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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 선생님과 만난 동의보감 - 내 안에 우주있다?

by 북드라망 2011.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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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 고미숙
고전평론가. 1960년 강원도 정선군 함백 출생. 가난한 광산촌에서 자랐지만, 공부를 지상 최고의 가치로 여기신 부모님 덕분에 박사학위까지 무사히 마쳤다.대학원에서 훌륭한 스승과 선배들을 만나 공부의 기본기를 익혔고, 지난 10여년간 지식인공동체 ‘수유+너머’에서 좋은 벗들을 통해 ‘삶의 기예’를 배웠다.덕분에 강연과 집필로 밥벌이를 하고 있다. 2011년 10월부터 ‘수유+너머’를 떠나 또 다른 공부와 공동체를 실험중이다.

어느 화창한 가을날, 감이당에서 고미숙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리라이팅 클래식의 열다섯번째 책인 『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에 관한 말씀을 듣기 위해서였죠. 저는 예전에 '몸과 삶, 몸과 우주는 하나다'라는 말이 너무 추상적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존재 자체가 질병이다'라는 말도요. 그런데 선생님께 아프지 않는 사람은 없다는 말씀을 듣고 다시 생각해보니, 건강하다고 생각했던 저도 (부끄러운) 병을 몇 개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끄럽다고 말씀드린 이유는 제가 그동안 그 병을 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환절기만 되면 알레르기성 비염때문에 콧물이 주르륵 나오고, 잦은 변비로 고통받고... 그런데 저는 이러한 몸의 신호를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무심했었지요. (밤에 야식도 막 먹었고요. 흑~ 지금은 야식을 끊었습니다!)

먹는 것과 감정이 제 몸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지금이라도 조금씩 느끼고 있으니 이 또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선생님의 말씀 중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무척 마음에 와닿았는데요, 저도 '개성있는 병, 개성있는 죽음'을 어떻게 창조해 나갈지 고민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인터뷰의 내용은 대부분 그대로 살려서 편집했습니다. 이야기 중에 드러나는 선생님의 유머도 유지했고요. ^^ 영상을 보는 동안 선생님과 직접 이야기를 나누는 듯, 편안하게 느끼셨으면 좋겠습니다. 또, 이 영상이 여러분에게도 몸과 삶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으면 더 바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1. 『동의보감』은 한의대생이 아니면 접근하기 어려운 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께서 이런 장벽(!)을 뛰어넘게 된 계기와 원동력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저도 처음에는 의학을 직접 공부한다는 생각을 못했던 것 같아요. 그럼 왜 하게 됐느냐, 몸이 아팠기 때문이에요. 그전에는 아프면 약이나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넘긴다, 이랬었는데 10년 전에 어떤 병이 왔을 때 수술을 할 것인지에 대한 결단을 해야 하는 시점이 왔어요.  수술이 너무 싫으니까 병에 대해서 좀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때 한의대 본과 4학년에 다니던 한 젊은이와 같이 공부를 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 젊은이가) 이것저것 조언을 해줬는데 ‘나도 이런 것들은 좀 알아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동의보감』을 공부하기 시작한 거죠. 공부하다 보니까 너무너무 실용적인 거예요. 일단 수술을 안 하기로 마음먹고, 그럼 대신 내가 (몸을 위해) 뭘 해야 되나 생각해서 산에 다니기 시작했지요. 그때부터 몇 년 동안은 매주 산에 다녔던 것 같아요. 저에게는 굉장히 혁명적인 변화였습니다. 관심 없었던 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요가를 하게 되면서 명상을 또 하게 되고……. 이런 변화 속에서 몸이 다르게 반응하는 걸 보고, 그런 과정을 보면서 책을 읽으니까 내가 아픈 부분이 더 이해가 되더라구요. 그래서 슬금슬금 읽다 보니까, ‘동의보감이 나를 위한 책이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웃음) 그러면서 이전에는 왜 동의보감을 공부할 생각을 못했을까 하는 점이 궁금해지고, 계보학적으로 따지고 들어가 보니까 의학에 대한 장벽이 엄청 높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럼 또 이것은 어디서 생긴 것일까’ 이런 식으로 질문이 생기면서 공부의 영역이 넓어지게 된 것 같습니다.

건강이 눈에 띄게 달라지는 걸 체험하셨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네, 일단 수술을 안 하고 버텨낸 것. 이게 가장 큰 성과라면 성과지요. 수술을 안 하겠다고 결심하고는 그 뒤로는 병원을 안 갔으니까. 그리고 몸의 변화나 반응을 주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아프기 이전에는 주시를 안 했던 거죠. 아픔 자체를 소외시킨 것 같아요. 그래서 서류처리 하듯이 빨리 처리해버리려고 했지요. 그래서 (제 자신이) 병을 약으로 빨리 진압하고, (병이) 없었던 것처럼 행동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태도로는 병이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요가·명상·공부를 하게 되면서 알게 된 거죠.

‘병이 나의 실존의 조건이구나’라는 점을 알게 된 후로는 아프고 힘든 일이 생겨도 그렇게 불안하지가 않아요. ‘아픈 것도 생성·소멸을 한다, 그래서 좀 버티면 지나 가겠구나’ 이런 점을 알게 된 것이 큰 성과죠. 병이 왔을 때 버티는 힘, 지켜보는 힘이 커졌고 운동, 자전거, 등산, 걷기에 대한 의미를 알게 되고, 또 이것을 일상화하는 것, 이 변화가 나한테는 가장 큰 선물이었습니다.

2. 『동의보감』은 목차만 무려 100페이지가 넘는다고 들었습니다. 허준이 이렇게 목차를 구성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또, 목차 외에도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동의보감』의 독특한 지점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동의보감』은 기존에 내려온 동아시아 의학사를 집대성하면서, ‘몸과 생명’이라는 키워드로 의학적인 성과를 재배열한 놀라운 책입니다. 흔히 의서는 병을 쭉 나열하고 병에 대한 증상과 처방, 이렇게 진행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러면 읽기가 어렵습니다. 너무 전문가들의 이야기다보니 이해도 잘 안 되고, 내가 아픈 병 말고는 관심이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동의보감』은 몸과 생명을 전면에 내세웠지요. 그런데 몸이나 생명을 알기 위해서는 우주에서 생명이 탄생하고 소멸하는 것을 알아야 하니까 우주의 이치가 배경에 깔려있게 됩니다. 그 배경의 베이스가 엄청나게 넓은 셈이죠.

이런 배경 위에 ‘질병이 어떻게 생기고, 질병과 어떻게 살아 가는가’로 구성이 되어있기 때문에 목차가 굉장히 방대한데, 전체 목차는 아주 심플합니다. 크게 내경편, 외형편, 잡병편, 탕액·침구편으로 되어있지요. 이 하나의 항목 안에 우주에 대해 말하면서도 생명, 병과 처방이 나오고, 병을 말할 때에도 우주와 생명, 감정에 대한 것들이 같이 나옵니다. 상호참조 기능처럼 네비게이션이 여러 개 있는 것이죠. 어디에서 출발해도 ‘병’이라고 하는 내 존재의 현장으로 연결이 됩니다.

만약에 우주를 다 알고, 생명을 다 알고, 몸을 다 알고, 그 다음에 질병을 알게 되는 순서라면 숨넘어가서 다 포기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동의보감』은 우주의 탄생에 대해 이야기 하고, 생명의 탄생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바로 양생술이 나오는 거죠. 「외형편」에서는 인간의 몸이 어떻게 구성되어있는지 부위 별로 설명하면서 순환이 원활하지 않으면 어떤 병이 생기고 그럴 때에는 어떤 처방이 있는지 바로 나오기 때문에 독립적이면서 또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동의보감』이 처음에는 너무 두껍고 무섭다고 생각했다가 나중에는 너무 친절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지점이지요.

『동의보감』에는 재미있는 치료 사례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동의보감』을 좋아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이야기가 많다는 점입니다. 생명에 대해서 말할 때에도 이야기의 형식을 갖고 있고, 질병이나 치유도 서사가 있다는 점, 이런 게 (저의) 구미를 확 당긴 거죠. 그런데 (의학서에) 이야기와 서사가 어떻게 가능한가 생각을 해봤더니 기본적으로 동양의학은 몸하고 마음을 구별을 하지 않잖아요. 그런데 몸과 마음이 하나라는 이야기는 몸과 삶이 하나라는 이야기이기도 하죠. 몸을 쓰고 마음을 쓰는 것이 삶이잖아요. 몸과 우주가 하나라는 이야기는 ‘몸과 삶과 우주’가 하나의 연속성에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아프다는 것은 그 사람의 삶에 어떤 균열이 일어난 것으로 볼 수 있죠. 삶은 사회적 활동도 되고 가족 간의 관계도 되고, 내가 밥벌이 하는 것도 되고. 여기에 뭔가 균열이 일어날 때 몸이 아픈 거예요. 또 아프면 균열이 일어나고.

그렇기 때문에 치유를 할 때 당연히 그 사람의 감정의 회로가 어떻게 되어있는지를 봐야 합니다. 이걸 분리한다는 것은 몸을 대상화하는 것이죠. 기계처럼 부속품 끼워 넣듯이 대하는 태도, 이때의 몸은 삶하고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고쳐봤자 삶에 아무런 변화가 없게 되는 것이고요. 그런데 동양학에서는 기본적으로 감정과 생리가 분리될 수 없어요. 오장육부에 다 감정이 붙어 있잖아요. 간에는 분노, 심장 기쁨, 신장 두려움, 폐는 슬픔 이렇게. 이것은 폐라는 장부가 슬픔이라는 감정과 분리되지 않은 채 동시적으로 존재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병이 생겼다는 건 감정의 회로가 어긋나면서 오장들 사이에 상생상극이 안된다는 의미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병을 고치려면 이 사람이 어떤 관계에서 문제가 일어났는지를 알아야죠. 의사가 환자의 일상의 조건을 꿰뚫어 봐야하는 겁니다. 오해를 너무 받아서, 속에 울화가 치밀어서 하는 등의 관계가 있었을 것 아닙니까. 그럼 이럴 때에는 감정을 움직여서 풀어줘야 한다는 것이 『동의보감』의 태도입니다. 읽다 보면 (치료 방법으로) 여인의 따귀를 때리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 경우 여인은 화가 나면서 감정이 확 풀리게 되는 것이죠. 의사가 (지금으로 치면) 예능 PD같은 일을 하는 거잖아요. 때려서 상황을 연출하고, 광대를 불러서 막 웃게 하고, 화내게 하려고 약을 처방하지 않고 튀고……. 이런 게 다 치료에 들어간다는 것이 (저는) 너무나 재밌는 거예요. 이렇게 생각하면 삶의 모든 조건이 다 치유의 방법이 되고, 그래서 이렇게 치유를 하면 감정이 바뀌고, 몸의 생리적 기전이 바뀌면서 관계가 달라져요. 그래서 ‘몸을 알면 삶을 바꿀 수 있고 그게 이제 우리가 살아가는 시공간의 원리다’라고 생각합니다.

자연스럽게 양생과도 연결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죠. 이 병에 다시 걸리지 않으려면 감정을 이렇게 써야한다, 이것을 자신이 평소에 훈련을 하는 것이 바로 양생이고 수행이죠. 아프고 난 후에야 내가 수행을 할 수 있게 되는 셈입니다. 저의 경우에도 아픈 후에 쓴 맛을 보고 나서야 ‘(몸)공부를 좀 해야겠다’라고 느낀 것과 좀 비슷한 것 같습니다.

3. 요즘은 ‘심리 치료’나 ‘웃음 치료’와 같은 프로그램들이 많이 있다고 합니다. 이런 치료 방법들과 『동의보감』에서 말하는 ‘감정을 다스리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요?

심리 치료를 따로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심리와 생리를 분리해놓은 거잖아요. 근본적으로 하나라는 전제가 있으면 심리 치료와 생리 치료가 따로 갈 수가 없는데, 우리 의학 체계는 기본적으로 생리만을 다루니까 심리가 문제가 되면 ‘스트레스야’ 혹은 스트레스가 심하면 ‘정신병증이야’라고 하면서 심리 치료를 하려면 정신과로 가게 됩니다. 이런 전제가 『동의보감』과는 명백하게 다른 점이지요.

심리 치료를 받는 사람들은 대부분 심리적으로 상처를 받고, 또 마음의 괴로움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의사의) 도움을 받아서 치유를 한다는 거잖아요. 그런데 치유가 내 몸과 마음이 합치되고 마음을 조절하는 힘이 생기지 않으면, 비슷한 상황이 닥치면 또 균열이 일어나게 됩니다. 제가 생각하는 가장 나쁜 패턴은 ‘너는 괜찮은데, 어떤 사람이 너에게 상처를 줬기 때문이야’라는 것입니다. ‘나는 소중해, 나는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났어’라는 결론으로 연결이 되면 남들이 나를 괜찮다고 말해주는 걸 원하는 거잖아요. 이건 치유가 아니라 양생적으로 봤을 때 굉장히 약해진 것입니다. 나에 대한 망상 때문에 남을 탓하는 마음이 생긴다면 사실 치유가 아닌 거예요. 그렇게 되면 다른 병증으로 나타나겠죠. 왜냐하면 ‘나는 원래 괜찮은데 누구 때문에 상처를 받아서 이렇게 된 거야’라는 생각만으로는 이 세상을 살아가기가 굉장히 벅차거든요. 근본적으로 나에 대한 존중감이 없기 때문에 배짱이 생기질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계속 괜찮다는 말(위로)을 들어야 하고, 사회와 제도를 탓하게 되지요. 이런 사람은 건강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고 볼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아무 탓을 하면 안돼요.

4. 『동의보감』에서는 병을 치유해서 없애는 것이 아니라, 병과 함께 살아가는 데 방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병과 공존할 수 있을까요?
 
『동의보감』을 보면 우리가 갖고 있는 통념이 참 빈곤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동의보감』은 아주 쉬운 방법으로 그런 통념을 깨줍니다. 제일 처음에 나오는 것이 “존재 자체가 질병이다”라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아픈 상태여야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아픔에도 불구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아파야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놀라운 발견이지요. 실제로 그런 말이 있잖아요. 골골백년이라든가 유병장수라는. 극단적이긴 하지만 문둥병이나 장애를 앓는 대신 장수하는 분들도 계시고요. 병이 나의 실존의 토대, 생명의 조건이라는 점은 굉장히 놀라운 발견입니다.

따지고 보면 세상에 아프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한 군데도 아픈 적이 없는 사람은 본적도 없을 뿐 아니라 부처님도 소화불량으로 돌아가셨잖아요. 운동선수들이 건강하다고 하지만, 운동선수들은 수명이 짧은 편이잖아요. 그러니까 ‘건강’이라는 것도 우리가 어떤 수치를 만들어 놓고 거기에 대한 환상을 키워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구도 그런 존재가 없는데, ‘정상적인 수치’라는 (일종의) 환상을 갖고 있는 셈이죠. 사실 거의 대부분의 사람은 대충 아프고, 대충 사는 것이지요. 병 자체가 나의 실존의 토대니까, 나만의 개성적인 병을 앓아야겠다고 생각하면 이제 병이 재미있어집니다.

병은 나이에 따라서 변주가 되는데, 청년기-중년기-노년기가 조금씩 달라지는 것이죠. 그래서 병을 완벽하게 치유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멋진 말로 표현하자면 “새로운 병을 창조한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병을 완벽하게 마스터했다고 생각하고 그 병에서 자유로워지면 새로운 병을 앓게 되고, 그 과정에서 ‘이건 좀 센데?’ 라고 느끼는 것이 늙음과 죽음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생로병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지요. 생로병사가 매끄럽게 이어지고 매 단계마다 다른 삶을 체험한다면, 이렇게 가면 죽음도 흥미로운 단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어떤 병이 왔을 때,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하고, 빨리 처리해버리는 것보다 이 병은 나에게 어떤 새로운 삶을 선물해줄까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병이 오면 자기 몸에 대해 많은 것을 발견하게 되고, 새로운 생각을 많이 할 수 있게 되거든요. 저도 여러 가지 병을 앓았는데, 그중 비염을 꽤 오랫동안 앓았습니다. 그때는 항히스타민제를 먹어서 진압하는 것만 주구장창했습니다. 갑자기 병이 없어졌는데, 나은 다음에 왜 나았는지도 모르겠어요. 그 병에 저에게 준 특별한 선물이 없는 거죠. 이게 얼마나 허무합니까.

그런데 작년에는 갑자기 대상포진을 앓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흥미진진하게 탐구를 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약도 없어서, 어떻게 변하는지 지켜볼 수 있었죠. 대상포진을 수두 바이러스라고 하고, 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쉴 수가 없는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병하고 공존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고, 어길 수 없는 약속을 지키는 시간 외의 나머지 시간은 병한테 완전히 몸을 맡기는 방법을 선택했지요. 그랬더니 바이러스들이 극성했다가 일주일 만에 가라앉더라구요.

그때 제가 대상포진이라고 하니까 엄청 아프다면서 주위 사람들이 너무 겁을 주는 거예요. (제가 그렇게 아프길 바란 건지, 인덕이 없어서 그런 건지…) 모두다 저를 공포의 도가니에 밀어 넣었죠. 그래서 한편으로는 이러한 말도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고통스러울 것이라는 말이 옮겨 다니면서 계속 증폭되는 것 같은. 물론 밤에 열이 펄펄나고 그랬으니까 아프긴 무척 아팠어요. 그런데 해야 하는 일을 못할 만큼 넉다운이 되진 않았어요. 

아픈 것도 관계 안에서 작용하는 거잖아요. 토한다거나 두통으로 서있을 수가 없다면 이런 병은 일상을 유지할 수가 없어요. 그건 급성병이니까 빨리 상태를 완화시켜야 돼요.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병은 만성질병이에요. 만성이라는 건 일상과 더불어 가는 병이라는 의미예요. 암이 있어도 일상이 유지가 되요. 그렇기 때문에 병과 일상을 잘 공존하면서 달래기도 하다가 졌다가, 또 이기기도 했다가 이렇게 하면서 사는 것이 가능한 거죠. 이렇게 할 수 있다면 어떤 병이 와도 그렇게 무섭진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일 나쁜 건 생각이 멈추고 한쪽으로 쏠리는 것입니다. 사실 암이라는 것도 시대가 낳은 문명적 질병이잖아요. 소유에 대한 집착, 한번 가지면 절대 놓을 수 없다는 생각들이 암세포를 만들어내는 거죠. 암세포 자체는 늘 생겼다가 없어진다고 해요. 근데 어느 순간 이 암세포들이 똘똘 뭉치는 거죠. 그렇게 되면 옆에 있는 세포들을 먹어치우기 시작합니다. 저는 「괴물」이라는 영화를 봤을 때, 괴물이 암하고 굉장히 비슷하다고 느꼈습니다. 무지막지하게 먹어치우고 먹지 못하면 저장해놓고.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거든요. 세상에 100%라는 것은 없잖아요. 그러니까 암이 왔을 때 무조건 두려워하기보다 자신의 일상을 바꾸면, 상당히 다른 삶을 체험하거나 치유할 수 있다고 믿어요. 암이라는 것 자체가 집착이나 소유하려는 심리적 기저에서 생기는 것이니까 순환시켜서 다시 원래 작동하던 세포로 바꾸면 되지 않을까요.

병에 걸리면 무조건 고통스러울 것이라는 통념이 많은 것 같습니다.

자신이 겪지도 않았는데 소문으로 들은 것으로 형성된 것이 ‘망상’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출산을 들 수 있는데요, 원래 출산은 자연스러운 행동이잖아요. 그런데 TV나 드라마에서 너무 소리를 지르는 장면만 나오니까 사람들은 겪기도 전에 미리 분만은 너무 아플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죠. 죽음도 이런 게 아닐까 싶어요. 현대인들은 죽음을 체험해보지 않았으면서 슬프고 비참하고 고통스러울 것이라는 엄청난 루머만 만들어냈습니다. 그래서 무지가 고통을 낳는다고 느꼈죠.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때 모든 것은 고통으로 변주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가 의학을 공부하지 않고 의사에게 전적으로 맡기게 되면 내면에 불안감이 자꾸 커지게 됩니다. 그런데 의사는 죽음에 대해 알려주지 않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자기만의 개성 있는 죽음을 창조해야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선인들이 죽을 날짜를 알고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이 놀라웠습니다.

마지막 호흡까지 자신이 통제할 수 있다, 이런 삶이 정말 위대한 삶이 아닌가 싶습니다. 허준이 도교 양생술에도 그런 선인들이 많습니다. 선승들의 경우 좌탈입망하다가 사람들이 다 보는 데서 죽어요. 죽음이 공개된다는 것도 무척 중요한데, 우리는 죽음을 밀실에서 처리하잖아요. 그러니까 더 무서운 거예요. 예전에는 죽을 때 사람들을 다 모아 놓고, 동네 사람들도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선승들은 제자들을 다 모아놓고, ‘생사가 여일하니 울지 말아라, 내가 가르치지 않았느냐’고 말씀하시고 숨을 거둡니다. 그러면 다들 울고불고 난리지요. 그럼 다시 눈을 뜨시고 버럭 화를 내시면서 ‘내가 울지 말라고 가르쳤는데 너희들은 죽음에 대해 도대체 뭘 배웠느냐’고 말씀하시면 제자들이 울음을 뚝 그치겠죠. 그런데 슬픈 것(상실)은 아직 마음에 있으니까, 선승께서는 또 일주일 정도 제자들과 놀아주시다가 다시 숨을 거두는 이런 정도로까지 자신을 통제할 수 있었던 거죠.

죽음은 우리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명백하게 의식과 생리가 헤어지는 것이잖아요. 살아있다는 건 붙어있다는 것이고요. 의식만 있으면 유령이라고 하고, 몸만 있다고 하면 ‘기계’라고 하죠. 이게 결합된 것이 사람이잖아요. 죽음은 몸은 오행으로 돌아가고 의식과 작별합니다. 이 분리 자체를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공부를 유불도의 스승들은 하신 거죠. 죽음이 더 슬플 게 없는 거예요. 그 공부가 위대한 건 뭐냐면 죽음의 장면을 본 모든 사람들에게 죽음에 대한 공포를 벗어나게 한다는 점입니다. 이게 최고의 보시이고, 세상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죠. 공부하는 사람들이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도록 보여 주는 거예요.

그렇다면 잘 사는 법과 잘 죽는 법은 동떨어진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삶에 집중할 수 있죠. 우리가 삶에 집중이 안 되는 건 두렵고, 뺏길까봐 불안하고 이럴 때 집중이 안 되는 거 아닐까요? 그러한 불안에서 벗어나면 지금의 삶을 그대로 만끽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5. 선생님께서 『동의보감』을 통해 알게 되고, 생활에서 실천하고 있는 양생법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동의보감』에 제일 먼저 나오는 게 고치법이거든요. 고치법이 양 어금니를 위아래를 소리나게 부딪치는 것인데, 퇴계 이황선생부터 조선의 선비들은 다 이 고치법을 했어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바로 자리에서 어떤 사물하고도 만나지 않고 하면 됩니다. 자면서 정이 모여 있던 상태를 유지하면서 자리에 앉아서 고치법을 36번, 치아가 안 좋은 사람은 더 많이 해도 되요. 저도 40대 초반에는 치과를 자주 다녔는데, 고치법을 습관적으로 하게 된 이후로는 치과를 가지 않게 되었어요. 또, 손을 비비면 그 안에 모이는 기운이 무척 정미롭고 따뜻합니다. 이걸로 다른 물체와 접촉하지 않은 채 눈과 양 볼, 귀를 마사지하면 좋습니다. 또, 입속에 고인 침! 침이 더럽기는커녕 엄청나게 소중하다는 것을 『동의보감』에서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지요. 아침에 일어나서 침으로 잇몸을 마사지하고 고치법을 하면, 잇몸이 건강해지는 것 같아요. 

이것도 오래된 습관인데, 아침에 일어나면 반드시 음양탕을 한 잔 마십니다. 음양탕은 물을 끓인 다음에 뜨거운 물을 먼저 컵에 반 정도 붓고 나머지 찬물을 붓습니다. 그때 음양(찬 기운은 아래로 내려가려는 성질이 있고, 뜨거운 기운은 위로 올라가려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이 돌면서 물분자가 굉장히 활성화되는데, 이것을 보약이라고 해요. 그리고 틈만 나면 걷습니다. 걷는 것이 최고의 양생법입니다. 현대인들은 하루에 30분도 안 걷는지, 30분만 걸으면 만병통치라는 기사도 있더라구요. 일체의 모든 걷는 행위를 지워버렸는데, 그럼 (몸의 기운이 순환이 되지 않기 때문에) 모든 담음, 어혈, 식적 등 모든 울체가 생기게 되죠. 그것의 결정판이 암인 것이고요.

6. ‘감이당’이 새로운 곳으로 독립해 나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앞으로 새로운 공간에서 어떤 활동을 계획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1998년부터 12년 정도를 ‘수유+너머’라는 앎의 공동체에서 공부를 하고 인생을 배웠습니다. 많은 것을 체험하고 많은 실수를 하고 많은 기쁨을 누리고, 성공도 하고 무지막지한 실패도 있었지요. 10년 쯤 되니까 저와 ‘수유+너머’의 관계가 정체가 된 것 같았어요. 그래서 어떤 상황에 개입하는 시간이 상당히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수유+너머’를 떠날 때가 되었다라는 생각을 했고, 제가 떠나야 또 공동체에는 새로운 힘이 구성이 되니까요. 그 과정이 지난 2년 동안이었고 다사다난한 사건들을 겪었지요. 제가 그때 느낀 것이 좋은 일, 나쁜 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건에서도 배움이 없으면 다 흉한 일이라는 점입니다. 배울 수 있으면 길한 것이지요. 병도 그런 것 같습니다. 병을 통해서 저처럼 『동의보감』도 배우고 『동의보감』에 대한 책도 쓰고 그러면 이게 길일까요 흉일까요? 안 아팠더라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지요. 사건도 그런 것 같아요. 저는 지난 시간 동안 ‘길흉이 나누어지는 것은 사건 자체가 아니라 내가 사건을 받아들이는 태도와 배움의 열정에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깨봉 빌딩으로 이사를 오면서 ‘수유+너머’와의 관계는 다 정리를 했어요. 추상적인 정리도 있지만 물질적인 것까지 포함해서요. 그동안 돈과 살림에 개입을 많이 했으니까 그런 것도 정리를 했고, 그걸 정리하니까 마음도 정리가 됐어요. 이런 것을 통해서 물질적 자산에도 마음이 담겨있다는 걸 알 수가 있죠. 그리고 저는 ‘감이당’의 4인조 밴드로 새로 시작을 하게 되었습니다.

좋은 것은 처음 시작하는 신선함과 설렘이 있다는 점입니다. 제가 『동의보감』에 관한 책을 내긴 했지만 의역학은 다음 생애까지 할 공부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이 공부에 입문하는 것을 선언하는 의미로 책을 낸 것이고, 이걸 통해서 의역학의 세계를 종횡무진하고 싶습니다. 혼자 힘으로는 어렵기 때문에 많은 친구들과 스승들을 만나야 하는데, 그것을 감이당이라는 조직으로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활동의 방향은 ‘북드라망’이라는 의역학의 지혜들을 집중적으로 리라이팅 할 수 있는 출판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글을 생산해낼 수 있는 사람들의 집합을 Trans Generation School이라고 세대(10대~6080세대)를 가로지르는 학습 네트워크로 구성하려고 합니다. 감이당은 집합적 공간의 이름이고, 배움의 네트워크와 연결되는 건 TG School이고, 지혜를 세상과 나누는 것은 북드라망이라는 책의 세계로 펼치겠다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직 걸음마 단계이기 때문에 기쁨, 설렘, 기대, 약간의 두려움이 있는데 가야할 비전은 어마어마하게 원대하니까 마음이 뿌듯하고 든든합니다.

- 정리 웹마케팅팀 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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