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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약선생의 철학관

불가능성은 혁명하는 자의 혁명!

by 북드라망 2012. 6. 25.

타자, 유령, 혁명
약선생(감이당 대중지성)

한동안 나는 출근길에 매번 똑같은 노숙자와 마주쳤다. 그는 항상 정류소의 번호 표지판에 기대어 서서 초점 잃은 눈으로 행인들을 이리 저리 바라보았다. 지나가는 행인들도 그가 그런지 오래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아무런 관심도 없이 지나갔다. 출근길의 흔한 풍경이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물론 지나갈 때마다 풍기는 매캐한 냄새는 마치 다른 세상, 다른 아침에 온 것 같은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그때마다 목욕탕으로 끌고 가서 한바탕 물을 뿌려주고픈 마음도 생기곤 했다. 하지만 그런 그와 눈이 마주칠까 두렵기도 하고, 인생에 이런 불유쾌한 일이 한 둘이냐 싶어, 이내 세상의 다른 행인들과 잘 섞여 지나가야겠다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얼마 지나자 그 매캐한 냄새도 통상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어느 날 그곳에 평소와는 좀 다른 일이 펼쳐졌다. 그가 갑자기 정류소 옆 은행 건물로 들어가, 출근하던 아가씨를 잡아채려 한 것이다. 아가씨의 기겁하는 비명소리와 주위 남자들의 고함소리, 그리고 노숙자의 알 수 없는 신음소리. 어느새 합세한 경비들이 노숙자를 힘으로 눌러 눕혔다. 반짝 반짝 거리는 대리석 바닥과 고함 소리들이 엉키면서, 시커먼 노숙자의 초점 잃은 눈빛을 더욱 강렬하게 했다. 뭔가 위협당하고, 침범당한 듯했다. 일종의 침략 같았다. 그 순간 나는 이상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 사람이 도저히 회복될 가망이 없을 만큼 깊디깊은 상처를 품은 것 같았고, 그 상처는 나에게도 있는 것 같았다. 이런 느낌은 동정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이어서 이 지경이 되어버린 그 사람의 처지를,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지켜보거나, 그저 시선을 돌리고 마는 다른 행인들의 처지를, 또한 이 뒤틀린 것을 바꿀 방도에 대해서, 생애 처음으로, 생각하게 하였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나는 당황스럽게도 그 노숙자가 로비에 들어서는 그 아가씨에게 이렇게 물으려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는 마지막으로 사는 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오직 타자로부터, 죽음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다던 데리다의 저 말을 저 노숙자가 감행하고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갑자기 목이 메었다. 파국에 임박한 자가 이제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살기 위해서 뭔가를 배우려 했을 거라는 상상이 들자, 저이와 내가 종이의 안팎처럼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사이인 것처럼 느껴졌다. 갑자기 그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는 기묘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가 나에게 뭔가를 가르쳐주려고 나타난 ‘또 다른 나’같은 느낌이었다. 불현듯 노숙자가, 타자가, 또 나라는 존재가 기묘하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여전히 불유쾌로 가득 찬 삶을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지만, 이때의 경험을 나는 지금도 반신반의하는 눈으로 바라본다. 도대체 나란, 타자란, 노숙자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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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 불가능한 애도 : 타자의 죽음
 
우선 타자는 자기와 다른 것, 내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타자가 타자일 수 있으려면, 정의상 자기와 분리될 수 있어야만 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타자는 여전히 자기의 일부분이거나, 기껏해야 자기가 아니라고 느끼는 환상에 불과할 것이다. 이를 따지기 위해서 데리다는 타자와의 극적인 절연과정인 ‘애도 작업’(travail de deuil)을 면밀히 살펴본다. 통상적으로 ‘애도’란 사랑하던 사람의 죽음 앞에서, 그/그녀의 죽음을 슬퍼하며 떠나보내는 과정이다. 아마도 이 과정에서야말로 타자의 타자됨이 분명해 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그녀가 현실적인 층위(가시적인 영역)에서 사라질 때에야, 살아 있을 때에는 눈치 채지 못했던 나와 다른 그/그녀만의 특성을 분명히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대개 ‘그/그녀의 빈자리가 아쉽다’라는 의례적인 추모사는 이런 점에 대한 통념적인 표현일 것이다. 현실적인 층위에서 사라졌을 때에야 비로소 원래 있었던 것이 무엇이었고, 지금 달라진 것, 없어진 것이 무엇인지 분명해진다. 아마도 ‘순수한 타자’라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 죽음의 순간에야 드러날 것이 분명하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살아 있을 때 사랑이라는 감정 때문에 느끼기 힘들었을 타자성―부모가 자식을 자기 몸처럼 생각하는 것을 상상해보라!―을 죽음과 함께, 현실적인 층위에서 사라질 때에라야 비로소 ‘그/그녀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타자)이었구나’라고 분명히 깨닫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그때에야 ‘내가 아닌 것’(=타자)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란 말이 된다. 따라서 애도를 통해 둘로 나뉠 수만 있다면(나누어진다는 것이 증명된다면) 타자는, 분리되는 순간 자기가 아닌 어떤 것으로서, 분명히 ‘있다’고 규정될 수 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데리다에 따르면, 성공적인 애도 자체가 애당초 불가능하다. 애도는 사랑해서 늘 같이 있고 싶어 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하는 대단히 역설적인 작업이다. 그런데 애도에 성공한다는 말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는 슬픔으로부터 벗어났다는 말이고, 그것은 함께 했던 기쁜 기억으로부터도 이탈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애도의 전제였던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게 되면서, 애도가 일종의 배신행위가 되는 역설에 빠지고 만다. 따라서 참으로 성공적인(정상적인) 애도[입사 introjection], 다시 말하면 죽은 사람을 배신하지 않으면서 죽음을 슬퍼하지 않기란 절대적으로 수행 불가능한 것으로 된다. 이런 점에서 흔히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후 찾아오는 ‘우울증’은 이런 애도 불가능성의 증후인 셈이다. 이런 구도에서라면 결국 애도는 ‘실패한 애도[(식인성)합체/납골 incorporation]’만 있게 된다. 하지만 이 역시 실패했기 때문에 타자를 떠나보내지 못했다는 말이 될 터이고, 타자가 자아 내부에 분리된 채 기억의 형태로든, 감각의 형태로든, 계속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애도 그 자체가 불가능한 채로 있기는 매 한가지인 셈이다. 즉 성공한 애도와 실패한 애도 모두, ‘애도 불가능성’을 보여 줄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타자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묘한 상황에 이른다. 생명을 가졌을 때는 육신으로라도 분리된 것처럼 보였지만, 오히려 죽음과 더불어 사라질 때가 되자, 이른바 ‘실패한 애도’속에 타자는 내 안으로 들어와 굳게 자리 잡아 버린다. 따라서 뜻밖에도‘타자의 죽음’이야말로 ‘나’와 ‘타자’의 합체를 열어주는 기묘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죽음이 타자를 찾아온다면, 그리고 타자를 통해 우리를 찾아온다면, 그렇다면 그 친구는 우리 안(in), 우리 사이(between) 이외의 곳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는 더 이상 그 자신으로는, 그 홀로는, 그 스스로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오로지 우리 안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we) 결코 우리 자신(ourselves)이 아니며, 우리 사이(between us)에 존재하지도 않으며, 우리와 동일하지도 않다. ‘자아’('self')는 결코 그 자체로 있지 않으며, 또 스스로와 동일하지도 않다. 이 특이한 반사[굴절, reflection]는 결코 그 자신 위로 닫히지 않는다. 그것은 애도라는 이 가능성 이전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폴 드만에 대한 기억들』 Memories for Paul de Man 영어판 28p,
『How To Read 데리다』 , 웅진지식하우스, 128쪽의 번역을 일부 수정

타자의 죽음을 통해 타자성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을 통해 타자는 자아와 합체된다. 그런데 이는 역설적으로 죽음이 타자를 통해 삶 속으로 걸어 들어오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데리다는 애도라는 것을 자아 내부에 위치한 일종의 지하 납골당에 타자를 안치하는 것으로 보았다. 여기에 이르면 타자의 문제가 삶과 죽음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살아 있는 한 나로서는 경험할 수 없을 ‘죽음’이 ‘타자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통해, 즉 ‘타자’를 통해, 내 안으로 들어온다. 즉 죽음이 삶 속으로 들어온다. 이 말은 ‘살아 있는’ 내가 ‘죽음이라는 불가능성’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말이다. ‘나’는 절대적으로 체험 불가능한 것으로서의 죽음을 타자의 그것으로 체험하며 삶 속에서 끌어안고 있다. 삶은 죽음을 끌어안는다. 결국 ‘타자의 죽음’과 어떤 식으로든 관계 맺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불가능성’과 관계한다. 아마도 그것은 언제까지나 불가능성으로만 ‘나’와 관계할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죽어 버린다면 그런 죽음으로서의 불가능성을 받아들일 ‘나’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죽음이라는 절대적 불가능성을 완전히 떠나보내지 못하고, 그것과 관계하면서 삶을 구성하고 있는 셈이다. 결국 삶은 불가피하게 경계 위에서의 삶(sur-vie), ‘삶-죽음’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에곤 실레, <어머니의 죽음>


유령 : 불가능성의 출현

그렇다면 데리다가 사는 법을 배운다고, 또 그것을 타자에게서 배울 수 있다고 했다면, 그것은 ‘죽음이라는 불가능성’으로부터 배운다는 것과 같은 말이어야 한다. 그리고 데리다는 이런 배움이 삶과 죽음 사이에서만 발생한다면서 다음과 같이 “유령”(spectre)을 불러낸다.

만약 그것,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 수행되어야 할 것으로 남아 있다면, 그것은 단지 삶과 죽음 사이에서만 발생할 수 있다. 삶 속에서만도, 죽음 속에서만도 아니다. 둘 사이에서, 그리고 삶과 죽음 사이에서와 같이 우리가 좋아하는 모든 “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은 어떤 환영과 함께함으로써만 그 자신을 유지할 수 있다/어떤 환영에 대해서, 어떤 환영과 함께 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반드시 혼령들(esprits)에 관해 배워야 할 것이다. 비록 그리고 특히 이것, 곧 유령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비록 그리고 특히 실체도 본질도 실존도 아닌 이것이 결코 그 자체로 현존하지 않는다 하더라도‘사는 법을 배우기’의 시간, 현존하는 교사가 없는 시간은 다음과 같은 것으로 귀착되는데, (…) 곧 유지하기/대화하기 과정에서, 동행이나 견습 과정에서, 환영들과의 교류 없는 교류 과정에서, 환영들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우는 것, 다르게, 더 낫게 살기, 아니 더 낫게 살기가 아니라 더 정의롭게 살기. (…) 그리고 이러한 유령들과 함께 존재하기는 또한, 단지 그럴 뿐만 아니라 또한, 기억과 상속, 세대들의 정치인 것이다.

─『마르크스의 유령들』 Spectres de Marx, 이제이북스, 12쪽

이 긴 인용문에서 데리다가 시도하고 있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것(=죽음)으로부터 배우려는 것이고, 그것이 삶과 죽음 사이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또한 그것이 절대적으로 불가피하다는 것 또한 알려주려는 것이다. 하지만 실패한 애도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바처럼 자아 어딘가 지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을 타자들은 결코 그 자체로 현전할 수는 없다. 말 그대로 그것들은 죽음 이후라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것들은 그 자체로 현전할 수 없다. 따라서 그것은 불가피하게 환영의 형태로서만 우리 앞에 (재)출현하게 된다. 결국 유령은 죽음 이후에 재출현한 우리들의 타자인 셈이다. 그런데 그것은 오로지 기억해야 할 것과 상속해야 할 것을 전달해 주기 위해서만, 다시 말하면 ‘세대들의 정치’로서만 (재)출현한다. 정치 없는, 상속 없는, 기억 없는 “유령의 출현”은 발생하지 않는다. 데리다가 말하는 “유령”은 상속할 것을 가지고 있는 타자로서, 불가능성의 형태로서만 드러나는 아주 치밀하게 사유되어진 구성물이다. 만일 상속할 아무것도 보유하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데리다가 말하는 유령이 결코 아니다. 그런 유령은 자신을 드러내어 출현시킬 아무런 이유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데리다는 현존하지 않는 그 ‘불가능성’에 대해 엄밀하게 사유하는 것 자체를 하나의 새로운 배움으로 상정하고 있는 셈이다. 만일 이런 배움의 과정을 생산하지 않는 ‘유령’(이를테면 ‘동화적 이미지로서의 유령’)이라면 그의 유령론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봐야 한다.

이처럼 유령은 불가능성으로서, 하지만 하나의 상속해야할 것을 지닌 것으로서만 출현한다. 데리다가 마르크스주의를 하나의 유령으로 이해하려 할 때 염두에 뒀던 점이 바로 이 점이다. 만일 ‘당·국가 체계로서의 마르크스주의’가 사라졌거나, 한계에 봉착했음[마르크스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주의의 유령들이 여전히 배회하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마르크스주의가 다른 무엇보다도 ‘불가능성’으로서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고, 따라서 그것이 상속해야할 무언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에 있다. 만일 그것이 ‘가능한 것’으로서, 그래서 교조주의적 프로그래밍으로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상속해야할 무엇도 찾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런 ‘가능성’에 대한 위험은 해체 가능성(deconstructibility)을 설명하는 자리에서도 표명한 바 있다.

해체는 결코 가능한 어떤 것으로 현전화되지 않는다. (…) 해체는 [해체가] 불가능한 것이라고 고백함으로써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 (…) 해체의 과제에서 위험스러운 것은 오히려 가능성일 것이며, 규제된 절차들, 방법적 실천들, 획득될 수 있는 경로들의 제어 가능한 집합이 되어버리는 것이리라. 해체의 관심, 그 힘과 욕망 ㅡ 그것이 이런 것들을 지니고 있다면 ㅡ 은 불가능한 것의/에 대한 어떤 경험이다. 곧 (…) 타자의, 불가능한 것의 발명으로서, 다시 말해 유일하게 가능한 것으로서의 타자의/에 대한 경험인 것이다.

─『프시케:타자의 발명들』 Psyché: Inventions de l'autre,
한국판 『법의 힘』 , 문학과지성사, 74쪽에서 재인용

이것은 유령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유령은 해체와 같이 불가능한 것으로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하지만 그것은 상속시켜야 할 것을 지니고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도저히 성취하지 못할 것 같은, 도달 못하는 불가능성 그 자체에 기입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가 마르크스주의를 ‘유령’이라고 불러야 한다면 그것은 여전히 상속해야할 불가능성으로서의 유령이어야 할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사람이 도저히 올라갈 수 없는 산꼭대기에 있다고 전해지는 궁극의 무술 비법과 같은 것이다.

유령과 함께하기 : 혁명을 혁명하는 혁명
 
그러나 상속해야할 것으로서, 그런 타자로서, 우리 앞에서 선 유령을 신뢰하는 것은 쉽지 않다. 타자는 ‘항상 거짓말 할 수 있고, 자신을 환영으로 가장 할 수 있으며, 또한 다른 환영은 자신을 이 환영으로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유령과 마주하는 우리는 이 유령이 상속해야 할 것으로서 참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확신할 수 없는 불리한 처지이다. 그래서 유령이 내린 명령에 복종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에 대해 심각하게 망설이게 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것들은 항상 죽음과 동반해서, 혹은 파국을 품고 출현하므로, 마주하는 우리를 불안으로 이끈다. 내 존재를 걸지 않고서는 사실을 확인할 수도, 복수를 완수 할 수도 없다. 『햄릿』에서 유령이 자신이 아버지라면서 불륜을 고지하고 복수를 명령하고 있을 때, 세익스피어는 그것이 진실인지에 대해서는 결코 보증해주지 않는다. 작품 자체만으로는 유령의 불륜 고지과 복수 명령이 사실이 아닐 수도 있는 셈이다. 더군다나 유령조차 아버지인지 아닌지 신원이 불명확하다[면갑효과]. 따라서 그를 확실하게 식별할 수 없는 우리로선 그의 목소리에 내맡겨져서, 그의 말만 듣고 믿을 수밖에 없는 처지다. 이 믿음의 순간은 기묘하다. 말 그대로 불현듯 빨려 들어간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면서도, 유령의 명령에 복수를 맹세하고야 만다. 그는 ‘모든 사랑으로’ 자신을 유령에게 내맡기고 마는 것이다. 그것은 운명적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윌리엄 블레이크, <햄릿과 아버지의 유령>


그의 탄생 자체에 의해 주어진 것이면서 또한 탄생의 순간에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그 이전에 도래한 이(것)에 의해 지정된 것이다. (…) 그, 햄릿이 법/바른 것을 위해, 법/바른 것을 목표로 삼아 존재하고 태어나도록 만들었으며, 따라서 시간을 바른 길 위에 다시 올려놓도록, 역사를, 왜곡/잘못을 바로 잡도록/법을 실행하도록, 이러한 왜곡/잘못에 대해 정의를 구현하고 바로 세우도록 그를 불러낸다. (…) 우리는 유령을 감수하지 않고서는, 따라서 하나 이상의/더 이상 하나 아닌 명령을 감수하지 않고서는 결코 상속을 받을 수 없다. 왜곡/잘못을, 하지만 또한 하나 이상의/더 이상 하나 아닌 명령을 감수하지 않고서는. 이것이 바로 그가 고통 받고 있는 원초적인 왜곡/잘못, 태생적인 상처다.

─『마르크스의 유령들』, 이제이북스, 57쪽

사실 계산하는 자에겐, 유령에게 몸을 맡기고, 명령에 맹세하는 것이 무척이나 위험한 일로 보일 것이다. 성공을 보장하기는커녕 혹독한 파국이 예상될 뿐인 ‘불가능성’에 몸을 맡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심하게 식별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접근해 보지만, 이마저도 거짓말과 가장, 기만으로 가득 차서, 실상을 파악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유령은 그것 자체로서도 죽음으로부터 출현했다는 점에서 불가능한 사건이지만, 그것을 식별할 수 없으며, 앞으로 어떤 일이 도래할지를 전혀 가늠(계산)할 수 없다는 점에서도 불가능성 그 자체이다. 결국 불가능성이란 삶이 죽음을 체험하는 것이고, 더군다나 죽음이 유령으로 재출현하는 사태를 말한다. 성취하거나 도달하지 못하는 것으로서 말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런 불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불가능성과 관계되었기 때문에, 기존의 통념적인 프로세스를 넘어서서, 불가능성을 해소하려는 행위와 더불어, 우리는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된다. 더군다나 그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에, 새로운 지평 이후의 모습을 상상한다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고, 완전한 파국, 완전한 몰락을 상정하고서 가야만 하는 당연한 길이 된다. 즉 ‘미래에 대한 계산’이 멈춘다.

이질성은 개방시키며, 독특하게 타자로부터 밀려오고 도래하는 것, 도래할 것으로 남아 있는 것의 틈입 자체에 의해 자신이 개방되도록 내맡긴다. 이러한 이접이 없이는 명령도 약속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 이러한 열림은 긍정된 또는 오히려 재긍정된 장래의 유일한 기회로서 이러한 이질성을 보존해야 한다. 그것은 장래 자체이며, 장래로부터 도래한다. 장래는 이러한 열림의 기억이다. 종말에 대한 경험에서, 집요하고 일시적인, 항상 임박하게 종말론적인 그것의 도래에서, 오늘날의 극단의 극단성에서, 도래하는 것의 장래가 예고될 것이다.

─『마르크스의 유령들』, 이제이북스, 81쪽, 87쪽

절대적 불가능성으로서의 유령은 확실히 종말론적으로만 출현한다. 유령은 ‘출현에 대한 기다림’과 ‘출현’ 그 자체로만 발견된다. 그것은 그것 자체가 ‘도달불가능한’ 죽음으로부터 출현하였고, 더군다나 ‘식별불가능한’ 모습을 하였으며, 아울러 그가 전달하는 메시지조차 사실인지 아닌지 ‘결정불가능’하기 때문에, 맹세 이후 도래할 장래에 대해서 ‘계산불가능’하다. 따라서 그것은 맹세와 더불어 마지막이 된다. 유령 앞에 서면 ‘그 이후’의 목적에 대해 논하지 않는다. 아니, 논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유령은 명령할 뿐이고, 마주하는 자가 그 명령을 알아듣는 순간, 그것을 자신의 운명으로 깨닫고서[구성되어서] 응답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복수 이후를 도저히 상상하지 못하고 만다. 그것은 그냥 빨려 들어감이다. 햄릿에게 복수의 명령은 메시아적인 명령인 것이다.
 
이 지점에서야 우리는 데리다의 ‘메시아적인 혁명개념’을 사유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단지 어떤 보존의 상태만이 아니라 심지어 개혁 과정까지도 중단시키는 혁명적 계기들에 준거한”(「마르크스와 아들들」, 『마르크스주의와 해체』, 길, 197쪽) 그런 개념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혁명에 대한 전통적인 형상이나 이미지들을 전복하려는 것이지, 혁명의 가치를 없애려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그것은 어떤 목적을 재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과정 자체를 끊임없이 재설정하는 작업이다. 그것은 현재의 과정을 중단시키는 작업이다. 그것은 매순간 불가능성으로 다가오고, 매순간 기존과정을 중단시키고, 매순간 새로운 배움을 환기하는,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것이 될, 이를테면 이런 표현이 용인된다면 ‘혁명을 혁명하는 혁명’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유령은 불가능성이므로, 과정조차 변혁시키면서 출현한다. 혁명의 과정 그 자체가 혁명의 대상이 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에드윈 오스틴 아베이, <갈라하드와 성배>


이런 점에서 불가능성은 불가능성 자신을 뛰어넘도록 항상 환기시키는 새로운 배움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이 불가능성의 구도 아래에서라면 ‘혁명을 혁명하는 혁명’은 매번 도래하여 혁명에 이르는 길조차 변혁하면서 다가온다. 예컨대 데리다가 마르크스주의 담론에서 유통되었던 사회 계급 개념에 문제제기를 하는 이유도 그것을 폐기해야 할 것으로가 아니다. 폐기를 목적으로 했다면 이미 그것은 그렇게 되고 있었으니, 그런 비판 자체가 무의미했을 터이다. 그는 기존의 사회계급 개념의 ‘전환과 비판적 재가공의 대상’(「마르크스와 아들들」, 184쪽)으로서 그것을 재탐구하고, 재발명하고자 했을 뿐이다. 그가 보기에 항상 “주어진 상황에서 헤게모니를 쥔 세력은 항상 지배적인 수사법 및 이데올로기에 의해 표상”(『마르크스의 유령들』, 123쪽)되기 때문에, 그것은 항상 돌파해야 할 것으로만 마주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마르크스조차 『공산당 선언』에서 한 시대의 “지배적인 관념들”은 “지배 계급”의 관념들에 불과했다고 선언하지 않았던가. 즉 데리다에게 현재의 지배적인 마르크스주의는 지배적인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관념에 불과하다. 데리다는 우리가 마르크스에게서 물려 받아야 하는 것이, 지배적인 관념에 저항하고 전환과 비판을 실행하는 힘, 바로 이것이라고 보았다. 상속은 매번 비판적으로만, 매번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서만 가능한, 항상 위험한 작업인 셈이다.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은 우리가 “물려받은” 그대로의 사회 계급 개념이 충분하게 ‘분화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 대담 당시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은, 반복하거니와, 특히 사회 계급의 동일화/동일시의 원리이자, 사회 계급은 “궁극적 지주”로서 동질적이고 현존적이며 자기 자신과 동일하다는 생각이었다.

─「마르크스와 아들들」 Marx & Sons, 한국판 187쪽

만일 비판적 입장에서 마르크스주의 상속을 수행한다면, 동일성의 원리로 묶어버리는 계급 개념을 비판적으로 재가공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지배적 마르크스주의가 갖고 있는 모든 실패와 모든 위협을 은폐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의 원리, 그것이 지닌 잠재력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어쩌면 잠재력을 낭떠러지에 떨어뜨리려 한다. 이런 점에서 비판적 상속이란, 매번 불가능성에 자신을 내던지는 작업일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자체가 가지고 있었다고 여겨지는 고유의 근거들을 무너뜨려야만 상속가능한 그런 상황일 것이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데리다는 지배적인 마르크스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에게, 비판적으로 재가공 될 것으로서, ‘새로운 마르크스’를 던져야만 할 필요가 있었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인터내셔널’인 셈인데, 그것은 신분과 직위 그리고 호칭도 없고, 은밀하지도 공개적이지도 않으며, 서로 계약도 없이, 당과 조국, 민족 공동체 없이, 더군다나 어떤 계급으로의 공동적 소속 없이 이루어지는 비동시대적인 연대이다. 도무지 마르크스주의적이지 않을 것 같은 마르크스주의적 연대이다. 결국 이것 자체가 불가능성으로 던져진 연대이다. 이런 점 때문에 혁명을 혁명하려는 혁명은 존재론적으로 이해 불가능한 영역에 서게 된다. 아마도 그들에게 이런 ‘혁명의 혁명’ 자체가 추상적이고 실현 불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존재론적으로 이해불가능한 유령으로만 출현하기 때문이다. 또한 유령은 지금 현재의 존재라는, 통념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존재―이것 자체가 이상화된 존재이다!―를 침범하는 형태로, 즉 비순수한 형태로서만 출현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현재의 마르크스주의는 이런 유령의 출현 자체가 위협적이다. 유령은 위협하고, 침범한다. 그것들은 두렵고 낯선 것(das Unheimliche)이다. 유령은 아주 낯선 사건을 만들어 내고, 지반을 흔들어댄다. 그러나 바로 이 낯선 유령들과 함께해야만, 마르크스주의는 자기 자신조차 혁명하여 우리에게 되돌아 올 수 있고,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를 혁명할 수 있을 것이다.

자, 이제 그날로 되돌아가 본다. 그날 아침에 봤던 그 노숙자가 어쩌면 나에겐 유령이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 유령은 언제나 이미 우리의 생활 한복판에 출현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는 불현듯 은행 로비에, 아가씨를 잡아채며 나타나서, 반짝반짝 거리는 은행 로비 바닥을 한 순간에 ‘오큐파이’(Occupy, 점령)하였다. 시위대보다 앞서서, 자본가들도 미처 모르는 틈을 타서 말이다. 그가 마지막으로 배우겠다는 심정이 있었는지 어쨌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의 침입은 나로 하여금, 내 밥벌이를 성찰하게 만들었다. 그의 초점 잃는 눈빛은 “너는 이제 너의 밥벌이를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마치 그것은 원래 내 안에 있었던 것이 밖으로 나와 외친 듯했다. 그것은 나의 지반을 해체하고 새로운 배치에 이르도록 명령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오큐파이는 이제 다른 모든 밥벌이에게도 덮쳐야 한다고도 생각되었다. 어느 누구든 자신의 밥벌이가 동일한 회로 속에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들이 오큐파이에 의해 모두 해체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이다. 이제 유령들이 이 도시를 오큐파이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또 이런 생각도 들었다. 혹시 내가 이미 유령이 아닐까라고 말이다. 우리는 이미 그런 불가능성을 뛰어넘어 절대적 환대의 결과로 존재하게 된 자들이지 않을까. ‘애도 불가능성’에서도 살펴봤던 것처럼, 우리는 이미 타자를 자신에게 받아들이고 있었지 않았는가. “저는 마지막으로 사는 법을 배우고 싶습니다.”는 말은 궁극적으로는 오로지 자신의 유령으로부터만 배울 수 있다는 말과도 같아 보인다. 그것도, ‘그 이후’ 없이 지금 당장, 장래를 계산하지 않고 배워야 한다는 말이다. 또한 어떤 사태를 ─이를테면 매캐한 냄새의 노숙자조차도─ ‘불가능성의 출현’으로서, 또한 상속해야 할 ‘유령’으로서 이해하려면, 그것을 배워야 할 사태로, 그것도 장래에 대한 계산 없이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타자에게 빌려온 자기를 다시 타자에게 되돌려주기 위한 운명으로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일 거다. 아마도 그것은 분리된 어떤 순수 타자에게 배우는 것이 아니라, 뒤섞인, 이미 경계 위에 있는, 다시 말하면 삶과 죽음 사이에 있는 자기, 삶-죽음으로부터 배우는 것이 될 터이다. 분명히 그것은 우리 스스로 위험한 경계 속으로 들어가, 자신을 내걸고서야 배울 수 있는 확정불가능한 지평일 것이다. 우선 유령들에게 나를, 우리들을 오큐파이 하도록 허락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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