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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나의 삶, 나의 글, 리좀

바로 지금이 그대에게 유일한 순간

by 북드라망 2012. 6. 19.
말할 수 있는 비밀
-시간과 선-

김해완(남산강학원 q&?)

線 - 철학자가 그리는 세계지도

이번 챕터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정말로 지도를 그려 보려고 한다. 線. 선이란 무엇인가? 왜 하필 선인가? 하지만 이런 식의 질문은 좋지 않다. 『천 개의 고원』에서 등장하는 개념들은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이 움직이는 바로 그 순간에 개념도,  같이 작동하게 되는 법이다. 이 “추상적인 선”을 통과해, 우리는 현재 배치 속에서 유효한 의미라는 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또한 아무것도 보증하지 않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의미’라는 게 태어날 수 있는지를 보게 된다.

이 선들이 아무 것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것은 지도제작의 문제이다. …… 선들은 ‘기관 없는 몸체’ 위에 새겨진다. 그 위에서는 모든 것이 그려지고 도망가며, 그것은 상상적 형태도 상징적 기능도 없는 추상적인 선 그 자체다. (『천 개의 고원』, 387~388쪽)

개념으로 지도그리기. 어쩌면 이게 철학자가 할 수 있는 전부인지도 모른다. 철학적인 작업은 자신의 개념이 어째서 타당한지를 증명해 내는 게 아니라, 이 신조어(개념)가 이 세계를 그려 내는 데 얼마나 효과적인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선(線) 개념을 몹시 좋아한다. 선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세계의 두 측면이다. 선들이 보여 주는 갖가지 교차로와 산맥과 구불거리는 길들. 그리고 그런 선들 바깥으로 펼쳐져있는 (선이 그려져 있지 않는) 광활한 여백. 선을 그린다는 것은 선과 선이 그려지지 않은 공간을 동시에 드러내는 작업이다. 이 지도를 보면서 우리는 기존의 언어로는 포착할 수 없었던 ‘신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다양한 입구를 발견한다. 그렇기 때문에 철학은 머리 아파도 공부할 만한 가치가 있다. 이로써 우리는 일상이 세계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는 내 세계의 지도를 직접 그려 보고 싶은 충동이 인다.

아, 『천 개의 고원』 내내 끈질기게 반복하는 저자들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하다. (쇠심줄보다 더 끈질긴 이 작자들) 우리가 ‘아직’ 모르는 무수한 사건들이 ‘이미’ 일어나고 있다고, 세계는 비밀스럽다고, 하지만 이 세계의 어떤 의미도 감춰지지 않았다고!

사용자 삽입 이미지파울 클레, <황금빛 청금석>


시간을 달리는 나 - 삶은 모노레일이 아니다

역사는 허구가 아닌 소설이다. 폴 벤느가 『역사를 어떻게 쓰는가』에서 했던 말이다. 요약하자면, 역사란 팩트(Fact)가 따로 있어서 그것을 발견할 수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 우리들 지성이 꿰는 줄거리(narrative)에서 그 의미가 생긴다는 것. “어떤 사실은 역사적이고, 또 다른 사실은 잊혀질 만한 일화라고 단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모든 사실은 계열 속으로 들어가며, 그 계열 속에서만 상대적인 중요성을 가지기 때문이다.”(『역사를 어떻게 쓰는가』, 48쪽) 이 구절은 ‘선’ 개념에 대해서 잘 설명하고 있다. ‘역사’라는 거대영역에서조차 절대적인 게 없다는 벤느. 역사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일상적으로 선을 그리며 산다. 엄마? 밥-엄마-용돈. 공부? 취업-공부-자격증. 이게 우리가 구체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엄마’와 ‘공부’라는 단어다. 무엇과 연결되느냐에 따라서 그것이 의미하는 바도 달라진다. 의미를 결정하는 건 초월적인 신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연결되는 이 ‘계열’(series)이다.

아무 의미 없이 흘러가는 우리들의 일상은 이 계열화를 통해 의미를 부여받는다. 우리는 이 ‘의미’라는 것을 갖기 위해 얼마나 발버둥 치면서 사는가.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시간을 컨트롤할 수 있는 것을 최고의 인생 스킬로 이해한다. 삶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열심히 자기계발서를 읽고, 앞으로의 예측대로 착실히 삶이 진행되기를 혹은 나의 의지대로 내 삶을 지배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것만이 오직 ‘의미’ 있는 삶이므로! 인생은 출발역에서 종착역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가는 기차와 같다. 과거를 자양분 삼아, 현재를 힘껏 달려, 미래로 골인.

하지만 선에 대한 전형적인 오해다. 선(계열화)은 우리들 인간의 삶 중 많은 부분을 설명해 주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인간 전유물인 것은 아니다. 선은 기표를 통과하거나 주체에 의해 만들어지거나 혹은 인간 사회의 구조적 시스템을 따라 결정되지 않는다. 선은 그 모든 것들을 경계 없이 가로지른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선들은 지도를 구성하듯이 우리를 구성한다”고 말했을 때, 이때의 선이란 시작점도 끝점도 없이 계속 뻗어 나갈 뿐인 수학적 개념(line)이다. 게다가 선은 끝없이 달려가기만 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복수적이고 동시다발적으로 존재한다. 이 선들의 집합을 우리는 ‘배치’라고 부른다. 자기들끼리 뒤엉키고 폭발하면서 단절, 합성, 중첩 등등의 온갖 역동적인 활동을 벌인다. “선들의 각 종류는 다양체……이다.”(『천 개의 고원』, 386쪽) 선들은 배치를 구성하고 또 그 배치 안에서만 작동한다.

이게 바로 우리들이 늘 실패하는 이유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모래처럼 시간이 빠져나가는 것은, 내가 아직 부족해서가 아니라, ‘나’도 ‘시간’도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역동성을 따라가야 한다. 왜 저자들이 나라는 존재를 점이 아니라 선으로 표현하려 했겠는가? 이것은 우리들이 ‘존재’가 아니라 ‘존재-하기’라는 것, ‘임’이 아니라 ‘함’이라는 저자들의 입장을 그대로 보여 준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는 같은 연장선상에 놓일 수 없다. 현재의 나를 구성하고 있는 하나하나의 요소들은 모두 과거로부터 온 여러 가지 ‘선들’이다. 나라는 지도를 그리고 있는 수많은 선들, 역사화되지 않은 내 안의 역사들! ‘브로콜리 너마저’는 노래 「청춘열차」에서 “더 이상 내 앞엔 모노레일이 없어~”라고 노래했지만, 사실 모노레일은 원래부터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모노레일 말고 새로운 차원을 발견해야 한다. 선은 현재의 나를 구성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들의 배치는 변할 수 있고 또 변할 것이다. 이렇게 살 수 있다는 것은 ‘이렇게 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계열화, 요소들이 아직 계열화되기 전에 존재했던 잠재성의 바다. 우리의 유일한 문제는 어지간해서는 우리들의 빈약한 언어로  이 고른판을 포착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내가 내 삶에 대해서 다 알지 못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닌가. 나는 ‘어느 시간’을 거쳐서 왔는가? 그것(시간의 선)이 세계 속에서 ‘드러날’ 때 비로소 알게 될 것이다. 선들끼리의 부딪힘과 폭발은 지금까지 내 시간의 의미를 송두리째 바꿔 버릴 것이다. 삶을 의미에 가두는 일은 쉬울지는 몰라도 그렇게 보람찬 일은 아니다. 의미란 미리부터 결정되어 있는 게 아니라 매 순간 생성되는 것이므로. 만일 이를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예상치 못한 사건(폭발)을 겪을 때마다 뒷목 잡고 쓰러질 수밖에 없다.-_-

사용자 삽입 이미지살바도리 달리 - <기억의 영속성>


어쩌면 이런 사유가 우리들의 오래된 원망을 해결해 줄 수 있을지 모른다. 어느 날 갑자기 어떤 사건이 날벼락처럼 내리꽂힐 때, 우리는 뒷목 잡고 쓰러지면서 하늘을 노려본다. 왜 나처럼 착하고 평범한 사람에게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신이여,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까?”(같은 책, 371쪽) 하지만 무슨 일이든 일어났을 수 있었다. 게다가 그건 신의 탓보다는 우리의 탓이다. “사람들은 방금 일어난 일을 결코 알지 못할 것이며, 일어나게 될 일을 항상 알게 될 것이다.”(같은 책, 369쪽) 파국이란 견고한 ‘나의 동산’이 파괴되는 순간이다. 그때서야 우리는 나의 세계가 제한된 선들로 그려졌음을 절감한다. 아, 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사건이 터졌다. 하지만 여기에는 누구의 의도도 없다. 내가 미처 알지 못한 수많은 선분들로서 사건은 처음부터 거기에 있었고, 우리가 지금까지 보고 싶었던 것만 보면서 살아왔을 뿐이다.

도대체 이것이 뭘 뜻하는가? 이 세계가 온갖 선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 그리고 또 다른 선이 언제든 이 사이를 가로지를 수 있다는 것이? 선이 가로지르는 고른판의 여백을 볼 줄 안다는 것이? 내 인생에 붙잡을 만한 의미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뜻하는가?

보왕삼매론에는 “억울함을 당해 밝히려고 하지 말라…”로 시작되는 구절이 있다. 한낱 중생일 뿐인 나의 마음은 대부분 억울함을 밝히고 있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 예상치 못한 마주침을 인간으로서 내가 가지는 한 톨의 자유로 이해하려고 한다. 이 역동성 덕분에 우리는 늘 새로운 의미를 생성할 수 있다. 우리는 늘 실패하지만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수 있고, 지층만 켜켜이 쌓인 것 같은 지금-여기에서도 도주선을 탈 수 있다. “진정한 단절은 되돌아갈 수 없는 그 무엇이다. 그것은 돌이킬 수 없다. 그것은 과거를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만들기 때문이다.”(같은 책, 380쪽) 우리는 똑같은 시공간 속에서도 ‘아직’을 살 수도 ‘이미’를 살 수도 있다. 그때는 우리는 다음도 이해하게 된다. 선은 반드시 시간에만 매여 있을 필요가 없음을. 시간이라는 것도 이 지도 위에서는 하나의 선분일 뿐이라는 것을. “항상 뭔가가 일어날 것이고 발생할 것이다.”(같은 책, 367쪽) 그렇다, 항상, 내가 보지 못하는 모든 지대에서!

세 종류의 선분

언제 어디서나 선은 그려진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선을 그리냐, 얼마나 그리냐 등등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선을 그리느냐’다. 선은 그 자체로 아무런 가치판단도 의미작용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들이 발생시키는 효과는 완전히 다르다.

먼저 직선(line)과 선분(segment)의 차이를 짚고 넘어가자. 직선이 모든 점들을 지나쳐간다면, 선분은 점과 점 사이를 잇는 데 그 역점을 둔다. 선분은 직선의 절단된 형태로, 운동하기를 그친 선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는 한 번에 파악되지 않는 직선보다는 시작점과 끝점이 분명하게 정해진 선분에 더 익숙하다. 이 선분의 가장 극대화된 형태가 바로 첫번째 선분인 “견고한 분할선”이다. 이것은 우리를 분할하고 재단하며 일상을 잘 짜인 바둑판으로 만들고자 한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 이 선분들 사이로 던져진다. 규정된 정체성, 주어진 동선, 따라야만 하는 삶의 코스들 따위의 것들. 우리는 어린이일 때는 영어를 배워야 하고, 청소년 때는 대학에 가야 하고, 대학에 가고 나서는 취직을 해야 하고, 취직하고 나서는 결혼해야 한다. “혼인, 잘 결정되고 판이 잘 짜여진 영토들의 놀이 전체. 미래가 있을 뿐 생성은 없다. 이것이 삶의 첫번째 선이다.”(같은 책, 373쪽)

그러나 우리는 이 견고한 분할선에 갇혀서 살지만은 않는다. 이것이 두번째 선인 유연한 분할선이다. 이것은 우리들의 욕망의 선이기도 하다. 이 분할선을 가장 빠르게 경험하려면 사랑에 빠지면 된다.(^^) 견고한 분할선이 용납할 수 없는 사이라면 더 확실하고! 지나친 연상연하, 동성애, 왕자와 거지, 로미오와 줄리엣…. 견고한 분할선은 이것들을 발견하지 못하거나 혹은 전면적으로 부정한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더라도, 사랑하는 순간, 분명 나와 너 사이에는 양자가 요동치며 흘러가고 있다. 여기가 바로 견고한 선과 동시에 형성되는 선의 여백지대다. “약혼자와의 삶과는 경쟁 관계에 들어가지도 않는 강렬한 분자적 삶 전체 …… 항상 자기 자신의 외부에 있으며 국지화하기 힘든 관계들.”(같은 책, 374쪽) 첫번째 선과 무관하게 내가 지금 발 딛고 서 있는 현실은 매번 “유연한 흐름”을 형성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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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세번째 선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매번 말하는 도주선은? 도주선은 더 이상 점에 구애받지 않는 차원이다. 그것은 일종의 절대적 탈영토화를 이룬 경지다. 그러나 우리는 도주선을 구체적으로 이것이다, 라고 명명하거나 제시할 수 없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 하지만 모든 것이 변했다.”(같은 책, 376쪽)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비밀은 비밀이 없다는 것 - 달아나고, 달아나며, 달아나기

우리는 주위에서 심심찮게 그런 사람들을 본다. 어느 순간 표정이 완전히 달라져 있다거나. 분위기가 다르다거나.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훨씬 더 그윽해졌다거나. 그러나 그렇다고 그들이 딱히 특별한 사건을 겪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모든 조건이 예전과 똑같은 경우가 더 많다. 아, 도주선 타고 매정하게 가 버린 사람. 우리에게 그들은 비밀처럼 보인다.

하지만 비밀은 비밀이 없다는 것뿐이다. 절대적 탈영토화가 우리에게 비밀인 이유는 지극히 일상 속에서 벌어진다는 사실 때문이다. ‘일상’은 익숙한 선들로 짜여진 배치다. 선이란 인식, 행동, 느낌, 기억, 이 모든 차원을 포함한다. 우리는 우리가 말할 수 있고 사용할 수 있고 그릴 수 있는 언어(선)만큼만 세계로 경험하고, 우리의 지각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은 영영 ‘비밀’로 남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각을 확장했을 때 우리는 그 순간 도주선을 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게 바로 도주선이다. 선의 외부지대를 감각하고 새로운 선분을 그리는 것. 일상으로부터 기존과 새로운 선을 획득하는 것. “분열분석은…… 삶의 선들, 문학작품의 선들, 예술의 선들, 사회의 선들이 될 수도 있는 선들을 뽑아낸다.”(같은 책, 388쪽)
우리가 동물이 되는 것은 글을 통해서이고, 지각불가능하게 되는 것은 색에 의해서이고, 냉혹하고 기억이 없게 되는 동시에 동물이 되고 지각 불가능하게 되는 것, 즉 사랑에 빠지는 것은 음악에 의해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술은 결코 목적이 아니다. 예술은 삶의 선들을 그리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같은 책, 356쪽)

새로운 삶, 새로운 앎, 새로운 예술은 하늘이 내려준 영감도 아니고 그저 신선함의 정도도 아니다. 앎과 삶의 일치는 신중하게 말해져야 한다. 그것은 “의미”(글)를 실천(삶)하라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언어와 삶은 오히려 너무나 밀착되어 있지 않는가? 우리는 내 말에 내가 속아 넘어가지 않는가? 우리는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의미’를? 아니다. 언어는 의미를 담지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냥 선분이다. “확실한 것은, 그 선들은 언어와 아무 상관도 없다는 것, 반대로 언어야말로 그 선들을 따라가야 하며, 글쓰기야말로 고유한 선들 사이에서 자양분을 얻어야 한다는 점이다.”(같은 책, 387쪽) 우리는 오히려 말들이 지금 어떤 선분을 그리고 있으며 또 어떤 선분을 그리라고 강요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또한 삶 속에서 다르게 말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새로운 선분을 그리는 방식으로만 주장하고 논박하고 글을 써야 하는 것이다. 글은 글쓴이의 삶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글을 통해 새로운 선분을 획득할 수 있고 실험할 수 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내 몸에 새겨진 기존의 선분에 끝나지 않는 싸움을 거는 것이다.

도주선을 타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나는 그게 방법이 복잡해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도주선을 경험했다. 학교를 뛰쳐나올 때, 회사를 그만두고 공부하기로 결심할 때, 가족이라는 견고한 틀에서 한 발짝 자유로워질 때, 우리는 모두 도주선을 탄 것이다. 감각이 바뀌지 않았는가? 그 전까지는 몰랐던 새로운 잠재성의 영역을 보지 않았는가? 하지만 이것이 일시적인 탈선이 될지 아니면 도주선이 될지는 그 다음 스텝까지 보아야 한다. 도주선의 핵심은, 삐뚤어지는 게 아니라 ‘계속하는 것’이다. 쇠심줄 같은 끈기 말이다. 계속하지 않으면 이 모든 선들은 다시 ‘견고한 분할선’으로 회귀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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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건 뭘 하느냐가 아니라 계속(도주)하는가의 여부다. 멈추는 순간 지금까지 벌였던 모든 사건들은 기존의 선분으로 재영토화될 것이므로. “젊은 혈기로 인한 탈선인가? 로렌스가 멜빌을 비난한 것처럼, 도망친 것이 아니라면 그건 더 나쁜 일이다.”(같은 책, 391쪽) 로렌스의 말마따나 “아직 어리니까” 혹은 “어린데도 벌써”라는 말만큼 삶의 생명력을 죽이는 것은 없다. 나는 나의 고정된 과거를 휘발시켜야 하고, 그것은 나의 정해진 미래를 지워 버리는 일과 동일하다. (늙었다는 말도, 나이 이외에 통상적으로 주입되는 평가들도 마찬가지다) 무엇에 찬성하고 반대하느냐고 혹은 내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무언가를 벗어나기 위해서 혹은 도달하기 위해서 달리는 게 아니다. 그냥 멈추지 않기 위해서 달릴 뿐이다. ‘아직’과 ‘이미’ 사이에 존재하기 위해서 혹은 ‘나’로 존재하기 위해서. 내 삶이 성공하든 파괴되든 (이것을 재단하는 것은 누구의 선분인가?) 아무 상관없어지는 지점은 그 사이뿐이다. 만약 한 순간이라도 멈춘다면 나는 나를 몹시 사랑해 주는 수많은 선분들 속에 갇혀 버릴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가끔씩 그 느낌이 공포처럼 엄습한다. 그러나 또한 그것이 나를 멈추지 않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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