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우리들은 태양의 아들이다

누가 해님과 달님을 짝지었을까

손영달(남산강학원 Q&?)

우주가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바야흐로 우주여행의 시대 개막을 목전에 두고 있다. 우주 결혼, 우주 황혼식, 우주 보험 등 우주는 목하(目下) 상품이 되어 팔릴 준비를 하고 있다. SF 영화에 나올 법한 일들이 빛의 속도로 현실이 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몇 해 전 개봉한 영화 아바타는 이런 우리의 현 주소를 여실히 보여 주는 작품이다. 자원 고갈에 허덕이던 인류가 우주로 떠나는 이야기. 지금 우리 모습이 딱 이렇지 않을까? 두 세기 전 신대륙에서의 골드러시가 다시 한번 시원하게 터져주시길 바라며, 세계의 갑부들과 기업은 우주로 눈을 돌리고 있다. 머지않아 별이란 말은 우주 광석이 가득한 자원의 보고라는 뜻으로 통용될지 모를 일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아마도 우린 아주 어린시절부터 우주정복의 꿈을 세뇌당해 왔는지도 모른다. 저렇게! '우리는 주말마다 정석을 복습한다.'의 준말이라는 설도 있다.^^



우주의 가치가 물질적 부로 환원되어 이해되는 이 시점에서, 누군가 당신들은 우주에 대해 어떤 확신을 갖고 있느냐 묻는다면 우린 뭐라 답할 수 있을까? 우리는 우주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가, 삶 속에서 어떻게 우주를 체험하고 있는가? 고도의 천문학과 과학기술을 가지고도, 우린 애석하게도 우주에 대해 딱히 뭐라 확언할 수 있는 게 없다.

분석심리학자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의 자서전에는 노년의 융이 아메리카 대륙을 여행하는 대목이 나온다. 거기서 만난 푸에블로 인디언들, 제대로 된 망원경 하나 없는 이들은 우주에 대해 놀랍고도 확고부동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푸에블로 추장 가라사대, 우리는 우주의 자손들이며, 태양은 우리 아빠다!

우리는 세계의 지붕 위에 사는 민족으로 아버지 태양의 아들들이오. 그리고 우리의 신앙으로 날마다 우리 아버지가 하늘을 운행하도록 도와주고 있소. 우리는 이것을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위해서 하는 것이오. 우리가 우리의 신앙을 더 이상 활용하지 않으면 그때는 10년 안에 태양이 뜨지 않게 될 것이오. 그러면 항상 밤이 되고 말 것이오.

─칼 구스타프 융 지음, 『카를 융, 기억, 꿈, 사상』, 450쪽

푸에블로 인디언의 역사는 오래지않아 막을 내렸다. 그 후로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들의 호언장담처럼 태양이 뜨지 않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고 있다. 이런 그들에게 ‘너네 태양 아들 맞어?!’ 라고 비웃을 수 있는 자 누구인가? 자기 확신과 위엄에 가득 차 자신의 우주론을 설명하는 추장의 모습에 탄복한 융은 이렇게 적어 놓았다. "이것을 우리 자신의 삶의 근거, 즉 우리의 이성이 짜내는 인생의 의미와 비교한다면 우리의 것이 얼마나 빈약한지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우스꽝스러우면서도 예의 바른 태도로 서 있는 저 남자. 그는 태양신을 섬기던 제사장이었다.


여기서 융이 주목하는 건 그 말에 담겨 있는 풍부한 우주적 의미이다. 그들에게 우주는 객관적인 관찰대상도 장사 거리도 아니었다. 그들은 서구인들의 협소한 시각과는 비교될 수 없을, 그야말로 우주적인 스케일로 세상을 봤다. 우주와 나는 둘로 나뉘지 않는 하나다. 우주의 리듬은 나의 모습을 결정하고, 나의 행위는 우주의 운행에 직접 기여한다. 이 말은 우리에게 ‘당신은 지금 얼마나 우주적으로 살고 있습니까? 어떻게 우주에 기여하고 있습니까’ 라는 윤리적인 질문을 남긴다.

고대인들에게 우주와의 합일은 삶의 의미이자 과제였고, 하늘은 관찰과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제의와 숭배의 대상이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천인감응론’도 이와 동류의 세계관이다. 어떻게 나를, 사회를, 국가를 우주적 궤도에 올려놓을 것인가? 우리가 망각해 버렸다기엔 너무 가까이 그리고 도처에 이런 세계관이 산개해 있다. 흥미롭게도 푸에블로 인디언들처럼 태양 숭배 신앙을 가진 민족은 무수히 많다. 이집트, 바빌론, 인더스 등 무수한 문명권에서 태양을 섬기며 자신의 삶과 합치시키려 노력했다. 태양은 단연 인기 1순위의 천체였던 것이다. 동서고금을 아우르며 세계인들의 관심을 사로잡았던 태양의 매력은 어떤 것이었을까?

태양, 질서의 수호자

어제는 금성일식이 있는 날이었다. 금성일식은 금성이 태양을 지나가는 현상이다. 불안정한 궤도를 가진 금성은 자주 태양의 주위를 어지럽게 지나다닌다. 때로 태양의 방향을 거슬러 역행하기도 하고 이번처럼 태양의 영역을 침범하기도 한다. 어제 일어난 금성일식에선 금성이 태양 안으로 쏙 하고 들어가는 흔치 않은 장면이 연출되었기에, 금세기 최고의 우주쇼라며 화제가 됐었다. 뉴스에는 태양을 관찰할 수 있도록 고안된 슈렉 가면을 쓴 아이들이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는 사진이 실렸다. 지금 못 보면 다음 생을 기약해야 한다는 말과 함께. 그런데 이건 옛 선조들이 봤다면 경을 쳤을 일이다. 점성학적으로 보면 태양은 왕을 상징하는 천체다. 그것이 금성에 의해 좀 먹혔으니 이건 보통 심각한 전조가 아니다. 천체는 결코 혼자 쇼하지 않는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는 고대인들이 일식을 어떻게 전조로 받아들였는지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다. 지금의 터키 지역에 있던 리디아와 메디아 왕국 간에 전쟁이 벌어졌다.

전쟁은 막상막하로 진행되어 6년째에 접어들을 때였다. 싸움이 한창일 때 갑자기 낮이 밤이 되고 말았다. 일식이라고 하는 하늘의 돌변은 밀레토스의 탈레스가, 실제로 그 해까지 정확히 들어 이오니아인에게 예언했던 일이다. 리디아 메디아 두 군은 다 같이 낮이 밤으로 변한 것을 보고 싸움을 그만 두고 할 수 없이 화평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헤로도토스, 『역사』, 50쪽

당시 사람들은 일식을 신의 노여움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행위를 바로잡는 계기로 삼았다. 그리하여 6년간의 싸움에 종지부를 찍고 화해 모드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만큼 태양은 중요한 천체로 여겨졌다는 것. 태양의 변화는 여러 천문현상 중에서도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태양의 인기 비결? 그건 무엇보다 ‘질서’에 있었다. 성실하고 규칙적인 바른 생활 사나이 태양. 태양은 우주 질서의 수호자로 여겨졌다. 하지만 그의 반듯함은 일식과 혜성의 침범 등, 여러 방해요소들로부터 수시로 도전 받는다. 그럼에도 한결같은 진로와 예측할 수 있는 주기를 유지하는 태양은 사람들에게 질서의 수호자로 여겨지기에 충분했다. 인간은 태양의 주기에서 시간과 공간의 질서감을 획득했다.

또한 태양은 만물을 생육하는 에너지의 원천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농경을 토대로 흥기했던 4대문명의 발상지에는 공통적으로 태양숭배 신앙이 나타난다. 생명에너지를 무한 방사하는 태양은 범접할 수 없는 지위를 가진 신으로 이해되었다. 이집트 태양신의 이름은 레(Re)이다. 이집트인들은 지하왕국의 어둠을 뚫고 나와 동에서 서로 항해하는 태양의 신, 레야말로 진정한 질서의 근원이라고 믿었다. 레는 항상 선물인 마트(Maat)와 함께 동행한다. 마트는 햇빛, 만물을 자라나게 하는 생명의 근원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태양의 신 레(Re). 레는 아침과 저녁 두 차례 전투를 벌인다. 어둠을 뚫고 솟아오르기 위해서다. 한 번의 승리와 한 번의 패배. 그것이 낮과 밤을 만든다.



우리에게 익숙한 불교의 ‘비로자나불(毘盧遮羅佛)’도 이런 태양신의 일종이다. 산스크리트어로 ‘Vairocana’는 태양이라는 뜻. 역시나 불상의 머리 주위에 태양의 광휘를 상징하는 빛살이 묘사되어 있다. 사라진 문명 아즈텍의 신 ‘토나티우Tonatiuh’도 태양신이다. 아즈텍 신전의 태양의 돌 위에 묘사된 이 신의 모습은 한 눈에 봐도 어엿한 태양의 화신이다. 머리 주위에 묘사된 빛살은 태양의 광휘를 표현한 것이다. 이들에게서 공통적으로 관찰되듯이 태양은 강렬한 생명의 에너지를 방출하는 최고의 신이었다. 뭇 존재들의 생명은 태양과 떼 놓을 수 없기에 태양신은 어디에서나 특권적인 지위를 가진 신으로 자리매김했다. 태양은 생명의 질서를 주관하는 완전 소중한 천체였던 것이다.

중국의 태양신은 왜?!

중국의 신화에도 물론 이런 태양신이 있다. 그런데 중국의 태양신은 여타 문명권에서처럼 끗발을 날리지 못한다. 일찍이 중국에도 태양숭배신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농경 문명이 만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권적 권위를 가진 태양신의 전통이 발견되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먼저 중국 신화 속의 태양 이야기를 만나보자.

중국의 신화에서 태양은 세발 달린 까마귀 삼족오(三足烏)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고대 중국 사람들은 세상에 열 개의 태양이 있다고 믿었다. 태양의 집결지는 동쪽 바다 끝에 있는 부상수(扶桑樹)라는 나뭇가지다. 태양의 어머니 희화는 나뭇가지에 매달린 아홉 개의 태양 중 하나를 탕곡이라는 호수에서 말끔히 씻겨 어제의 태양과 교대시켰다. 그런데 어느 날 열 개의 태양이 모두 하늘로 올라가 버리는 대형사고가 벌어졌다. 덕분에 세상은 불바다가 됐고 명사수 예에게 태양을 쏘라는 막중한 임무가 내려진다. 예는 솜씨를 발휘해 아홉 개의 태양을 명중시키지만 천신 희화의 자식을 죽였다는 이유로 하늘의 노여움을 사 지상으로 영원히 추방당한다.

그러자 예는 곤륜산의 서왕모가 가지고 있다는 불사약을 구해 영생을 얻으려 한다. 서왕모 면전에 당도한 예와 그의 아내 항아. 서왕모는 이들에게 불사약을 내려주며 복용법을 일러주는데, 한 사람이 한 병을 다 먹으면 즉시 하늘로 올라가고, 두 사람이 반을 나누어 마시면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항아는 남편을 배신하고 몰래 불사약을 들이킨다. 하늘은 이런 항아를 용서하지 않고 흉한 두꺼비로 만들어버린다. 오늘날에도 해와 달에 이들의 본 모습이 드러나는데 해에서는 부상수 가지에 매달려있던 태양-새 삼족오(三足烏)를, 달에서는 두꺼비로 변한 항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평소 우리가 해님 달님이라는 말을 자주 쓰듯이 중국에서는 해와 달을 함께 묶는다. 다른 문명권 사람들이 보면 놀라 자빠질 일이다. 감히 누가 태양을 달 나부랭이와 함께 묶는단 말인가? 태양을 소재로 하는 신화에 이다지도 권위가 없다는 것은 세계 신화에 유례가 없는 일이다. 일반적으로 달은 밤과 어둠을 주재하는 신으로 여겨지기에, 그만큼 부차적인 지위로 간주된다. 심지어 서구 지역에서는 달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부여하기까지 한다. ‘광기어린’ ‘미치광이’ 라는 뜻의 ‘lunatic’은 달을 뜻하는 라틴어 ‘lunar’에서 나왔다. 그럼에도 중국에서는 달은 해와 동급의 지위를 가지는 천체로 여겨지고 있다. 도대체 거리가 가깝길 하나, 크기가 비슷하길 하나, 천체 구조만 봐서는 당최 설명이 안 되는 이야기다. 

먼저 태양신의 권위가 추락하게 된 배경을 살펴보자. 이는 별자리 서당에 자주 등장하는 은나라의 몰락과 관련되는 이야기다. 우리는 날을 헤아릴 때 한 달을 열흘씩 끊어 상순·중순·하순으로 묶는다. 시간을 열흘을 주기로 한데 묶는 것은 은나라로부터 전해진 전통이다. 부상수에 걸려 있었다는 열 개의 태양은 은나라에 살던 열 개의 부족체를 뜻한다. 각 부족의 시조신이 태양이 되어 세상의 날을 주관한다고 여겼던 것이다. 이들 조상신의 이름을 따 태양에 붙인 이름이 우리가 천간이라 부르는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 이다. 이들이 한차례 순환하는 주기를 ‘순(旬)’이라 하여, 이를 시간의 중심으로 삼았던 것이다. 중국 문명은 분명 열 명의 태양신, ‘제(帝)’로부터 출발했다. 하지만 기원전 11세기, 은이 주나라에 의해 멸망하면서 태양의 특권적 지위는 후퇴하게 된다. 우주의 중심은 ‘천(天)’이라는 새로운 신이 차지하게 되고(이에 대해서는 다음주에 자세히~^^), 태양은 하루의 반절만을 주재하는 지위로 밀려나게 된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항아와 예. 이들의 운명 또한 기구하다. 항아는 예 몰래 불사약을 원샷하고 달로 귀양을 가고, 예는 사주를 받은 희화에게 미움을 사서 지상으로 내려온다. 신이라고 보기엔 뭔가 민망한 이 부부의 이야기. 해와 달은 이런 이야기들로 가득한 곳이다.



음양, 현자의 눈

중국에서 해와 달을 하나로 묶는 이유는 시간의 안배와 관련이 깊다. 태양은 하루의 절반인 낮을 주관한다. 나머지 반절은 달이 주관한다. 크기 상으로는 무려 400배의 차이가 나는 이들이지만, 지구에서 보기엔 이들은 하루라는 시간의 반절씩을 주관하는 대등한 천체이다. 이들의 의미는 해와 달이라는 천체의 외연을 넘어 보다 추상적인 원리로 발전했다. 바로 중국의 독특한 세계관인 음양(陰陽)이라는 개념이다. 한자 음과 양은 언덕(阝)의 응달과 양달을 나타낸 글자이다. 그늘과 양달이라는 상반되는 요소는 하나의 언덕의 두 모습으로 함께 공존하는데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로의 성격이 반대의 것으로 뒤바뀐다. 일과 월의 조합으로 밝을 명(明: 日+月)이나 바꿀 역(易: 日+月)이란 한자가 만들어진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해와 달은 떼 놓을 수 없는 한 쌍이었다. 서로를 포함하며 변이하는 음양의 개념은 우주의 상관관계를 나타내는데 소요되었다.

언덕의 양달은 응달이 있어야 가능하다. 언덕은 언덕이고 양달은 양달이라고 이들의 관계를 단절시킬 수 없다. 한 사물은 자신의 반대항을 전제하고서야 가능하다. 모순되는 것들을 무 자르듯 잘라버리는 태도는 ‘밝은(明)’ 인식이 아니다. 반대되는 요소들이 하나로 있기 때문에 세상은 부단히 ‘변화(易)’한다. 낮(日)은 밤(月)으로 밤(月)은 낮(日)으로. 이 생각은 중국 특유의 시간개념이 형성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시간이란 직선으로 나아가는 화살이 아니라 거듭되는 생성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대립적이면서 보완적인 두 개의 기운이 공존과 교대 속에 함께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음양의 개념은 중국의 사유가 협소한 인식에 갇히지 않는데 일조했다. 일상적인 사고에 매몰된 인간은 사물의 일면을 보고 전체를 규정하려 하지만, 음양은 사물의 보이지 않는 반대편과 나중에 도래할 다른 국면을 함께 이해하게 한다. 이러한 생각은 시간과 공간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게 한다. 이것이 사물의 전체를 인식하는 현자들의 앎, 대지(大智)이다.

서구 문명의 뿌리가 되는 고대 그리스에서도 음양과 비슷한 생각들이 발견된다. 기원전 6세기의 헤라클레이토스는 일찍이 이렇게 말했었다. "‘신은 낮이자 밤이며, 겨울이자 여름이고, 전쟁과 평화이며, 포만감이자 배고픔이다." 그는 대립물이 공존하는 채로 부단히 변화하는 세상의 모습을 포착했던 것이다. 그리스의 방대하고 화려한 신화 역시 같은 맥락의 것이다. 아폴론은 섬광이면서 때로는 어두움이고, 직선이면서 사선이기도 했다. 이것이 그리스의 신화가 기대고 있는 시적 언어, 뮈토스의 세계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은 얘가 쟤가 되고 쟤는 얘가 되는 이런 어정쩡한 이야기들을 벗어 던지기 시작했다. 반대되는 것들이 온통 뒤섞여 있는 신화적 세계관과 절연하면서 그리스는 진실에 대한 엄밀한 기준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관측 위주의 서양의 천문학이 태동한 것도 이즈음이다. 별에서 세상을 읽고 나를 읽던 고대의 전통을 말끔히 청산하고 우주의 구조를 그야말로 과학적인 태도로 규정하려 나선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인간과 우주가 소통하던 감응의 세계관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정교하고 체계적인 천문학적 지식이 넘쳐했지만 삶에 어떠한 기여도 하지 않는 한 그것은 모두 공염불과 같았다. 앞에 나온 푸에블로 인디언은 손바닥에 침 발라가며 맨눈으로 하늘을 봤지만, ‘해는 동쪽에서 떠오른다’ 정도의 단순한 지식들에서 인생의 지팡이가 될 수 있는 귀중한 성찰들을 이끌어 냈다.

태양은 별이다. 너무나 가까이에 있어서 매번 그걸 잊고 산다. 아주 먼 우주에서 태양을 바라보며 별이라 말하는 누군가가 있을 거다. 우린 이 태양을 바라보며 무엇을 떠올리는가. 질서? 생명? 무더위? 밝음? 우주? 삶?


전통적 삶을 벗어던진 우리 역시 이들과 같은 수순을 밟아왔다. 다음번의 일식이 언제 어디서 또 관측될 지, 우린 몇 백 년 앞을 정확히 내다보고 있다. 하지만 당장의 일식이 어떤 의미인지, 우린 단 한 줄도 말할 수 없다. 반면 조악하기 그지없는 고대인들의 생각들은 우리를 너무도 황당하게 하지만, 그 안에는 나와 우주를 합치시키려던 고대 현자들의 지혜가, 삶을 우주적 차원으로 끌어 올리려던 고민이 담겨 있다. 중국인들은 태양을 보고 음양을 생각했다. 하나 안에는 반드시 정반대의 것이 내재해 있고, 그렇기에 우주는 멈추지 않고 굴러갈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음양의 이치이다. 이글거리는 생명의 원리 또한 이와 같다. 삶 안에 죽음이 있고, 삶은 죽음으로 죽음은 다시 생명으로 이어진다. 태양도 음양의 원리에 따라 매일 탄생과 부활을 거듭한다. 그러니 삶에 집착하는 것, 허무의 늪에 파묻히는 것, 모두 인간의 협소한 이해가 지어낸 망상에 불과한 것이다. 음양의 리듬, 그 아름다운 순환의 질서에 부합하는 삶을 살 때 비로소 우리는 생명일 수 있다. 푸에블로 인디언의 말, 너는 어떤 삶으로 우주에 기여하고 있는가? 자, 이제 자기 스스로에게 되물어 볼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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