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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청년니체

니체의 ‘아니오’ (4)

by 북드라망 2019. 1. 15.

니체의 ‘아니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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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바보 같은 질문이다. 설령 예속을 원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예속이 그에게 자유의 감정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혹은 예속된 상태인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노예가 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노예는 예속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기에 자신이 속박되어 있다고, 즉 자유롭지 않다고 느끼지 못한다. 자유는 인간으로 존재하는 한 가질 수밖에 없는 원초적 욕망이다.

그렇다면 대체 이 자유의 정체는 뭘까? 어려운 질문이다. 우선 ‘자유’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부터 시작해보자. 자유라고 하면 어떤 상태가, 편안한 어떤 상태가 떠오른다. 이 편안한 상태는 내가 내 마음대로 행위 하는 데 있어 어떤 걸림돌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편안함이다. 아무런 제약도 없는 상태, 이것이 우리가 우선적으로 떠올리게 되는 자유의 모습이다.



​이런 자유를 가능케 하는 힘으로 지목되는 것은 ‘자유의지’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고, 이를 이용해 자신의 장애물들을 깨부술 수 있다. 그리고 그 결과 인간은 자유에 도달한다. 물론 자유의지가 항상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실패의 책임은 자유의지에 있지 않다. 문제는 노력이다. 노력이 부족해서이지, 자유의지 그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는 것. 포기는 배추를 셀 때나 하는 말이라는 구호를 가슴에 새기고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한 인간의 자유의지는 제대로 작동할 것이라는 믿음. 이런 자유의지에 기대어 우리는 제약 없는 상태로 나아가는 꿈을 꾼다.

그래서일까. 오늘날 우리에게 운명이란 말은 낯설다. 아니 낯설다 못해, 운명 따위를 운운하는 것은 인간의 잠재력을 모독하는 말로 들린다. 인간에게는 운명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자유의지는 인간이 가진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능력이다. 그렇기에 자유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어떤 운명인가가 아니라 자신의 자유의지가 얼마나 견고한가이다. 이런 우리에게 운명이라는 말은 자신의 나약함에 대한 변명 정도로밖에는 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니체에게 자유의 문제는 곧 운명의 문제였다. 그렇기에 <운명과 역사> 속 니체는 자유에 앞서 운명에 대해 성찰한다. 물론 니체 역시 자유의지를 인정한다. 하지만 그 자유의지라는 것은 결코 운명에 대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니체에게 자유의지는 운명과의 관계 속에서만 그 의미를 갖는다. 요컨대, 자유의지는 운명을 필요로 한다는 것! 바로 여기에서 니체만의 독특한 자유의 상이 펼쳐진다.

 

 

환상 속의 자유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자유의 상으로 돌아가 보자. 그것은 아무런 걸림돌도 없는, 모든 제약이 사라진 자유다. 하지만 그런 자유란 일종의 환상이다. 인간을 비롯해 하나의 생명체로 존재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어떤 제약들 위에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인간을 유한한 존재라고 부른다. 다시 말해, 어떤 한계를 가진 존재라는 것이다. 이 한계는 다양하다. 우선 몸이라는 경계가 있다. 몸의 경계가 사라진다는 것은 더 이상 생명체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즉 죽는다는 것을 뜻한다. 삶의 차원에서도 일정한 경계가 있다. 인간의 생명은 유한하며, 특정 조건들 위에서 펼쳐진다. 산소와 물이 있고, 지구의 중력이 있는 테두리 내에서만 인간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결코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한계들 위에 서있다. 존재한다는 것은 끊임없이 부딪힐 수밖에 없는 수많은 타자들과의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이기도하기 때문이다.

어떤 한계를 가진다는 것은 인간의 존재조건이다. 바꿔 말해, 한계가 없다면 우리는 존재할 수 없다. 삶은 이미 한계들을 가진 삶이자, 한계들 속에서 펼쳐지는 삶이다. 하여 제한 없는 자유란 우리의 존재조건 자체를 부정하는 일이다. 아무런 걸림돌도 없는 상태는 살아있는 한 인간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말 그대로 꿈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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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것이 단지 꿈에 그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 꿈은 우리의 현실 세계에 작용한다. 우리는 자유를 어떤 제약도 없는 상태로 상상하며, 그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달린다. 자유를 향한 이러한 질주는 사춘기의 반항에서부터 방종, 혹은 성실하게 하나하나 장애물을 통과해 가는 것까지 다양한 모습을 띨 수 있다. 하지만 그 질주의 끝은 모두 같다. 한계를 가진다는 것이 인간의 존재조건인 이상,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자유의 불가능성일 뿐인 것이다. 결국 우리는 제한 없는 자유라는 꿈에 지친다. 그리고는 적당한 예속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자유의 포기! 이것이 그 꿈이 만들어내는 우리의 현실이다.

제한 없는 상태로서의 자유는 멋져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멋진 ‘환상’일 뿐이다. 더욱이 이 환상은 우리가 원하는 자유의 실현을 불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그러니 제한 없는 자유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자유를 가로막는 걸림돌이다. 자유에 필요한 것은 우리를 기분 좋게 하는 환상이 아니라, 불쾌할지라도 우리가 서 있는 현실이다. 인간은 결코 한계가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 제약이란 인간의 존재조건이라는 진실! 자유는 이 진실과 함께 시작될 것이다.

 

 

자유롭지 못하기에 자유롭다?!

니체는 환상이 아닌 우리의 현실 위에 자유를 세우려 한다. 제한 없는 자유라는 망상 대신, 우리가 가진 한계들 위에서 자유의 공간이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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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지는 구속을 벗어난, 의도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 그것은 한계 없는 자유, 종잡을 수 없는 것, 영혼이다. 그러나 운명은 필요한 것이다 : 만약 우리가 세계사를 혼란스러운 꿈이라고, 인류가 가진 환상에서 비롯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역이라고 믿지 않는다면 말이다. 운명은 자유의지에 대항하는 한계 없는 저항력이다. 운명 없는 자유란 현실 없는 영혼, 악 없는 선처럼 터무니없는 것이다. 오직 반대되는 것들 사이에서만 변별적 특징은 산출된다. (<운명과 역사> 중)

 

운명이란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현실의 모든 한계들이다. 우리는 분명 이런 한계들을 넘어설 수 있는 힘인 자유의지를 가졌다. 하지만 자유의지가 우리가 의도할 수 있는 어떤 것, 한계 없는 자유와 연결되는 만큼이나 운명은 그런 자유의지에 대항하는 한계 없는 힘으로 작동한다. 제한 없는 자유가 실패하는 지점이 여기다. 우리의 자유의지가 한계를 모르는 만큼이나, 운명 또한 그 한계를 갖지 않는다는 것. 따라서 우리는 결코 운명에 대한 승리로서 자유를 거머쥘 수 없다는 것. 그렇게 자유의지는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는 가운데 패배를 선언하게 된다.

하지만 자유를 아무런 걸림돌도 없는 상태와 분리시키는 순간, 자유의지의 무기력한 패배는 사라진다. 니체에게 자유란 운명과의 관련 속에서만 자신의 자리를 만든다. 운명은 분명 자유의지의 반대편에 있다. 하지만 이 대립적 관계가 운명을 운명으로, 자유의지를 자유의지로 만든다면? 오히려 운명이 자유의지를 가능케 한다면?



운명과 자유의지는 현실과 영혼, 선과 악처럼 서로 반대되는 것이자, 서로의 존재조건을 이룬다. 운명은 ‘자유의지에 대한’ 저항력이다. 자유의지가 발현되는 곳에는 반드시 운명이 있기 마련이다. 바꿔 말해, 운명이 있다는 것이 자유의지가 작동하게 되는 조건이다. 우리가 한계를 한계라고 느끼는 그곳, 오직 거기에서만 자유의지 또한 존재한다는 것. 운명이 자유의지에 대항하는 저항력인 만큼, 자유의지 또한 운명에 대한 저항력으로서만 자신을 드러낸다. “오직 반대되는 것들 사이에서만 변별적 특징은 산출된다.”

니체에게 자유란 운명과 자유의지 사이에서 발생하는 저항력에 있다. 만약 한계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자유의지 또한 결코 발동하지 않을 터. 거기에는 자신이 예속된 줄 모르는 노예처럼 자유란 없다. 한계를 한계로 인식하고, 그 한계에 맞서는 자유의지. 자유는 운명에 대한 승리가 아니라, 운명과의 싸움 그 자체이다. 하여 자유는 종국적으로 성취되는 어떤 상태일 수 없다. 자유는 오로지 싸움의 형태로만 존재하며, 우리가 느끼는 저항력은 우리가 자유의 공간에 있다는 것에 대한 증명이다.

그렇기에 싸움의 강도가, 저항력의 정도가 우리의 자유의 정도다. 예를 들어 철수와 영희가 등산을 한다고 해보자. 철수는 산을 오르는 데 별 어려움이 없다. 반면 영희는 한 발, 한 발을 뗄 때마다 자신에게 저항하는 중력의 힘을 온 몸으로 느낀다. 이 때, 니체에게 자유로운 자는 철수가 아니라 영희다. 자신의 한계와 싸우고 있는 쪽은 영희이며, 바로 이 싸움이 영희에게 열린 자유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니체의 자기극복은 극복 이후가 아니라, 넘어감이라는 이행의 과정 자체를 의미한다. 이 이행의 순간이야말로 자유가 출현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지금 어떤 한계를 느끼는가, 그리고 그 한계와 싸우며 저항력을 느끼는가. 그렇다면 지금 그대는 자유롭다. 자유롭지 못하다고 느끼는 그 순간, 그래서 자유를 위해 싸워가는 그 과정이 곧 자유라는 역설. 이것이 니체의 자유가 갖는 두 번째 역설이다. (다음 편에 계속~)

신근영(남산강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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