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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차명식의 책 읽습니다

아버지라는 ‘두려움’ 크리스티네 뇌스틀링커 -『오이대왕』

by 북드라망 2019. 1. 8.

아버지라는 ‘두려움’

크리스티네 뇌스틀링커, 『오이대왕』



필자의 말

대학교를 졸업한 뒤 2015년 겨울부터 올해 봄까지 중학교 아이들과 인문학을 공부했다. 2년간 함께했던 아이들을 보내고 나니 문득 그 시간들을 이대로 흘려보내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에 그 간의 수업들을 가지고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이 글은 나만의 글이 아니다. 나의 목소리와 더불어 아이들의 목소리 역시 읽는 이들에게 닿을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 글에 등장하는 아이들의 이름은 모두 가명을 사용하였습니다.   


0.  

볼프강은 수학은 서투르지만 수영 하나는 자신 있는 평범한 중학생이다. 그런데 어느 날, 볼프강의 집에 느닷없이 왕을 자칭하는 자그마한 오이 모양의 괴물 하나가 나타난다. 그가 말하길 자신은 ‘오이대왕’으로, 볼프강네 집 지하에 사는 쿠미-오리란 정령들의 왕인데, 발칙하게도 그들이 자신을 쫓아냈으므로 볼프강네 집에 정치적인 망명을 하러 왔다는 것이다.


지저분하고, 흉측한데다, 무엇보다도 거만하고 고압적인 태도 때문에 볼프강네 식구들 모두가 오이대왕을 내키지 않아 한다. 할아버지도 엄마도 누나도 볼프강도 마찬가지다. 아직 어린 막내 닉은 별다른 생각이 없다. 다만 단 한 사람, 오직 볼프강의 아버지만이 별다른 까닭도 없이 마치 오이대왕이 자신의 왕인 것처럼 떠받들고 아낀다. 결국 아버지 한 사람 때문에 볼프강네 식구들은 오이대왕과의 불편한 동거를 시작하게 된다.


여기서 이미 알아차린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 오이대왕은 어떤 의미에서는 눈속임 장치 같은 것이다. 이 책은 결국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버지는 왜 다른 모두가 싫어하는 거만한 폭군을 떠받드는 걸까? 어째서 그 폭군의 말이며 행동 하나 하나마다 편을 드는 것일까? 그리고 그런 질문들을 던지다 보면 자연히 의문들은 다른 가족들에게로 옮겨간다. 왜 다른 가족들은 그런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아버지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을까.

그러므로 결국 이 책은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 또한 아버지의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이다.

 

1.

언제부터인가 가부장제라는 말은 더 이상 낯선 단어가 아니게 되었다. 그것은 대개 권위주의적이고 강압적인 아버지, 즉 오이대왕과 그를 떠받드는 볼프강의 아버지 같은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오이대왕을 둘러싼 갈등이 점차 커져가면서 드러나는 볼프강 집안의 평소 모습이 바로 전형적인 가부장적 집안의 그것이다.

 

「“우리 집은 뒤죽박죽이에요! 우리는 텔레비전도 아빠가 보고 싶어 하는 것만 볼 수 있어요! 먹는 것도 아빠가 원하는 것만 먹을 수 있고, 입는 것도 아빠가 입어도 된다는 옷만 입을 수 있잖아요! 웃는 것도 아빠가 허락할 때만 웃어야 해요!”

누나가 느닷없이 큰 소리를 치며 화를 냈다. 물론 누나의 말에 약간 과장된 부분이 있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나도 누나 편을 들기로 했다.

“누나도 이제 다 컸어요. 그런데 마음대로 놀러 갈 수도 없고, 춤도 추러 갈 수 없어요! 그리고 배낭여행도 안 되고요! 여름방학 축제에도 갈 수 없어요! 립스틱도 바르면 안 되고요, 긴 외투도 못 입어요!”」 (89p)

 

볼프강의 아버지는 자신이 집안의 모든 것을 명령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받고 싶어 한다. 그런 면에서 오이대왕의 신하처럼 행동하는 볼프강 아버지의 모습은 왕정의 질서, 가부장적 질서에 대한 그의 동경심과 욕망을 보여준다 할 수 있다. 심지어 그는 정치적으로도 매우 보수적인 사람이라 오이대왕의 백성인 쿠미-오리들이 자신들의 왕을 쫓아낸 것이 쿠데타나 마찬가지라고 말해 누나와 할아버지의 분노를 산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누나와 볼프강은 지하의 쿠미-오리들을 만나 그들이 왕 없는 자기 사회를 만드는 걸 돕게 되고, 이런 흐름들은 결국 한데 합쳐서 하나의 구도를 형성한다. 한쪽에는 쿠미-오리들을 공포정치로 억압해온 폭군인 오이대왕과 그를 싸고 들면서 집안의 왕처럼 군림하려 하는 가부장적 아버지가 있다. 다른 한쪽에는 그런 아버지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는 다른 가족들과 오이대왕 없이 자기 사회를 건설하려는 쿠미-오리들이 있다. 이 구도 속에서 전근대적 군주와 가부장적 아버지는 동일시된다. 그들은 모두 구시대의 잔재이며, 순리에 따라 혁명으로 축출되거나 그것이 싫다면 스스로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오이대왕』의 결말은 후자에 가깝다. 볼프강의 아버지는 자신이 회사 사장과 연줄이 있다는 오이대왕의 말을 믿고 그를 대신 배은망덕한 쿠미-오리들을 몰살시키려고까지 하지만 쿠미-오리들과 볼프강의 폭로에 의해 결국 오이대왕의 말이 거짓이라는 걸 깨닫는다. 그 순간 아버지는 오이대왕에게 투사하던 자신의 욕망이 얼마나 헛되고 무의미했는가를 깨닫고 무너져버린다. 때맞춰 막내인 닉이 오이대왕을 쫓아내자, 아버지는 일상으로 돌아가 마치 모든 것을 잊어버린 것처럼 행동한다. 그 뒤 볼프강네 가족들의 삶이 어떻게 변했는지, 과연 아버지가 이전처럼 다시 가족들을 ‘다스리고’ 싶어 했는지, 가족들이 이전과는 달리 아버지에 맞서 당당히 자기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지를 상상하는 것은 독자들의 - 우리의 몫으로 남겨진다. 그리고 물론, 우리 앞에 펼쳐진 현실은 좀 더 복잡하다.


가부장적 아버지를 집안의 왕으로 표현하는 메타포는 참으로 직관적이고 알기 쉬운 것이지만 이것을 실제 행동으로 이어가려 할 때는 멈칫하게 된다. 책에서는 가부장적 아버지의 욕망을 그대로 꺼내다 놓은 것 같은 오이대왕이라는 존재가 있었기에 그를 쫓아냄으로서 상황을 일단락 지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 설령 실제로 그럴만한 힘이 있다 하더라도 - 민중들이 혁명을 일으켜 왕을 쫓아내듯 집에서 아버지를 몰아낼 수 있는가?

    


 

2.  

“오이대왕을 보면 아버지를 두려워하는 가족의 마음이 곳곳에 숨겨져 있습니다. 성적표, 계산서, 그 외의 모든 것을 숨겨야하는 이유는 아버지가 화를 낼까봐 입니다. 그는 가족과 거리감이 있어요. 그 때문인지, 아버지는 혼자 다른 가족과는 다르게 행동합니다. 모두가 오이대왕을 미워할 땐 아끼고, 오이대왕이 쫓겨난 뒤 다른 가족들이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게 되었을 때 혼자 오이대왕을 미워합니다. 그런데 저는 책을 읽을 때 그런 점을 잘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너무 당연스레 넘어갔어요. 어머니가 그렇게 혼자 다르게 행동을 했으면 이상하게 여겼을 것 같은데, 왜 아버지는 그냥 넘어갔을까요?” (희진이의 감상문 중)

 

『오이대왕』을 읽다보면 볼프강의 아버지가 기묘하리만치 다른 등장인물들과 유리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오이대왕에 대한 태도에서 엇갈리는 것부터 가족들과 얼굴을 맞대는 시간도 적고, 무엇보다도 대화를 하는 방식에서 그것이 드러난다. 엄밀히 말해 아버지와 다른 가족들 사이에는 대화라는 것이 성립하지 않는다. 대화란 응수타진의 과정으로서 듣고 말함에 있어 오고 가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헌데 볼프강의 아버지와 다른 가족들의 ‘대화’는 오직 아버지만이 말을 하고 다른 가족들은 그것을 잠자코 듣거나, 다른 가족들이 무언가를 토로하고 아버지는 그것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 이유에 대해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해볼 수 있다. 오늘날 가족은 가장 내밀한 공동체로서 지극히 사적인 교류가 행해지는 인간관계로 여겨진다. 헌데 오이대왕에 등장하는 가부장적 아버지는 그 내적이고 사적인 공동체의 일원이면서도 언제나 외부에 - 정확히는 공동체의 경계에 자리하는 것을 지향한다. 가부장적 아버지는 자신이 ‘사적’ 공동체인 가족의 대표로서 ‘공적’ 영역을 대면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특정한 공적인 만남의 자리, 예를 들면 회사의 만찬에 참가한 임직원 가족들의 모습을 상상해보라. 먼저 아버지와 아버지들이 만나 대화하고, 반드시 자신들의 입으로 가족 구성원들을 소개한다. “‘제’ 집사람입니다.” “‘제’ 아들입니다.” “딸입니다.” 그 과정이 있은 뒤에야 다른 가족구성원들은 인사말을 건네는 걸 허락받는다. 그리고 근대 이후의 사회에서 대표한다는 행위는 대개 침묵하는 피대표자들을 통제할 권리를 의미한다. 주민, 시민, 국민의 대표자들이 사실상 말할 수 없는 그들을 통치하듯이, 가부장적 아버지는 대표의 권리로 다른 가족구성원들을 통제하려 들게 된다.


한편, 다른 가족구성원들에게 있어 공동체의 경계선에 자리하고 있는 아버지는 가족의 내부구성원이면서도(우리) 외부에 위치한 대상(그)이다. 바로 이것이 볼프강 집안에서 아버지가 유리되어 있는 원인이다. 두려움의 대상일 때도 타도의 대상일 때도 아버지가 언제나 외부의 대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가족들은 두려움에 침묵하면서 더 이상 그가 말을 하지 않길 바라거나, 아니면 분노에 차 포효하면서 더 이상 그가 말을 할 수 없길 바란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 그 소망을 위해 그를 축출해낼 것이라면 그렇게 하면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남아있기를 - 그는 외부인(그)이지만 또한 내부인(우리)이기에 - 바란다면, 볼프강 가족이 그러했듯 기요틴 이외의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우선은 아버지를 쫓아내지 않음으로써,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유지함으로써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또한 그것이 해체되지 않는 선에서 가족 공동체 내의 각자의 위치를 최대한 유동적으로 구성할 수 있어야 한다. 아버지가 절대로 가족을 대표해서는 안 된다는 법은 없지만, 적어도 ‘항상’ 그 자리에 있게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나머지 가족구성원은 물론 가부장적 아버지 그 자신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그도 언젠가는 은퇴할 것이고, 그와 동시에 그가 공적 영역에서 행사하던 영향력은 급감할 것이며, 그는 더 이상 가족과 사회의 경계에 머무를 힘을 잃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일평생을 그 자리에만 머물러온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새로운 자리를 찾아내지 못한다. 경계에서 스스로 버틸 힘을 잃은 그는 가족에게도 사회에게도 외부인으로 취급된다. 우리는 가부장적 아버지가 가족들을 두렵게 하면서도 그러한 자리가 아니면 자신이 설 곳이 없다는 두려움을 스스로도 품고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물론 이건 결코 쉽지 않은 문제이다. 왜냐하면 가족은 현존하는 모든 공동체 중 그 구성원들이 가장 견고하고 보수적으로 자기 위치를 고수하려하는 공동체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우리는 유동적인 가족 관계를 구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시도해야 할 당위를 얻는다. 이를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오이대왕』은 아이들을 위한 동화임에도 가부장적 아버지의 문제를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는 텍스트이다.

 

3.   

하지만 나는 『오이대왕』을 가지고 수업하면서 아이들과 이러한 이야기들을 나누지 못했다. 아이들이 책을 읽어오지 않아서? 아님, 아이들이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이야기여서? 둘 다 아니었다. 한때 아버지라는 이름이 갖는 일반적인 상象이었던 볼프강네 아버지의 모습, 권위적이고 가부장적 아버지의 모습이 아이들에겐 더 이상 일반적이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녀석은 자기 친구들의 아버지 중에도 볼프강 아버지 같은 사람이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어떤 녀석은 자신의 아버지는 이렇지 않다며 낯설어했고, 또 몇몇은 자신들의 아버지를 무어라 표현해야 할지 알맞은 말을 끝내 찾아내지 못했다.

위에서 나는 가부장적 아버지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선 그의 자리 -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경계 - 가 보다 유동적으로 변화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는데, 한편으로 이미 그것은 시대의 변화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의 아빠는 두렵고 나의 비리가 들키면 안 되는 존재입니다. 아빠에게 집은 진정한 휴식처이지만 다른 가족원들에게는 휴식처가 아닙니다. 아버지만을 위한 집. 이것이 작가가 글을 쓰던 시대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시대가 많이 흐른 지금은 어떤가요?”(도희의 감상문 중)

 

예를 들어 이미 많은 가정의 아버지들이 과거에 비해 길어진 노동 시간 때문에 더 이상 ‘집안의 대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 가혹한 현대 신자유주의 경제체제가 과거와 같은 수준의 노동으로는 가족구성원들을 부양할 수 없는 조건을 만들어 놓았기에 그들의 삶의 대부분을 직장에 투자해야한다. 그들에게는 여러 공적인 자리에서 가족들을 대표할 시간도, 다른 가족들을 일상을 통제할 시간도 없다. 이와 같은 아버지들은 ‘두렵고 낯선’ 가부장적 아버지 대신 ‘단지 낯선’ 부재자로서 집안에 존재한다. 같은 이유에서 어머니들이 공적인 자리에서 집안의 대표 역할을 맡게 되는 경우도 늘었고, (가령 학부모로서) 그 때문에 과거보다 더욱 강하게 자녀들에게의 통제력을 행사하는 일도 왕왕 있다. 또 남성 한 명의 노동만으로는 도저히 집안의 경제적 필요를 감당할 수 없기에 맞벌이 부부가 계속해서 늘고, 나아가 아이를 낳아 기르는 케이스 자체도 줄어들고 있다. 즉 한 명의 남성 가부장 대표와 나머지 피대표자들로 이루어지는 핵가족 체제 자체는 이미 붕괴 가도에 들어선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오직 가부장적 아버지가 사라져간다는 그 결과만으로 과연 모든 문제의 해결을 의미하는가? 아버지에 대하여 할 말을 찾지 못하던 녀석들의 침묵이 그 승리의 증거인가? 아버지는 가부장에서 부재자가 되었을 뿐 여전히 집안에 홀로 동떨어진 존재로 남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 때 어머니는 또 아이들과 어떤 관계를 맺게 되는가? 전통적 핵가족 체제가 아닌, 수많은 새로운 형태의 가족들 속에서는 또 어떤 관계가 만들어질 것인가?


가부장적 아버지는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의 핵심, 악의 축이 아니라 발생할 수 있는 수많은 문제들 중 하나일 뿐이다. 확실히 말해 어떤 형태의 가족이건 간에 그 나름의 문제는 계속해서 발생할 것이고,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일도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여전히 가족이라는 이름에서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내야 하며, 그에 따라 가능한 유동적인 가족 관계를 구축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대답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시간에 맡기는 것은 문제의 방치일 뿐이다. 우리는 그 근거를 다음 책에서 어머니들의 이야기를 통해 알아볼 것이다.


글_차명식(문탁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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