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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정치1/몸과정치2

인공인간으로서의 주권 - 下

by 북드라망 2018. 12. 20.

인공인간으로서의 주권 - 下

 


주권자는 공공의 정신으로서

국가의 원기 및 활동이 이로써 위탁[托]되는 바로서

 그 위탁을 잃게 되면 국인(國人)은 그 지배를 받지 않을 수 있어

 흡사 정신을 이탈[脫離]한 사체[死屍]와 같게 된다.

─불파사(拂波士), 「主權論」(1895)

 

 

사상의 수용과 ‘신체관’

그렇다면 여기서 바디폴리틱의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는 단지 번역자들의 의도 속에서 홉스를 의도적으로 왜곡, 수용한 것이라고 평가하는 것으로 그칠 수 있을까? 홉스의 생각은 당시 왕당파와 의회파 모두에게 비판을 받을 만큼 그를 어떤 식으로 해석할 것인가는 논쟁이 있어왔다. 이러한 난점은 홉스가 리바이어던이라는 인공 신체로서의 국가를 만들 때 이 ‘신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파악하기 쉽지 않다는 데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것은 홉스가 생각했던 신체상과 근대 일본에서 이를 번역하면서 생각하고 있었던 신체상과의 차이 바로 그것일지 모른다.



다카하시는 문부성 역 주권론에 대해 리바이어던 제1부인 인간론을 생략함으로써 원서의 논리구조, 즉 자연권을 관철하기 위한 주권의 절대성이라는 논리구조를 잃어버리고 주권의 절대성만을 내걸어 인간의 자연권을 말살하려는 것이 되었다고 평가한다. 이는 문부성 번역본이 리바이어던의 이론체계의 전제를 삭제해 버리고 결론만을 추출해 번역했기 때문이었다. 역자들이 1부를 생략한 의도에 대해서 알 수는 없지만 1부 인간론이 홉스의 정치사상을 이해시키기 위해 불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했으리라 보인다. 이로써 홉스 사상의 기저를 이루는 신체관 역시 사상되어 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앞서 다루었듯이 홉스 사상에서 인간론은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그의 독특한 바디폴리틱 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체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다.

   

그렇다면 홉스는 왜 하필 인공인간으로서 리바이어던을 구상했을까. 여기서 우리는 홉스가 국가의 각 부분을 ‘자동장치’로서의 신체에 대응시키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기계론적 성격에 일찍이 주목한 이는 칼 슈미트였다. 그는 홉스의 리바이어던에는 세 가지 관념이 점철되어 있다고 보았다. 첫째 리바이어던이라는 ‘신화적 형상’, 둘째 주권적 인격으로서 ‘법적 계약론’, 셋째 ‘영혼을 가진 기계’라는 관념이다. 그런데 슈미트는 성경 속에 나오는 리바이어던의 신화적 이미지를 오히려 별 의미없는 ‘문학적 착상’에 불과한 것으로 평가한다. 『리바이어던』 안에 리바이어던이라는 비유는 정작 세 번밖에 나오지 않으며, 그것도 별 설명 없이 언급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작 주목해야 할 것은 리바이어던이라는 신화적 비유가 아니라 리바이어던이 기계로서의 인공인간이라는 점에 있다. 

하비적 신체가 빠진 홉스

이러한 기계로서의 인공인간, 즉 국가의 성격은 당시 홉스와 교우 관계를 맺고 있던 의학자 윌리엄 하비의 사상과의 비교를 통해서 더 분명히 나타난다. 하비가 주장한 혈액순환설은 단순히 의학상의 새로운 발견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심장을 통해 중심과 주변의 관계를 사유하는 것은 하비 이전에 중세 의학사를 평정했던 갈렌의 신체관 속에서도 등장하는 것이었다. 하비 이론의 특징은 단순히 심장이 몸의 중심에 있다는 사유라기보다, 이 심장이 자동적=기계적 순환체계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 있다. 따라서 하비가 군주를 심장에 비유할 때 이는 모든 운동의 근원으로서 심장과 군주를 설정한 것 이상의 가치를 갖는다. 근대적인 의미에서 보자면 이제 주권은 군주가 소여적으로 갖고 있던 것이 아니라 기계로서의 인공인간을 만들어냄으로서만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 때 기계로서의 인공인간은 ‘순환적’이고 ‘자동적’인 메커니즘 속에서 작동한다.

그러나 이러한 홉스의 철학이 근대 일본에서 수용되었을 때, 그들 눈에 들어왔던 것은 홉스가 말하는 주권의 분리불가능성이었다. 홉스가 논하는 정치신체의 순환성이나 자동성, 기계적 성격으로서의 신체, 인격과 사람의 구별, 혼과 머리의 구별 등은 부차적으로 여겨졌을지 모른다. 역자들의 의도는 정확히 자신의 의도에 부합한 논의들에 집중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주권이 불가분적이라는 것은 홉스 사유의 핵심이며 이것이 역자들이 홉스에게 주목한 이유였다. 그러나 이를 단순히 홉스가 절대군주제를 옹호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석할 수는 없다. 그가 귀족제나 민주제 하에서도 주권은 나뉘어지는 것이 아님을 설명하는 것은 이 때문이었다. 오히려 주권이란 나뉠 수 없다는 것은 새로운 인격을 만드는 과정에서 하나로 통합하는 힘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이처럼 홉스에게서 보이는 이중적 성격, 즉 대표적(representational)인 동시에 절대주의적(absolutist) 성격은 한 축을 잃어버린 채 근대 일본에서 수용된다. 이는 슈미트가 강조한 홉스의 자유주의적 성격이 탈각되어 버림을 의미했다.

그런데 문부성이 번역한 책 중에 홉스의 『리바이어던』 말고 프란츠(Konstantin Franz)의 『국가생리학(Vorschule zur Physiologie der Staaten)』이 있었다. 문부성은 『주권론』을 번역한 다음 해인 1884년 이 책을 번역 간행하였는데, 이때 원서의 순서와 달리해 제1편에 국권을 설명하는 장을 위치시킨다. 이는 역자의 의도가 프란츠의 논의를 통해 국권을 강화하기 위한 것임을 보여준다. 프란츠는 민약설을 부정하고 민권주의를 철학자의 몽상이라 폄하, 자유설을 ‘정신의 전염병’이라 간주한 인물이었다. 『국가생리학』 역시 1장 주권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주권의 분리불가능성을 이야기한다.

 

무릇 주권은 원래 유일해서, 분할할 수 없는 것이라면, 일국가 내에서 여럿의 권이 있어 서로 불기독립할 수 없다. 제권은 반드시 하나로 귀합(歸合)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동물의 체내에 생기(生氣)는 원래 유일한 것이라고 해도 신경·혈맥 등과 같이 여러 기관 내에 분파(分派)해 각각 그 활동을 발하는 것과 같이 무릇 국가의 사무에 속하는 수많은 직분도 또한 각각 특별한 원칙에 의거해 각각 일파의 권력을 갖는다. 이로 말미암아 그 직분에 고유한 바의 활동을 하지 않을 수 없다.

─仏郎都, 文部省翻訳局 訳, 『国家生理学』(東京: 文部省翻訳局, 1884), p. 1

여기에서도 홉스의 논의처럼 주권의 분리불가능성이 강조된다. 그리고 이때 역시 신체의 유비가 등장한다. 동물의 체내에 생기가 유일해도 신경, 혈맥을 통해 여러 기관으로 옮겨가 활동하는 것처럼 국가 역시 사무에 속하는 직분이 있지만 이는 주권의 유일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처럼 주권논쟁에서 핵심은 ‘주권의 소재’로 이를 신체의 은유를 통해 나타내고 있다. 문부성의 역점은 위에서 보는 바대로 주권의 분할불가능성으로, 이는 체내에 유일한 생기가 신경과 혈맥을 통해 온몸을 도는 것과 마찬가지로 주권은 여럿으로 나뉠 수 없이 하나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데, 이들이 정치체의 각 기관에 전달되어 국가사무를 행할 수 있는 권력의 근원이 된다.

메이지 천황



이는 앞서 살펴본 루소나 스펜서를 가지고 온 민권파들의 예와는 분명 대조적이다. 민권파들은 천황의 권한을 제어하고 국회설립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천황을 머리에, 국회를 심장에 비유한다. 그리고 심장의 역할을 강조하며 주권의 소재가 단순히 머리에 있지 않음을 지적한다. 이처럼 주권론 논쟁 속에서 메이지 지식인들은 각각 정치체를 신체에 비유함으로써 주권을 상상했고, 이 때 각각의 신체상은 그들이 원하는 주권의 상에 따라 다르게 그려졌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 홉스는 단순히 지배하는 자로서 상정되는 머리만을 강조한 사상가로 이해된다. 그러나 홉스가 원래 의도했던 바는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신체 비유를 통해 법인격으로서 주권을 상정하기 위한 것이었던 반면 그것이 번역되어 유통되는 순간 기존의 천황 일인에게 절대적 권력을 부여하는 담론으로 탈바꿈되었다. 이는 홉스의 논의를 절반밖에 이해하지 못한 것이었다. 홉스가 신체유비에서 의도한 바를 현재의 군주에게 권력을 부여한다고 읽어낼 수도 있지만, 개개인이 결합해 전체로서 새로운 법인격을 만들어 내는 것이야말로 홉스의 의도였다. 홉스가 인공적인 인격으로서 리바이어던을 창조한 데는 이러한 기계론적, 순환론적 신체관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홉스의 번역자들에게 실제 인물에게 권력을 위임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은 홉스의 철학의 핵심적 기반이었던 기계적 사유가 이해에서 빠져있는 점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홉스에게 주권의 도출이 신체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면 이 과정에 대한 이해 없이 군주의 권한을 강조한 결론만을 가져옴으로써 근대 동아시아에서 주권론의 어긋남이 발생했다.

가면(persona)과 인격(person)

 

결국 가면(persona)을 씀(재현, 대리의 과정)으로써 정치적으로 인격(person)이 부여된다는 것이 홉스가 말한 페르소나의 의미였다. 근대 정치에서 인격을 가짐으로써 대표될 수 있다는 이러한 발상은 결국 머리를 통해서만, 머리와 신체 전체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대표성을 부여받을 때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있다는 논리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홉스의 신체에서 머리와 혼이 구분됨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전쟁이 벌어져(내전이든 외국과의 전쟁이든) 적이 최종 승리한 경우, 즉 코먼웰스의 군대가 더 이상 전선을 유지할 수 없게 되어 충성을 바치는 백성들을 더 이상 보호할 수 없게 된 경우, 코먼웰스는 해체되고(dissolved),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의 분별이 가르치는 바에 따라 자기를 보호할 자유를 얻게 된다. 주권자(the Soveraign)는 코먼웰스에 생명과 운동을 부여하는 공공의 혼(publique Soule)인데, 이 혼이 사라지고 나면, 구성원들은 더 이상 그것의 지배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람의 몸에서 혼이 떠나고 나면 (혼이 비록 불멸이라 하여도) 시신이 더 이상 혼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과 같다.

─Hobbes(1996), p. 230

홉스가 코먼웰스의 해체를 이야기하며 혼에 대한 강조를 언급하는 부분이다. 주권자는 코먼웰스에 생명과 운동을 부여하는 ‘공공의 혼’이다. 사람의 몸에서 혼이 떠나고 나면 몸뚱아리는 더 이상 혼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처럼, 공공의 혼인 주권자가 사라지면 구성원들이 그것의 지배를 받지 않게 되는 상태로 돌아가게 된다. 혼은 단순히 어떤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 신체를 하나로 만들어내는 역할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혼은 떨어져 있는 각자를 하나의 신체로 결합하게 해주는 것이며, 이 혼이 사라지게 되면 다시 각각의 자연상태로 떨어져나갈 수밖에 없다. 이 논리는 번역본에서도 유사하게 전개되고 있다.

내란이 일어나거나 또는 외환이 있어 결국 적군에게 패하게[摧敗] 되면, 국가의 세력은 그 땅을 지킬 수 없게 되어 근왕(勤王)의 민지(民志)도 떨칠[振起] 수 없게 된다. 이에 이르면 국가는 이미 붕괴[壞崩]한다. 사람들은 오직 각자 하고자 하는 바의 방법에 의해 스스로를 보호해야 한다. 왜냐하면 주권자는 공공의 정신으로서 국가의 원기 및 활동이 이로써 위탁[托]되는 바로서 그 위탁을 잃게 되면 국인(國人)은 그 지배를 받지 않을 수 있어 흡사 정신을 이탈[脫離]한 사체[死屍]와 같게 된다.

─拂波士(1967), p. 272


​주권자는 ‘공공의 정신’으로서 국가의 ‘원기’ 및 ‘활동’을 관장하는 자로, 주권자가 사라지면 국인 역시 지배관계에서 벗어나는데 이는 정신이 떨어져나간 시체와 같은 것이라는 논리를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문부성 번역본에서도 코먼웰스의 혼인 ‘공공의 정신’에 대한 강조가 보이고 있다. 그러나 문부성의 번역본에서 홉스의 인격에 대한 논의는 사상된 채 주권의 일의성을 강조하며 곧바로 주권의 수직적 위계성과 주권의 단일성을 강조하는 의미로 넘어간다. 



이는 어쩌면 홉스가 말하는 혼과 머리에 대한 구분이 사라지기 때문일지 모른다. 홉스는 머리와 영혼을 구별하며, 신체를 만들어내는 것은 단일체, 단일 의지, 단일 행동을 할 수 있는 민중임을 강조한다. 이러한 홉스의 논리를 따르자면 리바이어던의 표지는 단순히 머리에 복종하는 신체를 의미하는 것을 넘어, 그 기계라는 몸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움직일 수 있도록 영혼을 구성하는 민중의 중요성 역시 간과될 수 없다. 그러나 근대 일본에서 홉스를 전유했을 때 이는 다시 통치의 기술적인 측면으로 한정된다. 어떻게 하면 천황의 통치가 견제받지 않을 수 있는가의 문제로 환원되는 것이다. 이는 국권론 대 민권론이라는 구도 속에서 주권을 의회에 넘겨줄 수 없다는 생각이 홉스를 이런 식으로 읽히게 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보다 더 근본적으로는 인격과 신체 사이의 문제를 이해하지 못한 측면이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이는 결국 신체관이 다른, 좀 더 넓게는 세계관이 다른 공간에서 사상의 전파와 수용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관한 문제이다. 즉 신체는 법적 개념에서 잘 나타나듯 인격의 대상이자 동시에 물질화된 사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신체 자체는 특정한 법적 자격인 인격과 완전히 동일시 될 수도 없으며 단순한 사물로 취급될 수도 없다는 점에서, 인격 내지 사물과 완전히 겹쳐지지 않는다. 

 

이는 정치체 논의와도 연결되는 지점이다. 서구의 신체관이 사물에서 인격화되는 과정이었다면 마찬가지로 서구의 근대정치란 정치체(Body Politic)에 인격을 부여하는 속에서 주권이 탄생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유틀이 존재하지 않던 근대 동아시아에서, 인격이 인물로 변하면서 괴물로서의 리바이어던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이미지로 주권을 이해하게 되었다. 물론 기계로서 순환하는 신체를 작동시키는 힘은 현실적으로 강력한 왕권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고 홉스 역시도 판단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는가는 전혀 새로운 논리에 기초한 것이었다. 이후 근대 동아시아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군주의 이미지로서 주권을 사유하게 된 데는 이러한 신체에 대한 이해의 차이가 있었을지 모른다.


글_김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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