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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청년니체

니체의 ‘아니오’ (3)

by 북드라망 2018. 12. 18.

니체의 ‘아니오’ (3)


  

운명은 두 손을 가지고 있다. 한 손에는 사건이 들려 있으며, 다른 한 손은 우리와 맞잡고 있다. 사건들은 자신의 인과에 따라 자신의 길을 펼치고, 우리 역시 우리 삶의 경로를 따라 걸어간다. 운명은 이런 사건과 우리 자신이 마주치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사건은 운명을 굴리고, 그렇게 다가온 운명의 색깔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다.

 

우리는 분명 닥쳐오는 운명을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다. 하지만 그 운명이 ‘어떤’ 운명인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니체는 행복에 대한 질문으로 운명의 이런 모습을 보여줬다. 그 자체로 행복한 사건은 없다, 오로지 우리 자신의 거울에 비친 사건의 얼굴에만 행복이 깃들여 있다, 라고.

 



우리는 운명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운명의 최종 결정자는 우리라고 할 수 있다. 운명의 얼굴에 표정을 선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운명에 대한 자유의 가능성 또한 여기에 있다. 운명의 표정을 바꿀 수 있다는 것, 다시 말해 우리 역시 운명에 어떤 힘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자유의 공간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유에 대한 니체의 이 기쁜 소식은 오래 가지 않는다. 니체는 행복한 사건에 대한 이 이야기를 끝내고는 곧 자유에 대한 나쁜 소식을 전한다. 그 소식은 기쁜 소식을 전해주었던 그것, 운명의 한 손을 우리가 잡고 있다는 그 사실로부터 나온다. 언제나 그렇듯 우리의 가능성이 우리의 한계가 되는 것이다.

  


나를 막는 것은 바로 나다. 

 

하나의 운명을 ‘행복한’ 운명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의 거울이라면, 그 거울은 ‘불행한’ 운명을 만들기도 한다.

 

…우리의 기질은 단지 우리의 마음일 뿐이다. 그 마음에는 우리가 맺은 관계들과 사건들의 인상이 새겨져 있다. 무엇이 그토록 많은 강한 자들의 영혼을 평범한 것으로 끌어내리고, 관념들의 더 높은 곳으로의 비상을 가로막는가? 운명적으로 주어진 두개골과 척추의 구조, 부모님들의 지위와 본성,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주변과의 관계들, 환경의 통속성, 그리고 심지어 고향의 단조로움까지. 우리는 이런 것들에 영향을 받아왔다. 대항할 힘도 가지지 못한 채, 심지어는 우리가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말이다. 외부적인 인상들을 무의식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자신의 독립을 포기한다는 것은 뼈아픈 일이다. 습관의 힘에 의해 영혼의 잠재력이 억눌리고 자신의 의지에 반해서 영혼 안에 있는 변이의 씨앗을 묻어 버린다.  (<운명과 역사> 중)

  

니체는 단호하게 말한다. 무엇이 우리의 비상을, 우리의 자유를 가로막는가? 그것은 우리 자신이다. 인간이기에 가질 수밖에 없는 몸의 구조에서부터 자라온 환경과 맺어온 관계, 그리고 지금까지 겪어온 모든 사건들. 우리는 그 모든 것들에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 채 그것들을 받아들인다. 그렇게 나의 습관이라는 것이 만들어지고, 나의 삶의 리듬이 형성된다. 무의식적으로 수용한 모든 외부적 인상들, 그것들로 이루어진 것이 바로 나다. 

 

그렇기에 내 거울은 순수하지 않다. 그 거울은 내가 태어나고 자라온 시간들 속에서 만들어진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만든 거울을 가지고 삶을 시작하지 않는다. 내 것이라고 여겨지는 대부분의 기질은 인간이기에, 나의 부모에게서 태어났기에, 이 사회에서 살아왔기에 갖게 된 것들이다. 요컨대 나의 거울이란 타자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 그렇게 타자들의 거울로 나의 운명을 맞이한다는 것. 이것이 우리 거울의 진실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우리 외부에 존재하는 그 타자들에 의해 억압받는다고는 할 수 없다. 억압이라는 말에는 그 아래 순수한 내가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하지만 타자의 흔적을 모두 지운다고 해서 나만의 순수한 거울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 거울은 내 삶의 경로를 따라 오랜 시간 정성스레 만들어져서 내 안에 자리 잡는다. 그것 말고 내 것이라고 할 것은 없다. 타자의 거울은 나의 거울과 구분되지 않으며, 타자의 손때를 걷어낸 자리에 남아 있을 나만의 거울이란 없다.

 


 

그렇기에 니체는 내 외부의 어떤 것이 나를 가로막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외부는 이미 내부다. 만약 이 사회에 나를 방해하는 장애물이 있다면, 그것은 저 밖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 안에 있다. 이를테면 우리 사회가 돈밖에 몰라서 문제라는 생각을 한다 치자. 그때 이런 사회와 싸우고 싶다면, 우리는 우선 내 안에 자리한 돈에 대한 욕망과 싸워야 한다. 그렇지 않는 한, 사회가 돈밖에 몰라서 문제라는 그 얘기는 지금 내가 돈을 못 벌어서 불만이라는 얘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여 니체의 운명과의 싸움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다. 우리를 옴짝달싹 못하게 묶어세우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우리 부자유의 뿌리에 우리 자신이 있다는 것. 니체는 이를 알았다. 그렇기에 그의 ‘아니오’는 저 밖의 하나의 종교로서 기독교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그를 키운 팔 할은 기독교였다. 그가 가진 욕망과 사유, 삶의 리듬 그 어느 것 하나 기독교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니체, 그 자신이 기독교였다. 그렇기에 그의 ‘아니오’는 자기 자신을 향한 ‘아니오’였다.

  


자유, 자기 극복의 힘

 

니체의 운명에 대한 ‘아니오’는 자유의 모색이다. 그리고 그 ‘아니오’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향한다. 그렇기에 운명으로부터의 자유란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자유다. 니체는 이것을 훗날 “자기 극복”이라 부른다. 자유는 외부 세계의 무언가를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힘이라는 것. 자유 의지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런 자기 극복의 동력일 뿐, 이것과 저것 중 무언가를 선택하는 자유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니체의 이런 자유는 우리가 흔히 자유라고 믿고 있는 것들이 어떤 환상에 기대어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우리는 자유를 내 마음대로 하는 것과 곧잘 연결시킨다. 하지만 내 마음이란 것이 뭔가? 니체의 눈에 그것은 이미 이 세계의 욕망이고, 사유며, 리듬이다. 그래서 내 마음대로 한다는 것은 내가 부정하고픈 이 세계의 흐름에 그대로 포획되는 지름길이다.

 

이 세계가 요구하는 삶 말고 내 마음대로의 삶을 살고 싶다면, 삶에 대한 다른 상상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한, 내 마음대로의 상상력이란 이 세계의 지평 안에 있다. 우리는 우리 마음대로 상상하지 못한다. 그래서 사회적 요구들을 물리치며 내 마음대로의 행로를 걷는 것은 한 때의 방황이 되고, 결국 사회의 흐름에 안착하는 것이 성숙함이 된다. 내 마음대로 살기, 그것은 지금 자신이 가진 그 상상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에만 가능하다.

 

그러니 외부적 조건이나 제도가 내 마음대로 사는 자유를 가로막고 있다는 생각 역시 환상이다. 지금 우리 사회를 보자. 머리 길이, 치마 길이를 단속하던 유신 정권도, 최루탄과 곤봉으로 집회현장을 들이닥치던 군사 정권도 없다. 건전가요가 반드시 실려야 했던 음반은 사라진 지 오래고, 지하실이나 후미진 곳에 금서들을 진열한 대학가 서점들은 그 자취를 감췄다. 그 옛날 보릿고개는 말 그대로 옛말이 되었고,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속담을 입에 올렸다가는 욕 들어먹기 십상이다. 그래서? 그래서 우리는 더 자유롭게 내 마음대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정치적 조건도, 경제적 부도, 사회적 복지도 전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좋아졌지만 우리는 어찌된 일인지 삶이 더 팍팍하다고, 부자유스럽다고 느낀다. 어쩌면 우리는 그 이유를 신자유주의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라는 조건이 바뀌면 거기에 자유로운 삶이 펼쳐질까. 이쯤에서 제도와 조건이 우리를 자유롭게 해줄 거라는 믿음을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 것은 아닐까.

  


자유로운 자만이 자유로울 수 있다

 

한 때 헬조선을 탈출하자는 말이 유행이었다. 청년들은 안정된 직장을, 부모들은 좋은 교육환경을 찾아 떠나고 싶어 했다. 하지만 탈출한 그곳에 자유로운 삶이 펼쳐질지는 미지수다. 물론 좀 더 안정적으로 돈을 벌고, 좀 더 편하게 대학에 갈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편하게’가, 단지 불안감을 줄이는 것이 자유는 아니지 않은가. 여전히 돈이 삶의 근본에 자리하고, 공부가 돈을 불러들이는 스펙이 되는 한, 그렇게 화폐가 내 삶을 굴리는 동력이 되는 한, 나는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닌, 화폐의 삶을 살아주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화폐에 대한 우리의 욕망이 삶을 움직인다면, 헬조선의 안과 밖은 힘겨운 노예냐, 편안한 노예냐의 차이만이 있을 수밖에 없다.

 



돈이 풍족하게 많다고 해서, 또는 권력을 손에 쥐었다고 해서 문제는 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얼마 전 충격적인 사건 두 개를 만났다. 하나는 대한민국 최고 재벌의 이야기고, 다른 하나는 대한민국 최고 권력자의 이야기다. 그 이야기들 속에서 최고 재벌이 맘껏 펼치는 자유란 성매매 여성들을 집으로 불러들이는 것이었고, 최고 권력자의 경우에는 자기 방에 틀어박혀 미모를 가꾸는 일이었다. 이 어디에 자유가 있는가. 우리는 분명히 보았다. 돈도, 권력도, 그 자체로는 결코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조건이나 제도는 분명 자유의 중요한 요소다. 극도로 억압적인 제도나 극도의 빈곤 상태는 자유를 침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제도나 조건이 없다는 것이 곧 자유를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 자유를 위해서 외부의 장애물이 없어지는 것이 필요할 수는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자유의 충분조건이 될 수 없다. 아무리 좋은 제도나 조건이 마련된다 해도, 그 자체로는 삶의 자유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자유는 오직 자유로울 수 있는 자에게만 온다!

 

니체는 바로 이 ‘자유로운 자’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알았다. 자신이 싸워야 할 것은 외부가 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이것은 그리 유쾌한 소식은 아니다. 탓할 수 있는 외부는 없으며, 나를 옥죄며 끌어내리고 있는 것이 나 자신이기에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나쁜 소식인 것만도 아니다. 우린 더 이상 잡히지도 않는 외부의 적에 쫄거나, 그것을 찾아 떠돌 필요가 없다. 싸워야 할 것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나라는 구체적인 존재이고, 그렇기에 원하기만 한다면 누구든 지금 당장 자유의 싸움을 시작할 수 있다. 그렇게 자신이 가진 하나의 습속과의 싸움에서 하나의 자유가 열릴 것이다.

 

니체의 ‘아니오’는 저 밖에서 닥쳐오는 운명을 향하지 않는다. 운명은 무엇보다 내 안으로부터 출현한다. 하여 니체의 자유는 자기 자신을 직시하고,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자기 극복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니체는 말한다. 나로부터 등 돌릴 수 있는 자만이 자신만의 자유로운 삶을 열수 있다고. 내 마음대로 사는 자유는 나로부터 떠나는 데서 시작된다는 역설! 이 역설의 ‘아니오’가 니체의 자유가 가진 첫 번째 모습이다. 


글_신근영(남산강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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