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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CDLP) 스토리

닉 드레이크 『Pink Moon』 - 이토록 춥고 순수한

by 북드라망 2018. 12. 14.

닉 드레이크 『Pink Moon』 

- 이토록 춥고 순수한



어떤 책을 좋아하느냐 라고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면, '첫번째로는 두꺼운 책이요, 두번째로는 얇은 책입니다'라고 답하겠다. 어중간하게 두껍거나 적당히 얇은 책(그러니까 대부분의 책)이 나는 '싫다'까지는 아니지만 조금 꺼려진다. 책이란 모름지기 두꺼워서 다 읽고 난 후에 보람을 느끼도록 하거나, 얇아서 읽기 전에 편안한 기분을 주어야 '읽을 맛'이 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성향은 음악에도 고스란히 적용되는데, 첫째로는 대곡이 좋고 두번째로는 소품들이 좋다. 교향곡은 역시 CD 두장 분량의 말러의 교향곡들이고, 소품은 쇼팽의 곡들만 한 게 없다. 닉 드레이크로 말할 것 같으면, 음……, 포크계의 쇼팽이라고 나는 느꼈다. (약간 어거지스럽지만) 처음에 딱 들었을 때, '와 이거 무슨 쇼팽도 아니고……' 싶었던 것은 사실이니까 그렇다고 치자. (다시 한번 어거지스럽지만) 그만큼 닉 드레이크의 곡들은 짧고(『Pink Moon』의 전체 러닝타임이 28분밖에 안 된다), 기타 한대 혹은 거기에 현악기 한대 추가될 정도의 소편성이며, 앨범을 통째로 우중충하면서도 맑고 고운 (이른바) 감성에 절여놓은 듯 하다. 그러니까 닉 드레이크는 어쿠스틱 기타를 든 쇼팽이라나 뭐라나. 다만, 다른 점은 닉 드레이크는 생전에 쇼팽만큼 유명하지가 않았다. (항우울증 과다 복용으로) 죽고나서 10여년쯤 지난 후에야 유명해졌다. 요즘말로 '슈가맨'인 셈. 이 추운 계절, 닉 드레이크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아, 그렇지만 역시 닉 드레이크는 이제 어쩐지 슬금슬금 피하고 싶은 이름이다. (과장 좀 보태서) '다니는 골목마다 눈물을 뿌리고 다녔던' 그 춥고 우울했던 2006년 겨울이 보낸고 나는 내 영혼을 8비트 로큰롤과 모차르트의 장조곡들에 팔았다. 그러니까 명랑과 기쁨은 드러내야 제 맛이고, 비애와 우수는 숨겨야 제 맛이라는 것을 알 정도의 나이가 된 것이다. 


물론, 음악에는 죄가 없다. 정규음반 석장을 석장을 발표하는 동안 내내 실패만 거듭하다가, 결국엔 우울증에 시달리고, 그걸 고치려고 복용한 항우울제 때문에 고작 스물여섯 나이에 죽어버린 닉 드레이크에게 무슨 죄가 있겠나. 앨범 전체에 감도는 맑고, 투명한 비애의 감성은 너무나 아름답다. 그러니까 이렇게까지 '순수한' 느낌을 주는 음악을 만들어 부르는 사람이 오래 사는 것은 어쩌면 거짓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니까 나는 적당히 거짓말도 하고 넉살도 부리고, 알면서 뭉개줄 아는, 대략 그런 어른이 된 순간(첫 직장에서 '이제 일 좀 하네'하는 평가를 듣게 된 순간)부터, 그래 그러니까 그때부터 8비트 로큰롤를 리스너 인생의 기둥으로 삼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변화가 씁쓸하다거나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니다. '남'들하고 대충이나마 어울리면서 살 수 있게 된 것, '배려'라는 게 대충 무엇인지 알게 된 것이 나는 정말로 감사하다. 

 


영영 그런 걸 못하는 사람, 어쩌면 타고난 것을 계속 갈고 닦으면서 살다가 결국엔 감당하지 못해서 죽고 마는 사람들이 예술을 하는 것인가 싶기도 하지만, 그것도 어쩌면 '예술직업군'에 덧씌운 판타지일 수도 있겠다. 그러다가 요절하는 예술가도 있고, 천변만변하며 살아가는 예술가도 있겠지…….(롤링스톤즈도 담배 끊고 조깅하는 세상이다)


(매년 슬금슬금 피하다가) 오래 간만에 꺼내서 들어보니, 춥다. 안 그대로 바람이 세고 차가워서 얼굴이 시린 마당에, 추위가 귓 속까지 파고든다. 나이를 먹는 동안 몸에 붙은 지방들이 마음에 걸리기까지 한다. 뭐라고 해야 할까, 배 나온 아저씨가 되어서 이런 음악을 듣는 것이 어쩐지 음악에 누가 되는 느낌이랄까. 추운 날씨를 더 춥게 보내게 하는 그 감각 때문에 그렇게 슬금슬금 피했는지도 모를일이다. 


속지를 꺼내어 사진을 찍으려고 하는데, 모조리 엉겨 붙어있다. 도무지 모를 일이다. CD나 LP를 관리하는 나의 습관은 내가 보기에도 유난스럽다 싶을 정도인데 어쩌다 저렇게 된 일인지……. 얼마나 유난스러운가 하면, 내 손에 들어온 CD의 속지는 대충 두 번에서 세 번 정도만 케이스 바깥에 나올 수 있다. 처음 구입해서 들을 때 한 번, 그로부터 2~3년 쯤 지나서 한 번, 블로그에 글 쓸 때 한 번 정도? 나 말고 다른 사람이 꺼내거나 하면, 말은 하지 않지만 조마조마하다.(어릴 때는 못 꺼내게 하거나, 조심하라고 당부까지 했다.) 부클릿 종이가 구겨질 때는 팔이 비틀린 것처럼 마음이 아프다.(두꺼운 책 사이에 껴놓고 펴려고 한 적도 있다.)




그런데 이 앨범의 속지는 어째서 이렇게 된 것일까? 불현듯 한가지 가설이 떠오른다. '눈물 뿌리고 다니던 시절에 콧물 묻은 손으로 만지고, 마르기 전에 케이스에 넣어버린 것이로구나!'(어이 그럴리가 없잖아!) 분명히 처음에는 가사까지 보면서 '이게 무슨 말이야' 했던 기억이 있는 걸 보면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다. 와중에 참 다행스럽다고 느끼는 것이 있다. 이제는 저렇게 엉겨붙은 속지를 보아도 조마조마하거나 분통이 터지거나, '한 장 더 살까…' 하는 식의 유난스러운 기분이 들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아주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아니고 '헐, 이거 왜 이래' 정도의 기분은 든다. 적당하다! 한껏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런 기분이 드는 걸 보니 아직 어리다는 생각도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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