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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차명식의 책 읽습니다

독립이라는 ‘자유’ 라헬 하우스파터, 『나는 부모와 이혼했다』

by 북드라망 2018. 12. 4.

독립이라는 ‘자유’

라헬 하우스파터, 『나는 부모와 이혼했다』



필자의 말

대학교를 졸업한 뒤 2015년 겨울부터 올해 봄까지 중학교 아이들과 인문학을 공부했다. 2년간 함께했던 아이들을 보내고 나니 문득 그 시간들을 이대로 흘려보내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에 그 간의 수업들을 가지고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이 글은 나만의 글이 아니다. 나의 목소리와 더불어 아이들의 목소리 역시 읽는 이들에게 닿을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 글에 등장하는 아이들의 이름은 모두 가명을 사용하였습니다.   



0.    

여름이 왔고, 아이들과의 책읽기도 새로운 시즌을 맞이했다.

시즌이 바뀐 뒤의 첫 시간에는 으레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을 갖는다. 그러나 자기소개를 시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이전부터 있던 아이들은 다 아는 사람들에게 굳이 자기를 소개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새로 온 아이들은 낯을 가리느라 제 이야기를 쉽사리 꺼내지 못한다. 나는 일종의 타협점으로써 아이들에게 딱 세 가지만 말해볼 것을 제안했다. 이름, 나이, 여기에 오게 된 이유. 이렇게 말해야 할 것들을 정해주면 아이들은 어렵잖게 대답한다. 그리고 처음 오는 아이들이 ‘여기에 오게 된 이유’는 대개 다들 같다.


“엄마가 가보라고 해서요.”

“저 몰래 엄마가 신청했어요.”


가끔은 “아빠가…….” 도 있긴 하지만, 아무튼 자기 의지로 오는 아이들은 거의 없다. 별로 놀랍지는 않다. 중학생들이 자신의 의지로 어떤 일을 하려드는 경우도, 그것을 부모들이 허락하는 경우도 드문 일이니까.

그런 면에서, ‘집과 가족’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눈 여름 시즌에 아이들이 유독 ‘이 단어’에 매달린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독립.

 

 

1.

라헬 하우스파터의 『나는 부모와 이혼했다』는 아주 얇고 짧은 소설이다. 어느 날, 어린 주인공의 부모가 이혼하여 별거하게 되고 주인공은 어머니와 함께 살면서 격주 주말에 한 번씩만 아버지를 만나게 된다. 어머니는 밤마다 울며 괴로워하느라, 아버지는 새로운 여자를 만나느라 주인공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결국 주인공은 어머니가 더 이상 자신의 어머니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아버지도 더 이상 자신의 아버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우리 가족’은 이미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 역시 부모들과 ‘이혼’하기로 마음먹는다.




주인공은 더 이상 주말에 아버지를 만나러 가지 않는다. 어머니에게는 아버지에게 간다고 하고, 아버지에게는 어머니와 있겠다고 하면서 그 시간들을 할아버지가 남겨준 도심의 옥탑방에서 홀로 보낸다. 이미 오래 전부터 오직 주인공을 통해서만 서로에게 필요한 말을 전하던 부모들은 그 거짓말을 눈치 채지 못한다. 주인공은 혼자만의 시간 동안 새로운 사람들을 사귀고 사건들을 만나면서 부모님의 아들인 자신과는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한다. 하지만 결국 거짓말이 들통 나고 부모들은 배신감에 몸서리치며 주인공을 힐난한다. 그에 주인공은 그동안 자신이 느꼈던 감정들과 자신이 홀로 보낸 시간에 대해 부모들에게 찬찬히 설명하기 시작한다.

 

내가 이 책을 커리큘럼에 넣으면서 기대했던 역할은 일종의 ‘쉬어가는 시간’이었다. 더운 여름날 아이들이 짧은 소설을 가볍게 읽으면서 책읽기에 대한 집중력을 유지해줬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이들은 이 책에서 매우 깊은 인상을 받은 모양으로, ‘독립’이라는 주제에 대하여 제각기 할 말들을 쏟아냈다.  당연한 말이지만 ‘독립’은 녀석들에게 무엇보다도 ‘자유’를 의미했다.

 

“나는 평소 독립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독립을 하면 내가 무엇을 하든 간섭을 받지 않아도 된다 (...) 나에게는 5살 어린 여동생이 있다. 초등학생 특성상 만들기 활동이 많고, 우리 동생은 그것들을 다 모으는 성격이다. 매우 지저분하다. 나는 정말 인상 깊은 과학 실험기구들을 몇 개 빼고는 모두 버린다. 우리 엄마아빠는 전부 버리고 싶어 한다. 이런 차이 때문에 가끔 싸우게 되는데 혼자 살게 되면 내가 원하는 대로 맞출 수 있다.”

(선희의 『나는 부모와 이혼했다』 감상문 중에서 )


녀석들에게 있어 ‘독립’이 자유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부모로 대표되는 ‘집과 가족’이 구속이라는 뜻이리라. 여기에 구구절절 설명을 덧붙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린 시절한 번쯤 갖게 되는 의문들이 분명 있기 때문이다. 왜 부모님은 내가 하는 일에 사사건건 간섭하는 것인지. 왜 자꾸 내 의지를 무시하고 자기들 뜻대로 내 일을 결정하는 것인지 그러면서도 왜 나에게는 자기들에 대해 말할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인지. 내가 자기들 말을 들어주기만을 바라고, 내 말은 듣지 않는 것인지.


왜냐하면, 집안에서 아이들이란 보통 그런 존재로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미숙하고 서투르기에 알아야 할 것도 많지만 몰라도 되는 것도 많다. 그 알아야 할 것과 몰라도 되는 것의 기준, 말과 행동, 생각, 나아가 생활 전반에 걸쳐 부모들은 아이들의 모든 것에 참견하고 결정한다. 그리고 아이들은 생각하는 것이다. 이 집만, 집만 나가서 오직 나만의 쉼터를 가질 수만 있다면!

그리고 우리는 자연스레 묻게 되는 것이다.  가족에게서 독립하는 것, 그 자유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2.     

대개 안전은 구속, 자유는 위험과 한데 묶여 있다. 우리는 어딘가에 소속되어 일정한 책임을 짐으로써 안전을 보장받고, 자유란 그러한 책임으로부터 해방되는 대신 안전을 보장받을 수도 없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가족 또한 하나의 소속이다. 또한 가족은 현대 사회에서는 한 명의 개인에게 있어 가장 밀접하고 기본적인 단위의 소속이기도 하다. 그토록 자유를 갈망하는 아이들조차 한편으로는 독립이란 단어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건 그러한 까닭이리라. 홀로서기는 그동안 나를 보호해주던 그 모든 것, ‘안락한 나의 집Sweet home’을 뒤로 하고 떠나는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부모가 없으면 많은 것이 바뀔 것 같다. 일단 뒤에서 받쳐주던 지지대를 잃어버린 느낌과, 앞에서 두려움을 막아주는 무언가가 사라진 느낌일 것 같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유로운 느낌도 들 것 같다. 왜냐하면 나를 기다리는 사람도 없고, 나를 옥죄는 가족도 없고, 나를 구속하는 어떤 것도 없으니 말이다.”

(효준이의 『나는 부모와 이혼했다』 감상문 중에서)

 



집 밖으로 내딛는 그 한 걸음은 얼마나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지! 생각해보면 『나는 부모와 이혼했다』에 대해 말하는 아이들의 목소리에는 동경 비슷한 감정이 많이 묻어났다. 책의 주인공에게는 할아버지가 남겨준 자신만의 방이 있었고, 홀로 박물관이며 수영장을 찾아다닐 의지가 있었고, 낯선 할머니나 대학생 누나와 거리낌 없이 가까워질 수 있는 용기가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있었기에 부모에게 당당히 자신의 길을 걷겠노라 포부를 밝힐 수 있었다. 그에 비해 자신들은 집을 떠나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것을 자문할 때 녀석들의 표정에는 살짝 그늘이 드리웠다.


“<나는 부모와 이혼했다> 책의 아이가 부럽기도 했는데, 그 이유는 아이의 용기도 부러웠지만 무엇보다 아이 자신이 살 집이 이미 마련되어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정우의 『나는 부모와 이혼했다』 감상문 중에서)

 

어쩌면 누군가는 아이들의 이러한 모습, 부모로부터 해방되고 싶어 하면서도 두려움을 떨쳐내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기가 어렸을 때는 그렇지 않았다며 혀를 차거나 한숨을 내쉴지도 모르겠다. 그런 이에게 나는 집 밖의 세상이 과거에 비해 얼마나 더 낯설어졌는가를 말하고 싶다. 아이들의 하루는 대개 그 길이 정해져있다. 집을 나서서, 학교에 가고, 학원을 들러,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그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 중 아이들이 이름을 기억하는 어른들은 몇이나 될까? 가족 외에 아이들이 믿고 기댈 수 있는 어른들은 몇이나 될까? 돈 혹은 제도로 맺어진 책임과 의무 없이도 그 아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친구가 되어줄 어른들은 집 바깥 어디에 있는가?


타인은 이전보다 훨씬 더 두려운 존재가 되었다. 우리는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낯선 어른과 그들이 베푸는 낯선 친절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가르친다. 그는 동시에 집이라는 공간의 안전함과 가족이라는 방파제의 역할을 두드러지게 만든다. 그렇기에 아이들에게 독립은 자유, 정말로 낯설고 두려운 세상 속으로 스스로를 내던질 자유이며, 세상 그 누구보다도 가깝고 헌신적인 인간관계로부터 멀어지는 고독이기도 하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사실은, 이 낯선 세상에 유일한 방패처럼 말해지는 그 가족조차도 사실 아주 빠른 속도로 해체되고, 또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3.    

그 때 나는 아이들에게 바로 그 사실을 설명하느라 애쓰는 중이었다. 오늘날 독립이 왜 그렇게나 달콤하면서도 쉽지 않은 말이 되었는지를. 가족이 얼마나 우리들의 인간관계에 깊숙이 들어와 있고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를.      


“자, 상상해보자. 엄마와 함께 살지 않는 너희의 삶은 어떤 모습이지? 혹은, 아빠와 함께 살지 않는 너희의 삶은? 엄마와 아빠의 아들 혹은 딸이 아닌 너희는 어떤 모습일까?”   


아이들은 저마다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그 중 문득 한 명이 눈에 띄었다. 평소에는 좀처럼 책에 집중하지 못하던 아이였는데, 웬일인지 오늘따라 깊은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보였다. 나는 옳다구나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 애의 이름을 불렀다.     


“성민이, 넌 어떨 것 같애?”      


그 애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입을 열지는 않고 그저 눈만 깜박이면서.

그 순간 나는 무언가 실수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엇인지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기분이 들었다. 나는 한 번 더 같은 질문을 했고, 그 애는 그저 “그냥 그래요.”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비슷한 대답이었던 것 같다) 하고 대답을 했다. 그리고 나는 자연스럽게 그 순간을 넘겼다.

나중에 알기로, 그 아이의 집은 이혼가정이었다.

나는 뱃속이 싸늘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오늘날 이혼은 드문 일이 아니고, 이상하게 여기거나 지나치게 안타깝게 여길 필요도 없는 일이다. 그 아이가 자신의 삶을 불행하게 느끼는 것도 아니었다. 녀석은 책은 잘 안 읽어도 장난기가 많고 그를 숨기지도 않았다. 만일 나 역시 다른 경로로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그저 아, 그렇구나, 하고 평범하게 그 사실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때 나는 엄청나게 당황하고 말았다. 상황이 너무 절묘했던 탓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조금 다른 생각도 든다. 전통적인 핵가족의 이미지는 우리가 인지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 머릿속 깊은 곳에 여전히 강고하게 남아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그 때 나에게는 내 말을 그 아이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정확히는 ‘엄마 혹은 아빠와 함께 살지 않는 삶을 낯설게 여기고 상상해야 하는 것’으로 말하는 내가 그 아이에게 어떻게 느껴졌을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무심코 내뱉은 그 말이 나와 그 아이 사이에, 또 내 말을 듣고 그 ‘낯선 상황’을 상상하느라 애쓰던 다른 녀석들과 그 아이 사이에 벽을 놓아버린 게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다행히 그 이후로도 그 아이가 딱히 내게 거리를 둔다거나 수업에 나오지 않는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녀석은 여전히 책 읽는 걸 지겨워했고, 장난스런 말들을 툭툭 내뱉었으며, 수업 시간마다 크게 하품을 했다. 다만 여름 시즌을 마지막으로 그 아이는 더 이상 수업에 나오지 않게 되었다. 물론 그 뒤로도 그 애는 다른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종종 나와 마주치곤 했기 때문에 그 일로 인해 그만두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아님 그저 내가 그러길 바라는 것일지도 모르고.


확실한 건 그 일이 나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도록 만들었다는 점이다.

나는 이미 현대 사회의 다양한 가족 형태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감각의 차원에서는 여전히 그것을 낯설게 여기고 있었다. 우리 사회에서는 본인이 먼저 말을 꺼내지 않는 이상 남의 가족 사정에 대해 캐묻는 일이 드물고 그만큼 우리 주위에 엄마-아빠-아이가 아닌 다른 형태의 가족들이 수없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기 쉽다. 교육과 미디어는 또 어떤가. 학교와 각종 매체는 아주 무심하고 당연한 태도로 ‘엄마와 함께 해오는 무언가’, ‘아빠와 함께 해오는 무언가’를 아이들에게 건넨다. 아이들은 물론 ‘저는 엄마, 혹은 아빠랑 같이 안 사는데 어떻게 해요?’라고 묻지 못한다. 우리는 아이들로 하여금 낯선 세상을 두려워하고 가족에 의지하라 가르치면서, 그 가족의 모습 또한 지극히 제한된 형태로만 그려낸다. 물론 우리 자신 역시도 그러한 이미지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이제, 나와 마주하고 있는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에는 지금보다도 더욱 많은 형태의 가족들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이혼이 이미 특별한 일이 아니게 된 것처럼. 집 바깥의 세상은 더욱 낯설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가족은? 그 때도 여전히 가족은 유일한 방파제로서 남게 될까? 애초에 그 ‘가족’이,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가족과 같은 것일까? 그 때 아이들에게 있어 독립은 무엇이 될까? 그 자유와 두려움과 고독은 어디로 향할까?

나는 단지 상상만 해볼 뿐이다.


글_차명식(문탁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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