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신간]『청년, 니체를 만나다』 지은이 인터뷰

『청년, 니체를 만나다』 지은이 정건화 인터뷰

"아직 도래하지 않은 자기 자신을 긍정하자"

1. 선생님께서는 10대를 막 떠나보낸 직후, 니체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고, 첫만남에서 ‘끌림’을 느꼈다고 하셨습니다(철학자에게 ‘끌리는 일’이 가능하구나 싶었습니다^^). 이렇게 니체를 만나고 그 저작들을 읽으면서 선생님에게 생긴 가장 큰 변화라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저는 하기 싫은 게 많은 사람입니다. 니체를 처음 접하기 직전,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엔 더욱 그랬죠. 제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모든 것들이 참을 수 없었습니다. 저를 특정한 방식으로 살아가게끔 하는 모든 힘들이요. 자기계발을 비롯한 주류적 담론들은 말할 것도 없고, ‘사회적 척도를 따르지 말고 네 꿈을 쫓아라’, ‘너 자신을 기쁘게 하는 일을 해라’라고 말하는 제 주변의 ‘깨어 있는’(진보적인) 어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말들이 제게는 모두 ‘~ 해라’, ‘~해야 한다’라는 명령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졌어요. 제가 지겹도록 듣고 자라온 ‘너의 꿈’, ‘너의 삶’ 같은 말들이 가리키는 것은 결국 ‘다른 방식의 성공’과 ‘다른 방식의 성공한 삶’에 지나지 않으며, 너무나 아름다워 보이는 이런 말들은 사실 ‘그럴듯한’ 뭔가가 돼라는 명령을 감추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의 ‘하기 싫음’에 스스로를 맡겼습니다. 제 삶을 해야 하는 것들로 채우고 싶지 않아서 그 모든 명령 아닌 명령들을 거부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대학에도 가지 않고 취직할 생각도 하지 않고 즉흥적으로, 그때그때 하고픈 걸 하면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얼마간은 그 계획을 실행했어요. 여행도 다니고, 친구들과 밴드도 하고, 필요한 만큼씩 알바도 하고, 간간이 공부도 하고, 또 연애도 하면서 나름대로 즐겁게 스무 살 한 해를 보냈죠. 그런데 즉흥적인 삶이란 제가 상상했던 것과는 좀 달랐습니다. 규칙과 의무가 만들어내는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기만 하면 자유롭고 능동적인(주체적인?) 삶이 시작될 거라는 믿음이 사실은 커다란 착각이었던 것이지요. 즉흥적인 삶이란 그때그때의 자극에 복종하는 삶에 불과했습니다. SNS 중독과 밤과 낮이 바뀐 생활, 지독한 무기력증 ……. 즉흥적인 삶이 제게 남긴 것은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여러모로 즐겁기도 했지만, 도저히 이런 생활을 지속할 수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저 자신이 점점 더 무력해져 감을 느꼈기 때문이죠. 그러다 ‘혹시 나, 자유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스멀스멀 올라올 때쯤, 남산강학원의 청년 대중지성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고 거기서 처음으로 니체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다시 기회가 생겨 ‘규문’에서 니체전집 읽기 세미나를 진행하게 되었고, 지금도 세미나를 진행하며 계속해서 니체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처음 니체를 읽었을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비판을 하는 니체의 태도였습니다. 니체는 도덕을, 형이상학을, 인간적인 가치들을 더없이 날카롭게, 그리고 근본적으로 비판합니다. 그러나 예상 외로, 그의 과감한 비판에서 느껴지는 것은 비장함이나 사명감도, 분노나 증오도 아닌 명랑함과 쾌활함이었습니다. 니체의 비판은 제게 객관성과 중립성이라는 이름의 권위들로 무장한 재판관의 이미지가 아니라 자신이 소중히 여기던 모든 것들을 버리고 가볍게 떠나는 방랑자의 이미지를 연상케 했어요. 그리고 알게 된 것은, 니체의 비판은 단순히 틀렸다, 거짓이다, 나쁘다, 라고 무언가를 부정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니체에게 비판이란 사유를 낯설게 구성하고 ‘때 아닌’ 질문들을 던지는 일이었습니다. 그의 비판은 세계를 파괴하는 일인 동시에 세계를 출현시키는 일이었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떠나는 일인 동시에 스스로에 대한 새로운 긍정에 이르는 일이었죠. 저는 니체가 보여준 비판의 새로운 이미지에 어떤 ‘끌림’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인생 매뉴얼’에 따라 살고 싶지 않았고, 제게 부과된 모든 의무들과 명령들을 거부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상상할 수 있었던 것은 고작해야 그때그때 되는 대로 살아가는, 자유의 외피를 쓴 전적으로 수동적인 삶이었습니다. 그런 식의 부정과 거부는 지속될 수가 없었고, 결국 처음에 제가 거부하고자 했던 것(즉 일반적인 삶)으로 되돌아가는 것 외에 다른 출구를 만들어내지 못했죠. 니체를 읽으며 알게 된 것은 스스로 당연하다고 생각해온 가치들, 인식의 전제들을 의심하지 않는 한 부정과 거부는 늘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단순히 무엇인가를 부정하고 거부하는 것 외에도, 비판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들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지금은 다른 질문과 다른 사유를 구성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명령들과 압력들이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제게 작동하고 저를 규정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능동적인 비판의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니체에게서 이러한 비판의 기술을 배우고 있습니다. 




2. 이 책 1부를 열면서 “이제 나 자신이라는 미지의 영역으로 계보학적 탐사를 떠나려고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의미인가요? 


처음 공부를 시작했을 때 저는 저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와 공부를 분리시키려고 했습니다. 철학이 우리의 매우 구체적인 문제들에 직접적인 해결책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철학은 처세술이 아니고 철학자는 카운슬러가 아니므로, 우리의 자질구레한 고민들은 내려놓고 우선은 그 철학이 제기하는 문제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러나 제가 간과하고 있었던 것은 어떤 기이하고 관념적으로 보이는 철학도 그 철학자가 놓인 역사적인 조건과 그가 마주하고 있는 매우 구체적인 문제들 속에서 탄생한다는 점이었습니다. 니체에 따르면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진리 그 자체를 향한 의지는 없습니다. 인식 자체를 위한 인식은 없으며, 철학 또한 지배하고 확장하려는 생명의 활동이라는 것. 어떤 철학이 놓여 있는 역사적 조건과 우리 자신이 놓여 있는 구체적 현실을 무시할 때 철학은 공허한 것이 되고 맙니다. 철학적인 문제와 개인적인 문제를 구분하는 동안, 저는 철학을 관념이나 논리로 환원시켜버리거나 현실의 문제에 대한 (공허한) 해답으로 소비하게 될 뿐이었습니다.


물론 철학은 우리의 현실적인 문제들에 어떤 해답을 주지는 않습니다. 특히나 니체는 보편적인 진리를 제시하거나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려주기는커녕, 그러한 모든 이상들을 파괴하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삼았죠. 그렇다고 해서 철학이 현실과 무관하다는 뜻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철학은 어떤 해결책을 주는 대신에 저의 현실과 저의 문제를 전혀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해줬습니다. 니체를 읽으며, 또 글을 쓰며 저는 제가 스스로에 대해 너무나 무지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온갖 것들에 부여한 가치들, 제가 저 자신에 대해 내린 규정들, 제가 제 문제들을 문제화하는 방식 등등을 한 번도 낯설게 의식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죠. 니체를 읽고 또 글을 쓰는 것은 제겐 무엇보다도 우선 저 자신과 마주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제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낯설게 느끼고 이상하게(?) 바라보는 과정, 즉 ‘나 자신이라는 미지의 영역’을 탐사하는 일이었죠. 제가 부여잡고 있던 관점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시도하는 만큼 저 자신과 마주할 수 있었고, 또 한때 저 자신이었던 것들로부터 떠날 수도 있었습니다. 


계보학이란 가치의 가치를 질문하는 일입니다. 니체에 따르면 그 자체로 존재하는 지고한 가치는 없습니다. 모든 가치는 해석하고 가치평가하는 힘에 의해서 가치 있는 것으로 출현합니다. 그리고 이때의 힘이란 다른 모든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확장하고 자신의 힘을 발산하고자 하는 우리의 생명, 우리의 삶이죠. 따라서 가치의 가치를 묻는다는 것은, 그것의 참/거짓을 따져 묻거나 선하다/악하다라고 도덕적 판결을 내리는 일과는 무관합니다. 가치란 그것을 출현시킨 힘(본능)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계보학이란, 그 가치를 자명한 것으로 출현시킨 힘은 어떤 힘인지 그러한 가치는 어떤 본능에 의해 지지되고 있는지를 질문하는 작업입니다. 그 가치에 내포된 힘은 우리로 하여금 삶을 긍정하게 하는가 부정하게 하는가, 삶을 충만함과 풍요로움으로 해석하게 하는가 결여와 궁핍함으로 해석하게 하는가, 새로운 영토를 구성하며 자기 자신으로부터 떠나도록 하는가 아니면 낯선 힘들을 모두 쳐내고 자기 자신 안에 고립되게 하는가……. 가치에 대해 이런 질문들을 던지는 것이 바로 니체의 계보학입니다.


글을 쓰면서 제가 줄곧 시도했던 것은 제가 믿고 있던 가치들에 대한 계보학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저 자신에 대해, 글쓰기에 대해, 예술에 대해, 우정에 대해, 여행에 대해 …… 가지고 있던 전제들과 의심해보지 않은 자명성들, 그리고 그 안에 작동하고 있는 가치의 위계들을 낯설게 보고 그러한 가치들이 저를 어떻게 살아가도록 하고 있는지를 질문하는 일. 이러한 작업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성공적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글을 쓰는 과정이 제게는 처음으로 조금의 허세도, 자기비하도 없이 저 자신과 마주하는 과정이었다는 것입니다. 



3. 이 책 4장 ‘글쓰기, 나를 떠나 나에 이르는 길’에 보면 선생님 자신이 독특한 위치에 있는 20대로서 또래들에게 어떤 이야기들을 전하고 싶었다고 하셨는데요, 이 책에 그런 이야기가 함께 담겨 있을까요? 있다면 어떤 것일까요?


공부를 시작한 뒤로 저는 제 공부를 통해서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고자 하는 열망을 품어왔습니다. 그 누군가란, 가깝게는 연구실 안팎의 친구들일 테고 멀게는 저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제 또래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제넘은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저는 저와 제 또래들이 너무나 진부한 말들에만 둘러싸여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헬조선이니 N포세대니 하는 암울한 규정들이나 욜로, 소확행 같은 새로운 소비 트렌드를 가리키는 말들. 그에 비해 우리의 문제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하고 우리의 현실에 대해 다르게 질문하게 하는 담론이나 텍스트는 부재한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저는 대안학교를 졸업해서 대학에도 가지 않고 돈도 안 되는 공부를 하고 있는, 이러한 독특한 위치에 있는 저만이 할 수 있는 무언가 신선한 이야기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대와 욕심이 독이 되었던 것인지, 저는 한동안 매너리즘에 빠졌습니다. 어떤 텍스트를 읽어도 ‘20대’나 ‘세대’를 언급하지 않고는 글이 써지지 않았고, ‘냉소’나 ‘불안’, ‘무기력’ 등, 제가 우리 세대의 문제라고 규정한 것들을 걸고넘어지지 않고는 문제의식이 구성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어느새 제 글의 패턴이 되어버렸고, 이렇게 패턴화된 글들은 어김없이 ‘말 건네기’에 실패했습니다. 무기력하고 불안한 동시에 안온한 20대의 일상을 스케치하고, 제가 읽은 텍스트의 내용을 대략 끼워 맞춘 다음, ‘각자의 자유를 발명하자’ 같은 공허한 결론에 이르기를 반복할 뿐이었죠. 


그렇게 실패를 거듭하다 자기 자신의 위치, 자신의 관점을 고수한 채로는 언제고 계몽적이고 교조적인 말밖에는 건넬 수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말을 건넨다는 것이 어떤 정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닌 다음에야, 제가 세계에 대해, 제 또래에 대해, 또 저 자신에 대해 부여한 익숙한 규정성들을 의심하고 제가 문제를 바라보는 익숙한 문제의 구도를 비틀어내는 과정 없이는 누군가에게 말을 건넬 수도 없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었죠. 그래서 저는 우선 저 자신에게 진솔한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책은 ‘~가 문제다’라거나 ‘함께 ~를 하자’라는 식으로 독자에게 말을 걸고 있지는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저 자신으로부터 출발하는 글들을 쓰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하는 글이 반드시 자기 자신의 문제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책의 3부에서는 제 또래들과 함께 이야기 해보고 싶은 주제들(교양, 저항, 노동(자유), 언어, 성(性), 정치)에 대해 썼습니다. 



4. “나는 ‘진보 꼰대’가 싫어요!”― 이 책 속 한 소제목이기도 하고, 책 곳곳에서 그런 분위기가 물씬(?) 느껴집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이고, 니체와의 만남이 이 ‘싫음’에 어떤 변화를 주었는지 궁금합니다.


네, 정말 싫어합니다(^^). 386세대인 부모님 밑에서 자란데다가 중, 고등학교를 모두 대안학교에 다닌 탓에, 저는 진보적인 어른들 사이에서 자랐고, 영향도 많이 받았습니다. 영향을 받지 않았다면 싫어할 이유도 없겠죠. 저는 자신들의 다수적(남성적) 감수성 위에 온갖 ‘올바른’ 가치들을 두르고 윤리적·정치적 당위를 내세우며 스스로를 ‘더 나은 사람’이라고 여기는 이들을 ‘진보 꼰대’라고 부릅니다. 청년들의 탈정치화를 지탄하며 짱돌을 들고 맞서 싸우라고 말하는 진보 지식인들이나, 온갖 민주적이고 대안적인 가치들을 앞에 내세우면서 ‘그래도 학생이라면 공부를 해야지’라거나 ‘그래도 대학은 가야지’라고 제게 말했던 진보적인 교사들, 또 ‘깨어 있는 시민’을 자처하며 자신이 믿는 가치를 보편화하려는 진보세력들 등, 저는 살면서 꽤 많은 진보 꼰대들과 마주쳤습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이런 분들은 대개 중년 남성들이었습니다(^^;).  


저는 한동안 이러한 무의식적인 저항감을 해석하지 못했습니다. 행위와 이념 사이의 모순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인지, 그들의 거창한 가치들이 너무나 무겁게 느껴졌던 것인지, 그저 부모 세대에 대한 반발심인지, 해석이 되지 않았죠. 그냥 싫을 뿐이었습니다. 지금은 제가 견딜 수 없었던 것이 그들의 사유의 경직성이 아니었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스스로를 더 나은 사람이라고 정당화 할 뿐인 거창한 가치들과 당위들, 그리고 쓸데없는 비장함과 일상에서 드러나는 권위적이고 꽉 막힌 태도 등등. 제가 싫어했던 이 모든 것들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스스로의 생각에 틈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경직성인 것 같습니다. 몇 없는 제 꿈(?) 중 하나는 자기 안에 갇히지 않는 중년 남성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공부가 그 꿈을 실현하는 데 도움이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5. 이 책의 3부의 제목은 “이제, 더 이상,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입니다. 여기에서 선생님은 “구체적 현실에서 비롯되는 어떤 참을 수 없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계신데요. 지금 선생님이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당장 떠오르는 것은 ‘인성’이라는 말입니다. 언제부터인가 SNS나 커뮤니티, 뉴스 댓글 등등에서 지겹도록 보이는, 대개 아이돌이나 스포츠스타를 비롯한 셀러브리티들의 행실을 꼬집을 때 쓰이는 말이죠. 인성이라는 이 모호한 말은 ‘사람을 실력이나 외모로만 평가하면 안 된다’라는 그럴듯한 당위를 내세우지만, 거기서 느껴지는 것은 도덕적인 규범에 들어맞지 않는 사람들과 그들의 행위들을 심판하고 교정하려는 반동적인 힘뿐입니다. 끊임없이 누군가의 인성을 물고 늘어지는 댓글들이나 ‘〇〇〇인성 논란’ 같은 게시물들을 보다 보면 재판관이 되어 상대에게 판결을 내리고자 하는 노예적인 욕망에 혐오감을 느끼게 됩니다. 

지금 제가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은 구체적인 기예(技藝)가 결여된 윤리인 것 같습니다. 이건 저 자신에 대한 참을 수 없음이기도 한데요, 최근 들어 저는 제가 한동안 고수해오던 ‘정치적 올바름(PC함)’이 너무나 공허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성적·인종적·문화적·신체적 특성 혹은 정체성을 근거로 상대를 규정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소수자를 차별·혐오하는 표현을 삼가고, 나아가 상대를 한 명의 인간으로서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것. 저는 이 아름다운 윤리가 타인들과의 실제적인 관계 속에서 너무나 무력하다는 것을 느꼈고, 혹시 이러한 정치적 올바름을 고수할 때 제가 원했던 것은 관계의 실재성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관계에 수반되기 마련인 불화와 갈등, 혐오감 등등을 외면하고 회피하기 위해 취한 고상한 제스처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규정들과 정체성이 만들어내는 경계를 넘어서야 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각자의 관점과 자아만을 안전하게 고수하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들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관련된 내용을 3부의 ‘어느 것도 아닌, 동시에 모든 것인 성(性)’에서 다루기도 했습니다.



6. 끝으로 선생님이 가장 좋아하는 니체의 말은 무엇인가요.  


“우리는 부정한다. 우리는 부정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있는 무언가가,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무언가가 살아서 자신을 긍정하려 하기 때문이다!”(니체, 《즐거운 학문》 307절, 니체전집 12, 안성찬·홍사현 옮김, 책세상, 2005, 284쪽) 

제가 가장 좋아하는 니체의 말입니다. 우리의 부정은 사실 아직 도래하지 않은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이라는 것! 냉소와 허무주의로부터 저를 지켜주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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