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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정치1/몸과정치2

인공인간으로서의 주권 - 中

by 북드라망 2018. 11. 15.

인공인간으로서의 주권 -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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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하나(一)를 얻음으로써 맑고,

땅은 하나를 얻음으로써 안정되며,

왕후는 하나를 얻음으로써 천하의 정(貞)이 된다.

이와 같이 무릇 하나는 귀한 것이다.

 ... 주권이 마땅히 하나이며 마땅히 나누어질 수 없음을 알 수 있음이 아니겠는가.

 불씨 주권론을 번역해 내며 이 한 마디를 붙인다.

─불파사(拂波士), 「「主權論弁言」」(18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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홉스에 대한 노자적 해석

그런데 여기서 번역자들의 의도를 살펴볼 수 있는 열쇠가 있다. 이는 다름 아닌 책 앞에 달려있는 변언(弁言)이다. 앞서 다카하시의 지적을 소개했듯이 이 변언은 본문에 대한 해제적 성격을 띠고 있지 않다. 그런데 이 변언은 다소 엉뚱하다 싶은 내용을 전하고 있다.

하늘은 하나(一)를 얻음으로써 맑고, 땅은 하나를 얻음으로써 안정되며, 왕후는 하나를 얻음으로써 천하의 정(貞)이 된다. 이와 같이 무릇 하나는 귀한 것이다. 덕이 하나가 아니라면 자신을 이루기 부족하고, 뜻(志)이 하나가 아니라면 공을 이루기 부족하다. 예(禮)는 오직 하나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말미암는 바가 되고, 법(法)도 오직 하나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안정할 수 있는 바가 된다. 정(政)이 많은 문(門)에서 나와서 나라가 다스려진 적이 있느냐. 이 또한 주권이 마땅히 하나이며 마땅히 나누어질 수 없음을 알 수 있음이 아니겠는가. 불씨 주권론을 번역해 내며 이 한 마디를 붙인다.

─拂波士, 「主權論弁言」

『주권론』 앞에 붙어있는 이 짧은 변언은 번역 의도를 명시적으로 보여준다. 변언에서는 하나의 논리가 강조되는데 이를 주권이 하나임과 연결시킨다. 이 변언을 시작하는 “하늘은 하나를 얻음으로써 맑다”는 말은 노자의 『도덕경』 39장에서 가지고 온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노자가 말한 ‘일(一)’은 어떤 ‘존재’를 의미한다기보다 일의 ‘논리’에 가깝다. 이때 일의 논리는 분별과 갈라짐을 극복한 것이 아니다. 이는 『도덕경』의 이후 구절을 봐도 알 수 있듯이 대대 개념들을 그 안에 내포해 하나가 되는 노자의 독특한 철학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도덕경』 39장에서는 이 문장에 이어 “하늘이 맑지 않으면 갈라질까 두렵고, 땅이 안정되지 못하면 흔들릴까 두렵고, 신이 영검스럽지 못하면 없어질까 두렵고, 골짜기가 가득 차지 못하면 메말라 버릴까 두렵고, 만물이 생겨나지 못하면 죽어 없어질까 두렵고, 후왕이 고귀하지 못하면 거꾸러질까 두렵다. 그러므로 귀함은 천함을 뿌리로 삼고, 높음은 낮음을 토대로 삼는다”고 말한다. 이처럼 일은 귀함이 천함에 바탕하고, 높음이 낮음에 바탕하는 특유의 노자식의 논리와 이어지는 것이지 단순히 하나의 존재로서 일의 획득을 의미한 것이 아니다. 


노자


 

따라서 이는 홉스식의 주권의 불가분성을 설명하는 말이라기보다 거꾸로 하나의 가능태로서 분화되기 이전의 상태, 앞으로 분화를 기다리는 상태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노자의 논리가 주권의 불가분성을 설명하는 데 차용되고 있다. 홉스의 주권론을 번역하면서 역자들이 가장 강조한 것은 다름 아닌 주권의 불가분성이었다. 『주권론』의 역자는 홉스를 끌어들이며 주권이란 노자의 일의 논리가 그러하듯 천하를 통일시키는 원리로서 일이라는 점에 주목한다. 역자들이 노자의 득일(得一)편의 ‘侯王得一以爲天下貞’라는 문장에 초점을 맞춰 ‘일(一)’이라는 도를 얻어 천하를 안정시킨다는 논리를 근대적 주권의 논리, 즉 주권이란 나뉘어져서는 안 되며 하나의 통합된 권력이 있어야 질서가 가능하다는 논리로 연결시킨 것이다. 변언이 『주권론』 자체에 해제적 성격을 갖지 않음에도 이 글이 굳이 실려 있다는 것은 그것이 해석적으로 정확한지 아닌지 여부를 떠나 역자들이 이 책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를 보여준다. 이 ‘일(一)의 논리’가 문부성 번역자들이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번역하고자 했던 의도의 핵심이었다.  

 

홉스(Hobbes)와 불파사(拂波士) 사이의 차이

 

이는 홉스의 18장을 번역한 「제도에 의해 성립된 주권자의 권(權)을 논함」이라는 장을 살펴보아도 알 수 있다. 앞서 지적했듯이 18장은 거의 생략되지 않고 번역되고 있는데 번역자들이 전달하고 싶던 내용이 이 장에 들어있음을 보여준다. 이 장에서는 각인의 신체를 대표하는 권리, 즉 그 대표자의 권리를 설명하는데 이는 인민이 이미 상호 계약을 이루었기 때문에 마음대로 통치형태를 변경할 수 없음을 말한다. 또한 이렇게 만들어진 주권은 박탈되지 않는다. 다수의 인민이 동의를 표했기 때문에 처음에 동의하지 않음을 표한 자도 그 결의에 따르지 않을 수 없으며, 주권자의 모든 행위는 승인되어야만 한다. 인민의 뜻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주권자의 행위는 결코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이 도출된다. 따라서 주권을 장악한 자는 처형되거나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는다. 이는 홉스의 18장 논의를 그대로 가지고 온 것으로 이를 통해 천황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선택했음을 추측케 한다.

이상 진열한 바의 권리들[諸權]은 합해서 주권의 정신을 이루는 바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 표목(票目)에 의해 주권은 누구[何人] 내지 어떤 집회[何ノ集會]에 있는지를 식별할 수 있다. 이같은 권리들은 결코 공유될 수 없으며,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 이로 보자면 이같은 권력을 이전하면, 그 나머지 권력을 장악하는 것도 모두 국가를 경영하는 이유의 목적, 즉 치평과 정리(正理)를 유지하기 위해 조금도 도움이 되는 바 없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은 권력이 분리될 수 없는 것은 국내가 분리되면 왕국은 자립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拂波士 (1967), p. 245


​이처럼 근대 일본에서 홉스에게 주목한 이유는 주권의 불가분성을 가지고 천황의 전제적 권한을 강화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번역본에서도 홉스가 말한대로 주권의 세 종류로 군주정치(monarchy), 공화정치(democracy), 귀족정치(aristocracy) 사이의 차이는 단순한 편의와 적절성 상의 문제이지 어느 것을 우위에 놓고 있지 않은 대목을 소개하기도 한다. 또한 홉스의 원문에 있는 대로 군주정의 불편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도 하다. 즉 군주에게 간언이나 기만하는 사람에게 빠져 유혹에 빠지기 쉽다는 것과 부적절한 이에게 주권이 계승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번역본에는 홉스의 원문에 없는 부분이 역자들에 의해 첨가되기도 했다. 18장 말미에 원문에는 없는 “그가 군주정치의 해를 논해 이 보기 쉬운 이치를 남기는 것은 과연 어떤 마음인가”라는 한 구절을 추가하고 있는데, 이는 역자들이 천황제를 강화하기 위한 의도 속에서 이 책을 번역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 첨언은 가토 히로유키에 의해서였다고 지적되는데 국권론의 관점에서 군주제를 옹호하는 입장이 관철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역자들이 홉스의 책에서 주목한 것은 백성의 자유는 어디까지인가, 그리고 군주의 권리를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을까라는 논리였다. 기타 백성의 자유는 법의 침묵에 달려있다고 말하는 홉스의 논의는 그들에게 안성맞춤이었다. 이처럼 천황권의 절대성과 그것에 대한 인민의 절대적 복종의 계기를 강조한 것을 생각하면 문부성의 의도가 주권재군설을 지원해, 국회개설을 요구하는 민권파를 억압하는 이론적인 근거를 제공하는 것에 있었다는 점은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토마스 홉스



물론 홉스의 논의 전부에 문부성이 찬동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가령 인민 개개인이 계약을 통해 주권을 만들어낸다는 홉스의 생각을 문부성이 그대로 시인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또한 사람은 모두 자연적으로 평등하다거나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누구나 자유롭다는 관념 등 홉스 특유의 인간관에 대해서 문부성이 어디까지 동의했는지는 의문이다. 그렇게 보자면 문부성은 홉스의 논점을 모두 승인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생각하기에 주요한 논점, 즉 주권자의 권력의 성질, 주권의 불가분성, 군주정체의 우위, 주권의 전제 등의 주장을 가져오기 위한 시대적인 필요성 때문에 이 책을 초역, 출판한 것이다. 문부성의 간행의 의도는 다분히 자유민권운동에 대항해 민권파의 요구를 억압하는 이론을 제공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국왕파와 의회파 모두에게 비난을 받던 홉스(Hobbes)와 ‘홉스’의 음역인 ‘불파사(拂波士)’ 사이에는 차이를 보이게 된다. 

 


국권의 시대, 중심을 세운다는 것

  

당시의 시대 상황을 보면 메이지 10년대 중엽 문부행정은 일종의 반동기였다. 즉 문부성은 1879년 제정된 자유주의적 색체가 진한 교육령을 개정함과 동시에 인의충효를 취한 교학성지를 내걸어 소학교교칙강령, 소학교교원심득(小學校敎員心得) 등을 배포해 존왕애국의 지기(志氣)를 고양하기 위한 도덕의 교육에 힘썼다. 당시 국회개설을 둘러싸고 주권의 소재는 어디에 있는가를 둘러싸고 급진 양당이 싸우는 주권논쟁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문부성은 자신의 논의를 뒷받침해줄 서양의 이론이 필요했다. 루소나 스펜서 등을 가지고 오는 민권론자들에 대항하는 논리로 홉스가 선택된 것이었다. 

 

이처럼 국권파 지식인들에게 민권, 자유를 주장하는 민권파 지식인들에 대항해 천황의 권한을 어떻게 확립할 것인가가 핵심적 문제의식이었다. 이노우에 역시 제국헌법 제정회의(1888)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기축(機軸)이 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황실뿐이다. 따라서 이 헌법초안에서는 오로지 뜻을 이 점에 모아 군헌(君憲)을 존중하여 속박하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 그러나 군권(君權)이 심히 강대한 때는 남용의 우려가 없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말이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만약 그렇다고 해도 재상에게 그 책임이 있다. 또한 그 남용을 방지할 방법이 없지 않다. 남용을 우려해 군권의 구역을 축소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난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초안에서는 군권을 기축으로 하여 이를 훼손하는 일이 없어야 하며, 저 구주(歐洲)의 주권분할의 정신에 의거하지 않는다. 예부터 구주 여러나라의 제도에서 군권과 민권을 공동으로 한다는 방식과는 다르다.

─『樞密院議會議事錄』 第1卷, p. 22


​이때 기축(機軸)이 설정되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주권 분할의 정신과 대비되고 있다. 군권과 민권을 공동으로 하여 군권을 축소, 훼손하는 일이 없어야 함이 분명히 강조된다. 홉스는 이 의도의 근거로 선택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분명 홉스에게서 보이는 신체상과 다른 지점을 보인다. 즉 홉스가 의도한 바는 단순히 머리의 위치에 놓인 왕 혹은 대리인으로서 주권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신체를 표상하며, 이 표상된 신체는 다로서 일을 완성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주권이 일의 논리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은 근대 정치철학에서 기본적인 발상이었다. 대중들을 하나로 상정하고, 이들의 의지를 계약이라는 과정을 통해 한 곳으로 양도, 몰아주는 과정을 통해 ‘단일한 의지를 가진 단일한 실재’를 상정한다. 홉스가 의인화 과정을 통해 인공적 인간 개념을 만들어 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문부성 역 홉스 번역본 역시 일의 논리를 강조하지만, 이러한 과정이 빠져 있다. 따라서 이를 문부성 번역자들의 의도 속에서, 즉 국권파와 민권파의 대립적 정치적인 상황 속에서 파악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한 해석이 되기에 무언가 미진한 느낌이다. 왜냐하면 홉스에 대한 이해 자체가 난점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글_김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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