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 노트』 - 그저 바라보는 연습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 노트』 

- 그저 바라보는 연습



요즘 별도로 카메라를 들고 다닌다. 아무래도 전화기에 달린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 사실 이제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카메라'라고 검색을 해 보면, '카메라'이야기보다 전화기에 달린 카메라 이야기가 훨씬 더 많다. 상위 10개 정도는 새로 나온 전화기에 달려있는 카메라가 얼마나 대단한지에 관한 기사들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작년에 전화기를 바꾼 다음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세상에 전화기에 달린 카메라가 이렇게 좋아졌다니……. 그래서인지, 아니면 내가 잘 안 돌아다녀서인지 모르겠지만, 확실히 예전보다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사람이 줄었다. 


전화기에 달린 카메라가 좋아졌기 때문에 '카메라'를 들고 다니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나에겐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작은 디지털 카메라와 약간 큰 필름 카메라에, 몇가지 렌즈들까지 주렁주렁 달고 다니곤 했었는데, 가지고 다니는 것들이 서서히 줄다가 어느날부터는 아무것도 가지고 다니지 않게 되었다. 아마 무거워서 그랬을 것이다. 그렇게 두고 다니던 카메라를 다시 슬슬 가지고 다닌다. 


"이름을 주지도, 상표를 붙이지도, 재 보지도, 좋아하지도, 증오하지도, 기억하지도, 탐하지도 마라. 그저 바라만 보아라. 이것이 가장 힘든 일이다. 그러나 그저 보이는 게 찍힐 뿐이다. 카메라는 파인더 안에 보이는 사물의 표면에 반사된 빛을 기록할 뿐이다. 그것이 전부다."

- 필립 퍼키스, 박태희 옮김, 『사진강의 노트』, 2005, 눈빛, 19쪽


그러니까 찍든, 찍지 않든 간에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면 '보는 것'이 달라진다. 가장 크게 달라지는 것은 '말'이 줄어든다는 점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대체로 그럴텐데, 길 가다 눈길을 끄는 장면을 보았다고 치자. 그러면 그 장면은 시각적으로 기억되기도 하지만, 대개 '~장면' 같은 식으로 번역된다. 그 사이에 나는 나 스스로에게 저 장면은 '~야' 말하는 셈이다. 그런데 손에 카메라를 쥐고 있으면, 그런 번역이 필요가 없다. 차라리 장면의 상을 찍거나, 머리 속에서 사진화 하거나 하게 된다. 물론 그 사이에도 많은 언어적인 번역이 일어나기는 하지만, 그건 다음 문제다. 말하자면, 카메라를 들고 있으면 '말'로하는 해석이 조금 뒤로 물러나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부쩍 '말'들과 멀어지고 싶을 때, 카메라를 들고 다니게 된다. '말'을 쉬고, 다른 걸로 긴장감을 찾는다고 해야 할까? 뭐 그렇다. 그런데 그런 식의 감각은 꼭 '카메라'여야만 생긴다. 전화기에 달린 카메라는 '말'을 쉬게끔 하는 물건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더 많은 '말'을 만들어내는  물건인 것 같다.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사실은 책을 한권 추천하고 싶어서다. 위에 인용한 『사진강의 노트』라는 책이다. 예전에, '그저 바라만 보아라'라는 문장을 처음 보았을 때, 무언가 대단한 '진리'를 손에 쥔 것 같은 기분 좋은 감각을 느꼈더랬다. 그것은 지금까지도 내가 세상을 대하는 여러가지 태도들 중 한가지에 큰 영향을 미쳤다. 며칠 전까지는 그렇게까지 큰 영향을 받았는지도 몰랐으나, 다시 읽어보니 확실히 알겠다. 나는 타고나기를 내 '의견'을 남에게 내보이는 것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다. 서넛 정도가 모인 자리에 끼면 언제나 화제를 주도하고 싶어하고, 주장을 스스럼없이 떠들며 그 와중에 받는 주목을, 몹시 즐긴다. 당연히 말이 많다. 그것도 아주 많다. 그래서 곤란할 때도 아주 많다. 명시적으로 '나는 이렇게 살겠다'고 약속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서 아무도 그게 '약속'이었는지 모르지만, 스스로 보기에 많은 약속들을 하곤 한다. 기왕에 그렇게 타고났다면, 그런 약속들도 아무렇지 않게 무시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게 잘 되질 않는다. 그러다보니 스스로 한 말에 발목을 잡히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그러면 나는 한없이 작아지고, 어쩐지 패배감이 들기도 하며, 마음속으로 괴로워한다. 


말하자면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일은, 약간은 주술적인 것이다. '말과 거리를 두고 싶다'는 기원을 그것(카메라)이 이루어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 필립 퍼키스의 가르침에 충실하게 카메라를 들고 있을 때에는 '그저 바라만' 보려고 노력한다. 당연하게도, 잘 안 된다. 아니 대부분 안 된다. '의미'를 붙이는 것은 거의 본능에 가깝다. 그래서 언제나 '실패'하고 마는데, 나름대로는 유의미(?)한 실패라고 생각한다(다시 한번 실패!). '그저 바라만 보는 것'은 여전히 멀지만, 적어도 거기에 붙는 의미의 가짓수는 많이 줄어든다. 이른바 '의미'의 갯수만큼 번뇌도 느는 모양인지, 그나마 조금 줄고 나면 마음이 한결 가볍다. 이것조차 주술적이다. '사진'이라는 매체가 가진 '가벼움'에 몸을 싣고 싶은 마음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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