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나'를 '남'의 자리에 세우기

'나'를 '남'의 자리에 세우기



산(히말라야)을 오르는 내내 나는 지갑과 노트, 물병이 든 배낭 하나뿐이었다. 모든 무거운 짐은 셰르파가 짊어졌다. 가이드는 셰르파에게 하대(下代)를 했다. 그들의 관계가 조금씩 나를 변화시켰다. 아, 이 말엔 어폐가 있겠다. 정확히 말하면 나 스스로 변해갔다.

‘나는 돈을 주고, 당신은 노동력을 주기로 했으니 계약에 따라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들이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짜증이 났다. 폭력이나 폭언을 사용하진 않았지만 감정을 거르지 않고 표현하기 시작했다.

수십 년간 서울에서 썼던 문명의 가면을 이마 위로 올리는 데 채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말이 통하지 않는 셰르파는 상대하지 않았다. 미숙하나마 한국말이 통하는 가이드가 주된 대상이었다. 현지인들에게 던진 질문에 엉뚱한 답이 돌아오곤 했다. 말이 가팔라지고 거칠어졌다. (......) 이른바 ‘갑질 사건’이 들려올 때마다 히말라야에서의 일주일이 떠오른다. (......)

내가 계속, 무엇이든 글을 쓰는 삶을 살게 된다면 인간과 인간 사이에 거미줄처럼 쳐진 관계의 그물에 주목하고 싶다. 그 관계의 그물 속에서 위태롭게 살아가는 나 자신을 주시하고자 한다. 남의 잘못은 중요하고 나의 허물은 대수롭지 않다고 여기는 나를, “웃자고 하는 소리”로 남들을 얼마나 불쾌하게 하는지 눈치채지 못하는 나를, 무시로 반칙하며 살면서도 세상엔 원칙의 청진기를 대는 나를.

_권석천, 「낯선 나와 마주치는 서늘한 순간」, 『악스트』 통권 19호(7/8월), 은행나무, 2018


‘내로남불’. 사자성어처럼 되어 버린 이 말이 현대사회의 정신을 대표하는 말처럼 보일 때가 있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분명 자기를 먼저 돌아보는 것이 최소한 지향해야 할 윤리로 이견없이 받아들여졌던 때도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자기보다는 남 보기에 바쁘다(자기를 볼 때도 ‘남들의 눈에 비친 자기’를 본다).


사주에 ‘금’(金)기운이 많기 때문인지, 아니면 관성이 세서 그런지, 기질적으로 ‘규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는, 남에 대한 기준도 참 엄격했다(하다). 이러이러한 말을 하는 사람이라면(그런 생각/철학/세계관을 가진 사람이라면) ‘절대!’ 이런 행동은 하면 안 되는 것 아닌가. 어떻게 저런 행동을 부끄러움도 없이 할 수가 있나. 자신의 말(신념)과 반대되는 행동을 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 건가, 모르는 척하는 건가. 소심해서 대놓고 묻지는 못했지만 마음속으로는 푸짐하게 욕하고 더할 수 없이 경멸했다.


그 모든 기준에 ‘나’를 먼저 대보게 된 것은, 돌이켜보면 ‘천운’이나 다름없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모든 과거는 흑역사”라고는 하지만, 부끄러움 없이 떠올릴 과거가 하나도 남아 있질 않았을지도 모른다. 물론 여전히 무시로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그 원칙에 ‘나’보다는 ‘남’이 먼저 서 있는 경우가 많지만, 이전보다는 훨씬 빨리 정신을 차리고 ‘나’를 ‘남’ 자리에 세운다. 그렇게 하는 것만으로도, 타인에 대한 이해가 더 넓어지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화’는 덜 나게 된 것 같다. 남은 생 동안 조금씩이라도… “형제 눈 속의 티끌보다 내 눈 속의 들보”를 먼저 깨닫는 사람이 되어 가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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