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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정치1/몸과정치2

‘관품(官品)’으로서의 사회 - 上

by 북드라망 2018. 9. 20.

‘관품(官品)’으로서의 사회 - 上

이른바 군(群)이라는 것은 사람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다.

 부분에 정밀하지 못하면 전체를 볼 수 없다.

 하나의 군[一群], 한 나라[一國]의 성립 역시

 체용공능(體用功能)이 생물의 한 몸[一體]과 다름이 없어

 크기의 차이는 있어도 기관의 다스림[官治]은 서로 준한다.

 고로 인학(人學)은 군학(群學)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옌푸(嚴復), 「원강(原强)」(1895)

하늘이 움직인다-천연론의 시대

이번에는 근대 중국으로 넘어가보자. 스펜서의 세포로서의 유기체는 중국에서 어떻게 이해되었을까. 스펜서의 중국 수용에 영향을 끼친 인물로 옌푸를 들 수 있다. 당시 중국의 청년들이 침대 맡에 두고 읽었다던 책이 바로 옌푸의 『천연론(天演論)』이었다. 이 책은 헉슬리의 『진화와 윤리(Evolution and Ethics)』라는 강연을 번역한 책이었다. 그러나 주목할 점은 옌푸가 사상적으로는 헉슬리와 정반대에 서있는 스펜서적 관점에서 논하고 있다는 점이다. 잘 알려진대로 헉슬리는 스펜서를 철저하게 비판한 논자였다. 헉슬리의 책을 스펜서의 말을 인용하며 번역한 것만 보더라도 옌푸에게 스펜서의 영향력이 컸던 점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옌푸의 유기체에 대한 이해 역시 스펜서의 논의를 많이 수용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허버트 스펜서



앞서 보았듯이 스펜서의 유기체론은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유기체론과 다르다. 영국의 자유주의자였던 스펜서는 소극적 국가관을 바탕으로 개인의 자유를 무엇보다 중요시한 인물이었다. 따라서 그의 유기체론은 전체주의적 색깔과는 가장 거리가 먼 것이었다. 스펜서에게 유기적인 것이란 개별 세포들의 독립성을 기반으로 그것들 간의 자유로운 협동관계로써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자유주의와 유기체는 상호모순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때 중요했던 것은 앞서 보았듯이 당시의 세포설의 발전을 통해 새롭게 인식한 생물학적 사실들이었다.

번역어로서의 ‘관품’

그렇다면 중국에서 스펜서의 자유주의적 유기체는 어떻게 수용되었을까. 우선 특이한 점은 옌푸가 ‘organism’의 번역어로 ‘관품(官品)’이란 말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천연론』(1898)에서 처음 등장한다.

최근 생물학자들은 인간, 금수, 곤충, 초목에 속하는 생물은 기관[官]을 갖춘 생물이라 하여 관품(官品)이라 부르고, 쇠, 돌, 물, 흙은 기관을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에 비관품(非官品)이라고 부른다. 기관이 없으면 죽지 않는데, 이는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관품의 몸 안에서는 죽는 것도 있고 죽지 않는 것도 있는데, 죽지 않는 것은 정령이나 혼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죽을 수 있는 것을 갑이라 하고 죽을 수 없는 것을 을이라 한다면 이 둘은 확연히 다른 사물이다. 예컨대 초목 가운데서 뿌리, 가지, 줄기, 열매, 그리고 꽃과 잎은 갑에 속하는 것이며, 을은 어미를 떠나 자식의 몸으로 전수되어 면면히 이어지는 것으로, 대대로 조금씩 변할 수는 있지만 죽지 않으며 간혹 작게 나누어져 일부분이 죽기는 하지만 완전히 죽지는 않는다. 동식물이 모두 그러하다.

─엄복, 양일모 외 역, 『천연론』, 146-147쪽


​이 대목에서 그가 유기체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가 잘 드러난다. 그는 유기체와 무기체를 ‘관품(官品)’과 ‘비관품(非官品)’이라 번역하고 이를 기관의 유무로 설명하고 있다. 생물은 기관을 갖추어 관품이라 부르고, 무생물은 기관을 갖추지 않아 비관품이라 부른다. 그러나 관품, 즉 생물 안에서도 죽는 부분과 죽지 않는 부분이 있어 이 죽지 않는 부분은 대대로 면면히 이어진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천연론』에서는 스펜서와 같이 사회 조직원리로서 유기체로 파악하는 관점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는 헉슬리의 원문에서도 유기체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생명의 진화라는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진화론적 시선에서 조직원리로서의 유기체적 발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천연론』에서 옌푸는 스펜서의 말을 가지고 와서 진화를 ‘흡수를 통해 질량을 모으고 소모를 통해 운동을 분산시키는 것’이라 설명한다. 이를 사물에 적용하면, 사물은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유동적인 것에서 견고한 것’으로, ‘혼란한 것에서 질서 있는 것’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이는 또 다른 진화의 원칙인 ‘혼란한 것에서 질서 있는 것으로 진화한다’는 것과도 관련된다. 옌푸에게 혼란한 것은 어지럽고 정돈되지 않은 상태를 말하고, 질서 있는 것은 일정한 형체를 지니면서 경계가 분명하게 나누어진 상태를 말한다. 진화란 이 혼란한 것에서 질서있는 상태로의 변화다. 그리고 이는 생물의 진화과정과 사회의 진화과정에서 동일하게 일어나는 것이라 보았다.



이처럼『천연론』에서 보이는 유기체 사유 속에서 스펜서의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다. ‘기관[官]’이란 신체 안에서 각각이 맡은 기능을 담당함으로써 분업의 체계를 이루는 유기체적 특성을 보여주며, 정치체에서도 각각의 정치적 기관이 기능을 담당함으로써 질서있는 사회가 된다는 진화론적 관점이 그것이다.

 


유기체 vs 관품

그의 초기 글인 「원강(原强)」(1895)도 유기체적 발상을 설명하고 있다. 이 글에서 ‘관품’이란 말은 등장하지 않지만 사회 개념을 소개하며 이것이 사람과 유사함을 논하고 있다. 

 

이른바 군이라는 것은 사람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다. 부분에 정밀하지 못하면 전체를 볼 수 없다. 하나의 군[一群], 한 나라[一國]의 성립 역시 체용공능(體用功能)이 생물의 한 몸[一體]과 다름이 없어 크기의 차이는 있어도 기관의 다스림[官治]은 서로 준한다. 고로 인학(人學)은 군학(群學)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인학은 또한 둘로 나눌 수 있으니 하나는 생물학[生學]이고 또 다른 하나는 심리학[心學]이다. 생물학은 인류를 기르고[長養] 번식하는[孳乳] 대법을 논한다. 심리학은 백성의 지행과 감응의 비밀[秘機]을 논한다. 무릇 사람의 몸은 형(形)과 신(神)이 상호 갖춰져 쓰임을 이룬다. 마찬가지로 나라의 성립 역시 힘과 덕이 서로 갖추어진 후에야 존재한다.

─嚴復, 「原强」 『嚴復全集 卷七』, 16-17쪽


「원강」의 초고는 1895년 『직보(直報)』에 개제되었는데, 이 글에서도 유기체적 발상이 어렴풋하게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일군(一羣), 일국(一國) 역시 사람이 모여서 이뤄진 것으로, 생물의 한 몸[一體]과 같이 ‘관치(官治)’, 즉 기관의 기능이 존재한다. 『천연론』에서 보았듯이 사회[羣]를 알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인체에 대해서 알아야 하며 이 둘이 논리적으로 동일함을 지적한다. 그런데 1901년 『후관엄씨총간(候官嚴氏叢刊)』에 실린 「원강」 수정본에서는 동일한 대목에 좀 더 부가적인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사회[羣]는 사람이 모인 것이고, 사람은 관품[官品]의 우두머리[魁]다. 살아있는 생물의 원리[生生之机]를 밝히려면 반드시 생물학[生學]을 연구해야 한다. 감응의 미묘함을 알고자 한다면 반드시 심리학[心學]을 연구해야 한다. 그 후에야 비로소 군학(羣學)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한 무리[一羣]가 이루어짐에 있어 그 체용공능(體用功能)은 생물 일체와 다를 바 없는 것으로 크기는 비록 다르나 그 기관의 기능[官治]은 서로 준한다. 내 몸이 생겨나는 바를 안다면 무리[羣]가 성립하는 바도 알게 된다. 수명을 오래 유지할 방법을 안다면 국가의 명맥을 오래 유지할 방법 역시 알게 된다. 한 몸의 내부에 형(形)과 신(神)이 서로 갖추어져 있듯이 한 무리의 안에 힘과 덕이 서로 갖추어져 있다. 몸이 자유를 귀하게 여기듯, 국가도 자주를 귀하게 여긴다. 생(生)과 군(羣)이 이와 같이 서로 닮은 까닭에 둘이 아니다. 둘 다 모두 기관이 있는 물체일 뿐이다(二者皆有官之品而已矣). 그러므로 학문에서 군학이 가장 중요한데 오직 군학이 밝아진 이후에야 비로소 치란성쇠(治亂盛衰)의 원인을 알게 되고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공능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오호라! 이는 진실로 대인(大人)의 학문인 것이다.

─嚴復, 「原强」 『嚴復全集 卷七』, 25쪽


​수정본에서는 ‘관품’이라는 말이 등장하고 유기체적 사고도 뚜렷이 나타남을 알 수 있다. “무릇 일국은 일신과 같아서, 맥락이 관통하고, 기관[官體]이 서로 도와, 그 머리를 때리면 사지가 모두 응하고, 그 배를 찌르면 온몸이 죽음을 안다”라는 말에서도 초고본에는 없는 ‘맥락이 관통하고, 기관이 서로 돕는다[脉络貫通 官體相救]’란 부분이 추가되어 유기체의 뜻을 좀 더 명확히 하고 있다. 옌푸가 초고를 쓴 시기와 수정본을 쓴 시기 사이에 유기체에 대한 사고가 좀 더 명확해졌던 것인지, 아니면 수정본을 내면서 단지 표현이 분명해진 것 뿐 인지는 확언하기 힘들지만 수정본에서 유기체적 사고가 더 분명히 나타나는 것만은 사실이다. 이때 유기체에 대한 논의의 특징 역시 기관이 있다는 점과 이 기관에 대한 지식이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는 데 핵심이라고 파악한다는 점에 있다.

그렇다면 옌푸가 ‘유기체’란 말 대신에 ‘관품’이라는 번역어를 선택하는 이유를 조금 더 파고 들어갈 필요가 있다. 그는 왜 일본에서 사용하던 ‘유기체’란 번역어 대신 ‘관품’이라는 새로운 번역어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일까. 주지하듯 그는 번역어를 고를 때 신중함을 기했다. 하나의 번역어를 고르는 데도 몇날 몇달을 고민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는 번역어를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참된 진리에 다가가게 하려는 그의 목표와도 관련된다. 옌푸는 진화와 관련된 어휘 역시 당시 일본에서 사용되던 용어와 구별해 독자적인 번역어를 사용했다. ‘struggle for existence’의 번역어로 물경(物競), ‘natural selection’의 번역어로 천택(天擇)을, ‘potentilaity’의 번역어로 저능(儲能), ‘development’의 번역어로 효실(效實)을 선택한 것이다. 그런 그가 유기체라는 말 대신에 ‘관품’이라는 말로 ‘organism’을 설명하려 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이에 대해서 실리(Sir John Robert Seeley)의 강의록을 번역한 『정치강의』(1905)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유기(有機)’라는 두 글자는 서양 언어 organism에 대한 일본어 번역입니다. 이 글자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하였으며, 본래의 의미는 도구(器)이며 또한 기관(機關)이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두레박은 물을 긷는 도구이며 일을 처리하는 기관입니다. 그리고 귀와 눈, 손과 발은 신체의 도구이며 기관이지만, 앞에서 든 두레박과는 달리 생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근세의 과학에서는 모두 이 글자로 생명이 있는 사물을 명명합니다. 생명이 있고 또한 각종의 생리 기능을 담당하는 기관을 지닌 것을 유기체라고 합니다. 제가 이전에 번역한 책에서는 이 단어를 ‘관품(官品)’으로 번역했습니다.

─옌푸, 양일모 역, 『정치학이란 무엇인가-중국의 근대적 정치학의 탄생』, 13-26쪽


​그는 국가가 생물과 같은 유기체인지 아닌지를 밝히기 위해서 유기체의 뜻을 먼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고 말하며 실리가 말하는 ‘organism’의 어원을 살펴본다. 이는 그리스어로 tool이나 machine을 이르는 말로 두레박이 물을 긷는 도구(器)이자 일을 처리하는 기관(機關)인 것처럼, 사람의 귀와 눈, 손과 발 역시 도구이자 기관이라는 점에서 둘 다 organ이라고 옌푸는 설명한다. 그러나 두레박과 달리 사람은 생명을 가지고 있는데 근세 과학에서는 organ이 ‘기계’적인 것이 아니라 ‘생명’이 있으며, 각종 기능을 담당하는 ‘기관’을 지녔음을 말한다. 이때 관품은 눈이 보는 기관인 시관(視官), 귀가 듣는 기관인 청관(聽官)과 같이 각각의 형태를 지니고 그 형태는 각각의 기능을 갖춘 것이다. 이는 실리의 원문과 거의 일치하는데, 그가 관(官)으로서의 특징을 추가, 강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에 이어 옌푸는 원문에는 없는 관품과 유기체에 대한 설명을 추가하고 있다. 그는 ‘관품’을 ‘관을 지닌 품물[有官之品物]’로, ‘유기체’라는 것은 ‘기관을 지닌 물체[有機關之物體]’로 정의하고 둘 다 기관을 가진다는 점에서 같다고 본다. 한 포기의 풀 속에도 토양을 빨아들이는 기관인 뿌리, 수액을 증발시키는 기관인 껍질, 탄소를 뱉고 산소를 빨아들이는 기관인 잎, 교합과 생식을 담당하는 기관인 꽃이 있기 때문에 모든 짐승, 곤충, 초목은 ‘관품’이자 ‘유기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유기체’라는 용어보다 ‘관품’이라는 용어가 ‘organism’의 번역어로 더 적절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관품과 유기체라는 두 용어는 모두 사용할 수 있지만, 제가 보기에 관품이라는 두 글자가 유기체보다 더 적절할 듯합니다. 각종의 나무나 쇠로 된 기기(機器)는 기관을 가진 물체라고 칭할 수는 있지만 관품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관품이라는 두 글자야말로 정말로 organism의 적절한 번역일 것입니다.

─옌푸, 양일모 역, 『정치학이란 무엇인가-중국의 근대적 정치학의 탄생』, 66쪽



​그가 왜 관품이라는 번역어를 선택했는가에 대한 설명이다. 나무나 쇠로 된 기기(機器)는 기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를 유기체라 부를 수 있지만, 생명이 없기 때문에 관품이라 부를 수는 없다. 옌푸에게 ‘organism’은 단순히 기능적 분업으로서의 기관의 존재가 중요한 것만은 아니다. 나무나 쇠로 된 기계도 기관을 가질 수 있지만 관품은 거기에 더해 생명을 갖고 있는지 여부까지 포함되는 말이다. ‘유기(有機)’라는 말에 생명을 갖고 있다는 뜻이 부족하기 때문에 ‘관품(官品)’이라는 말을 쓴 것이다. 이때 기관[官]은 단순한 부분을 의미하는 것이라기보다 생명의 부분을 지칭한다. 가령 기관이 없는 돌의 경우 임의로 두 곳을 만져보면 아무런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데 이는 형태[形]는 다르지만 기능[用]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부를 제거하더라도 불완전한 형체가 되지는 않는다. 반면 관품은 일부분이 부서지면 생명에 해를 입게 되고 심지어는 이로 인해 죽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옌푸가 ‘관품’이라는 역어를 선택한 이유는 organism이 생명을 가졌다는 의미를 좀 더 확실히 나타내기 위해서였다고 볼 수 있다. 그에게 기관을 가졌다는 것은 단순히 도구적, 분업적인 것을 넘어 생명의 차원에서 설명된다. 그렇다면 ‘관(官)-품(品)’이라는 말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들어가보자. 


글_김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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