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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청년니체

니체의 ‘아니오’ (1)

by 북드라망 2018. 9. 18.

니체의 ‘아니오’ (1)

- 보이지 않는 손은 없다 

아이들이 처음으로 배우는 말은 엄마, 아빠, 맘마 정도다. 그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들이 입에 달고 사는 말이 나온다. “아니야~”, 혹은 “싫어!” 부모와 자식 간의 끊임없는 입씨름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이제 주면 주는 대로 받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던 그 ‘착한’ 아이는 온데간데없다. 대신 말끝마다 ‘아니야’를 붙이며 고집을 피우는 ‘미운’ 아이가 그 자리를 채운다.

 

사실 ‘아니오’라는 거부표현은 아이들이 성장했다는 신호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들은 부모와 같이 가까운 존재와 자신을 구분하지 못한다. 그저 한 몸처럼 여기는 것이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아이들은 눈앞에 있는 사람들과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나’라는 존재, ‘자아’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럼 이제 아이들은 당당히 말한다. 아니야~.



삶에서 ‘아니오’가 폭발하는 또 다른 시기가 있다. 사유가 봄을 맞이하는 시기, 사춘기다. 봄이 오면 만물이 생동하듯, 사춘기를 맞이한 우리 속에는 사유의 싹이 자라난다. 비로소 생각이라는 것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나게도 이 봄에 태어나는 새싹은 ‘아니오’의 모습을 하고 있다. “아니야, 나를 내버려두라고!” 이렇게 사유의 봄은 반항이라는 폭풍우와 함께 온다.

 

사유의 봄이 오다

 

사춘기의 ‘아니오’는 세상을 향한 외침이다. 사춘기, 우리는 자아라는 좁은 테두리를 벗어나 세상을 향해 첫 발을 내딛는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하는 사실이 하나 있다. 봄의 새싹이 출발하는 곳은 땅 속 저 깊은 곳이라는 것! 우리는 대지 위로 돋아난 푸릇푸릇한 새싹만을 생각한다. 하지만 모든 새싹은 대지 아래에서 시작된다. 땅 속에 묻힌 씨앗은 겨우내 얼었던 땅이 녹는 것으로 대지 위의 봄을 예감한다. 그리고 그 어둠 속, 대지의 무게를 온 몸으로 느끼며 싹을 틔운다. 그 싹이 대지 위로 나가기 위해서는 지난한 시간을 통과해야 할 것이다. 사춘기란 바로 대지 아래 씨앗이 첫 싹을 내놓는 시기이며, 대지를 뚫고 나아가는 그 새싹의 시간이 청년기다.

하여 사유의 봄은 어둠으로 온다. 어둠 속 새싹은 온 몸으로 대지의 무게를 느낀다. 어떻게든 그 무게를 견디며 대지를 뚫고 나가야한다. 자신을 짓누르는 세상의 무게, 자신을 나아가지 못하게 가로막는 거대한 힘. 이것이 청년에게 다가온 세상의 첫 모습이다. 청년은 그 세상을 향해 외친다. 아니야, 싫어, 나를 그냥 가게 내버려두라고. 반항이란 대지 아래 새싹이 자신을 키워나가려는 하나의 몸부림일 것이다. 그렇게 청년은 세상과 불화한다.

 

하지만 모름지기 봄은 봄인 법. 청년의 시간은 그 이름에 걸맞게 푸르르다. 생명의 활발발한 기운으로 충만한 푸른 봄, 청춘. 생각해 보라. 대지라는 거대한 힘을 뚫고나가려는 새싹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강인한 생명력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이제 갓 제 모습을 내놓은 그 작은 싹은 거대한 나무 못지않은 생명력을 자신 안에 품고 있는 것이다. 청년의 봄은 이처럼 어둠 속의 푸름이고, 푸름 속의 어둠이다. 이것이 청년의 세계이자, 청년만이 가질 수 있는 빛깔이며, 그 한 가운데 청년의 ‘아니오’가 있다.

 

니체에게도 이 사유의 봄이 찾아왔다. 그 푸른 어둠으로, ‘아니오’의 폭풍우와 함께.

 

세계와 마주하다

 

1862년, 18살의 니체는 세계 앞에 서 있었다. 그것은 거친 파도로 일렁이는 거대한 바다였다. 세계는 끊임없이 변해가고 있었고, 거대한 파도처럼 자신을 덮쳤다. 그렇게 세계의 흐름에 실려 어딘가로 끌려가고 있는 듯한 느낌. 거대한 바다 앞에서 선 나약한 존재로서 인간. 그렇게 니체는 운명이란 것에 대해 사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운명과 역사>에 그 사유를 담는다.

 

운명이라고 하면 우리는 뭔가 대단한 것을 떠올리지만, 사실 매일의 일상에서 경험하는 것이 운명이다. 우리는 예기치 못한 수많은 사건들을 만나고, 때로는 그런 사건들에 얽매여 고통스러워하곤 한다. 불현듯 닥쳐오는 사건들이란 내가 의도해서 만든 것도 아니며, 내 의지대로 움직여 주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것의 의지대로 내가 움직여지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말하곤 한다. 세상이 그런데 나라고 어쩌겠어요, 남들 다 하는데 나 혼자서 안 할 수는 없잖아요, 그저 따라가는 수밖에, 라고. 다름 아닌 여기가 운명의 자리다.

 

니체가 묻고 싶었던 것은 이것이다. 왜 우리는 이렇게 세상의 흐름에 떠밀려 살아갈 수밖에 없을까. 대체 세상이란 놈은 어떤 것이기에 우리는 싫다고, 싫다고 하면서도 그것에 따라 살아가게 되는 것일까. 우리를 끌고 가는 세계의 거대한 흐름으로서 운명. 그 운명 앞에서 자신의 길을 놓치고 마는 인간이란 존재. 그러니 자신이 원하는 삶의 길을 내고자 한다면, 운명이라는 놈을 직시해야 한다. 이처럼 운명에 대한 질문은 자유에 대한 질문과 맞닿아 있다.

 



18살 밖에 되지 않은 젊은이가 운명에 대한 이런 탐구를 하다니, 왠지 대단해 보인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운명에 대한 탐구만큼 청년에게 어울리는 일이 있을까 싶다. 자아라는 좁을 테두리를 벗어나 세상과의 첫 만남을 가지게 되는 것이 청년이다. 그렇기에 청년들은 그 어떤 시기보다 세상에 대한 민감한 감각을 자랑한다. 니체가 유달리 성숙한 인물이어서, 혹은 천재여서 운명과 자유에 대해 물은 것이 아니다. 그는 한 명의 청년이었을 뿐이고, 그 청년으로서 마주할 수밖에 없는 질문들을 던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청년이 마주한 운명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아니오, 보이지 않는 손은 없습니다!

 

운명에 대한 니체의 첫 인상은 시계였다. 시간은 말 그대로 흘러간다. 우리를 통과해 제 갈 길을 갈 뿐이다. 누구도 이 시간의 흐름을 거역할 수 없다. 우리는 시간의 흐름에 실려 가고 있으며, 그렇게 자라고 늙고 죽는다. 운명의 거대한 수레바퀴는 무엇보다도 이 시간이란 것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시계는 그 시간의 흐름, 운명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시계에는 어떤 목적지가 없다. 한 바퀴를 돌고나면 다시 한 바퀴를 돌고, 그러고 나면 다시 한 바퀴를 돌고, 그리고 또 다시……. 시계는 매번 돌아갈 뿐, 어떤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운명에 대해 목적이란 것을 떠올리곤 한다. 운명은 어디를 향해 흘러가는지, 그 종착지는 어디인지, 운명이란 것이 품은 그 목적이란 대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목적지를 향해 운명의 수레바퀴를 굴리고 있는 보이지 않는 손의 세계로 들어간다. 하나, 시계는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이 영원한 생성에는 끝이 없을까? 이 거대한 시계장치를 움직이는 태엽들은 무엇일까? 그것들은 숨겨져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우리가 역사라 부르는 거대한 시계에서와 동일할 것이다. 사건들이 시계를 돌리는 다이얼이다. 시계 바늘은 한 시간, 한 시간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12시가 지나면 바늘은 그 운동을 다시 새로 시작한다 ; 세계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목적들은 오직 우리에게만 존재할 뿐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운명과 역사〉 중)

 

운명에는 정해진 방향이 없다. 그것은 사건과 사건의 연속일 뿐이다. 그 사건들에 하나의 방향을, 목적을 읽어내는 것은 인간이다. 운명의 수레바퀴를 굴리는 보이지 않는 손은 없다! 방향 없는 사건들로부터 목적지를 상상하는 인간만이 있다. 그러니 보이지 않는 손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머릿속에 있을 뿐이다.

세계를 굴러가게 하는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부정. 이것은 니체에게 엄청난 일이었다. 단지 경험이 미천한 청년이어서, 아직은 배움이 짧은 청년이어서 그랬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런 청년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제 갓 세상을 만난 청년, 그래서 세상의 편견에 아직 잠식당하지 않은 청년, 그 청년이기에 자신의 세계가 당연하다고 받아들인 것들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것은 분명 니체에게 엄청난 일이었다.

 

니체의 부정은 자신의 시대, 자신의 환경, 그리고 자신의 믿음, 요컨대 기독교를 향한 ‘아니오’였다. 기독교는 이 세계의 보이지 않는 손, 신을 전제한다. 이 신의 지반 위에 2000년 유럽이 서 있었다. 니체의 친가와 외가는 모두 목사 집안이었고, 그의 아버지 역시 1859년 돌아가시기 전까지 목사로 사셨다. 니체는 그 위에서, 그 속에서 자랐다. 기독교는 그의 진리이자 세계였다. 바로 이 진리와 세계를 향해 니체는 ‘아니오’라고 했던 것이다. 몇 년 후, 니체는 어머니에게 말할 터였다. 당신의 바람을 들어드리지 못하겠다고, 신학 공부를 하지 않겠노라고.


글_​신근영(남산 강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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