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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지의 사상가, 맹자

맹자와 그의 시대

by 북드라망 2018. 9. 5.

맹자와 그의 시대


우연히 동양고전에 접속해서 지난 10년간 정말 빡세게 읽었다. 

많이 배웠고,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고, 나름 바뀌었다.

어쨌든 갈무리가 필요하다는 생각, 혹은 갚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누구에게? 공자님에게? 하하. 그럴지도.

하지만 우선은 함께 공부했던 친구들에게 그동안 떠들어댔던 말들을 공들여 주워 담아 

전달해 보려 한다. 친구들이여, 잘 읽어주길!




1. 일(一) 세계에서 다(多)의 세계로


맹자를 이해하기 위해 『맹자』 밖을 살펴봐야 한다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진리이다. 지구가 어떤 곳인지를 더 잘 알기 위해 달에서 지구를 바라보는 것과 비슷하달까. 그래서 맹자라는 인물과 그의 사상은 『맹자』라는 텍스트 안에서 만큼이나 『장자(莊子)』, 『한비자(韓非子)』, 『관자(管子)』, 『열자(列子)』, 『전국책(戰國策)』 같은 다른 텍스트 속에서 더 잘 보인다. 아참 가장 중요한 텍스트를 빼먹었다. 바로 『사기(史記)』이다. 그런 텍스트들을 통해 우리는 흔히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라고 부르는 특정한 시대, 특히 맹자가 살았던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대한 어떤 조망도를 갖게 된다. 몇 년 전 나는 이런 도표를 만든 적이 있는데 이 도표를 사마천의 말로 풀면 다음과 같다.


 

“진(秦)효공 원년, 황화와 효산 동쪽에 여섯 개의 강대국이 있었는데, 진 효공은 제 위왕, 초 선왕, 위 혜왕, 연 도후, 한 애후, 조 성후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였다. 회하(淮河)와 사수(泗水) 사이에는 10여개의 소국이 있었으며 (魯, 宋, 衛, 鄒, 縢, 薛 등)....주 왕실이 쇠약해지자 제후들은 무력으로 정벌하고 서로 다투어 합병하였다.” ( 『사기본기』, 「진본기」, 까치, 133쪽)


BC 4세기, 이제 천명을 받아 폭군이었던 은나라 주(紂)임금을 처단하고 천하를 통일했던 주(周)라고 하는 하나의 세계는 사라지고 없었다. 천자를 중심으로 제후와 대부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종법제 질서는 파괴되었다. 이미 춘추시대부터 “시해당한 군주가 36명이나 있고, 멸망한 나라가 52개국이나 있으며, 여러 나라로 분주하게 유랑하면서 자기의 사직(社稷)마저 보존하지 못하였던 제후들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사기열전』, 「태사공자서」, 까치, 1212쪽) 그렇게 분열, 합병, 멸망, 이합집산을 계속해나가던 제후국들은 맹자가 살았던 전국시대에 와서 7개의 강대국으로 세력이 재편되어 서로 일진일퇴하면서 아슬아슬한 균형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들 제후들은 모두  ‘왕’을 자처하면서 천자의 통치행위였던 ‘예악정벌’을 스스로 결정했다. 허울뿐이나마 유지되던 천자의 권위가 완전히 사라진 것이었다.


그것은, 공자처럼 말하면 하나의 세계가 무너진 “천하무도(天下無道)”의 시대였다.(“孔子曰 天下有道 則禮樂征伐 自天子出 天下無道 則禮樂征伐 自諸侯出”, 『논어』, 「계씨편」, 2장) 하지만 다른 식으로 말하면 다원화된 세계에 걸맞은 변법과 개혁이 강력하게 추동되었던 시대이기도 했다. 하여 이 시대는 맹자의 시대라기보다는 “지혜로운 자는 법을 만들고, 어리석은 자는 법에 제지당하고, 현명한 자는 예를 고치고, 평범한 자는 예에 구속된다”고 말하는 강력한 변법개혁가 상앙(商鞅)과 같은 사람들의 시대이고(『사기열전』, 「상군열전」, 까치, 92쪽), 합종연횡의 외교술을 구사하며 “한번 노하면 제후들이 두려워하고 가만히 있으면 천하가 조용해졌다”는 (『맹자』, 「등문공 하」 2장) 정치외교 9단 소진(蘇秦), 장의(蘇秦)와 같은 사람들의 시대이고, 전쟁을 할 때마다 “13만 명을 참수”하거나 “2만 명을 수장”시키거나 40만 명을 생매장시키거나 45만 명을 포로로 잡았던 (『사기열전』, 「백기왕전열전」, 까치, 194쪽) 백기(白起)와 같은 전쟁달인들의 시대였다.


“당시 진(秦)나라는 상군(商君)을 등용하여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군대를 강하게 하였고, 초(楚)나라와 위(魏)나라는 오기(吳起)를 등용하여 싸움에서 이기고 적을 약하게 하였다. 제나라의 위왕(威王)과 선왕(宣王)은 손자(孫子), 전기(田忌) 등의 무리를 등용하여 제후들이 동쪽을 향하여 제나라에 조회(朝會)하게 하였다. 천하는 바야흐로 합종(合從)과 연횡(連橫)에 힘썼으며, 남을 공격하고 정벌하는 것을 현명하다고 여겼다.” (사마천, 『사기열전』, 「맹자순경열전」, 까치, 204쪽)


실력과 성과로 승부를 보던 시대! 바야흐로 세상은 요동치고 있었다.


    

2. 힘의 시대, 말의 시대  


하나의 세계가 무너졌다는 것은 유일한 권력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그것은 권력이 아래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이고, 더 많은 사람들이 권력을 분점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동시에 그것은 힘들이 공존(혹은 제어)할 수 있는 공통의 근거나 척도가 사라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더 이상 형의 나라도 아우의 나라도 아닌 관계에서는 오로지 물리적 힘들만이 쟁투한다. 하여 죽어나는 것은 백성 뿐. 형벌로 다리가 잘리고, 전쟁에 끌려가 죽고, 남은 가족은 동사(凍死)하거나 아사(餓死)한다.


“지금 세상에서는 처형된 자가 베개를 나란히 하고 칼을 쓰고 차꼬를 찬 자가 비좁아 서로 밀치며 형벌로 죽은 자가 서로 바라보고 있다.” (『장자』, 「제유」)


“그들은 배가 갈리고 창자가 파헤쳐지고, 목이 잘리고, 얼굴이 뭉개지고, 머리와 몸통이 분리되고, 몸은 풀밭에 흩어지고, 머리통은 땅에 나둥그러진 채, 서로 국경에서 바라보고 있습니다. 또 부모, 자식, 늙은이, 젊은이들의 손과 목을 묶어 줄줄이 연결한 무리의 포로들이 길 위에 끊일 날이 없습니다. 죽은 사람의 영혼은 홀로 슬퍼할 뿐, 제사를 지내 줄 유족마저 없습니다. 백성들은 삶을 영위할 수가 없고, 가족들과 뿔뿔이 흩어져 여기저기 떠돌다가 노예나 첩이 된 사람이 천하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사기열전』, 「춘신군열전」, 까치, 259쪽) 




더 심한 잔혹동화들도 부지기수다. 예를 들어 진나라와의 전쟁 중 보급로가 끊겨 굶은 지 46일째가 지나자 조나라 군사들이 은밀히 서로를 죽여 잡아먹었다는 이야기 (위의 「백기왕전열전」, 193쪽) 혹은 초나라의 포위 속에서 고립된 송나라 사람들이 먹을 게 없어서 자식을 바꿔 잡아먹고 해골로 불을 땠다는 ‘역자석해(易子析骸)’ 이야기 같은. (『사기열전』, 「송미자세가」, 까치, 163쪽)


위나라 혜왕의 아들 양왕이 맹자에게 묻는다. “천하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天下惡乎定) ”맹자가 대답한다. “하나로 통일되겠지요(定于一)” (『맹자』, 「양혜왕 상」, 6장) 문제는 어떻게? 였다. 무한경쟁, 각자도생 세상에서 어떻게 공통의 질서와 윤리를 다시 세울 것일까?


장예모의 『영웅』에서는 진시황을 죽이려던 자객 무명(이연걸)이 진시황의 열 걸음 앞까지 나아가지만 마지막에 암살을 포기한다. 전란을 끝내고 백성의 편안한 삶을 되찾아주기 위해 진시황의 천하통일을 지지해야 한다는, 하여 개인의 복수 따위는 묻어야한다는 또 다른 자객 파검(양조위)의 뜻에 따라. 그것은 『자객열전』에 나오는 형가(荊軻)를 모티프로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자객에 관한 영화라기보다는 영화의 부제가 알려주는 대로 ’천하의 시작‘에 관한 영화이고, 그 천하통일을 만든 숨겨진 영웅들에 대한 영화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역사에 대한 결과론적인 해석 아닐까? 아니 그보다 지금 여기서 ‘팍스 차이나’를 재구축하고 싶은 장예모의 무의식적 열망에 관한 이야기는 혹시 아닐까? (이 영화가 개봉되었을 때 장예모의 팬이었던 나는 만사를 제치고 한달음에 달려갔었다. 그리고! 이 중국식 국뽕 영화에 심히 당황한 나머지 난 장예모에 대한 오랜 짝사랑을 단번에 끊어버렸다. ㅋㅋ)




실제로는 훨씬 더 복잡했을 것이다. 다시 하나(一)의 세계가 도래할 것인가? 그것은 불가피한 것일까? 필요한 것일까? 필요하다고 해도 어떻게 그것을 가능하게 할까? 누군가는 법이, 누군가는 힘이, 누군가는 외교적 합의가 대안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누군가는 현실주의자가 되었을 것이고, 누군가는 이상주의자가 되었을 것이고, 누군가는 논리주의자가 되었을 것이다. 정치가 무엇인지 다시 규정되고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도 논란이 되었을 것이다. 미쳐 날뛰는 날것의 힘들을 조율하기 위해 역으로 이성적인 탐구가 확산되고 합리적인 언어가 추구되었다. 설득력 있는 수사법과 치열한 논쟁술도 필요했다. 힘들의 시대에 도래한 말들의 시대! 전국시대는 그런 시대였다.



3. 지식인들, 세상의 전면에 서다.  


교과서적인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자. 춘추전국시대의 역동성은 철제 농기구와 소를 이용한 심경(深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밭을 깊이 갈고 정성껏 김을 매었더니 곡식이 풍성하게 자랐다.”(『장자』, 「칙양」)는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새로운 기술이 생산력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황무지 개간 등으로 인해 사유지도 늘어나고 가족단위로 농사를 짓는 자작농도 늘어났다. 이에 따라 조세제도가 바뀌고 관료임용방식이 바뀌게 되었다. 공을 세우는 사람에게 벼슬을 주고 땅을 떼어주는 분봉제(分封制)에서 일정한 월급을 주는 봉록제(俸祿制) 방식으로.


뿐만 아니라 철제 공구(工具)를 사용한 상공업도 발전하기 시작했다. 상공업의 생산과 교환이 활발해지면 당연히 화폐경제도 발달하고 전국적인 시장도 성립하고 도시도 활성화된다. 춘추시대의 도시는 많아야 1,000호(1만 명 정도)를 넘는 게 고작이었으나, 전국시대에 오면, 예들 들어 제나라 수도 임치(臨淄)의 경우 대략 50만~60만 명의 인구가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임치에 거주하는 시민 가운데는 부유한 자가 많아 도시는 시장을 중심으로 오락 연회가 번성하였으며, 음악, 닭싸움, 개경주, 노름, 축구, 곡예, 기타 모든 종류의 오락이 성행했다. 대로 위는 수레로 가득하여 정체되고 거리는 오가는 행인이 어깨를 부딪칠 정도였다고 한다.” (자이즈카 시게키 등, 『중국의 역사-선진시대』, 혜안, 358쪽)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는 사(士)라는 계층의 변화일 것이다. 과거에 그들은 귀족계급의 맨 아래쪽에 위치한 자들이었고, 종법관계에 붙박여 혈연관계에 강하게 의존하고 있는 집단이었다. 그러나 사회의 유동성이 커짐에 따라 이들의 전문적 지식과 경험이 교환관계 속으로 진입하게 되었고, 그만큼 이들은 기존의 종법관계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어떤 점에서는 공자로부터 시작되었지만 이제는 누구라도 실력만 있으면 ‘자신을 팔 수 있는(“沽之哉! 沽之哉! 我待賈者也”, 『논어』, 「자한」 12장) 사(士)계층이 대두한 것이다.


우리는 이 시기 출현한 전형적인 사(士)계급으로 소진(蘇秦), 장의(蘇秦)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일종의 사학(私學)이었던 귀곡(鬼谷)선생의 문하들이었고, 공부가 끝난 후 여러 나라에서 취직을 시도했으나 모두 떨어지는 실패를 맛보았고, 다시 발분하여 스펙을 쌓았고(소진은 췌마법揣摩法이라는 심리학을 공부했다고 한다), 마침내 ‘뜻을 얻어’ 천하를 주름잡는 평민출신 정치가가 되었다.


한편 그 교환관계의 다른 한편에는 누구라도 엄청난 스카우트 비용을 대기만 한다면 그리고 공손한 예로써 초청한다면, 상당한 실력자들을 휘하에 거느릴 수 있는 제후(혹은 경상卿相)들이 존재한다. 대표적인 것이 그 유명한 전국시대 사군자(四君子), 즉 제나라의 맹상군, 조나라의 평원군, 위나라의 신릉군, 초나라의 춘신군들인데 이들은 각각 약 3,000여명의 빈객을 휘하에 두었다. 사마천은 이들이 “앞을 다투어 사인士人을 공손히 접대하고 빈객들을 초치하는 데 서로 힘을 기울여 경쟁하였고, 그 빈객들의 힘을 이용하여 나라의 정치를 돕는 한편 자신들의 권력을 굳히려 하고 있었다.”(『사기열전』, 「춘신군열전」, 까치, 262쪽)고 말한다.


그리고 이 교환관계의 가장 정점에 우리가 직하학궁(稷下學宮)이라고 부르는 제가백가의 산실이 존재한다. 직하학궁은 제나라 수도 임치성의 직문(稷門) 밖에 설치된 일종의 연구기관이었는데 언제 설립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맹자와 동시대인 제위왕, 제선왕 시대에 최고로 번성했다고 한다.(바이시, 『직하학연구』, 소나무, 105쪽)


“선왕(宣王)이 새로운 사계층(文学游説之士)들을 좋아하여 추연, 순우곤, 전병, 접여, 신도, 환연 같은 무리들 76명 모두에게 집을 하사하여, 상대부(上大夫)로 삼고, 관직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이 토론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제나라의 직하에는 학자들이 많아져서 그 수가 수백 명에서 천명을 넘어섰다.”(『사기세가』, 「전경중완세가」, 까치, 407쪽)

 

직하학궁의 가장 큰 특징은 “不治而議論”(위의 번역에 따르면 “관직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이 토론”한다는 뜻이다)이다. 「맹자순경열전」에도 “추연(騶衍)을 비롯하여 제나라의 직하선생....무리가 각자 글을 지어 국가의 치란의 일들을 논술하여 이로써 당시의 군주들에게 읽혀지기를 간구하였으니”라는 표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은 상당한 대우를 받되 구체적인 자리는 없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이유가 뭘까? 순수한 연구기관으로 정치적 외압으로부터 학문연구를 독립시키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역으로 지식인의 역할을 자문정도로 제한하고 그들의 권력화를 구조적으로 막기 위해서였을까? 그곳의 지식인들은 자신을 순수한 연구자라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정치적 주체라고 생각했을까? 직하학궁은 ‘인재개발원’에 가까울까? 아니면 ‘브루킹스 연구소’에 가까울까? 아니면 ‘포드재단’ 같은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참의원이나 원로원의 기능을 가졌던 것일까? 좀 더 따져봐야 할 중요한 쟁점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맹자가 제 선왕에게 측은지심에 대해 설파했던 곳도, 순우곤(淳于髡)과 “형수가 물에 빠지면 건져낼 것인가? 아닌가?”에 대해 논쟁을 한 곳도, 고자(告子)와 인간의 본성에 대해 논쟁을 한 곳도, 호연지기(浩然之氣)에 대한 자신의 사유를 길러낸 곳도, 바로 이곳, 직하학궁에서였다는 점을 확인하는 정도로 하고 일단 넘어가자.



4. 맹모의 신화를 벗기고   


우리는 점차 맹자에게 줌 인(zoom in) 중이다. 전란의 참혹함과 신분상승의 기회가 공존했던 전국시대로부터 시작하여 가장 활기찼던 제나라 임치에 모여 있던 천여 명의 지식인 집단을 통과해 그 중 한 명이었던 우리의 주인공 맹자에게로 말이다. 드디어 맹자 개인사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가 된 것이다. 그런데 좀 난감하다. 맹자의 백그라운드에 대해 할 말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일단 우리의 백과사전, 『사기』에도 맹자의 백그라운드에 대한 정보는 딱 열두 자에 불과하다. “맹가(孟軻)는 추나라 사람으로 자사(子思)의 문인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孟軻, 騶人也. 受業子思之門人”(『사기열전』, 「맹자순경열전」) 『맹자』 안에서도 맹자 개인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맹자는 논어에 나오는 전유(顓臾)나 비(費)처럼 노나라의 부용국(附庸國)이었던 추(鄒)나라 출신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점은 나에게 맹자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를 준다.


우선 맹자는 공자와 동향사람이다. 그렇다면 공자를 사숙하는 것도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문인에게 직접 배우는 것도 물리적으로 가능하다. 또한 맹자는 묵자(묵적)와도 동향사람이다. 그러니 묵자의 문인들과도 어우러져서 살았을 것이다. 사실 나는 늘 왜 맹자가 “천하의 말이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에게 돌아간다.”(『맹자』, 「등문공 하」, 9장)라고 했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건 지금 내가 알고 있는 전국시대 담론배치와 다르기 때문이다. 왜 종횡가나 법가가 아니라 굳이 양주, 묵적을 문제 삼는 것일까? 라는 질문. 그런데 맹자의 고향이 추(鄒)나라이고 맹자가 돌아다닌 지역이 추나라-등나라-제나라-송나라-그리고 수도를 안읍에서 대량으로 옮긴 이후의 위나라였다는 사실을 확인하면, 맹자의 심상지리에는 서쪽의 진나라나 조나라, 한나라, 북쪽의 연나라 같은 경우는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맹자의 ’천하‘는 노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작은 작은 동심원에 불과했고 맹자의 동선은 소진, 장의와 (동시대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겹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맹자 개인사와 관련하여 오히려 문제는 그 유명한 맹모(孟母)의 에피소드들이다. 맹자의 어머니가 아들 교육을 위해 세 번이나 이사를 갔다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의 이야기, 혹은 맹자가 중간에 공부를 게을리 하자 자신이 짜던 베를 싹둑 잘라서 경계를 시켰다는 ‘맹모단기(孟母斷機)’ 등의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사실 맹모에 관한 이야기는 맹자에 관한 최초의 기록인 『사기』에는 없다. 그것은 잘 알려져 있는 바처럼 전한(前漢)시대 유향(劉向 기원전 77~6)이 지은 『열녀전(列女傳)』, 「모의전(母儀傳)」에 기록되어 있다. 말 그대로 여러 여성들의 전기 중, 특히 ‘훌륭한 어머니’ 파트에 배속되어 있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맹모에 관한 이야기는 크게 네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는데, 앞에서 말한 ‘맹모삼천지교’의 고사와 ‘맹모단기’의 고사, 그리고 맹자가 부인이 옷 벗고 있는 것을 보고 음란하다 여겨 내쫓으려 한 것을 맹모가 방어한 이야기, 마지막으로 부인이란 자신의 뜻대로 하지 않고 어려서는 부모를, 출가해서는 남편을, 남편이 죽으면 자식을 따른다는 그 유명한(혹은 악명 높은^^) ‘삼종지도(三從之道)’의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열녀전』 이후 2,000년쯤 뒤에 곽말약(郭沫若 1892 ~1978)이 맹모의 이야기를 다시 각색한다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유향의 맹모전에 나오는 네 개의 에피소드 중 세 번째 에피소드를 재구성했다. 이야기는 이러하다. 맹자가 아침에 일어나서 웃통을 벗고 체조를 하면서 호연지기를 키우고 있었다. 부인이 아침을 먹으라고 맹자를 부른다. 그런데 부인은 현숙하지만 섹시한 글래머였다. 두 사람 모두 어제 밤의 불타는 사랑을 기억하고 있다. “지난 밤에 맹자는 맹 부인을 사랑해주었던 것이다. 그것도 참외를 먹듯이 한 방울의 즙까지도 아까울세라 모두 마셔버렸던 것이다.”(곽말약, 『역사소품』, 범우사, 61쪽) 오해 말기를. 나는 지금 하이틴로맨스 소설의 한 구절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루쉰과 동시대 인물이었으며 루쉰과 논쟁하기도 하고 우정을 쌓기도 한 곽말약. 신문화 운동가이자 고대사 전문가이자 문학가였던 곽말약의 소설을 말하고 있는 중이다. 어쨌든 부인에 대한 정욕과 성현이 되고자 하는 의지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맹자를 보다 못한 맹자 부인이 남편이 성인이 되기를 바라면서 스스로 집을 나갔다는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이쯤 되면 모두 짐작하겠지만, 맹모 혹은 맹부인 이야기는 맹자보다 유향에 대해 혹은 곽말약에 대해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알려준다. 『맹자』 안에 언급된 ‘어머니를 후히 장례 지냈다’는 그 단 하나의 팩트를 모티프로 하여 유향은 자기 시대의 적폐였던 외척과 후궁을 경계하기 위해, 곽말약은 문학이란 역사적 사실을 자유롭게 재해석하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이야기를 새롭게 구성한 것이다. 그러니 맹모에 대한 이야기는 잠시 잊어도 좋지 않을까? 맹모가 없는 맹자의 이야기를 이제부터 시작해보자. 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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