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이탈로 칼비노, 『나무 위의 남작』 - 우리 시대는 어떻게 태어났는가?

이탈로 칼비노, 『나무 위의 남작』

- 우리 시대는 어떻게 태어났는가?


『나무 위의 남작』은 칼비노의 '우리의 선조들' 3부작 중 두번째 작품이다. '우리의 선조들'이라는 타이틀이 보여주듯이 칼비노는 자신들의  시대를 계보학적으로 추적한다. '우리의 선조들'의 첫번째 작품이었던 『반쪼가리 자작』이 '인간'은 어떻게 탄생하는지에 초점이 맞춰졌다면, 『나무 위의 남작』은 한 시대의 탄생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듯 보인다. 『나무 위의 남작』의 주인공 코지모는 부모와의 다툼 끝에, 반항의 방법으로 '나무' 위에 올라가 내려오지 않는다. 처음에는 단지 '반항'이었던 것이 나중에는 그의 삶이 되고 말았다. 그는 평생 나무 위에서 산다. 나무와 나무 사이를 이동하며 사냥을 하고, 요리를 하기도 하며, 책을 읽고, 글을 쓰기도 한다. 소설의 중심적인 '공간'인 하늘과 땅 사이, 나무 '위의' 공간이 상징하는 바는 의미심장하다. 


『나무 위의 남작』은 '시대'의 결이 차곡차곡 접혀있는 소설이다.


부모님들은 '영지'와 '대저택'으로 상징되는 '과거' 속에서 살고 있다. 시대가 전진하고 있는 것을 부정하며 '공작' 작위에 집착하는 아버지와 왕위 계승 전쟁의 시대에 붙들려 있는 어머니는 '좋았던 과거'를 현재로 연장하여 이어붙이는 사람들이다. 또 권태와 무기력' 때문에 그는 자신이 세운 엄격한 규칙들을 지키지 못하는 가정교사, 포슐라플뢰르 신부는 '구시대'의 권태와 무력을 표상한다. 그들에게 '미래'는 단지 '반항', '미친 짓', '납득 불가능한 일'로 감지될 뿐이다. 그러한 과거의 인물들과 대조되는 것이 바로 주인공 코지모와 화자인 그의 동생, 그리고 그들의 누나 바티스타다. '미래'는 이들을 통해서, 셋으로 분기하는 데, 계몽주의 시대의 '이상적 인간형'으로 변화해가는 주인공 코지모, 과거의 영광과 시대의 격변 사이에서 적당히 타협하는 화자, 과거에 붙들려버리고 마는 그들의 누나까지 당대의 인간들이 휩쓸려갈 세가지 유형의 미래가 그들을 통해서 표현되고 있다. 칼비노는 소설적인 공간 안에 다양한 시대를 지향하는 캐릭터들을 배치함으로써 18세기라는 과도기이자 격변기를 압축적으로 그려낸다. 


다시 '나무 위'라는 공간의 특이성으로 돌아오자. 주인공 코지모는 '식탁 예절'을 지키지 않았다, 그리고 곧 벌이 부과될 것이다. 그러나 코지모는 식사도 벌도 받지 않는다. 그는 곧장 나무 위로 올라가고 만다. 그리고 두번 다시 땅에 발을 디디지 않는다. '땅으로부터의 이탈'이 상징하는 바는 무엇일까? 


"난 지금 땅 위에 서 있는 게 아니오. 그러니 당신네 땅에 있는 것도 아니오!" 코지모 형이 분명하게 말했다. 벌써 이런 말을 덧붙이고 싶은 유혹이 생겼다. '그리고 난 옴브로사의 공작이고 이 모든 영토의 영주요!' 하지만 형은 아버지와 말다툼을 하고 식탁에서 도망쳐 나온 지금, 아버지가 항상하던 그 말을 하고 싶지 않아 꾹 참았다.

- 31쪽


'땅'에서 이탈한 코지모는 '중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나무 위로 올라간 그는 나무를 타고 돌아다니다가 코지모의 가문과 지방의 유력 가문 지위를 두고 다투는 온다리바 가문의 영역까지 들어가게 된다. 거기서 만나게 되는 소녀 '비올라'는 코지모의 인생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어쨌든 '땅'의 권리를 주장하는 비올라에게 코지모는 '나무 위'는 너희 땅이 아니라고 선언한다. '땅', 그것은 '구체제'를 떠받치는 기둥이자, 그의 부모님이 갇힌 과거('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이다. 의미심장한 것은 코지모가 자신을 '공작'이라고 호명하고 싶은 유혹에서 벗어난다는 점이다. 이때 비올라는 코지모에게 '땅으로 내려오면 너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나의 하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벗어남과 사로잡힘의 중간지대이자, 땅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강하게 '중력'을 경험하게 되는는 '나무 위' 공간의 특성이 드러난다. 이것을 시대적 차원으로 치환해 보면, 구질서의 관성에서 벗어나려는 선구자들의 무의식적 저항으로 읽을 수도 있고, 땅의 속박에서 벗어나려는 인류의 노력으로 읽을 수도 있다.


'빛의 세기'(Siècle des Lumières)의 시작에 루소(좌)가 있었고, 그 끝에 칸트(우)가 있었다.


'나무 위'에서 살게 된 코지모는 '개척'을 시작한다. 곳곳에 편의시설을 만들고, 사냥하는 법을 배우고, 나무 위에서 이동하는 법에 익숙해져 간다. 능력의 확대 과정이자 자유의 확대 과정으로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이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먹고 사는 문제의 해결이다. 코지모를 나무 위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부모님들은 음식으로 유혹하기도 하고, 더럽혀진 옷을 그대로 입고 있는 그를 그대로 내버려두기도 한다. 만약 코지모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는 다시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 그를 뒤로 잡아끄는 힘으로부터 그는 어떻게 탈출할 수 있을까? 스스로 먹을 음식을 구하고, 잠잘 곳을 만들며, 옷을 지어 입어야 한다. 그는 나무 위, '자신의 영토'를 자신의 설계에 따라 차근차근 재편해 간다. 그곳에는 과거부터 이어져온 '질서'가 없다. 모든 것을 스스로 다시 창출해야만 하는 것이다. 중세로부터 이어져온 인간 사회의 기초질서가 급격하게 붕괴되는 가운데, 새 사회의 신질서를 구축하려고 했던 '계몽주의자들'에 대한 은유로서 이보다 더 훌륭한 소설적 표현이 또 있을까. '근대'는 자유의 요구와 그것의 확대로부터 출발하였고, 파괴를 통해 새 체제를 구축하며 만들어진 세계다. 코지모가 '나무 위'의 세계로 올라가는 과정, 그 세계에 자신의 질서를 부여하는 과정은 실제 역사의 소설적 은유이면서 동시에 실제로는 이루지 못한 이상에 대한 작가 자신의 욕망의 전사(轉寫)가 아니었을까? 


"우리 형은 땅을 제대로 보고 싶은 사람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만 한다고 주장합니다."

- 221쪽


나무 위의 생활에 완벽하게 적응한 코지모는 나무 아래의 온갖 문제들을 본다. 거기서 그는 자연재해에 대비하는 '조직'을 만들기도 하고, 프랑스 혁명의 파도에 맞춰 계몽주의에 급격하게 경도되기도 하며, 실제 혁명군의 행군을 돕는 등, 나무 위에서 '새시대의 이상'과 조우하게 된다.(이 과정 속에서 이름난 도둑이자 소설광 잔 데이 브루기와 만나고 '독서'에 몰두하게 되는데, 이 부분은 언제가 따로 글을 쓰 계획이다. 이 부분을 읽고 잠깐 동안 책을 읽지 못할 정도로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혁명의 이상'은 어떻게 되었는가? 작품 후반부에 등장하는, 폐퇴하는 나폴레옹군을 추격해온 러시아 장교와의 짧은 대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끔찍한 전쟁'으로 마감되고 말았다. 독소전쟁(1945 종전), 소련의 헝가리 침공(1956년)과 베트남 전쟁(1960년 개전)의 사이인 1959년에 이 작품이 발표되었다는 점을 연관해서 보면 쉽게 지나칠 수 없는 대목이다. '계몽의 시대'는 나폴레옹 전쟁으로 마감되었고, 100여년 후 유럽은 파시즘의 광풍에 휘말렸으며 소련은 다시 한번 해방군이 되어 유럽으로 들어왔다. '해방군' 소련은 1956년 '자유'를 요구하던 헝가리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만다. 18세기에 태어난 꿈과 이상의 끝에는 모두 '전쟁'이 있었던 셈이다. 한 시대의 이상이 현실에서 종언을 고하고 만 것이다.


골치가 아플 정도로 신문을 읽고 책을 읽지만 형이 말하고자 했던 것들은 거기 없다. 형이 생각했던 것은 다른 것, 모든 것을 포용하는 그 어떤 것으로,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바로 삶으로 보여 주었다.

- 331쪽


삶을 구원하는 '말'은 말로써 말해지지 않는다. 삶으로 말해질 뿐. '이상'을 꿈꾸고, 실제로 그러한 이상을 '삶'에서 구현해낸 코지모의 죽음도 몹시 인상적이다. 그는 땅에서 죽지 않는다. 죽음을 앞둔 그를 보고, 최선의 치료를 하던 의사는 '신부님이 올라가셔야겠어요'라는 말로 임박한 죽음을 알려온다. 내려온 신부에게 화자인 동생이 묻는다. 


"고해 성사를 했습니까, 돈 페리클레?"

"아니요, 아니요, 하지만 좋다고, 자기는 좋다고 말하더군요."

- 333쪽


평생 루소를 좋아했고, 어느 때나 루소의 저작을 즐겨 읽었던 사람이 있었다. 그가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한 말은 'Das ist gut'(이것으로 좋다)이었는데, 그는 계몽에 대해서 '자기 스스로에게 책임이 있는 미성숙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는 계몽시대의 철학의 맨 끝단에 서서 낭만의 시대, 현대 철학으로 향하는 길을 놓은 칸트다. 나무 위에서 목가적 삶을 살면서도 최선의 체제와 최선의 안락함을 위해 노력해 왔던 코지모에게서 루소를 떠올리는 것, 또 죽어가는 코지모의 마지막 말에서 칸트를 떠올리는 것 모두 자연스럽다.(소설 속에서 그는 이 말을 남기고 바로 죽지는 않는다. 죽음의 장면일지, 되돌아가는 장면일지는 읽어볼 분들을 위해 남겨놓는다. 힌트 한가지는 그의 마지막 순간 역시 지극히 계몽의 시대를 표현하고 있다.) 나무 위에서 살다가 죽은 코지모 삶은 사실상 '근대'라는 시대의 삶과 같다. 그는 지금 우리 시대의 인식론적인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우리 시대가 이상으로 삼았던 '이념'이 어디에서 출발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전쟁은 그것들에게 종언을 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삶'은 열려있는 법. 소설은 끝났지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는 것은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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