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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 인문의역학! ▽/24절기 이야기

비움과 채움, 적음과 많음, 小와 滿

by 북드라망 2012. 5. 21.
소만, 욕(辱)으로 만(滿)해지는 시절

김동철(감이당 대중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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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만의 그림자, 보릿고개

5월의 푸름이 짙어감에 따라 농부의 속은 벌겋게 타 들어간다. 보릿고개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보릿고개는 소만 즈음에 찾아왔다고 한다. 지난해 가을 수확한 식량은 겨울과 봄을 거치며 모조리 소모되고, 이듬해 추수 때까지 남은 공백의 길목에 소만이 자리하고 있다. 숨통이 끊어질 듯 말 듯 한 고비가 찾아온 것이다. 마침 보리를 타작하여 어렵사리 연명하니, 이때를 보릿고개라 이름하였다. 나는 도시 출신에 세대도 달라 보릿고개에 대한 감각이 없다. 그저 짐작만 할 뿐이다. 그런데 만물이 자라 조금씩 차오른다는 소만과 기아에 허덕이는 보릿고개 사이에는 거리감이 느껴진다. 충만과 결여의 상반되는 이미지가 동시에 펼쳐지는 시공간이 바로 소만 즈음이다. 언뜻 보면 어울리지 않으나 그 둘은 한 쌍이다. 채워야 덜어낼 수 있고, 비워야 채울 수 있다.

보릿고개를 넘기 위해 무엇이든 먹어야 했던 옛사람들은 산야의 나물을 캐내었다. 소만의 첫 5일간을 고채수(苦菜秀)라 하여 씀바귀가 뻗어 오른다고 한 것은 당시의 혹독한 현실을 나타낸다. 쓰디쓴 씀바귀를 밥알 대신 질겅질겅 씹으며 태산보다 높은 보릿고개를 오른다. 허기진 가운데, 오히려 이때 농사일은 무척 바쁘다. 이른 모내기에 돌입하는 동시에 가을에 심은 보리를 베고, 밭농사 김매기 등으로 눈코 뜰 새 없다. 배고픈 와중에 할 일은 더욱 많아지니 이것은 어쩐 일인가, 그저 죽으란 소리인가? 그렇지 않다. 인간은 너무 편안하면 게을러지게 마련이다. 배부르면 정신이 나른하고, 배고프면 정신은 또렷하다. 보릿고개에 처한 이들은 저절로 한 생각에 집중한다. 그것은 ‘생산’이다. '오늘 일하지 않으면 내일 굶는다!'라는 현실은 정신을 빠릿빠릿하게, 손끝을 야무지게 한다. 덕분에 가을에 거둘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다. 이처럼 소만의 충만함은 보릿고개의 결핍에서 비롯하는 것이었다. 결국 만(滿)은 공(空)과 짝을 이뤄야 존재할 수 있고, 이것이 곧 음양의 이치이다.

하지만 지금 시대에 무슨 보릿고개 운운하느냐 할 수 있다. 바로 그 점이 내가 짚고 싶은 바다. 보릿고개 없는 시대에 태어난 이들은 비교적 편안하다. 그렇기에 잡생각이 많다. 물론 오늘날에 사는 사람들도 저마다 짊어진 삶의 짐이 있게 마련이나, 존재 자체의 기반인 먹거리에 대한 걱정은 보릿고개가 있던 시절과 비할 수 없다. 보릿고개라는 결핍된 환경은 인간 정신을 명료하게 했다. 그 시공간에서 살던 이들은 잡념과 망상에 쉬이 빠지기보다, 살기 위해 땀 흘려 생산하는 일에 몰두했다. 보릿고개가 없는 지금, 무엇이 그 역할을 대신할 수 있을까? 아니 그럴 필요조차 없지 않나.

보릿고개와 소만이 나란히 공존하던 시절에서, 결핍을 주던 보릿고개는 사라지고 풍족함을 상징하는 소만만 홀로 남았다. 결핍은 악한 것으로 내몰리고, 풍족함이 선한 것으로 긍정되었다. 비우기는 싫어하고 오로지 채우려고만 한다. 그래서 남은 것은 무엇인가? 미성년 즉 성인이 되지 못한 자들의 대량양산이다. 오로지 채우는 데 급급하니, 아프거나 힘든 일에 견디지 못한다. 영양과잉으로 체격은 좋아졌으나 체력은 약해지고, 위로과잉으로 심리적 상처에 민감하고, 보호과잉으로 나이를 먹어서도 독립이 늦어지는 것은 이런 까닭이리라.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언제나 나를 애 취급해 버리는 세상 모든 위로와 배려에 썩소를! 씨~익~! 만국의 어른-아이들이여, 단결하라. 이제 우리, 미몽에서 깨어나자. 지옥으로 가는 길엔 그런 위로와 배려뿐이라는 걸 잊지 말자. 다시 한번 그것들에 썩소를~!^^


보릿고개, 사라진 통과의례

성인이 된다는 것은 자기 인생, 자기 일상의 주인이 된다는 의미이다. 그저 나이를 먹는다고 성인인 것도 아니요, 어리다고 미성년도 아니다. 자기 삶의 주도권을 쥐고,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자가 진짜 성인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현실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통과의례가 전무한 상태이다. 진학하고 졸업하고 취업하는 등, 시간의 흐름에 자신의 인생을 내맡긴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왜 사는지 의미조차 헛갈릴 때가 많다. 보릿고개는 일종의 통과의례로 작동했다. 그때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일터로 총출동하여 일손을 도왔다. 모두가 한 몫을 하며 생존을 위한 생산에 참여했다. 그럼으로써 자기 존재를 실감했다. 생존이 걸리면 사람은 치열해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통과의례를 거쳤다고 해서, 인생의 의문은 풀리지 않는다. 삶의 희로애락과 질곡은 여전하다. 변한 게 있다면 그 모든 것을 나 홀로 감당하겠다는 태도이다. 그때 삶의 길은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없던 길을 스스로 뚫고 나아갈 수 있다. 길은 처음부터 길이 아니었다.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고독을 담담히 받아들인 자, 그가 곧 성인이다.

공교롭게도 올해 소만은 성년의 날과 겹친다. 장미꽃과 키스로 상징되는 우리의 성인식은 그저 축하의 인사와 선물이 공허하게 오갈 뿐이다. 원시부족 사회에서는 성인식의 일환으로 다양한 통과의례를 고안했다. 성년을 앞둔 아이에게 홀로 ‘모험여행’을 떠나게 하거나(당연히 신용카드는 없다), 광막한 사막에서 몇 날 밤을 지새우거나 혹은 담력을 시험하는 의식 등을 치르게 한다. 그럼으로써 아이는 부모의 품을 벗어나 당당히 공동체의 성원으로 참여하게 된다. 성년의 날이 그저 기념일로 전락한 것은 우리 사회에 성년, 미성년의 구분이 더 이상 무의미하다는 이야기와 같다. 어쩌면 어른·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미성년의 상태로 사이좋게 ‘동반 하락’ 했는지도 모르겠다.

사주명리학으로 해석하면, 요컨대 극(剋)은 없고 생(生)만 있는 형국이 요즘의 세태라 할 수 있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은 없고 편하게 길러주기만 하니, 버릇이 없어지고 응석을 부리거나 한없이 의존적인 인간형이 이때 출현한다. 생(生)은 극(剋)이 동반되어야 진정한 ‘살림’이 된다. 강철은 불덩이에 달궈지고 수없이 두들겨 맞아야 단단해지듯, 통과의례라는 극(剋)을 통해야 인간은 거듭난다. 유아에서 어른으로 환생(還生)하는 것이다. 모험여행과 같은 통과의례를 마치고 돌아온 자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존재이다. 우리에게는 장미꽃과 키스의 즐거움보다, 보릿고개와 같은 시련의 통과의례가 필요하지 않을까? 어차피 겪어야 할 세상은 혹독하기 그지없는데, 미리 단련해서 나쁠 것은 없으리라.

그러기 위해선 잃어버린 통과의례를 스스로 만들어 볼 수 있다. 당장 모험여행을 떠나거나 사막으로 달려가도 좋겠지만, 반드시 똑같이 할 필요는 없다. 원시부족의 경우를 살펴봐도 성인이 된다는 것의 핵심은 시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신체의 조성이다. 이는 보릿고개가 주는 결여에서 오는 고통과 유사하다. 아니, 그럼 무작정 굶으라는 말인가? 옛사람들이 그랬듯이 씀바귀라도 씹으며 스스로 기아체험이라도 하라는 것인가? 아니다. 결핍을 절절히 체험하면서 동시에 충만해지는 아주 좋은 방법이 있다. 씀바귀 못지않게 쓰디쓰면서도 너무 많이 먹으면 속이 얼얼해지고 혼이 쏙 빠져 버리며, 제대로 소화시키면 유아에서 어른으로 존재의 환생까지 도모해 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욕’을 처(!)먹는 일이다.

욕, 한 뚝배기 드실래예~?!

욕은 타인이 다이렉트로 먹여줘야 제맛이다. 자아비판을 아무리 해도 남에게 듣는 쓴소리만 못하다. 입에 쓴 약이 몸에 좋듯이, 뼈와 살을 분리하는 강도의 질책과 비판은 인격을 담금질하는 데 그만이다. 누군들 좋은 소리 듣고 인정받고 싶어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런 칭찬받고픈 인정욕망은 자기도 모르게 주변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고 되고, 온전히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게 한다. 욕먹어도 꿋꿋이 자신의 길을 가는 배짱! 그러면서도 비판을 겸허히 수용하고 자신을 점검할 수 있는 기백! 그 정도 수준이라면 어디 가서든 당당히 어른이라 할 만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불꽃남자 정대만. 나는 그를 사랑한다. 그의 눈물과 땀에 그의 진심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변신하려고 한다. 무엇이 될 수 있을 지는 모른다. 그 알 수 없음이 두렵지 않다. 그 당당함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그는 어른이고 용감하다. 소만에 우리는 무엇을 채우고 무엇을 비우는가. 두려움을 비우고 용기를 채우는가. 아이를 버리고 어른이 되는가.


굳이 멀리까지 사막이나 황무지로 떠날 필요 없다. 주변의 상사, 선생, 동료, 친구, 후배의 욕으로 자신의 일상을 가득 채운다면, 보릿고개가 사라진 소만을 더 이상 탓하지 않아도 된다. 이미 욕으로 충만한 소만이기 때문이다. 아, 노파심에 말하자면 여기서 말하는 욕은 단순 욕지거리 혹은 비난이 물론 아니다. 자신이 굳게 움켜쥐고 있던 고집, 집착, 약점 등. 한마디로 듣기 싫은 말을 꼬장꼬장하게 귓구멍에 퍼붓고, 인신공격으로 여겨질 만큼 자아상이 송두리째 해체되는 데 도움을 주는 비판적 언어활동을 가리킨다. (흐.. 구분하기가 어려운가? ^^;) 그럼으로써 우리는 견고한 자의식을 내려놓게 되고, 무엇이든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신체를 형성할 수 있다. 무엇이든 받아들이니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무한 변용의 가능성이 활짝 열리며, 존재는 거듭난다. 욕만한 통과의례는 없다.

타인의 비판을 받아들이는 것은 말이 쉽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조금 듣다 보면 금방 울컥해 언성을 높이고 멱살잡이할지도 모를 노릇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까지 그에 대한 준비를 해왔다. 잊었는가? 우리가 봄 내내 해왔던 것들을! 봄의 여섯 절기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 행동윤리를 실천했다. 입춘에 계획을 세우고 우수에 마음을 녹이고 경칩에 과감해지고 춘분에 갱신하고 청명에 미혹되지 않고 곡우에 현장에 달라붙으라고. 그런데 그것들은 모두 비교적 다른 사람들과 엮이지 않고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봄과 여름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 봄이 따스했다면 여름은 뜨겁다. 봄이 워밍업이었다면 여름은 실전이다. 프로야구 선수들이 봄에 스프링캠프 전지훈련을 하며 여름의 시즌을 준비하듯, 우리 역시 이제까지 봄에 준비한 것들을 가지고 여름의 실전을 맞이해 내놓아야 한다. 그래서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문턱인 곡우에, 봄에 배운 마음가짐을 한 점으로 응축했던 것이다.

여름의 실전에선 더 이상 혼자서 무엇이든 할 수 없다. 실전은 곧 생산을 가리킨다. 소만에 접어들어 농부의 일손이 한층 바빠지듯, 우리 또한 생산하는 적기에 다다랐다. 입춘에 세운 계획은 바로 뭔가를 만들어 내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그것을 본격적으로 실천에 옮길 때가 바로 여름이다. 생산은 삶의 현장에서, 타인과 함께하는 가운데서 이뤄진다. 마음을 녹이고 과감해지고 갱신하고 미혹되지 않는 따위의 원칙은 모두 타인과 어우러지기 위해 요청되는 윤리였던 것이다. 욕을 먹는 것도 타인과의 관계에서 가능하다. 인간의 실전은 인간관계 이외에는 없을뿐더러, 그 속에서 무엇인가를 생산하기 위해선 바로 위와 같은 마음가짐의 덕목이 필요함은 두말할 것 없다.

우리는 여름의 생산을 위해, 봄 내내 마음을 갈고닦았다. 물론 실전에 들어서면 아무리 마음을 다잡았어도, 시시때때로 울컥할 일이 많으리라. 본격적인 한여름의 길목에서 소만을 만났다. 무엇으로 이 시기를 만(滿)할 것인가? 칭찬과 위로와 격려도 좋다. 하지만 욕지거리도 먹다 보면, 그것도 꽤나 청량하고 들을 만하다. 덤으로 존재의 무한 변용까지 가능하고, 모험여행도 다녀온 셈이니 일석이조! 이렇게 해볼 만한 것을 혼자만 꾸역꾸역 먹지 말고, 주변의 친구, 동료, 자녀, 부모에게 직접 실천해 보기 바란다. 그들도 쓴맛을 볼 기회를 줘야 하지 않겠는가? 소만에 가득 채운 욕은 무더위를 버티는 힘이 되는 동시에 가을 추수를 위한 밑거름이 되리라 믿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여름이다. 하늘은 곧 땅을 데울 것이고 땅은 곧 사람을 데울 거다. 이 열기로 우리는 무엇을 데울 것인가.


※ 임진년 소만의 절입시각은 5월 21일 오전 00시 15분 입니다.
※ 계사년 소만의 절입시각은 5월 21일 오전 06시 09분 입니다.
※ 갑오년 소만의 절입시각은 5월 21일 오전 11시 59분 입니다.
※ 을미년 소만의 절입시각은 5월 21일 오후 05시 45분 입니다.
※ 병신년 소만의 절입시각은 5월 20일 오후 11시 36분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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