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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정치1/몸과정치2

심복과 기혈로 움직이는 나라 - 上

by 북드라망 2018. 6. 28.

심복과 기혈로 움직이는 나라 - 上

   


민약이 이루어짐에 땅[地]이 변하여 나라[邦]가 되고 인(人)이 변하여 민(民)이 된다.

 민이란 중의(衆意)가 서로 결합되어 몸을 이루는 것[成體]이다.

 이 몸은 의원(議院)을 심복(心腹)으로 삼고 율례(律例)를 기혈(氣血)로 삼아

 그 의사를 펼치는 것이다.

─나카에 조민(中江兆民), 『나카에조민전집(中江兆民全集)』1권, 92쪽

 

사회계약론의 수용

앞서 일본에서 사회를 ‘상생양의 도’나 ‘교제’라는 단어들로 사회를 번역하면서 사회적인 것을 어떻게 상상했는가 일단을 살펴보았다. 또한 시민사회적 개념이라 할 수 있는 후쿠자와의 안과 밖의 균형으로서 정부-인민 관계를 보았다. 그렇다면 또 하나 사회적인 것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사회계약론적 발상일 것이다. 복수의 인간들 사이의 주체적인 결단 행위를 통해 사회를 맺어간다는 발상이야말로 사회적인 것에서 핵심적이다. 이러한 사고가 동아시아에 유입된 것은 언제일까? 연구자들은 후쿠자와의 『학문의 권장』에서 이미 사회계약론의 일단을 찾아볼 수 있다고 말한다. 그가 국민이라는 자는 한 사람의 몸에 두 가지의 임무가 있다고 말하는 대목이다. 그 하나는 “정부 아래 서는 일인(一人)의 민(民)이 된 입장에서 하는 것으로, 바로 손님의 적(積)”이며, 두 번째는 “국중(國中)의 인민의 합의로 일국이라는 이름의 ‘회사(會社)’를 결성하고 사(社)의 법을 세워 실시하는 것으로, 바로 주인의 적(積)”이라고 주장한다. 이어 “정부라는 것은 인민의 ‘위임’을 받아 그 약속에 따르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대목을 들어 사회계약론적 발상이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후쿠자와가 『학문의 권장』에서 국민이 정부에 따르는 것은 정부가 만든 법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든 법에 따르는 것이며, 국민이 법을 파하는 것은 정부가 만든 법을 파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든 법을 파하는 것이라는 발상과도 이어지는 대목이라 하겠다.

 



이는 웨일란드의 개인주의와 사회계약론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손님’과 ‘주인’이라는 이중적 역할을 담당하는 인민이란 웨일란드의 The Elements of Moral Science의 “the duties of a citizen are of two kinds: first, as an individual; and, second, as a member of society”에 대응되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대목을 보면 웨일란드가 말하는 society는 계약론적 사회와는 거리가 있다. 이때의 사회는 어떤 목적 하에서 의지를 가진 개인과 개인 사이의 자발적 계약으로 이뤄진 결사체인 civil society라는 적극적인 개념은 아니었다. 특정 목적을 위해 의지적으로 참가하거나 이탈하는 것이 불가능한, 사람들이 그 안에서 태어나 보호를 받고 구성원으로서 의무를 담당한다는 의미에 가까웠다. 따라서 웨일란드가 시민의 의무를 개인적인 것과 사회의 구성원으로 나눈 것은 후쿠자와의 번역처럼 사회계약상의 이중적 의미인 객체로서의 ‘손님’과 주체로서의 ‘주인’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한 단체의 구성원으로 수동적 의무와 능동적 의무를 나눈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후쿠자와는 이 문장에 이어 원문에는 없는 비유를 삽입한다. 1백 명의 시민이 하나의 상사(商社)를 설립해 협의를 한 후 상사의 규칙을 결정하는 일을 상정해 국가를 상사로 인민을 사원으로 비유하는 것이다. 따라서 1백 명 전원은 상사의 주인이지만 동시에 사원이라는 것이다. 일국의 모든 인민이 정사를 담당할 수 없기 때문에 정부를 세워 국정을 맡긴다. 이때 정부는 인민의 대리인[名代人]이자 사중(社中)의 위임을 받은 지배인(支配人)이라는 논리 속에서 계약론적 사고로 사유하고 있다. 이처럼 후쿠자와는 웨일란드의 society를 계약론적 발상 속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국민이 정부와 약속해 정령의 권한을 정부에 위임한 이상 대리인으로 설정된 정부의 권한에 속하는 일에 대해서는 국민은 조금도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심지어 정부의 위정과 관계없는 사람은 결코 군대나 조약문제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며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까지 말한다. 따라서 후쿠자와에게 사회에 대한 발상은 계약을 통해 정부를 만들어내는 것까지는 해당하지만 이러한 위임이 사회적 ‘유대의 공공성’에까지 미치지 못하고 ‘영역의 공공성’에 그치고 만다는 점에서 엄격히 말하자면 사회계약론적 발상과 완전히 부합한다고는 보기 힘든 것이었다.

 

후쿠자와에게 계약론적 사고가 존재했는지, 혹은 그것이 서양과 어떻게 달랐는지 단언하기는 힘들다. 분명한 것은 근대 초 메이지 지식인에게 계약론적 발상이 보인다는 점이고, 이러한 계약론적 사고 속에서 신체유비가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메이지 시기 일본에서의 사회계약론의 특징을 살펴보도록 하자.

 

사회계약론의 사고가 본격적으로 유입된 것은 루소의 논의가 소개되면서부터이다. 가령 쓰다 마미치가 『태서국법론』(1868)에서 주권의 유래에 대해 다섯 가지를 소개하며 그 중 하나로 계약설을 언급한다. “주권의 본원을 서약(誓約)에서 나온다고 한다. 이르길 옛날에 일찍이 국인(國人)이 회의(會議)해서 나라를 세워, 한 사람(一人)을 받들어 군주로 삼아 백사(百事) 그 명에 따라야 한다고 명시적으로 맹약을 세우거나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암묵적으로 그 뜻을 일치”시켰다. 이를 합동서약(合同誓約) 또는 신복맹약(臣服盟約)이라 소개한 것이다. 또한 니시 아마네는 「백학연환」(1871) 강의에서 ‘입약위군론(立約爲君論)’으로 번역 소개하며 “무릇 정부라는 것은 국민이 서로 약속을 다해 사람을 뽑아 세우는 것으로, 달리 군주인 자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주의”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계약론에 대해서는 이른 시기부터 소개가 되고 있었지만 초기의 이해에서 바디폴리틱에 대한 사고까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동양의 루소, 나카에 조민

루소 연구자인 슈클라(Shklar)는 모든 정치사상은 ‘은유의 문제’라고 말하며 특히 루소 이론에서 ‘바디폴리틱(body politic)’ 논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녀는 사람들이 관계 맺는 복잡성은 이미지를 조직하지 않고서는 상상되거나 느껴질 수 없으며, 그런 점에서 루소에게 의인화(personification)란 수사 차원이 아니라 그의 정치사상의 핵심을 보여주는 것이라 말한다. 루소의 핵심 논제였던 사회계약 역시 정치체(corps politique/body politic)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밝히는 것, 즉 신체(corps/body)의 문제였다. 루소의 말을 빌리자면 정치체란 “각자가 그 신체와 힘을 다 함께 일반의지의 최고 지도하에 맡기고 난 후에 다시 우리 전체가 각자를 전체의 불가분의 부분으로 받아들이는” 집합적 신체이다. 이 때 집합적 신체란 개별적 신체들의 단순한 양적 ‘집합(agrégation)’이 아니라 질적 전환을 이루어 낸 ‘연합(association)’으로, 신체의 이미지로 하나의 정치체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 루소의 사상 전반을 흐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근대 일본에서 루소의 논의가 부분적으로 소개되었던 적은 있지만 사회계약론에 대한 본격적인 소개는 역시 ‘동양의 루소’라 불린 나카에 조민(中江兆民, 1847~1901)으로부터 시작한다. 메이지 시기 루소의 『사회계약론』은 총 네 번 번역된다. 그 첫 번째가 나카에 조민에 의한 것으로, 그는 프랑스 유학에서 돌아온 후 바로 루소의 책을 2부 6장까지 번역해 『민약론(民約論)』(1874)이라는 이름으로 출간한다. 그러나 이는 메이지정부에 의해 출판금지 처분을 당해 정식으로 간행되지는 못했다.

나카에 조민



조민은 『민약론』이 나온 지 8년 후 사회계약론을 다시 한 번 번역한다. 이번에는 한역(漢譯)의 형태로 『민약역해』(1882)를 간행한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은 일본어역과 한역이라는 단순한 언어의 차이뿐만이 아니었다. 『민약론』의 출판 후에 벌어진 다른 이들과의 논쟁 속에서, 그리고 조민의 사상적 심화 속에서 나온 것으로 기존의 번역을 상당히 수정한 것이었다. 그가 ‘역해(譯解)’라는 이름으로 루소의 사회계약론을 ‘해(解)’했음을 강조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단순히 루소를 번역, 소개하는 의미에서의 ‘동양’의 루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동양과 루소가 만나 새로운 사상가가 탄생했다는 의미에서 ‘동양화된 루소’, ‘루소의 동양화’가 이뤄진 것이다.

물론 그 사이에 최초의 완역본으로 하토리 도쿠(服部徳)의 『민약론(民約論)』(1877)이 있고, 『민약역해』의 1년 뒤에 하라다 센(原田潜)이 번역한 『민약론복의』(1883)가 있다. 그러나 하토리 도쿠의 『민약론』과 하라다 센의 『민약론복의』에 대해서는 루소의 논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역 역시 많다고 지적된다. 반면 조민의 『민약역해』는 루소의 사상에 대한 보다 높은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루소 원문의 내용을 조민이 소화시켜 자신의 의견을 추가하고 해설한 완성도 높은 저작이었던 것이다.


민약역해에서의 사회계약

그럼 본격적으로 조민의 바디폴리틱에 대한 이해를 살펴보자. 그는 『민약역해』(1882)에서 민약, 즉 사회계약을 “그 요를 들어 말하면, ‘사람들이 스스로 그 몸과 그 힘을 중용(衆用)에 제공하고 이를 다스림에 중의(衆意)의 같은 바[同然]로서 한다’는 것”이라 말한다. 이어 조민은 사회계약이 이루어진 상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민약이 이미 이루어졌으니 이에 땅[地]이 변하여 나라[邦]가 되고 인(人)이 변하여 민(民)이 된다. 민이란 중의(衆意)가 서로 결합되어 몸을 이루는 것[成體]이다. 이 몸은 의원(議院)을 심복(心腹)으로 삼고 율례(律例)를 기혈(氣血)로 삼아 그 의사를 펼치는 것이다. 이 몸은 자신의 형태가 없으므로[不自有形] 중신(衆身)을 형태로 삼고 자신의 의사가 없으므로[不自有意] 중의(衆意)를 의사로 삼는다. 이 신체를 옛사람은 ‘국(國)’이라 했고 지금은 이를 칭해 ‘관(官)’이라 이른다. 관이란 것은 직무[群職]를 재정하고 처리하는 것[裁理]을 이른다. 중(衆)과의 관계[往復]로 말하면 ‘관’이 되고, 법령[令]을 내는 것으로 말하면 ‘군(君)’이 되고, 타국의 사람[他人]이 칭한다면 ‘방(邦)’이 되고, 그 중을 합해 가리키면 ‘민(民)’이 되고, 율례(律例)를 논의하는 자를 칭하면 ‘사(士)’가 되고, 그 법령에 따르는 자를 칭하면 ‘신(臣)’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호칭은 상호 통용되며 반드시 분별되는 것은 아니다. 그 본의를 살펴 마땅히 이렇게 부를 수 있을 뿐이다.

─나카에 조민, 『나카에 조민 전집』1권, 92쪽

우선 눈에 띄는 것은 땅과 나라, 인(人)과 민(民)을 구별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이전에 주어진 조건으로 존재했던 ‘땅과 사람’이 ‘민약’이 이뤄짐에 따라 ‘나라[邦]와 민’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이 때 민은 “중의(衆意)가 서로 결합되어 몸을 이룬다[成體]”고 번역하고 있다. 루소와 마찬가지로 사회계약에 의해 하나의 ‘집합적 신체’가 탄생하는 발상을 볼 수 있다. 이렇게 탄생한 몸은 ‘자신의 형태가 없으므로 중신(衆身)으로 형태를 삼고 자신의 의사가 없으므로 중의(衆意)로서 의사를 삼는다’.

이 부분은 원문에서는 다음과 같다. “이 결사행위가 이뤄짐으로써 각 계약 당사자의 개별적 인격이 변해 이 행위는 일개의 무형의(정신적인) 집합체를 만들어낸다고 말한다. 이 집합체는 이를 설립하는 집회의 투표수와 같은 수의 구성분자에 의해 만들어져 바로 이 동일한 행위로부터 그의 통일과 그의 공동의 자아, 그의 생명과 그의 의지를 받아들인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루소에게 사회계약을 통해 이루어진 집합 개념이란 단순히 양적, 물리적 변화가 아니라 질적, 화학적 변화라는 점이다. 루소는 전체의지와 일반의지를 구별하며, 일반의지를 통해 개별적 인격이 결사행위를 함으로써 공동의 자아를 갖는 ‘정신적이고 집합적인 신체(corps moral et collectif)’를 이룬다고 표현한 것이다. 조민은 이를 민약을 통해 중의(衆意)로서 서로 결합해 몸을 이루는 과정에서 양적 집합인 인(人)이 질적 연합인 민(民)으로 변한다고 표현한 것이다. 


이와 같은 질적 변환을 겪어 탄생한 집합적 신체는 루소에게 다양하게 표현된다. 즉 “공적 인격(personne publique)이 예전에는 도시국가(Cité)라고 불렸는데, 지금은 공화국(Ré- publique) 또는 정치체(corps politique)로 불린다. 그것은 또 수동적일 때에는 구성원들에 의해 국가라고 불리며, 능동적일 때는 주권자(Souverain)라고 불린다. 또한 그와 유사한 것들과 비교될 때에는 권력(Puissance)이라고 불린다. 그 구성원들은 집합적으로 인민(peuple)이라는 이름을 가지며, 개인적으로는 주권 참여자로서 시민(Cityons)이라 불리며, 국가의 법에 복종하는 자로서 신민(Sujets)이라 불린다.” 이는 집합적 신체, 즉 바디폴리틱으로서의 공적 인격이 공화국이자 주권, 그리고 시민이자 신민을 나타내는 개념임을 명시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대목이다. 조민은 이를 번역하며 도시국가를 ‘국(國)’, 공화국 또는 정치체를 ‘관(官)’, 주권자를 ‘군(君)’, 인민 혹은 시민을 ‘민(民)’, 신민을 ‘신(臣)’으로 매칭했던 것이다.

루소



그런데 여기서 눈에 띄는 점은 “이 몸은 의원(議院)을 심복(心腹)으로 삼고 율례(律例)를 기혈(氣血)로 삼아 그 의사를 펼치는 것”이라는 대목이다. 이는 루소의 원문에 없었던 것이었다. 루소의 원문은 “그 순간 각 계약자의 개별 인격 대신에 이 결사 행위는 투표권을 가지는 구성원의 수만큼의 멤버로 구성된 정신적・집합적인 몸을 만들어낸다. 여기에 통일성, 공동의 자아, 생명과 의사가 부여된다”인데, 여기서 조민은 그 공동체에 부여되는 것으로 서술한 ‘통일성, 공동의 자아, 생명과 의사’에 대한 번역을 생략한 대신 중의의 결합으로서 몸을 이룬다는 설명을 ‘심복’과 ‘기혈’의 유비를 추가하여 보충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물어볼 수 있다. 조민이 다소 뜬금없어 보이는 ‘심복(心腹)’과 ‘기혈(氣血)’의 비유를 집어넣은 이유는 무엇일까. 조민은 이를 어디서 가지고 온 것일까? 혹은 이러한 조민의 유비는 전통적 신체 유비와 얼마나 다른가? 결국 조민의 생각은 루소의 바디폴리틱 논의와 얼마나 통하는가? 이를 통해 조민이 생각한 사회적인 것의 특징은 무엇인가라고. 


글_김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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