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노둔(魯鈍)해서 행복해요~”

“노둔(魯鈍)해서 행복해요~”



子曰 不憤不啓 不悱不發 擧一隅 不以三隅反 則不復也

자왈 불분불계 불비불발 거일우 불이삼우반 즉불복야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마음속으로 통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열어주지 않으며, 애태워하지 않으면 말해주지 않되, 한 귀퉁이를 들어주었는데 이것을 가지고 남은 세 귀퉁이를 되돌아보지 않으면 다시 더 일러주지 않아야 한다.” - 〈술이〉 8장



=글자풀이= 

=주석풀이=


〈위정〉편 4장에 따르면, 공자는 15살에 배움을 뜻을 둔(志學) 뒤로, 이립과 불혹을 거쳐 50살에 이르러 천명을 알게 됐다고 한다(知天命). 이와 같은 삶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끊임없는 배움’ 정도가 될 것이다. 공자뿐만이 아니다. 모든 고수들은 긴 시간 동안 꾸준히 노력해서 자신의 영역을 일군다. 그들에게 비결을 물으면 한결같이 이런 말을 한다. “처음부터 목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가 쌓여서 지금에 이르렀을 뿐이다.”라고. 이런 말을 들으면 그들의 삶의 궤적이 어렴풋하게나마 상상되어 감동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막막하기도 하다. 분명 시간이 쌓이지 않고는 무엇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시간이 많이 쌓인다고 해서 꼭 무엇이 이루어지는 건 아니지 않던가? 공부는 특히 그렇다. 공부는 시간을 많이 필요로 하지만, 시간상으로 모든 게 해결되는 건 아니다. 시간 이상의 무엇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할까? 단순히 ‘버티기식’이 아니라면 무엇을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것일까? 공자를 비롯한 수많은 고수들이 고난을 겪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는 그 힘은 어디로부터 나오는 것일까?


쉬이 이해되지 않는 것에 대한 조바심. 이것은 나뿐만 아니라 2,500년 전, 내로라하는 수재들이었던 공자의 제자들에게도 해당된 일이었다. 위대한 스승이었던 공자는 구구절절 길게 설명하지 않는다. 짧으면 두 글자, 길어야 열 글자 내외다. 간단명료한 가르침을 이해하기 위해 제자들은 다시 물어보기도 하고, 친구에게 물어보기도 하면서 좌충우돌한다. 가령, 번지는 공자에게 인(仁)과 지(知)를 물어봤다가 이해가 되지 않아 다시 물어봤고, 그래도 이해가 되지 않자 자하에게 물어봤다(〈안연〉편 22장). 자공은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물어보고 자신이 이해될 때까지 의심나는 것을 계속 물었다(〈옹야〉편 11장). 이렇게 끈질긴 물음을 던지는 제자들의 속은 참 답답했을 것 같다. 스승의 대답을 들으면 속이 시원해야 하는데, 들으면 들을수록 명료하기는커녕 궁금증이 증폭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배움에 끝이 없다고는 하나 백날 물음만 가지다가 끝나는 것인가? 하지만 공자는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는 제자들을 보고 흐뭇해했으리라.


분(憤)과 비(悱)의 뜻을 보자. 분은 마음속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것이고, 비는 마음속에 있는 말이 나오지 않아서 안달이 나는 모양을 뜻한다. 주희는 이 두 글자를 마음으로는 터득하고 싶으나 잘 되지 않아서 애태우는 모양으로 풀었다. 계(啓)와 발(發)은 제자가 고민하다가 끝내 뚫지 못하는 지점을 탁! 하고 열어주는 것이다. 공자는 제자가 무엇을 알기 위해 고민하는 과정이 있지 않으면 가르침을 주지 않았다.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신체가 되어야 한다. 무엇을 알고자 하는 절박함이 있다면 어떤 가르침도 쉽사리 놓치지 않는다. 그러나 배우는 자가 애를 태우며 절박해하지 않는다면 가르침은 허공으로 흩어진다. 내 경우도 그렇다. 책을 대강 읽으면, 알 것 같다가도 정작 하나도 정리가 안 되고 강의를 들어도 남는 게 없다. 하지만 문장 하나하나를 따라가며 끈질기게 읽을 때는 모르는 것이 있어도 자기 나름대로 소화하고 또 다른 질문에 이르게 된다. 이렇게 책에서 남는 게 생길 때 공부하는 맛이 생기고, 힘들어도 또다시 책을 읽을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이처럼 스스로 애를 태우고 머리를 싸매며 공부하던 것은 스승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기본적인 신체를 만드는 과정이다. 요컨대 공자가 제자들에게 요구한 것은 이거다. 끊임없이 애를 태우고 괴로워하며 공부하라는 것! 편하고 재미있기만 한 공부란 없다.




제자의 배움은 일회적으로 끝나지 않는다. 스승님이 하나를 알려주면 그것을 실천으로 옮겨보거나 다른 배움으로 연결할 수 있어야 한다. 즉, 가르침을 소화하며 확장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배우는 태도다. 그런데 이 과정 또한 보통 고생이 아니다. 스승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질문을 던질 뿐이다. 물론 제자는 그 단서를 곱씹는 과정에서 또다시 애가 타고 머리가 아픈 과정을 겪어야 한다. 반복. 반복. 반복. 그러고서야 겨우 배움의 즐거움을 지속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따라서 아무리 스승이 위대하다한들 제자가 마음을 내서 배우고자 하지 않으면 스승도 어쩔 수가 없다. 공자가 “어찌할까 어찌할까 하고 말하지 않는 자는 나도 어찌할 수가 없다(不曰如之何如之何者 吾末如之何也已矣 - 〈위령공〉 15장).”라고 말한 것도 그런 맥락이다. 즉, 공자는 배움에 마음을 내지 않는 사람에게는 가르침을 전할 수도,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공부란 끝없이 나아가는 과정만 있을 뿐이다. 공부에는 스스로 그만두는 것 외에 어떤 종착지도 없다. 따라서 공부하고자 한다면 힘듦과 괴로움을 피하고 싶은 마음일랑 고이 접어두어야 한다. 아니, 공부를 하며 더욱 큰 재미를 느끼고자 한다면 능동적으로 괴로운 시간을 겪어낼 수 있어야 한다. 재미는 그 지루한 시간을 겪은 자만이 경험할 수 있는 특권이다. 〈술이〉편 18장에서 공자는 스스로를 ‘발분(發憤)하여 먹는 것도 잊고, 배우는 것이 즐거워 근심을 잊어 늙어지는 것을 모르는 사람’으로 소개했다. 공자라고 공부가 수월했겠는가. 다만 배움을 통해 느껴지는 즐거움은 다른 것에 비할 바가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았을 것이다. 그가 평생을 공부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이 즐거움이 아니라면 무엇이었겠는가.


어떻게 하면 공부를 오래할 수 있을까? 공부할 때마다 드는 편해지고 싶은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누군가가 이렇게 질문했다면 공자는 여기에 어떤 답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공부를 오래 하는 비결이나 오래한다고 해서 보장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대신에 공자는 배우는 자의 태도를 말하며 어디서도 느낄 수 없는 충만함이 배움의 과정에 깃들어있음을 넌지시 일러줬을 것이다.


난 둔재(鈍才)다. 모두들 익히 알듯 둔재의 특징은 배움이 느리다는 거다. 책을 읽어도 이해가 느리고, 하고 싶은 말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지 못한다. 그러나 공자의 말에 따르면, 난 공부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었다. 무엇을 읽어도 대번에 이해하지 못하기에 질문할 것 투성이고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혼자 공부할 수 없다. 이해가 빠르지 않기에 애를 태울 수밖에 없고, 애를 태운 만큼 재미와 감동이 커진다. 또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하기에 다른 사람의 공부에 긴장감을 줄 수도 있다. 그러니 천재가 아니라 둔재인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정약용은 강진에서 황상이라는 제자를 키웠다고 한다. 자신의 노둔함에 대해 고민하는 황상에게 정약용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산석(山石)에게 문사 공부할 것을 권했다. 산석은 머뭇머뭇하더니 부끄러운 빛으로 사양하며 이렇게 말했다. ‘제게 세 가지 병통이 있습니다. 첫째는 둔한(鈍) 것이요, 둘째는 막힌(滯) 것이며, 셋째는 답답한(戛) 것입니다.’ 내가 말했다. ‘배우는 사람에게 큰 병통이 세 가지 있는데, 네게는 그것이 없구나. 첫째 외우는 데 민첩하면 그 폐단이 소홀한 데 있다. 둘째, 글짓기에 날래면 그 폐단이 들뜨는 데 있지. 셋째, 깨달음이 재빠르면 그 폐단은 거친 데 있다. 대저 둔한데도 들이파는 사람은 그 구멍이 넓어진다. 막혔다가 터지면 그 흐름이 성대해지지. 답답한데도 연마하는 사람은 그 빛이 반짝반짝 빛나게 된다. 뚫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할까? 부지런히 해야 한다. 틔우는 것은 어찌하나? 부지런히 해야 한다. 연마하는 것은 어떻게 할까? 부지런히 해야 한다. 네가 어떻게 부지런히 해야 할까? 마음을 확고하게 다잡아야 한다.’ - 정민 지음, 《삶을 바꾼 만남》, 37쪽


나도 처음에는 내가 둔재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를 이해하기 위해 이리저리 헤매는 과정 속에서 ‘수재’들은 알 수 없을 공부의 맛을 느끼기도 한다. 정약용이 황상에게 전하고 싶었던 것도 부지런히 공부하는 와중에 느껴지는 즐거움이 아니었겠는가. 가끔은 예리한 지성을 가진 사람이 부럽기도 하다. 그러나 나의 뭉뚝한 지성 또한 그에 뒤지지 않는다고 믿고 싶다. 속도는 느릴지언정 공부의 역량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 나만의 영역을 확실히 만들기 위해 더 애를 태우며 천천히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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