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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카프카와 함께

카프카, 법의 힘

by 북드라망 2018. 6. 21.

카프카, 법의 힘



카프카의 작품 세계를 단 한마디로 요약해본다면? ‘법 앞에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남긴 미완의 세 장편은 모두 한계의 문턱 앞에서 자기 운명을 시험하는 K의 이야기를 다루기 때문이지요. 또한 그가 쓴 일기, 단편, 편지 등 많은 글이 철저하게 ‘할 수 있음과 없음’, ‘들어갈 수 있음과 없음’이라는 상황 자체를 화두로 삼고 있습니다. 주어진 삶, 허락된 생활에 대한 철저한 인식. 카프카는 아버지와 아들, 학교와 회사, 사무실과 침실, 낮과 밤, 먹음과 굶음, 심지어 생과 사처럼 당연해 보이는 모든 경계가 실은 다만 그렇게 보일뿐인 ‘법’이라며 의심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문학은 법의 한계를 문제삼는 일에 집중합니다. 카프카에게 법이란 왜 그렇게 중요했을까요? 그는 왜 삶의 온갖 경계들을 부정하거나 비웃지 않고, 그 엄연한 힘 앞에 버티고 서 있으려고 했던 걸까요? 오늘은 그의 법을 탐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언어의 聖事?


카프카의 법을 이해하려면 그가 내놓은 많은 수수께끼를 풀어야 합니다. (물론 카프카는 ‘법’만이 아니라, ‘변신’이나 ‘출구’, ‘읽기’나 ‘쓰기’, ‘문학’이나 ‘예술’과 같은 단어에 대해서도 여러 겹의 알레고리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카프카의 법철학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작품은 아무래도 「법 앞에서」입니다. 작품의 주인공은 시골 사람이예요. 세상 물정 모르는 그는 법의 문을 넘어가기 위해 일생을 노력합니다만, 결국 그 입구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법의 문이 닫혀 있었느냐고요? 아니예요. 법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시골 사람은 왜 법의 문을 넘어가지 못했을까요?


    법 앞에 한 문지기가 서 있다. 이 문지기에게 한 시골 사람이 와서 법으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청한다. 그러나 문지기는 지금은 그에게 입장을 허락할 수 없노라고 말한다. 그 시골 사람은 곰곰이 생각한 후, 그렇다면 나중에는 들어갈 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가능한 일이지” 하고 문지기가 말한다. “그러나 지금은 안 돼.” 법으로 들어가는 문은 언제나처럼 열려 있고 문지기가 옆으로 비켜났기 때문에. 그 시골 사람은 몸을 굽혀 문을 통해 그 안을 들여다보려 한다. 문지기가 그것을 알자 큰소리로 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그것이 그렇게도 끌린다면 내 금지를 어겨서라도 들어가보게나. 그러나 알아 두게. 나는 힘이 장사지. 그래도 나는 단지 최하위의 문지기에 불과하다네. 그러나 홀을 하나씩 지날 때마다 문지기가 하나씩 서 있는데, 갈수록 더 힘이 센 문지기가 서 있다네. 세 번째 문지기의 모습만 봐도 벌써 나조차도 견딜 수가 없다네.” 시골 사람은 그러한 어려움을 예기치 못했다. 법이란 정말로 누구에게나 그리고 언제나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고 그는 생각한다.(「법 앞에서」)


표면적인 이유는 문지기에게 있습니다. 시골 사람은 스스로를 장사라고 소개하는 문지기의 말을 곧이곧대로 지키려다가 스러지는 것이지요. 세상에! 신도 아니고, 판사도 아니고, 겨우 최하급 문지기가 아닙니까? 이 문지기가 협박이라도 한 것일까요? 물론 문지기는 문 너머에는 또 다른 문이, 그 너머에는 또 다른 문이 있어 점점 더 힘이 센 문지기가 나타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힘이 세다는 것은 순전히 그의 말에 지나지 않지요. 그것은 입증된 사실이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자기 힘을 과시하는 문지기는 『실종자』에도 나옵니다.


    “어떤 의미에선 수위장으로서 나는 모든 사람들의 상관이야. 왜냐하면 수많은 작은 문들과 문이 없는 출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이 정문, 세 개의 중간문, 열 개의 옆문, 말하자면 이 호텔의 모든 문들이 내 관할 하에 있거든. 물론 모든 종업원들은 나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해. 또 다른 한편으로는 호텔 관리부가 내게 준 이런 커다란 명예에 부응하여 나는 조금이라도 수상한 자를 보내지 못하게 할 의무를 지고 있어.”(『실종자』)




또 문지기의 말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법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데, 지금은 안 돼라니요? 생각해볼까요? 실제로 우리가 살 수 있는 시공간은 ‘지금’ 밖에 없습니다. 과거는 언젠가의 지금이었으며, 미래또한 그 어느날의 지금입니다. 문지기의 말을 따른다면 시골 사람은 이 생에서 절대로 그 법 너머에 이를 수 없을 겁니다. 세 번째 문지기의 말도 이렇게 모순적인데, 하물며 그 다음 문지기, 그 다음 문지기의 말은 또 어떻겠습니까? 아래 『실종자』의 인용문을 읽어보겠습니다. 누가 됐건 문지기의 말이란 결국 온갖 외국어가 뒤범벅되어 있는, 심지어 알아들을 수조차 웅얼거림에 불과합니다. 시골 사람은 이런 난감한 말을 앞에 두고 서 있는 것입니다.


   단순한 말만으로는 그들의 임무를 수행하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수다를 떨었다. 특히 그중 한 사람은 얼굴 전체에 검은 수염이 덮여 있는 우울해 보이는 수위인데 그는 조금도 쉬지 않고 안내를 했다. 그는 끊임없이 테이블 판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을 했다. 그런데 그는 테이블 판을 보지도 않고, 이런저런 질문자들의 얼굴도 보지 않고, 단지 자기 앞만 꼼짝 않고 바라보았다. 분명히 그건 그가 힘을 저장하고 모으기 위해서였다. 더욱이 수염으로 인해 그의 말은 약간 알아듣기 어려웠다. 비록 영어식 음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사용했던 언어들이 외국어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카알은 그의 옆에 서 있었던 짧은 시간 동안 그가 말한 것 중에서 아주 일부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더욱이 하나의 안내가 쉼 없이 다른 안내와 연결되어 곧바로 다음의 안내로 넘어가기 때문에, 질문자가 아직 자기의 안내라고 생각하여 긴장한 표정으로 경청하다가는 잠시 후에 자기 용건이 끝났다는 것을 알게 된다.(『실종자』)


카프카에 따르면 법이란 오직 말입니다. 우리는 도처에 포진해 있는 문지기의 말을 지키다가 죽습니다. 하지만 진실되어야 할 그 말에는 그 어떤 성스러움도 없지요. 과연 카프카는 어처구니 없는 이 운명을 보여줌으로써, 법을 권위를 깎아내리려 했던 걸까요?



우리는 모두 실종자 


카프카가 말의 허위로움만을 문제삼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의 세계에서는 문자도 말못지 않게 허위롭습니다. 만약 문지기가 말하는 대신, ‘지금은 안 돼’라고 쓰어진 문서를 보여주었더라면 사태는 달라졌을까요? 문지기는 법 저 너머에 계신 상급자들을 따로 언급하지 않아도 되었을까요? 아마 그렇지 않았을 것예요. 카프카는 말의 세계만큼이나 문자의 왕국도 텅빈 기표들이 서로를 걸고 넘어뜨리면서 돌아가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은 정작 바다 풍경은 구경도 못한 채로 끝없이 쌓여 있는 문서에 서명을 하고 있으며, 『성』의 베스트베스트 백작은 누가 썼는지, 어디에 도착중인지 파악되지도 않는 서류들 사이에서 하나의 텅 빈 기호로서 마을을 지배하고 있으니까요.


이와는 달리 소르디니는 우리의 답신을 받자마자 의심을 품었어요. 그래서 수많은 서신이 오가게 되었지요. 소르디니는 어째서 별안간 측량사를 초빙하지 말자는 생각이 났는지 내게 물었습니다. 나는 미치의 뛰어난 기억력의 도움으로, 처음에 관청에서 그런 제안을 했다고(물론 우리는 다른 부서가 관계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진작 까맣게 잊었습니다.)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소르디니는 관청에서 서류를 보낸 이야기를 왜 이제야 꺼내느냐고 물었습니다. 다시 나는 이제야 그 서류 생각이 났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소르디니는 참 이상한 일이라 하더군요. 나는 넌무 오래 질질 끌던 문제라 하나도 이상할 게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소르디니는 이상하다며, 내가 생각나게 한 그 서류가 없다는 겁니다. 나는 몽땅 분실되었으니까 물론 서류가 없을 거라고 대답했습니다. 소르디니는 그래도 첫 공문을 보냈다는 메모가 있어야 할 텐데, 그게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말문이 막혀 버렸습니다. 소르디니의 부서에서 깜빡 실수를 저질렀다고 감히 주장할 수도, 생각할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성』)


마을에서 측량사의 존재는 서류 속에서 나타났다가, 서류와 함께 실종됩니다. 이 이야기는 「황제의 칙령」을 떠오르게 합니다. 황제는 궁궐의 방과, 왕성의 문과, 수도의 담 사이에서 결국 실종되고 마는 칙령을 유언으로 남깁니다. 사실, 누구도 황제가 무얼 말했는지 알 수 없고, 관심도 없습니다. 그리고 칙령을 가지고 올 전령사가 누구인지도 중요하지 않지요. 왕국의 신민들은 죽은 왕의 말을 매개로, 서로가 서로에게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사이로 남습니다.


황제가-그런 이야기가 있다-한낱 개인에 불과한 ‘그대’에게, 그것도 황제의 태양 앞에서는 아주 먼 곳으로 피신한 왜소하고 초라한 신하, 바로 그러한 ‘당신’에게 임종의 침상에서 칙명을 보냈다. 그 칙사를 황제는 침대 옆에 꿇어앉히고 그의 귀에 그 칙명을 속삭이듯 말했다. 그 칙명이 황제에게는 매우 중요했으므로, 그는 칙사에게 그 말을 자신의 귀에 되풀이하도록 시켰다. 그는 머리를 끄덕여 그 말이 맞다는 것을 시인했다. […] 칙사는 여전히 심심 궁궐의 방들을 헤쳐 나가고 있다. 그러나 결코 그 방들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고, 그가 설령 궁궐을 벗어나는 데 성공한다 하더라도 아무런 듣고 없을 것이다. 계단을 내려가기 위해서 그는 스스로와 싸워야 할 것이고, 설령 그것이 성공한다 하더라도 아무런 득이 없을 것이다. 궁궐의 정원은 통과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정원을 지나면 두 번째로 에워싸는 궁궐, 또다시 계단과 정원, 또다시 궁궐, 그렇게 수천 날이 계속될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 그가 가장 외곽의 문에서 밀치듯 뛰어나오게 되면-비로소 세계의 중심, 침전물들로 높이 쌓인 왕도(王都)가 그의 눈앞에 펼쳐질 것이다. 어느 누구도 이곳을 뚫고 나가지는 못한다. 비록 죽은 자의 칙명을 지닌 자라 할지라도-그러나 밤이 오면, ‘당신’은 창가에 앉아 그 칙명이 오기를 꿈꾸고 있다.(「황제의 칙령」)


‘K가 왔다.’ 이 단순한 사실은 정말이지 많은 문서를 통해 표현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가 어떤 인간인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요. K라는 존재는 서류 속에서 찢기고 헤쳐졌습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백작이나 관리들의 서류 없이는 K를 인지하지도 못했어요. 백작의 마을에서 존재와 존재는 실체적 관계를 맺지 못하고, 언제나 언어에 매개된 채 살아갑니다. 문지기의 권위가 겨우 말에 불과하다면, 제도화된 우리 일상을 채우는 것도 겨우 ‘문자’인데 말이지요.



언어라는 제도 


삶의 초월적 의미가 상실된 시대(「법 앞에서」)에서 일어나는 말의 제도화! 「법 앞에서」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우리 삶을 결정짓는 모든 문턱은 언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것도 내용 없는 언어. 어째서 형이상학적 의미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 언어가 실체적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일까요? 카프카는 이 문제를 ‘이름’이라는 화두를 통해 성찰합니다. 우리는 이름을 통해 존재와 존재 사이에 실체적 관계를 맺고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런데 카알 로스만(『실종자』)을 둘러싼 호명의 신비에서 알 수 있듯, 이름은 아버지의 아들, 외삼촌의 조카와 같은 관계의 지표로서 단지 삶을 제도적으로 묶는 끈에 불과합니다. 카알이 자신의 이름을 대답하자마자 모계와 부계의 모든 사슬이 그를 휘감아버립니다.


주위가 조용해지자 선장은 “야콥 씨, 이 젊은이에게 뭔가 물어보지 않으시겠어요?”하고 대나무 막대기를 든 남자에게 물었다. “물론 그래야지요.”하고 그 남자는 가볍게 고개를 수그리며 친절에 대해 감사를 표하면서 말했다. 그러나 나서 카알에게 또 한 번 물었다. “당신 이름이 뭐예요?” 집요한 이 남자의 돌발적인 질문을 처리하는 것이 중요한 본론에 유리하다고 생각한 카알은, 습관대로 자신이 가까스로 찾아내었던 여권을 제시하는 것으로 자기 소개를 대신하지 않고 간단히 대답했다. “카알 로스만이에요.” “설마.”하고 야콥이라 불린 남자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미소를 지으면서 뒷걸음질쳤다. 선장, 경리주임, 항해사도 심지어 사환마저도 카알의 이름을 듣자 분명 굉장히 놀라고 있었다. 다만 항만청에서 온 직원들과 슈발만은 무관심한 태도를 취했다. “설마.”하고 야콥 씨는 되풀이하더니 약간 굳은 걸음걸이로 카알을 향해 걸어왔다. “그러면 내가 너의 외삼촌 야콥이고 너는 나의 귀여운 조카야. 이곳에 줄곧 있는 동안 예감이라도 했겠어요?”하고 야콥 씨는 선장 쪽을 보고 말하고 나서, 카알을 껴안고 키스를 했다. 카알은 잠자코 그가 하는 대로 놓아두었다.(『실종자』)


그런데 언어의 제도화, 삶의 제도화는 왜 옳지 않을까요? 그것은 단지 ‘언어적으로 그렇게 보일 뿐’인 제도적 관계에 걸려있는 존재, 제도의 한 점으로 사는 존재는 늘 삶의 본질적 문제로부터 소외되기 때문입니다. 자기 소송자인 요제프 K를 통해 카프카는 대답하지요. K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제도에 의탁한 자의 끔찍한 얼굴을 보게 됩니다. 상인 블로크는 단 둘이 있을 때에는 K에게 더할나위 없는 선의를 갖고 있었지만, 변호사가 출현하는 장소에서 법이 문제가 될 때에는 완벽하게 변신하여 더할나위 없이 경멸적인 말을 내뱉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블로크는 변호사(제도)의 힘을 마치 자신의 것인양 전유하면서 우정도 적도 모르는 상태에서 길길이 날뛰었지요. 그가 변호사 앞에서 하고 싶은 유일한 일은 자기 권력을 과시해 K를 굴복시키는 일입니다. 변호사와 함께 있을 때, 그의 눈에는 자기 자신도, 다른 인간도 모두 권력의 도구로 보였습니다.




제도가 개입할수록 인간은 서로에게 무책임해지게 됩니다. 공부가 교육이 되고 배움이 교과가 될 때, 스승과 학생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자리, 그 역할에 푹 매몰될 때 우리는 자기 얼굴을 잃습니다. 2차 세계대전 중 트레블링카 나치 수용소의 책임자였던 프란츠 슈탕글은 끝까지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다. “내가 저지른 일에 대해 나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나는 그저 그곳에 있었을 뿐입니다.” 슈탕글의 말은 2차 대전 중에 인종학살에 가담했던 전범들이 이후 재판 과정에서 계속 했던 변명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평범한 인간의 정신세계가 윤리적 차원에서 해결 불가능한 문제를 구축”합니다.(조르고 아감벤,『불과 글』) 카프카는 바로 그 점을 문제 삼았습니다. 제도화된 언어에 함몰된 인간을 어떻게 살려낼 것인가?



나의 항구, 나의 이름 


카프카가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은 제도화된 언어적 관계를 끊어내는 것이었습니다. 우선 카프카는 ‘카프카’라고 하는 자신의 이름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떼어내기로 했습니다. 수행적인 방법이 필요했지요. 카프카는 날마다 엄청난 양의 일기를 썼는데요, 그것은 그가 철저히 자기 이름으로부터 멀어지려는, 프란츠 카프카라는 이름의 제도적 관계로부터 거리를 두려는 노력이었습니다. 일기란 날짜와 장소를 기입한 다음, ‘자기 자신에 대해 자기 자신이 쓴다’고 하는 형식이 도입되는 글쓰기 양식이지요. 특정한 시공간 안에 글쓰는 주체로서 나를 고정시킴으로써, 일기는 쓰는 자와 그것을 읽는 자를 ‘나’라는 기표로 통합합니다. 그러나 카프카는 일기에서 ‘나는 쓰지 못했다’는 말을 끝도없이 계속합니다. 또는 자신이 썼던 문장을 구두점 하나 바꾸지 않고 몇 번이나 똑같이 반복해서 씁니다. 언어 자체의 힘에 압도당한 듯, 혹은 그것에 저항하듯 카프카는 몇 페이지씩 이어지는 문장 속에 갇혀 있습니다.


이처럼 문장의 진술이 문장의 내용을 위반하고, 구두점 하나 틀리지 않은 문장과 문단의 반복은 글쓰는 주체를 ‘나’로 고정시키는 일기 양식 자체에 언어적 잉여를 만듭니다. 일기와 함께 이루어지는 그의 글쓰기는 자신의 이름 카프카, ‘카프카’라고 하는 기표를 초월하는 힘을 만들어냅니다. 카프카는 쓰지 못했음과 과잉 쓰임의 가능성을 만들면서 끊임없이 자기 이름을 넘어가고, 마침내 스스로 실종되려고 한 것이 아니었을까요? 마치 카알 로스만처럼?


카프카는 언어의 힘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라면 아예 문학을 하지 않았겠지요. 그는 글쓰기를 통해 언어의 무한한 힘을 되찾고자 했습니다. 카프카는 자신의 작품을 왜 태워달라고 부탁했을까요? 작가란 글쓰기 자체의 가능성 속에서 스스로를 실종시켜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한 작품의 저자로서, 카프카가 쓴 글이 문학의 제도 안에 들어가버리는 것을, 카프카문학이라는 제도가 되어버리는 것을 거부했던 것이 아닐까요?


글_오선민(고전비평공간 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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