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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서당개삼백년

서당개 어언 3년, 자신(自信)과 불신(不信)

by 북드라망 2018. 5. 23.

서당개 어언 3년, 자신(自信)과 불신(不信)



子使漆雕開仕 對曰 吾斯之未能信 子說

자사칠조개사 대왈 오사지미능신 자열


공자(孔子)께서 칠조개(漆雕開)에게 벼슬하기를 권하셨다.

칠조개가 대답했다. “저는 벼슬하는 것에 대해 아직 자신할 수 없습니다.” 하니, 공자(孔子)께서 기뻐하셨다. - 〈공야장〉편 5장



=글자 풀이=

=주석 풀이=

공자의 배움은 실천을 전제로 하고, 이 실천에는 정치도 포함된다. 하지만 공자의 모토는 ‘배운 뒤에 벼슬에 나아간다’이다. 배움으로 자신을 완성시키지 못한 사람이 벼슬을 하게 되면, 사욕에 쉽게 흔들려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나아가 벼슬을 잃고 자신을 해치기도 한다. 따라서 공자는 평소 망령되이 행동하지 않도록 내면을 다지는 수신(修身)을 끊임없이 강조했고, 배우지 않고 벼슬하려는 제자들은 엄하게 혼냈다. 그런데 《논어》 안에서 유일하게 공자가 먼저 벼슬을 권한 제자가 있었으니, 바로 칠조개다.


칠조개는 이 구절 외에는 나오지 않아서 평소 그의 사람됨이 어땠는지, 공자가 어떤 상황에서 벼슬을 권했는지 구절의 맥락을 파악하기 힘들다. 그러나 공자가 그에게 벼슬을 권한 것으로 보아 칠조개의 학문이 어느 정도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칠조개는 “아직 그것을 감당할 자신이 없습니다.”라는 말로 겸허하게 사양했다. 이토 진사이가 얘기했듯, 당시에는 재주가 완성되지 않아도 주위 사람들이 추천하면 벼슬에 나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관습이었다. 하물며 다른 사람도 아닌 공자가 추천한 것이니 벼슬해야 할 이유로 이보다 더 확실한 게 있을까? 그럼에도 칠조개는 ‘굳이’ 벼슬자리를 거절했다. 주목해야 할 포인트는 두 가지다. 첫째, 칠조개는 왜 벼슬을 거절했을까? 둘째, 칠조개가 자신의 말을 거절한 것에 공자는 왜 기뻐했을까?


공자는 가끔 제자들에게 각자의 포부(志)를 물어본다. 그러면 대부분의 제자들은 벼슬을 가지고 뜻을 펼치는 것에 대해 얘기한다. 가령, 〈선진〉편 25장에서, 공자가 자로와 염구, 공서화에게 “만약 누군가가 너희들을 알아준다면 어찌 하겠느냐”라고 물어봤을 때, 이들은 각각 평소 자신이 이상적으로 생각해온 정사(政事)를 주관하겠노라 말한다. 하지만 공자가 보기엔 이들을 포함해 많은 제자들이 자신의 그릇보다 뜻을 더욱 앞세웠다. 벼슬을 감당하기에 여전히 배움이 부족함에도 벼슬을 감당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듯 보였던 것이다. 자로가 아직 배움이 무르익지 않은 자고에게 비(費)땅을 관리하는 벼슬을 맡겼을 때, 공자가 자로를 혼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자고는 사람됨이 우직했기에 타인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했으나 아직 정사를 맡기에는 지식이 부족했다. 그런데도 배움을 통해 필요한 지식을 쌓지 않고 벼슬을 맡겼으니 공자가 “남의 자식을 해치는구나!”라고 엄하게 꾸짖은 것이다.


공자는 평소 제자들에게 “지위가 없음을 걱정하지 말고 지위에 설 것을 걱정하며, 자신을 알아주는 이가 없음을 걱정하지 말고 알려질 만하기를 구해야 한다.”(不患無位 患所以立 不患莫己知 求爲可知也 - 〈이인〉편 14장)라고 말하며 우선 학업을 쌓을 것을 강조했다. 그런 점에서 칠조개는 공자의 말을 잘 실천하고 있었다. 주희에 따르면, 뜻이 높아도 세세한 것에서 간혹 마음을 다 쏟지 않는 부분이 있고, 목표지점이 분명해도 자신을 돌이켜 성실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칠조개는 공자라는 위대한 스승의 인정을 받았어도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미세하게 일어나는 자신의 마음을 살피고 있었으리라. 타자의 인정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돌이켰을 때 떳떳하고자 했던 칠조개로부터 그가 얼마나 자신을 엄격하게 성찰하고 있는지를 이 짧은 구절에서 알 수 있다. 주희는 이것이 칠조개가 품었던 큰 뜻(大意)이라고 보았다. ‘큰 뜻’이란 거창한 포부를 세우기에 앞서 꼼꼼하게 자신을 살피고 역량을 기르고자 하는 실천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보면, 공자가 칠조개의 말에 기뻐한 것은 당연하다. 공자는 스스로를 호학자(好學者)로 소개한다. 호학(好學)이란 끝없는 배움을 통해 자신의 울타리를 뛰어넘는 것이다. 그의 가르침의 핵심은 제자들에게 호학을 전달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의 뜻은 종종 호학은커녕 벼슬하는 데 가 있었다. 공자가 “10호쯤 되는 작은 읍에 반드시 나처럼 충(忠)과 신(信)한 사람이 있어도, 나만큼 학문을 좋아하는 자는 없을 것이다.”라고 말한 건 어쩌면 그런 제자들에 대한 안타까움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자신처럼 호학하는 자가 없다는 것에 대한 절망감이 평소 공자에게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칠조개의 행동에는 그동안 공자가 그토록 전달하고자 했던 호학자의 태도가 담겨있지 않은가! 자신이 평소 가르쳐왔던 핵심을 깨달은 제자가 있었으니, 공자가 얼마나 기뻐했을지 그 감동을 짐작할 수 있다. 타자를 감동시키는 공부란 결국 자신의 공부에 최선을 다할 때 가능하다.


나도 칠조개처럼 공부에 마음을 붙이고 싶다. 그리고 내가 공부하고 있는 것을 통해 누군가에게 자극과 감동을 주고 싶다. 하지만 그게 좀처럼 쉽지 않다. 공부에 힘이 붙었다고 생각하다가도 갑자기 낯설게 느껴지고, 안간힘을 써야만 낯설었던 공부에 조금 마음을 붙이게 된다. 그렇게 공부와 밀당을 반복하는 동안 도대체 공부를 통해 무엇을 이룰 수 있는지 회의감이 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봐도 얼른 공부가 안정되길 바라는 마음이야말로 내가 겪을 것들을 건너뛰고자 하는 꼼수임을 알 수 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공부는 천천히 기본을 다지며 차근차근 겪어나가는 과정을 인내해야 하는 일종의 수련이다. 그것 외에는 공부에 힘이 붙는 길도,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방법도 없다. 그러나 지금 나는 공부를 통해 나 자신을 닦기보다는 ‘공부에 마음이 붙은 상태’,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것’으로만 마음이 향해 있다. 정작 내가 해야 할 기초를 하고 있지 않으니 당연히 공부에 마음이 쉽게 안 붙을 수밖에.


게으름을 끊고 뜻을 크게 세우고 행하는 것은 분명 힘든 일이다. 그러나 편한 것은 없다. 지금 게으름을 부리면 당장은 편할지 몰라도 앞으로 어떤 발전가능성도 없게 되며, 나아가 누군가에게 매력적인 인물로 그려지지도 않는다. 꾸준히 공부해서 무엇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보다는 차라리 꾸준히 공부하지 않으면 무엇도 성취할 수 없다는 두려움을 갖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공부를 시작한 지 햇수로 3년째, 아직 나의 노력이 어떤 결실을 맺을 수 있을 만큼 쌓였다고는 자신(自信)하지 못하겠다. 그러나 힘들다고 해서 도망치지 않고 기꺼이 이 지난함을 견딜 각오가 되어있다는 것만큼은 내가 자신(自信)하는 바이다.


 

글 : 규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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