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난 연재 ▽/카프카와 함께

공부한다면, '개'처럼

by 북드라망 2018. 4. 19.

공부한다면, '개'처럼 



인간 너머라구요? 


카프카의 세계에는 동물이 가끔 나옵니다. 개(「어느 개의 연구」,『소송』), 쥐(「작은 우화」,「요제피네, 여가수 또는 서씨족」), 원숭이(「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어쩌면 두더지?(「굴」) 동물은 자기의 종족에 관련된 어떤 질문에 붙들려 있습니다. 예를 들면, ‘개란 무엇으로 사는가?’ ‘쥐의 불안과 고독이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등. 머리에 이런 화두를 활활타는 불처럼 이고 돌아다니다가, 결국 동물은 어떤 경지에 도달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라짐’. 아버지 개와, 친구 쥐들이 시비를 걸며 매달려도 그들은 슬그머니 떠나버린답니다. 자신의 테두리를.




때로는 이 사라짐이 죽음과 변신의 테마로 구현되기도 합니다. 그럴 때에는 어김없이 인간이 문제가 되지요. 어쩌다가 포획된 원숭이 피터는 동물원의 철창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자신의 본성을 죽이고 인간의 ‘언어’를 익힙니다. 그래서 원숭이-인간이 되어요. 동물이 인간으로 변신하는가 하면, 인간이 동물로 바뀔 때도 있습니다. 인간의 생존을 탐구했던 단식 광대(「어느 단식 광대」)는 철창 속에서 동물처럼 네 발로 주저앉고 마지막에는 여러 야수와 함께 전시됩니다. 그렇다면 ‘가족애’에 시달리던 그레고르 잠자 씨가 많은 발과 딱딱한 등껍질을 지닌 갑충으로 변신하신 것도 카프카식 동물 변신담의 일종으로 볼 수 있겠네요.(『변신』) ‘무엇이 과연 원숭이스러움인가?’라는 질문 저편에서 인간은 출현하고, ‘이것도 인간인가?’라는 회의 속에서 갑충은 튀어나온다! 카프카의 인간은 동물 그 너머에 있고, 카프카의 동물은 인간 그 너머에 있습니다.



예술이여, 질문하라 


동물들은 또한 배우이지요. 그들은 무대 위에서 즉, 자신의 종족 앞에서 온 몸으로 ‘우리의 생활’을 표현합니다. 학술원 회원이 된 피터는 연기하지 않지만, 학술원들 앞에서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퍼포먼스 하기 때문에 예술가라고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카프카 작품의 예술가들은 대부분 동물 배우예요. 카프카에게 무대는 왜 중요한 걸까요?


카프카의 예술관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은 「어느 개의 연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미완의 장편 『소송』의 주인공 요제프 K가 ‘개처럼’ 죽어간다고 해서 당황할 필요가 없지요. 여기서 카프카의 개는 인간 그 너머의 존재, 법 밖의 이미지로 나옵니다) 그런데 이 개는 예술가이기 이전에 연구가네요? 네 맞습니다. 그는 견족(犬族) 전체로부터 존경과 질타를 한몸에 받고 있는 학술견입니다. 그런데 그가 촐랑거리던 한 마리의 강아지에서 학술견으로 진로를 결정했던 것은 우연히 예술견들을 만난 뒤였죠. 그럼 꼬마가 만난 예술견의 모습을 한번 볼까요?


저 일곱 마리의 위대한 음악가들은 나에게는 더욱 놀랍고도 압도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었고, 노래를 부르는 것도 아니었다. 저마다 일제히 혈기 왕성한 표정을 하고 입을 거의 여는 일이 없이, 텅 빈 공간으로부터 마법적인 힘으로 음악이 솟아나게 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다 음악이었다. 발을 올리고 내리거나 고개를 갸웃거리거나, 달리고 멈춰 서고 한 마리가 다른 개의 등 위에 앞발을 얹고 그리고 똑바로 선 앞의 개가 다른 모든 개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거나, 혹은 땅 가까이 몸을 끄는 복잡한 형상을 형성하고도 한번도 실수하지 않도록 함으로써, 서로 간에 규칙적인 결합 형태를 취하기도 하고 서로를 받아들이는 자세를 취하기도 한다.(「어느 개의 연구」)


대단한 예술이라고는 볼 수 없군요. 발을 올렸다가 내리고,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서로의 몸에 기대는 행동이란 개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예술견들이 표현하는 것은 개다움 그 자체라 할 수 있습니다. 카프카의 배우 예술가는 평범하기 그지없지만, 종족의 일원이라면 누구나 하고 있는 나날의 행위를 표현하는데 있어 대가입니다. 서씨 쪽의 슈퍼스타 요네피네도 그렇지요. 그녀는 쥐라면 언제나 불 수 있어야 하는 휘파람을 붑니다. 그녀는 “기교라기보다는 오히려 삶의 특징적인 표현”을 뿜어내지요. 하지만 정신없이 음식을 나르고 있는 쥐들이 무의식적으로 불고 있는 휘파람과는 다릅니다. 요제피네가 입을 오물오물 하기 시작만 해도, 사람들은 하던 일을 멈추게 되지요. 그녀는 관객에게 ‘쥐의 휘파람이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녀의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것뿐 아니라 그녀를 바라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단지 우리의 일상적인 휘파람이라 해도, 우선 여기서는 단지 그 습관적인 일을 하기 위해 엄숙하게 격식을 차리고 나선다는 어떤 기묘함이 존재한다. 호두 하나를 까는 일이 진실로 예술이 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감히 대중을 불러모아 그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 그들 앞에서 호두 까는 일을 하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누군가가 그런 일을 해서 자신의 뜻을 관철시킨다면, 그것은 절대로 단순한 호두까기에 관한 일이 아닐 것이다. 아니면 그것이 단지 호두까기이기는 해도 우리가 호두까기를 손쉽게 잘 해낼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예술을 무시해왔었으며, 이 새로운 호두 까는 이가 비로소 우리에게 그 예술의 본질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해질 것이다.(「요제피네, 여가수 혹은 서씨족」)


요제피네의 휘파람은 소리라기보다는 하나의 몸짓입니다. 휘파람불며 사는 쥐의 삶 자체. 평범한 호두까기도 무대 위에서 연출될 때는 문제가 달라집니다. 관객은 생각하게 되지요. ‘과연 호두를 깐다는 일이란 무엇인가?’ 무대를 보면서 사람들은 까서 먹는 호두에 대해서가 아니라 호두를 까는 일의 사회적, 철학적 의미에 대해 궁금함을 갖게 됩니다. ‘호두까기’는 원래 목적을 잃고 삶의 한 부분에 대한 질문 수단이 되지요.


카프카의 개도 예술견의 동작을 보고 처음으로 ‘개란 무엇으로 사는가?’를 묻습니다. 어느 단식 광대가 굶음을 보여줌으로써 관객들에게 던지려 했던 것도 바로 이런 질문이었지요. ‘과연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카프카는 「어느 단식 광대」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의미심장한 장면을 마지막에 하나 삽입합니다. ‘입술 가득히 피를 머금은 육식동물들 속으로 군중이 뛰어간다!’ 인간은 서로를 뜯어먹는 일에 열광하며 살고 있다는 말일까요?


카프카는 일찍부터 연극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특히 1911년에는 이자크 뢰비가 꾸려가는 동유럽 유대인 유랑 극단의 공연을 보면서 자신의 언어론과 예술관을 확고히 하기도 했지요. 사실 20세기 초 체코의 유대인 아이에게 연극은 허락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교리 때문이기도 하고, 전통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카프카의 경우에는 여기에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의 특별한 교육관이 더해졌지요. 정통 독일식 교양 교육으로 무장 해서, 프라하의 상류 사교계에 입성해야만 하는 장남에게 유대적인 것은 한 방울도 튀어서는 안되었습니다.


하지만 카프카는 연극의 매력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어요. 연극을 많이 감상한 해는 1911년과 1912년이지만, 카프카는 연극미학에 대한 관심을 죽을 때까지 놓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에 병상에서 고치고 있던 작품집 제목 역시 『어느 단식 광대』(1924)입니다. 유고로 출판되는데요, 수록된 네 편의 작품 「첫번째 시련」,「작은 여인」,「어느 단식 광대」,「요제피네, 여가수 또는 서씨족」모두 배우가 주인공입니다. ‘무대’에 매혹된 카프카의 말을 한번 들어볼까요? 아래의 인용문은 1911년 무렵 쓰였을 것이라고 추정되는 글입니다. 그는 체코의 프라하에서 폴란드의 바르샤바, 600km가 넘는 그곳에까지 가서 유대인 연극을 보고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상연된 연극은 희극이었는데, 노래와 춤이 곁들어진 6막 10장으로 된 슈모르의 「발 추베」였다. … 나에게는 오페라, 연극과 오페레타 모두 합친 것보다도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우선 첫째로 언어가 이디시어라는 것, 독일어식 이디시어이긴 하지만 그러나 역시 보다 훌륭하고 아름다운 이디쉬였다. 둘째로 여기에서는 무엇이고 다 있다는 것, 즉 연극, 비극, 노래, 희극, 춤, 모두를 갖춘 바로 인생이 아닌가! 온밤 동안 나는 흥분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언젠가는 나는 흥분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언젠가는 나도 유대 예술극장에서 봉사할 것을 그리고 유대인 배우가 될 것을 맹세했다.(『잠언집-행복한 불행한 이에게』수록) 


카프카는 유대인 배우가 될 꿈까지 꾸었군요. 그렇습니다. 연극 무대에 위에는 비극, 노래, 희극, 춤, 즉 인생 그 자체가 다 있었던 거죠. 특히 동유럽 유태인들은 연미복의 신사들과 가슴골이 깊게 파인 드레스를 입은 숙녀들의 인생따위는 몰랐습니다. 그들은 어머니의 땅도(고향), 아버지의 나라(천국)도 모르고 덕지덕지 기운 누더기 옷에 제대로 알아듣기도 힘든 온 동유럽의 방언을 섞어 그들이 하루하루 겪는 희로애락을 보여주었지요. 씁쓸하지만 진실된 장면들을 보며 카프카는 ‘유대인이란 도대체 무엇으로 사는 것인지?’ 나아가 ‘인간이란 과연 저런 존재인 것인지?’라는 질문 했던 것입니다.



신체, 법이 새겨지는 서판 


무대가 직접 나오지 않아도 카프카 작품은 충분히 연극적입니다. 작품 전체에서 강조된 배우의 개별 몸짓 때문이죠. 마치 화면 여러 곳에 볼록랜즈를 들이대든 카프카는 몸짓의 부분부분을 부각시키기 좋아했습니다. 특정한 사건을 표현할 때에도 인물의 감정이나 핵심 사물에 스포트라이트를 주는 법 없이, 인물들의 옷차림과 움직임 같은 지엽적 디테일을 더 중요하게 사용했습니다. 첫 단편집 『관찰』(1913)은 그런 스타일의 실험으로 가득합니다.


전차가 정류장으로 다가온다. 한 소녀가 내리려고 계단 가까이에 선다. 마치 그녀는 내가 만져보기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확실하게 보인다. 그녀는 검은 곳을 입고 있었는데, 치마의 주름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블라우스는 몸에 꽉 기고 작은 그물 모양의 흰 레이스로 된 칼라를 달고 있다. 그녀는 왼손을 평평하게 벽에 대고 있고, 오른손에 쥔 우산은 두 번째 계단 위에 놓여 있다. 그녀의 얼굴은 갈색이며, 양편으로 약간 눌린듯한 코의 끝은 둥글고 넓적하다. 그녀는 숱이 많은 갈색 머리를 가지고 있고, 오른쪽 관자놀이에는 잔머리털이 바람에 나부낀다. 그녀의 작은 귀는 바짝 붙어 있다. 그러나 나는 가까이 서 있었기 때문에 오른쪽 귓바퀴의 뒷면 전체와 귀뿌리의 음영을 본다.(「승객」,『관찰』(1913))


작품의 반을 차지하는 이 장면을 통해 카프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압박된 상체와 뜬금없이 날리는 치마의 레이스는 무엇을 상징하며, 벽과 우산에 각기 따로 접속해 있는 양 손의 숨은 뜻은 무엇일까요? 팔꿈치와 발목, 눈매와 이마는 다 따로 놉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소녀의 하차 의도가 아니지요. 참으로 강렬하게 전달되는 것은 소녀의 몸이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는 점입니다. 검은 옷을 입고 전차를 배경으로 서 있다는 것은 19세기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떠올리게 합니다. 수수한 복색과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이 표정없는 아가씨가 돌아다닐 수 있는 공간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귀족의 부엌? 방직공장? 까페 계산대 뒤? 게다가 갈색 피부와 양편으로 약간 눌려 들어간 퍼진 콧등이라는 대목은 인종적 뉘앙스마저 풍기지요. 그 자신의 의식이나 외부와 아무런 상관관계를 형성하지 않는 몸의 부분부분. 하지만 그녀의 귓불과 발꿈치 각각에는 시대와 사회가, 인종과 가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말 고삐를 쥐고 한 사나이가 걸어갈 때, 우리는 그가 기수인지 상인인지를 알아차릴 수 있지요. 그 어깨 솟음과 걸음의 리듬만으로도 말과 맺는 그의 관계가 다 표현되니까요.




그런데 카프카는 조각된 이 몸뚱아리를 하나도 자연스럽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카프카에게 신체란 법이 새겨지는 서판입니다. 유형지에서 천방지축으로 날뛰던 죄수는 법률기계 아래에서 죄목을 몸에 새기는 형벌을 받습니다. 팔자란 온 몸에 시나브로 새기는 것이어서 말로 굳이 중언부언할 필요가 없습니다. 엄마 뱃속을 나온 바로 그 순간부터 우리의 몸은 일분도 쉬지 않고 제도와 질서를 받아쓰고 있으니까요. 수없는 반복을 통해 귀와 혀에 새긴 문법 때문에 할 수 있는 발음과 없는 발음이 정해지지요. 죄수의 경우처럼, 우리도 스스로의 창의를 통해 법을 발명하거나 몸의 쓰임을 고안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동의한 적도 없고, 미리 알아볼 수도 없었던 법으로 스스로를 조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판결은 엄하지 않습니다. 죄수가 법한 계율을 그의 몸에다 써레로 써 넣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저 사람의 몸에는,” 장교가 그 남자를 가리켰다. “네 상관을 존경하라는 말을 써 넣습니다.” […] 탐험가는 여러 가지 질문을 하고 싶었지만 죄수를 쳐다보고 이렇게만 물었다. “저 사람은 판결문을 알고 있나요?” “모릅니다” … “그걸 그에게 알려주는 일은 쓸데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몸에서 알게 될 테니까요.” … “그렇지만 자신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는 사실은 알고 있겠죠?” “그것도 모릅니다.”(「유형지에서」) 


19세기 말에 서구의 부르주아지는 자율적으로 신체를 표현하는 법을 완전히 잃어버렸다고 합니다. 발자크를 비롯해서 몇몇 병원 관계자들은 부르주아들 보행같은 신체 움직임을 연구하기도 했는데요. ‘정상적인 속도로 걷는 남성’, ‘엽총을 갖고 뛰는 남성’, ‘키스 표시를 보내면서 걷는 여성’ 등,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성을 놓고서 수많은 행위의 정상적 몸놀림을 규정해보려는 시도가 있었다고 합니다.(아감벤,「몸짓에 관한 노트」,『목적 없는 수단』참고) 절제된 몸짓을 통해, 과잉되어 있던 귀족 문화로부터 스스로를 차별화하려 했던 부르주아지들이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19세기 대중의 신체 감각은 조각되었지요. 카프카는 자신의 배우-동물과 함께 인간적 정신(신념이나 이념)이 아니라 그 몸에 새겨진 법을 문제 삼았습니다.



길은 굶주림을 뚫고 지나간다


다시 개의 연구로 돌아오겠습니다. 예술견을 만난 뒤로 강아지는 학술견이 됩니다. 카프카에게 예술은 ‘질문하기’였습니다. 그 질문을 껴안은 자는 형벌을 수행하듯 그 앞에 묶이게 됩니다. ‘왜 나를 들여보내주지 않는거지?’를 궁금해했던 시골 사람이 법 앞에 죽을 때까지 서 있었던 것처럼요. 하지만 질문을 가진 자는 법의 수행자가 아니라, ‘자기 질문’의 수인이 된다는 점에서 일련의 법으로부터 벗어나 있습니다.


자, 개란 뭘까요? 다음은 그의 연구결과입니다.


살기는 어렵고, 땅은 거칠고, 학문은 인식하고 있는 바가 풍부하나 실질적인 결과는 보잘것이 없다. 식량을 가진 자는 그것을 움켜쥐고 놓지 않는다. 그것은 사사로운 욕심에서가 아니라 개의 법도에 해당한다. 동족들이 만장일치로 결의한 것이다. 그것을 가진 자는 언제나 소수이므로, 사리사욕을 극복하려는 데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먹을 것이 모자라면 우리들의 것을 나누어주겠다’ 하는 대답은 일종의 판에 박은 말이거나 농담이 아니면 남을 놀리는 것이다.(「어느 개의 연구」)


아 천박하구나, 사리사욕이라니! 자랑스러워 마땅해야 할 자신의 종족이 품고 있는 이 씁쓸한 본성 앞에서 학술견은 화가 나지 않을 수 없었죠. ‘이 저질의 생활의 천장이 뻥 뚫려버렸으면!’ 급기야 그는 ‘개라는 개의 골수는 다 빨아 뱉어버리고 싶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굶기 시작합니다. “나는 모든 개들을 강제로 모이게 하여 그들이 마련한 압력에 의해 그 뼈가 저절로 열리도록 하고 싶다. 그리하여 그들이 사랑하는 생활로 돌아가게 하고 그리고는 완전히 혼자서 그 골수를 빨고 싶다.” 이 골수란 영양분이 아닙니다. 개를 ‘개다움’으로 가두어버리는 독극물이지요. 학술견은 자기 골수를 씹어 뱉듯, 굶음으로써 종족의 개다움을 떨쳐 버리려 합니다.


괴로움을 당하면서도 단식을 더 계속하고 싶은 유혹을 느껴, 알지 못하는 개의 뒤를 밟을 때처럼 욕망에 불타 유혹에 따르기로 하였다. 나는 단식을 중단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마도 몸이 극도로 약해져서 일어나 구원을 청할 기력조차 없었던가 보다. 나는 숲속의 마른 잎사귀 위를 대굴대굴 뒹굴었다. 이제는 잘 수도 없었다. 사방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까지 잠들어 있던 세계가 내 단식으로 눈을 뜨는 듯이 생각되었다.(「어느 개의 연구」)


잠들어 있는 세계 전체를 눈뜨게 하는 단식. 카프카에게 연구란 곧 굶음이었습니다. 막스 브로트와 떠난 어느 기차 여행에서 만난 한 아가씨가 ‘당신은 누구세요?’라고 물었을 때, 그는 스스럼없이 “공부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대답했지요. 카프카는 평생 채식을 고집했고, 말년에는 후두결핵 때문에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습니다. 자신을 태워가며 썼던 작품이 바로 단식 광대와 굶는 예술가들의 이야기였어요. 자신의 골수를 먹어 없애면서, 카프카라는 인간은 가만히 들어앉아 있던 인간다움을 하나하나 깨우며, 태우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단식 광대는 ‘먹고 산다는 것’의 문제를 끝까지 밀어붙인 다음, 더는 먹고 싶은 것이 없는 지평을 발견합니다. 굶고 굶은 결과로 얻은 귀한 깨달음이었습니다. 굶음을 거듭하던 광대의 몸도 점점 인간의 법을 벗게 되지요. 그래서 서커스단의 다른 동물들, 별종들, 기이한 기계들과 나란히 있게 되었습니다. 동물이나 식물, 사물의 온 차원이 그의 신체를 뚫고 지나갔지요. 질문을 가진 자의 최후는 ‘사라짐’. 결국 단식 광대는 인간의 지평과 동물의 지평을 넘어 지푸라기의 차원으로 가 버립니다.


학술견의 최후는 어땠을까요? 학술견의 연구는 조용했던 개들을 불편하게 하면서 계속해서 분란을 일으켰습니다. 어떤 개는 먹이를 주며 회유하려 했고, 어떤 개는 ‘개보듯’ 무시하며 지나쳤습니다. 하지만 학술견에서 단식견으로 바뀌어 가면서, 그는 주변의 소음을 듣지 못하는 존재가 됩니다. 어릴 적 예술견에게 ‘당신은 왜 그러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들은 답하지 못했습니다. ‘개가 개의 말에 답을 안해?’ 그때 강아지는 놀라 자문했지요. ‘그럼 저들은 개가 아닌가? 개의 법 밖에 있단 말인가? 이제는 단식견이 바로 그런 질문을 받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부르는 소리를 못 듣고, 자신이 지금까지 개를 연구해왔다는 사실조차 잊고. 마침내 그는 네 발을 갖고 하늘을 날아다니게 됩니다. 개가 하늘을? 굉장한 도약이 학술견을 뚫고 지나가면서 그를 공중에 띄워버린 것입니다. 텅 비어버린 몸뚱아리로 숲 속 마른 나뭇잎 위를 대굴대굴 구를 때, 단식견은 개 종족에게 하나의 가능성으로서만 존재했던 공중견처럼 날아가듯 뛰게 되었던 것이죠.


개는 변신에 변신을 거듭했습니다. 학술견에서 단식견으로, 마침내 예술견이 되어 하늘로! 카프카에게 공중은 자유가 실현되는 것같은 환영을 주는 장소지요.(「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첫번째 시련」) 네, 그것은 '자유의 이미지'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개는 새가 아니라 공중견이 됩니다. 바닥을 떠나지 않는 것이죠. 땅을 떠난 공중 곡예사의 운명은 죽음. 노예선에서 탈출한 자의 끝은 망망대해. 카프카는 지켜야할 법이라고는 없는 허방의 자유는 믿지 않았습니다. 개의 공중은 자기 족속을 깔보기 위한 초월적 공간이 아닙니다. 개는 자신의 네 발을 땅에서 먹이를 줍는 데 쓰지 않고, 도약을 위한 도구로 바꾸었지요. 그는 굽히고 살아야만 하는 대지와 우러러보아야만 하는 하늘의 관계를 바꾸어, 땅과 하늘을 하나의 극장으로 만들었습니다. 개와 개 아닌 것, 온갖 것이 질문되는 무대로 말이지요. ‘저것이 과연 개인가?’, ‘그럼, 새란 무엇인가?’ 개 너머란 지금 여기에서 대지와 하늘의 관계를 바꿈으로써 개다움을 깨는 일이었습니다.


“너는 부인하지만 나한텐 벌써 노랫소리가 들려.” 나는 떨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잠자코 있었다. 나는 그때 지금까지 어떤 개도 경험하지 못한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적어도 전해오는 이야기 속에서는 그와 같은 것을 조금이라도 암시할 수 있는 그 어떤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나는 한없는 불안과 수치심에 사로잡혀 눈앞의 피바다 속에 얼른 엎드렸다. 이 개는 자기는 전혀 알지 못하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노래의 멜로디가 이 개에게서 떠나 독자적인 법칙을 쫓아 공중으로 흘러가고, 마치 그와는 관계가 없는 것처럼 그를 떠나서 한결같이 나에게 들려오는 것이었다.(「어느 개의 연구」)


글_오선민(고전비평공간 규문)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