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존 스칼지, 『유령여단』 - 이불속 하이킥을 덜하는 방법

존 스칼지, 『유령여단』 - 이불속 하이킥을 덜하는 방법



이불속 하이킥. 고요히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다가 느닷없이 허공을 향해 발길질을 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대개는 처절한 후회, 자책, 수치심 등에 휩싸여 무의미한 동작이나 발성을 갑작스레 폭발시키는 행위를 폭넓게 아우르는 말이다. 이 행위는 일견 갑작스러워 보이지만 사실 독립적으로는 발생하지 않으며, 물밑에서 선행된 일련의 사고 과정에 뒤따라서 일어난다. 더 중요한 필요조건은 사고와 행위 모두를 앞서는 타임라인에, 반드시 씨앗이 되는 사건이 존재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이불속 하이킥은 과거에 몸소 겪었던 사건을 기억으로부터 길어올려, 당시에 취했던 자신의 행동이나 언사를 제 3자적 시점에서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평가한 뒤, 다시 시점을 본인으로 되돌려 통렬히 반성하는 기작의 결과물이다. 이때 평가 단계에서 탑재하는 객관성이라는 게 참 기만적인데, 스스로는 객관적이라고 믿고 있지만 십중팔구는 자기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편파적이기 때문이다. 기질적으로 부끄러움을 잘 느끼는 사람은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보는 것을 자기 자신에게 야박하게 구는 것으로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그가 마음속으로 설정하는 ‘제 3자’는 어떤 바보짓도 사랑해주던 조부모나 수줍게 생일초대장을 건네며 얼굴을 붉히던 초등학교 때 짝궁이 아니라, 가자미 눈을 하고 못살게 굴던 직장 선배나 고등학교 때 우리 반을 유난히 미워하던 학년주임같은 인물이다. 이런 식으로 표방된 ‘객관성’의 속에서는, 실수의 기억이 백 배 천 배로 불리하게 왜곡되기 마련이다. 


내 얘기다. 이불속 하이킥은 나의 전매특허다.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가 괴성을 질러 주변 사람들 놀래키기’ 종목이 있다면 세계 챔피언 금메달은 따놓은 당상일 것이다. 최근의 실수를 생각하며 괴로워하는 건 차라리 아무 일도 아니다. 나는 7살 때 있었던 일을 가지고 30살의 어느 여름밤 갑자기 이불속 하이킥을 하는 사람이다. 그걸로 끝이면 다행이게. 두어 달 지나 알밤 익는 가을밤에 한번 또 하이킥을 해줘야 하는 것이다. 다음 해 여름, 모기가 윙윙거리는 밤에 다시 한 번 더. 


이불속에서 하이킥 하게 만드는 일들은 대개가 극히 사소한 일들이다. 진짜 문제는 그 사소함이다. 구태여 사과를 하거나 해명을 청할 수준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찜찜함을 깔끔히 해소하는 게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그게 다시 악순환을 일으킨다. 두고 두고 주기적으로 하이킥을 하고, 그렇게 쪼잔한 일로 하이킥을 했던 내가 부끄러워서 또 하이킥을 한다. 지나간 쪼잔한 일에 대해 현재의 에너지를 소진하며 부끄러움을 느끼는 쪼잔한 스스로에 대해 다시 부끄러움을 느끼고, 그걸로 다시 부끄러움을 느끼고, 다시, 다시, 다시... 이게 무슨 우스꽝스러운  뫼비우스의 띠란 말인가. 


그래서 이 무한반복의 궤도에 속절없이 말려들 때마다, 나는 인간의 개체성을 원망했던 것이다. 개체가 아니었다면. 자아가 이렇게 독립되어 있는 게 아니었다면. 모든 게 투명했더라면. 타자와 나의 의식이 그냥 융합되어 있었더라면. 남과 나를 구분짓는 자의식 따위, 아예 처음부터 없었더라면. 


그랬다. 나는 자의식이 어마어마하게 귀찮았다. 그 알량한 것이 초래하는 온갖 에너지 소모가 그렇게 성가실 수가 없었다. 있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운데, 그게 비대하기까지 하면, 하이킥의 무한급수가 밤마다 펼쳐지는 꼴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스스로의 자의식을 저주하며 내가 꿈꿨던 건, 하나의 정신을 공유하는 거대한 존재의 부속지처럼 되는 것이었던 듯 하다. 각자 따로 움직이고 따로 반응하지만, 정신으로는 이어져있어 단독자로서의 부끄러움이나 허영이나 고독 따위는 느끼지 않을 수 있는 존재. 개미같기도 하고, 산호같기도 하고, 불가사리의 한쪽 발 같기도 한 그런 것. 면도칼로 가운데에 칼집을 내서 돋아나게 한 플라나리아의 두 번째 머리 같은 것. 그렇지. 아마도, 중앙의 의식을 공유하면서 독자적으로도 움직이는 위장이나 심장 같은 것인데 생각도 할 수 있는 그 어떤 딸린 부위.   


꿈꾸기는 했지만, 한없이 막연했던 게 사실이다. 그게 어떤 상태일까? 그건 어떤 기분일까- 개체성보다 집단성이 더 자연스러운 존재가 된다는 건. 그러면서도 동시에 인간이라는 건? 


 『노래하는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에서 캐서린 윌헬름은 개인성을 압도하는 집단성을 천성으로 갖게 된 미래 인류의 한 세대를 시적으로 그려낸 바 있다. 인류문명 멸망 이후라는 특수한 환경 때문에 그렇게 태어나고 자랄 수밖에 없었던 그 특이한 사람들은 원시적이면서 미래적이었고, 아름다우면서 동시에 매우 기괴했다. 개인성을 악의 근원으로 간주하며 사회적 동일성을 지키는 데 강박적으로 매달리던 그들은 결국 자멸의 길을 걷는다. 그들은 예술을 이해하지도 창조하지도 못했고, 그 어떤 학문도 발전시킬 수 없었다. 그들에게 적대적이었던 작중 인물 하나는 그들이 ‘인간이 아니’라고 단언하기까지 한다. 글쎄, 인간의 정의에 대해서는 논박의 여지가 있겠지만, 일단 내가 스스로의 개체성에 넌더리를 내며 자의식을 저주하던 그 모든 순간들 가운데, 그들처럼 되고 싶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건 분명하다. 


존 스칼지의 장편 밀리터리 SF 『노인의 전쟁』의 후속편인 『유령여단』에도 그 비슷한, 그러나 더 극단적인 존재가 나온다. 문명은 있으나 개체적 자의식은 없는 외계부족 오빈. 


“자기 인식의 함정이 뭐지? 오빈이 그런 걸 할 수나 있나? 오빈에게는 예술이 없어. 음악도 문학도 시각 예술도 없어. 지적으로는 예술이라는 개념을 이해하지만, 그걸 감상할 방법은 없어. 그들이 의사소통을 할 때는 오직 사실을 말할 때뿐이야. 어디로 갈지, 언덕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아니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여야 하는지 같은. 그들은 거짓말을 못해.”

(중략)

“오빈은 거짓말을 못해. 자기네 사회 구조 안에서 완벽하게 상호 협동해. 도전이나 논쟁은 규정된 태도로 처리해. 누굴 모함하지도 않아. 완벽하게 도덕적이야. 그들의 도덕은 절대적으로 변경할 수 없게 박혀 있거든. 허영도, 야심도 없어.”

- 존 스칼지,  『유령여단』, 388쪽


소설 속 빌런인 샤를 부탱이 오빈의 이런 특성이야말로 완벽한 것이라고 칭송할 때, 주인공 재러드 디랙은 강하게 반발한다. 그것은 독자의 마음을 대변하는 반발이다. 개체성의 소멸을 꿈꾸던, 따라서 논리적으로라면 샤를 부탱에게 동조했어야 할 내 마음까지도. 


이 소설이 『노래하는 새들은 지금은 사라지고』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인간의 정의, 그리고 자의식의 가치에 대한 구체적인 숙고를 끌어낸다면, 그 공은 외계종족 오빈의 대척점에 서 있는 주인공 재러드 디랙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다. 그는 어떤 사람의 유전자를 복제하여 만들어낸 신체에 그 사람의 복제된 의식을 주입하여 만들어진 특수부대 군인이다. 그 ‘어떤 사람’, 의식과 유전자 모두의 원래 주인이 바로, 인류를 배신하고 오빈의 편에 선 천재 과학자 샤를 부탱이었다. 머릿속 어딘가 부탱의 기억이 주입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순백의 상태로 태어나 어린아이처럼 차근차근 세상을 익혀나가는 재러드 디랙의 행적을 좇으며, 소설은 같은 질문을 반복한다. 같은 유전자, 같은 의식과 같은 기억, 같은 두뇌를 가지고 있다면, 두 사람은 같은 사람이 될까?   


“이것 봐, 디랙.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나한테 자의식이 좋네 어쩌네 말할 수는 없어. 네가 너 자신이 아닌 다른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걸 의식하고, 다른 사람의 기억을 의식하고, 네 삶의 목적이 우주개척연맹이 지목하는 사람과 생물들을 죽이는 것에 불과하다는 걸 의식하면서 말이야. 넌 자아가 딸린 총이야. 차라리 자아가 없는 편이 나았을텐데.” p389 


 우주개척연맹이 확고한 군사적 목적을 가지고 디랙 또는 그의 동료 특수군인들을 ‘만들어’ 냈을 때, 샤를 부탱이 말한 것처럼 자아를 제거하지 않은 이유는 불분명하다. 딱히 인권의식이나 과학윤리가 투철해서라기보다는, 인간의 신체에는 인간의 자의식이 깃들었을 때 종합적으로 가장 효율이 좋아진다는 결론이 내려져서가 아닐까 싶다. 어쨌든 철저히 전술적인 목적에 의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존재라는 사실이, 인간의 유전자와 인간의 의식 기제를 갖춘 디랙을 인간 아닌 존재로 규정 짓지는 못 한다. 그에게 주어진 삶의 구불구불한 행로에서 매 순간마다 스스로 내린 크고 작은 선택들이, 그를 명실상부하게 독자적인 한 인간으로 일으켜 세운다.



생생한 전투장면들과, 흥미진진한 문화 충돌의 단면들, 정밀한 과학적 상상, 알맞은 톤과 온도의 유머를 능수능란하게 교차시키면서 이 소설은 끊임없이 인간과 의식, 개체로서의 인간과 집단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해 질문하게 만든다. 태어날 때부터 뇌파가 서로 연결될 수 있도록 기술적으로 조정된 특수부대원들의 집단적인 감각 공유는 어쩌면 내가 이불속 하이킥에 신물이 났을 때 꿈꾸었던 바로 그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본 것, 내가 느낀 것, 내가 놓친 것을 모두가 함께 감각해 이해한다면, 서로 부끄러워할 게 안 남는 거잖아. 그리고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나는 깨달았던 것이다. 그 집단감각의 공유가,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며 동고동락하는 소대원들끼리로 한정된다는 것을. 가능할 때조차, 우리는 자의식의 경계를 낮추기는 할지언정 결코 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공유의 범위는, 사랑하고 믿음이 가는 사람들의 테두리 안에서 멈춘다는 사실을.      


어차피 ‘나’의 경계 밖에는 심술궂은 제 3자들이 산재해 있다. 우리 특수부대 소대 밖으로까지 우리의 감각을 공유해서는 좋을 일보다는 탈날 일이 더 많을 것이다. 어차피 자의식의 담 안에 도사리고 있어야 한다면, 살짝 넓힌 경계 안에서 좀 너그러워져도 될 것이다. 내 인생의 작은 써클, 나의 특수부대원들, 최대한 공감하며 좋게 해석해줄 친절한 얼굴들을 마음에 저장해놔야지.


내가 이불속 하이킥을 좀 덜 하게 된 것은, 내 과거의 멍청한 행적을 평가하는 가상의 ‘제 3자’를 내게 호의적인 얼굴들로 상상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이를테면 “초등학교 2학년 때 서예학원 선생님 얼굴에 콧수염을 그리겠다고 쫓아다니다가 제풀에 울고 나왔어요.”라고 고백했을 때 최대한 가볍게 받아줄 사람의 얼굴, 그러니까 다정한 할머니나, 사려깊은 작은 이모나, 쾌활하고 친절하던 짝궁의 얼굴 말이다. 

“콩알만한 꼬마애가 붓 들고 뛰어다닌 게 귀여우면 귀여웠지 뭐 그리 대단히 흉잡힐 일이었겠니.” 

“그만할 땐 가끔 좀 엉뚱해도 귀여운 거다.”

“야, 아홉 살 짜리가 장난친 걸 10년 넘도록 나쁘게 기억할 사람이 어딨냐?”

아마도 할머니, 이모, 짝궁은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말을 들은 나는 부끄러움을 훌훌 털어낼 수 있었겠지. 

이 반 주번 누구냐며 위협적으로 칠판을 탁탁 두들기던 학생주임, 팔짱끼고 입가를 비스듬히 치켜올리며 삐딱하게 지켜보던 사회초년병 시절의 김대리 선배를 머리에서 지워야 한다. 나의 특수부대원들로 그 얼굴을 대체해야 한다. 뻔뻔한 사람들에게 권할 만한 정신승리는 아닌 것 같지만, 세상만사 부끄러울 일 투성이라 이불속 하이킥에 도가 튼 사람들에게는 유용할 것이다. 


글_윰(sf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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