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삶의 제작자'들은 어디로 갔을까?

'삶의 제작자'들은 어디로 갔을까?



이반 일리치의 책, 『누가 나를 쓸모없게 하는가』를 읽다가, 위에 옮겨 놓은 문장을 보고서, 베르그손이 '삶의 제작자들'에 관하여 써놓은 문장과, 며칠 전에 겪었던 일이 함께 떠올랐다. 


20년이 넘은 우리집은 어딘가가 툭하면 고장이 난다. 한동안 베란다 천장에 물이 새가지고, 업체 사람을 불러 고쳐놓았다. 그러더니 얼마 후에는 화장실 벽 한쪽으로 또 물이 새는 것이 아닌가. 베란다 문제를 해결해 주었던 곳에 전화를 했더니, 금방 기술자가 와서 진단을 내려주었다. 옥상 환기구를 통해서 빗물이 들어와 화장실로 흘러온 것이니 관리사무소에 이야기하면 된다고 하였다. 다시 관리사무소에 전화를 하여 문제를 이야기했더니, 알아서 하겠다고 한다. 그러더니 그 다음부터는 물이 새지 않았다. 이번에는 전기가 문제였다. 차단기가 한번 내려가더니, 다시 올라올 줄을 모르는 것이었다. 코드를 하나씩 다 뽑아 봐도 문제였다. 결국 전기기사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차단기 자체의 문제였다. 


20년을 산 집인데, 내가 알아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전등이나 수도꼭지를 갈고, 떨어진 타일이나 변기를 붙이는 것 정도가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이다. 전기가 나간 날이 마침 일요일이어서, 나는 주말을 암흑 속에서 보냈다. '무기력'을 경험할 수 있었던 날이었다. 


베란다와 화장실을 고친 후에 '새로 지은 집으로 이사가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참 자연스럽게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사갈 집을 구하려면 그에 합당한 '비용'이 발생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사를 갈 수 없다. 그래서 생각했다. '욕실, 베란다 리모델링에 얼마나 들지?'였다. 각각 200~300만원 사이. 이번에도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돈'이 없으면 이렇게 된다. 모든 것을 '돈'에 맡겨야 하고, 모든 능력을 돈으로 매개된 타인에게 의존해야만 한다. '상품'이 없으면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게 되었다. 


'현대사회'는 좋은 말로 날이갈수록, '전문화'되고, '세분화' 되어 간다. 덕분에 한 인간의 '능력'은 점점 빈약해져 간다. 촘촘하게 구성된 '상품'들의 세계에서 각자는 구매자이면서 동시에 판매자이다. '사고', '파는' 능력말고는 다른 능력이 필요가 없다. 고장난 물건을 고치는 능력이 필요하면 그 능력을 가진 사람을 사면 되고, 글쓰는 능력이 필요하면 그 능력을 가진 사람을 사면 된다. 어쩌면 지금부터 200~300년쯤 후에(그때도 '인류'가 남아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은 단순한 몇가지 행동만 반복하는 빈 껍데기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사실 아무 상관없지만, '삶의 제작자들'이라는 베르그손의 말이 떠오른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제작'이야말로 단점투성이의 존재, 어쩌면 '저주' 속에서 태어났을지도 모를 '인간'에게 던져진 구원의 동아줄일지도 모르겠다. 스스로의 삶을 돌보는 '능력'이 퇴화되는 것과 동시에 '삶'의 재난도 시작될 것이다. 삶의 어떻게 만들어 나갈 것인가, 어떻게 돌봄의 능력을 복원할 것인가.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 10점
이반 일리치 지음, 허택 옮김/느린걸음
창조적 진화 - 10점
앙리 베르그손 지음, 황수영 옮김/아카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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