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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카프카와 함께

만국의 공무원들이여, 초원으로!

by 북드라망 2018. 4. 5.

만국의 공무원들이여, 초원으로!



‘원래’라는 신


카프카는 세계를 어떻게 보고 있었을까요? 한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의 세계, 그 세계가 돌아가는 원리가 집중적으로 분석된 작품은 『성』입니다. 이 소설을 딱 한 문장으로 요약해볼까요? 두둥! ‘주인공 K, 백작님의 마을을 돌아다니다!’ ‘미완’이라는 형식이야말로 필요했다는 듯, 카프카는 길고 긴 이 작품 안을 끝없이 걷는 K를 창조했지요. 과연 K는 골목길 미로 안에서 어떤 사건을 겪는 걸까요? 그가 마주했던 질서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으며, 그는 왜 골목길을 돌아다니는 방식으로서만 제도 안에서 살아갈 수 있었던 걸까요?




마을은 이렇게 움직입니다. 첫째, 통치자(백작)의 진두지휘를 받는다. 어떤 사건이든 일단 백작님의 결정이 떨어져야 진행이 되지요. 그런데 K는 백작님을 만날 수 없었어요. 어디 K뿐인가요? 마을에는 ‘베스트 베스트’ 백작님 모습을 본 이가 아무도 없었답니다. 그러므로 첫째 원리는 이렇게 보완됩니다. 통치자는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말해, 지배의 중심은 텅 비어 있다. 그런데 비어있는 것은 중심만이 아닙니다. 백작의 수족들도 얼굴이 없지요. 중간 관리자 ‘클람’이 마을을 돌아다닌다는 것은 확실했지만, 목격되는 그의 모습은 제각각이었어요. 클람은 명령의 수신과 발신이 오고가는 문턱일 뿐이었죠. 사람들은 쉴새없이 클람의 눈치를 보았지만, 정작 그에게는 눈도 귀도 없어서 지을 수 있는 표정이 없었어요. 심지어 그 자신의 모습도 보지 않는 자. 마을은 그런 빈 얼굴들의 지휘 아래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물론 마을 사람들은 그의 외모를 알고 있고, 몇몇은 그의 모습을 보았고, 그에 관한 이야기는 다들 들었지요. 눈으로 보고 소문으로 듣고 여러 가지 잘못된 저의가 더해져 클람의 상이 만들어졌는데, 대략 맞는다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대략 맞는다고 할 수 있을 뿐이지 그 밖에는 가변적인데, 그래도 클람의 실제 외모만큼은 아닐 거예요. 그는 마을을 올 때와 떠날 때가 완전히 다르게 보인다고 그래요. 맥주를 마시기 전과 후가 다르고, 깨어 있을 때와 잠을 잘 때가 다르며, 혼자 있을 때와 대화를 나눌 때가 다르다고 해요. 이런 점에서 볼 때 그가 저 위 성에 있을 때는 거의 완전히 딴판이라는 게 이해가 될 듯도 해요. 그리고 마을 안에서 떠도는 이야기들 사이에도 커다란 차이점이 있어요. 키, 태도, 몸짓, 수염이 서로 다르게 이야기되지만, 옷에 대해서만은 다행히도 보고가 일치해요. 그는 언제나 똑같은 옷, 즉 옷자락이 긴 검은 재킷을 입고 다녀요. 물론 이 모든 차이점이 무슨 요술 같은 것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 잠시 동안만 클람을 볼 수 있게 된 구경꾼이 처한 순간적인 기분, 흥분의 정도, 희망과 절망의 무수한 등급에 따라 생긴다는 것을 쉬게 이해할 수 있어요.(『성』)


그런데 왜 이들에게는 표정이 없을까요? 나날의 일상은 참으로 복잡해서 이웃끼리 겪게 되는 문제는 한도 끝도 없습니다. 때문에 일어나는 사건들을 중재하고 판결해야 하는 공무는 밤 하늘의 별처럼 많을 수밖에 없죠. 클람은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이해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습니다. 촘촘한 질서의 총체적 맥락을 알려고 달려들었다면, 아니 그 자신이 뭘 하고 있는 인간인지를 돌아보기만 해도 표정이 만들어졌을 테지요. 난감함, 답답함, 피로감, 무력감 등. 이 모든 것이 눈썹과 입술 언저리에 나타났다 사라졌을 텐데 말이예요. 어쩌면 클람은 제도의 거대한 그물을 가늠할 수 있는 사람은 따로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K가 ‘왜 그러고 계세요?’라고 묻기라도 했다면, 그 자신은 백작에 비해 너무 작으니까 어쩔 수 없는 거 아니냐고 발끈하지 않았을까요?


“대체 일개 관리가 용서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관청 전체와 관련된 일일지도 모르지만, 관청 전체도 십중팔구 용서 할 수는 없고 판결을 내릴 수만 있을 뿐이지요. 설령 관리가 마차에서 내려 그 문제를 다루려 한다 해도 가난하고 지친 늙은이가 입 안에서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무슨 사건인지 어떻게 파악할 수 있겠어요? 관리들은 무척 교양이 있지만, 한쪽으로 치우쳐 있어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는 한마디만 들어도 전체 맥락을 금방 꿰뚫어 볼 수 있지만, 다른 부서의 일은 몇 시간쯤 설명해 주면 점잖게 고개는 끄덕일지라도 실은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할 거예요. … 이것을 철저히 이해하려고 하면 평생 걸려도 끝내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성』)



문제는 마을 사람들이죠. 지배자의 얼굴에 구멍이 뻥 뚫려 있는데도 왜 그렇게 말을 잘 들을까요? 그건 그런 식으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여관 주인도, 학교 선생님도, 이장님도, 그들의 아버지들과 그들의 할아버지들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백작님은 저 곳에 계셨고, 어떻게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잘 안보이지만 클람은 쭈욱 돌아다니고 있었거든요. 성으로 가기 위해서는 첫 번째 문지기를 만나야 하고, 그 너머에는 힘센 다른 문지기가 있다고 하고, 그 뒤에는 정말 끔찍한 문지기가 기다리고 있을 텐데, 뭘 더 알아야 하나요? 법 앞에 섰던 시골 사람처럼 ‘그건 그렇다’라고 하니, 처분이나 기다릴 밖에요.


“그것이 그렇게도 끌린다면 내 금지를 어겨서라도 들어가보게나. 그러나 알아두게. 나는 힘이 장사지. 그래도 나는 단지 최하위의 문지기에 불과하다네. 그러나 홀을 하나씩 지날 때마다 문지기가 하나씩 서 있는데, 갈수록 더 힘이 센 문지기가 서 있다네. 세 번째 문지기의 모습만 봐도 벌써 나조차도 견딜 수가 없다네.” 시골 사람은 그러한 어려움을 예기치 못했다. 법이란 정말로 누구에게나 그리고 언제나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고 그는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 모피 외투를 입은 그 문지기의 모습, 그의 큰 매부리코와 검은색의 길고 가는 타타르족 콧수염을 뜯어보고는 차라리 입장을 허락받을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훨씬 낫겠다고 결심한다.(「법 앞에서」)


‘우린 원래!’ 이것이 마을을 움직이는 두 번째 방식, 실은 핵심 원리였습니다. 당연한 것 밖에는 모르는 이웃들이 도처에서 불쑥 불쑥 튀어나와 길을 막아서는 통에, K는 성의 입구 근처까지 갔다가 돌아올 수밖에 없었고 클람의 팔꿈치 근처까지 갔다가도 그만 길을 놓쳐야 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살아 왔어’, ‘이렇게 직접 전화를 하고, 자꾸 찾아와서 옛일을 들추어내면 안 돼는 걸 모르니?’ 그들은 웃지도 화내지도 않습니다. ‘왜 자꾸 생각 같은 걸 물어? 내가 울고 웃는다고 뭐 달라지는 게 있어?’ 그렇습니다. K에게 여기서 기다려라, 저기에 앉아라, 라고 말하던 사람들이 정말 믿었던 것은 백작님이 아니라 ‘원래’였습니다.



포세이돈의 우울


‘원래’를 말하는 순간, 제도는 작동한다! ‘원래’와 함께, 나는 제도이다. 이것이 카프카 님의 결론이지요. 그런데 맹하니 앉아 있는 클람이라고 삶이 쉬울까요? 클람의 진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포세이돈」에 잘 나와 있지요. 이 작품에서 카프카는 저 위대한 바다의 신 포세이돈을 올림포스 산 위의 제우스와 수질 관리국의 하급 관리들 사이에 끼인 공무원으로 그립니다.


포세이돈이 작업 탁자에 앉아서 셈을 하고 있었다. 모든 하천을 관할하는 당국이 그에게 계속해서 수많은 일거리를 주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기 대양의 심연에 앉아 쉬지 않고 셈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가끔 주피터에게 가는 여행만이 단조로움을 깨뜨리는 유일한 중단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대개 그가 진노해서 돌아오게 되는 여행이었다. 그런 이유로 그는 바다를 전혀 보지 못했다. 다만 올림포스 산으로 바삐 올라갈 때 슬쩍 지나칠 뿐, 정말 한 번도 바다를 두루 항해해보지 못했다.(「포세이돈」)


바다의 신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책상 위에 있습니다. 무얼 하나요? 서류 작업이죠. 그는 대양의 심연에 앉아 쉬지 않고 종이를 넘기고 있습니다. 온 세상의 하천은 지금도 끝없이 물길을 만들고 있는 중이며, 지구는 돌고 있으니 흐름은 멈추지 않겠지요. 포세이돈! 그는 얼마나 신중한지! 만사를 제 눈으로 확인하고 처리해야 직성이 풀리기 때문에 조수를 둘 수가 없답니다. 포세이돈! 그는 또 얼마나 성실한지! 제우스를 알현하고 돌아오는 그 순간조차, 결제 서류에 집중하느라 바다를 바다로 못 본답니다. 이 대양을 돌리는 것은 꼼꼼하고도 매사 열심인 우리들의 공무원, 포세이돈 님이시죠.




카프카가 보기에 세상은 포세이돈들로 꽉 차 있습니다. 그런데 저런! 그들이 “고통으로 까무러칠 지경이 되어 비명조차 못 지르고 어둠 속에서” 홀로 끙끙대며 앉아 있네요. 단편 「일상의 혼란」에는 사무원 A의 곤란이 나옵니다. 사업상의 용무 때문에 A는 B를 만나려고 하지요. 성실하기 그지없다 보니, A는 ‘최대한 빨리’ 그리고 ‘빈틈없이’ 사무를 처리하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길목에서 B와 마주치는데요, 헉! 사무실이 아니라 길 위에 있는 B를 그만 못 알아보고 말지요. 결국 A는 사업을 망치게 됩니다. 이때 A의 급한 성질은 정말 포세이돈을 닮았습니다. 포세이돈도 일생의 꿈이라고는 세상의 종말에, 비로소 자신이 죽게 될 때, 딱 그 직전에 “재빨리” 바다 일주 여행을 하는 것이라고 하니까요.


마지막에 A는 벌을 받습니다. 발바닥 불나게 뛰어다니다가 아예 뒤꿈치가 타버리거든요. 제도의 한 점으로 산다는 것은 얼굴 없는 모습으로, 타는 발바닥을 끌어안고 길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일. 이마에 팔자를 그리고 책상 앞에 앉아 원래의 자신을 고집할 때, 우리는 바다처럼 출렁거리는 파란 세상을 외면하는 제도가 되고 맙니다.


집에 와서 그가 들은 이야기는 B는 A가 떠나자 곧바로 왔는데, B가 대문에서 A를 만나 사업을 상기시켰으나 A는 시간이 없노라고, 지금 서둘러 가야 된다고 했다는 것이다.  / A의 그러한 이해할 수 없는 태도에도 불구하고 B는 그래도 여기서 A를 기다리려고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A가 그새 되돌아오지 않았느냐고 벌써 여러 차례 묻기는 했으나 아직 위층 A의 방에 있다는 것이 기뻐 A는 계단을 달려 올라간다. 그는 위층에 거의 다 올라가는 참에 발이 걸려 비틀거리다 그만 뒤꿈치 근육에 열상을 입고 고통으로 까무러칠 지경이 되어 비명조차 못 지르고 어둠 속에서 다만 끙끙대고 있는데, B가-아주 멀리에서인지 바로 곁에서인지는 분명치 않으나-화가 나서 계단을 쿵쿵 디디며 내려가 아주 사라지는 소리가 그에게 들린다.(「일상의 혼란」)



골목은 나의 초원  


도대체 왜 포세이돈은 저 먼 미래에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삶을 살고 있나요? 왜 인간은 제도의 부분으로사는 것에 만족하나요? 여기에 대한 카프카의 대답은 간단합니다. 바로, 두렵기 때문에.


가령 그에게 특정한 어느 바다 하나를 지저해줄 수는 없었다. 이곳에서는 셈을 하는 일이 단지 아주 귀찮은 일이라는 것을 제외하고, 위대한 포세이돈은 물론 언제나 군림하는 자리만을 얻을 수는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에게 물 바깥에 있는 일자리를 제공하면, 그는 벌써 그 생각만으로도 속이 메스꺼웠다. 그의 신적인 호흡은 불규칙해졌고, 그의 단단한 흉곽은 흔들거렸다.(「포세이돈」)


‘태초부터 그는 바다의 신으로 정해져 있었고, 그리고 그것은 유지되어야 하거늘!’ 아무도, 심지어 포세이돈 자신조차도 공직을 떠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계가 몰락할 때쯤에는 자신도 바다를 한 번 볼꺼라고 호언장담하지만, 실은 이 책상을 떠난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불안을 느낍니다. 포세이돈이라는 명함 없이 살아가려면, 그 불같은 성질을 다 죽이고 강바닥의 피라미에게도 고개를 숙여야겠지요. 째깍 받던 월급을 그리워하며 골목길 담벼락에서 쓰레기를 뒤져야겠지요. 심연에서의 쾌면이 아니라 달밤의 노숙을 자연스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포세이돈은 신이 아닌 자신을 상상할 수 없었어요.


‘원래’ 없이 살기란 과거로부터도 이어져 있지 않고 미래로도 나아가지 않는 길을 걷는 일. 현재가 시간 속에 응고되어서 다시 또 ‘원래’임을 주장하기 전에, 지금을 끊고 다른 길을 뚫어야만 합니다. 낮이 그린 길을 밤이 지워야 하지요. 사막의 유목민처럼, 바람 속에서 자꾸 달라지는 모래의 지평을 사랑해야 합니다. 물 한 방울 없는 사막으로 나가야 하니, 심연의 포세이돈이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카프카의 세계에는 두려움을 모르는 자가 있습니다. 바로 K이지요. 이 이방인은 자신이 완벽하다고 생각합니다. 결핍을 모르기에 결여를 두려워하지 않지요. 그래서 입구도 출구도 없는, ‘원래’들이 우글대는 골목을 거침없이 돌아다닙니다. 그는 늘 이웃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러고는, 길바닥과 방구석을 가리지 않고 헤집으면서 자신의 욕망을 펼칩니다. ‘이제 친구를 만들 거야. 오늘은 저 아가씨와 하룻밤을 보내야지. 아, 이번에는 청소를 좀 해 볼까? 일단은 발을 따뜻하게 하려고 해.’ 그 누구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원래부터 있었던 것은 하나도 없으니까. K는 오직 지금 자신이 원하는 일에 집중합니다. 어제의 애인을 잃고, 과거의 친구를 떠나보내는 일쯤이야! 그는 하하 웃으며 냉랭한 골목을 덥힙니다.


“그렇다, K와 같은 인간이 분명 있는 것이다. 그런 자는 법이든 아주 평범하고 인간적인 고려든 모든 것을 무관심하고 졸린 상태에서 무시해 버리며, 서류 배달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고 집의 명예를 손상시켜 여태껏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는 일을 일으키고도 아무렇지 않게 여긴다. 절망적인 상태에 빠진 나리들이 직접 저항하기 시작해, 보통 사람들 같으면 상상도 못 할 자제력을 보이며 다른 방법으로는 요지부동인 K를 몰아내기 위해서 벨에 손을 뻗어 도움을 청한 것이!”(『성』)


카프카는 원래를 떠나기가 어렵지 않다고 말합니다. 인디언을 떠올려보면 되지요. 원래 없는 들판에서 우리는 짧은 전율을 느낄 뿐! 배고픔이나 자존심으로 고통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말 모가지나 말대가리조차 섞여 들어가는 초원에서는 고집해야 할 ‘나’도 더 이상 없을 테니까요. 만국의 공무원들이여, 인디언이 되라! 원래를 신봉하는 이들이여, 초원으로 가자! 우리가 두려워한 것은 겨우 ‘자기’였구나. 이마 주름을 펴고 가뿐하게 책상에서 일어서는 포세이돈을 떠올리니, 어딘가에서 카프카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인디언이 되었으면! 질주하는 말잔등에 잽싸게 올라타, 비스듬히 공기를 가르며, 진동하는 대지 위에서 거듭거듭 짧게 전율해 봤으면, 마침내는 박차를 내던질 때까지, 실은 박차가 없었으니까, 마침내는 고삐를 집어던질 때까지, 실은 고삐가 없었으니까, 그리하여 눈앞에 보이는 땅이라곤 매끈하게 풀이 깎인 광야뿐일 때까지, 이미 말 모가지도 말대가리도 없이.(「인디언이 되려는 소망」)


글_오선민(고전비평공간 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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