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난 연재 ▽/카프카와 함께

바깥은 없다, 오직 골목길에서_카프카 읽기

by 북드라망 2018. 3. 22.

바깥은 없다, 오직 골목길에서



지금이 아니면 언제, 내가 아니면 누가?


당신들이 우리를 아는가? 우리는 게토의 양들, / 천년 동안 털이 깎이고 모욕을 당한 양들. / 우리는 십자가의 그늘에서 시들어가는 / 재봉사요, 필경사요, 선창자들이지. / 이제 우리는 숲속의 오솔길을 익혔다네. / 총 쏘는 법을 배웠다네. 정확히 목표물을 맞히지. / 내가 나를 위하지 않는다면 누가 나를 위할까? /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지금이 아니면 언제?


우리는 다윗의 자손이요, 마사다에서 끝까지 저항하던 사람들. / 우리는 모두 주머니에 돌을 가지고 다닌다네. / 골리앗의 이마를 산산조각 낼 돌을. / 형제들이여, 묘지가 된 유럽을 떠나라. / 약속의 땅을 향해 함께 배를 타자. / 다른 인간들 속에서 인간으로 살아갈 곳을 향해. / 내가 나를 위하지 않는다면 누가 나를 위할까? /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지금이 아니면 언제? 


당신들이 우리를 아는가? 이제 우리는 주인의 옷을 깁던 바늘로 자신의 옷을 짓고, 주님의 말씀을 받아쓰는 대신에 이 민족의 새 역사를 쓰고, 순교때문이 아니라 스스로의 운명을 위해서 노래하노라! 이 노래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후렴구입니다. 고통을 준 적(敵)도, 슬픔 없는 낙원도 나오지 않는 반복구. 이 노래의 주인공들은 아픔과 희망을 지금 이 순간에 구성합니다. 손에 돌 하나를 쥐고서 골리앗을 찾아나서는 대신 자신을 응시하면서 말이지요.


프리모 레비



아우슈비츠의 생환자 프리모 레비(1919.7.3.~1987.4.11)의 마지막 소설 『지금이 아니면 언제?』(1982)는 이 노래를 따라 진행되는 작품입니다. 여러 명의 중심 인물들은 모두 자신의 ‘지금’ 앞에서 분투합니다. 소설은 1943년 여름에서 1945년 여름까지의 약 2년간 아우슈비츠 언저리에서 끈질기게 독일에 저항하고자 했던 동유럽 유태인 게릴라들의 모험을 다루는데요, 끔찍한 학살의 장면이나 악마 독일인은 그려져 있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해방된 순결한 땅, 이스라엘에 대한 이야기도 전혀 안 나옵니다. 이들의 투쟁은 독일군 보급부대의 자존심을 상하게 한다거나, 구호품을 약탈하는 정도에 그치지요. 게다가 게릴라들은 이스라엘로 떠날 수도 있는 항구에 도착할 뿐, 이스라엘로 가지도 않습니다. 부르주아적 소유욕, 가부장적인 남성들의 이기심, 망령처럼 들러붙는 기억들. 게릴라들은 매순간 눈 앞에서 적과 동지를 바꾸면서 생존의 문제를 해결합니다. 그들은 잘 알고 있지요. 이스라엘이 해결해줄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요. 게릴라들은 기원을 믿지 않았던 것처럼 피안에도 기대지 않았습니다. 대신 ‘지금’ 온갖 방향으로 길이 나 있는 숲을 사랑합니다.


프리모 레비에게 현실의 비극을 해결해줄 바깥은 없었습니다. 시간은 ‘지금의 나’를 중심으로 펼쳐지고, 내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전에 없던 풍경을 선물합니다. 피안의 바깥으로 나가지 않는다면, 이 안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래서 레비의 인물들은 내부를 바꿉니다. 게달리스트 공동체에는 노인도, 장애인도 있고, 페미니스트 여성과 가부장을 필요로 하는 여성이 함께 생활합니다. 심지어 이들 중 한명은 유태인도 아닙니다. 그는 카톨릭 신자로서 책임감을 느끼고 이 공동체에 남아 있다고 큰소리치지만, 사실 숲 속에서 게릴라들과 함께 사는 것이 더 좋았을 뿐입니다. 이들이 쓰는 언어도 제각각이었지요. 따라서 숲 속에서 이들에게 닥치는 문제는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순식간에 공동체의 무게 중심이 바뀌는 일은 다반사! 누가 장닭을 잘 잡을까? 이번에는 누가 저 수염 긴 마을 이장의 고집을 꺾을 수 있을까? 저 역무원의 의심을 없애려면 어떤 사투리를 구사해야 할까? 즉 각자는 순간순간 자신의 능력을 끊임없이 변용하면서 추격해오는 독일군을 피하거나 공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공동체를 살리고 자신도 살아 남을 수 있거든요. 시계 수리공에 불과했던 소심한 사나이 멘델이 엉뚱하게도 기차를 운전할 결심을 하고, 과감하게 열차를 움직임으로써 친구들에게 짧지만 깊은 평온을 선물했던 에피소드는 그래서 인상적입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내가 아니면 누가? 자유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나를 바꾸는 문제이니까요.



바깥은 없다


카프카의 세계에도 바깥은 없습니다. 심지어 카프카의 항구는 죽은 자가 유령이 되어 돌아오는 곳입니다. 완전히 해결되는 문제도, 절대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도 없는 세계.(「사냥꾼 그라쿠스」) 1913년 발표한 첫 단편집 『관찰』에 나오는 작품 「결심」도 바깥으로는 절대로 나가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비참한 상태로부터 몸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원하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으면 수월할 것이다. 나는 안락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테이블 주위를 돌아다니고, 머리와 목을 움직이고, 눈을 빛내며, 눈언저리 근육을 긴장시킨다. 모든 감정을 억제할 것이다. A가 지금 온다면 그에게 열렬하게 인사하고, 내 방에서는 B에게 인내심을 가지고 친절하게 대할 것이며, C의 집에서는 고통스럽고 수고스럽더라도 숨을 길게 내쉬면서 거기서 이야기되는 모든 것을 마음속으로 삼킬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꼭 생기게 마련인 실수로 인하여 이 모두가, 쉬운 것도 어려운 것도 중단될 것이고, 결국 나는 다시 원상태로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모든 것을 참고 견딜 수 있는 최상의 방책이란 스스로 둔중한 덩어리처럼 행동하고, 그래도 날아갈 것 같은 느낌이 들 때에는 불필요한 걸음은 한 발자국도 떼지 말며, 다른 사람을 짐승의 눈길로 바라보고, 결국 후회를 느끼지 말며, 요컨대 인생에서 아직 유령과 같은 존재로 남아 있는 것은 자신의 손으로 억눌러버릴 것이며, 다시 말해서 무덤 속의 최후의 안식을 더욱 늘리고, 그 이외에는 어느 것도 더 이상 존속시키지 않는 것뿐이다. 


그러한 상태의 특징적인 행동은, 새끼손가락으로 눈썹 위를 쓰다듬는 것이다.(「결심」) 


제목은 ‘결심’이라지만 이 이야기의 화자는 겨우 새끼 손가락으로 눈썹 위를 쓰다듬고나 있습니다. 세상에! 그것이 어떻게 비참한 상태에서 몸을 일으키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 될 수 있을까요? 이 작품의 표면적 메시지는 단순해보입니다. ‘무엇을 하려든지 하지 마라. 무엇을 상상해도 더 나아질 일이란 없다.’ 그렇다면 카프카는 패배주의자인 걸까요? 하지만 다시, 또 다시 읽다보면 희안한 지점을 하나 발견하게 됩니다. 화자는 사실 비참함을 분석하지도, 비참 너머의 평온을 구상하지도 않습니다. 그의 결심은 단 하나, 어느 것도 더는 존속시키지 말자! 입니다. 이제 그만!


후회 따위는 모르고 말자. 인생의 유령 같은 놈들을 손 안에 쥐자. 최후의 안식이란 죽음 이후의 일이니 그때 가서 생각하자. 그의 투쟁은 더 나아질 어떤 지점도 상상하지 않는 데에서 출발합니다. 생이란 단지 눈썹 위에 집중되는 것! 역사 따위는 믿지도 말며 그냥 짐승의 눈으로 사람을 보자. 바로 그 순간, 나는 세계의 낯선 자가 되어 비로소 이 비참으로부터 잠깐 고개 돌릴 수 있으리니. 「결심」에는 낙관도 비관도 없습니다. 현재는 미래로 나아가는 징검다리가 아니다! 라는 선언만 있습니다.


카프카는 구원을 믿지 않았지요. 친한 유태인 친구들이 모두 팔레스타인에 가서 민족의 낙원을 건설하자고 했을 때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매일 아침 출근길에서 ‘쯧쯧 유태인인 주제에!’라는 경멸어린 시선을 받았으면서도 말이예요. 카프카의 세계에는 현재의 내가 겪고 있는 생의 질곡을 단칼에 해결해 줄 메시아라든가 생의 번뇌를 종결시키는 죽음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의 주인공들은 언제나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죽어라’라는 운명을 선고받지만, 바로 그 심판대 앞을 떠나지 않지요. 그들은 바로 거기에 머물면서 사건을 만듭니다. 벽인줄 알았던 곳이 문이 되어 열린다 해도 그 밖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놀이의 시작, 여행의 출발  


레비의 인물들이 공동체 내부를 바꾸면서 움직였던 것처럼, 카프카의 존재들도 규칙이 끊임없이 바뀌는 세계를 사랑합니다. 그것은 '놀이'이지요. 유령이 되었다가 시골 의사가 되었다가, 가끔은 황제의 전령사가 되었다가. 「법 앞에서」에 나오는 시골사람이나 『소송』의 요제프 K는 정말 장난꾸러기들이지요. 엄마나 선생님이 아무리 불러도 집이나 교실로 돌아오지 않는 아이들처럼, 이들은 길가의 돌맹이와 구슬 두 개에 혼이 팔려 길을 잃습니다. 『성』의 K도 마찬가지예요. 그도 백작님이 계신 성 안에 들어가야 한다고 말은 하지만, 마을에서 연애 하고, 취직 하고, 친구 사귀고, 이웃과 싸우느라 끝내 성에 이르지 못하거든요. 카프카의 세계는 누가 봐도 갑갑하지만, 누구도 자유의 저편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대신 딱 멈추어 선 그 자리에서 놀이터를 만들고, 그 놀이와 함께 전에는 보지 못했던 다른 풍경 속으로 한 걸음씩 몸을 밀어 넣습니다.


카프카의 놀이꾼들이 가장 사랑하는 장소는 어디일까요? 바로 골목입니다.


나는 골목길을 따라 뛰듯이 달렸다 / 달려가는 취객처럼 / 발로 공중을 구르면서(「어느 투쟁의 기록」) 


골목은 바로 여행의 출발지! 이제까지의 생활을 딱 멈추고, 전혀 다른 방향으로 고개 돌리게 되는 장소이지요. 카프카의 골목은 언제나 누군가의 집이나 아들의 방 바로 밖에서 시작됩니다. 가족들의 오순도순한 저녁 식탁을 뒤로 하고, 화자는 벌떡 일어나, 골목길로 접어들지요. 혹은 출세의 고속도로가 펼쳐질 귀족의 파티장 입구에서 사나이는 사기꾼에게 붙잡혀 골목을 돌아다니게 됩니다. 따뜻한 안락과 쾌적한 성공. 골목길에서는 정확하게 이것이 중지됩니다. 그래서 한번 골목길에 들어서게 된 주인공은 다시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아니, 자기 방에 돌아갈 수 있다고 해도 그는 더 이상 옛날의 그일 수 없습니다. 흠. 갑충이 되어 돌아가는 것은 가능할지도 모르겠군요.


층계도 이미 어두워졌고 대문도 잠겨 있다면, 그리고 이런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갑작스러운 불쾌감 속에서 벌떡 일어나 상의를 갈아입고 곧장 외출복 차림으로 외출해야만 한다는 것을 설명하고는 짧은 작별 후에 외출하면서 거실문을 닫는 속도에 따라 다소간의 불쾌감을 뒤에 남겨놓게 된다고 생각한다면, 골목길에서 다시 정신을 차리고 이 전혀 예기치 않았던 자유에 특별히 민첩하게 답하고 있는 온몸으로 – 그는 온몸에 이 자유를 마련해준 것이다 – 깨어난다면, 이 한 가지 결심을 통해서 그럴 수 있는 자신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평상시보다 큰 의미를 가지고 인식하게 된다면, 그리고 그 긴 골목길을 걸어 나간다면 – 그렇다면 그는 이날 저녁 가족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게 되고, 가족은 흔들거리며 비실체 속으로 떨어지게 되며, 반면에 그는 스스로, 아주 확고하게,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향해 허벅지 뒤를 치면서 아찔할 정도로 일어서게 된다.(「갑작스러운 산책」)


그런데 골목길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는 험악하기 그지없습니다. 당연하지요. 골목이란 아버지를 버린 아들, 아내를 배반한 남편, 술 때문에 직장으로 복귀할 수 없는 주정뱅이, 아직도 누군가를 속일 궁리로 바쁜 사기꾼처럼 집 없는 자들, 아무 것도 잡을 것이 없는, 모든 것을 중단시킨 자들의 세계니까요. 그래서 골목에 들어서자마자 주인공들은 온 만신이 탈탈 털리는 기분이 듭니다. 희괴한 녀석들의 횡설수설 때문에 ‘사물들이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없어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참담한 심정마저 갖게 되지요. 스쳐 지나가는 이들과의 낯선 마주침. 그렇게 예측할 수 없어지는 운명.




그 중 최고는 형제살해 사건일 겁니다. 달 밝은 밤 저녁 아홉시쯤. 누구나 오싹하게 만드는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 슈마르는 형제 베제를 칼로 찌릅니다. “배제! 율리아의 기다림은 헛된 것이 될 걸!”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나누어받은 피를 부정하고, 자신의 형제가 그 피를 되물림하는 것을 막기 위해 칼을 들고 골목길에 서 있습니다. 슈마르가 형제를 찔러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저는 모르겠습니다. 슈마르 자신도 모르지 않을까요? 카프카라도 ‘모른다’고 했을 것입니다. 골목길에서 벌어지는 온갖 사건은 신도 설명해주실 수 없을 겁니다. 이처럼 카프카의 골목길에서는 모든 확실한 것들이 뭉개집니다. 이유라고는 찾을 길 없는, 그런 사건만이 연속하는 곳, 골목!


밤에 골목길을 산책하고 있을 때, 멀리에서부터 한 남자가 보였고 –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내 앞의 골목길은 오르막길이었고 마침 보름달이 떠 있었기 때문이다 – 우리 쪽으로 달려올 때, 비록 그가 약하거나 누더기를 입고 있더라도, 누군가 그를 쫓아와 소리를 지르더라도, 우리는 그를 붙잡지 않고, 그를 가도록 내버려둘 것이다.


왜냐하면 마침 밥이고, 그리고 우리 앞 골목길이 보름달 속에 오르막길이었기 때문이고, 거기다가 아마도 이 두 사람은 그들 대화에 열중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마 두 사람이 제삼자를 쫓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며, 첫 번째 사람이 죄 없이 쫓길지도 모르며, 두 번째 사람이 살인을 하려는 의도일지도 모르며, 그렇게 되면 우리는 살인 공범이 될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지도 모르며, 그래서 단지 각자 자신의 침대를 향해 달리고 있는지도 모르며, 아마도 그들은 몽유병 환자일지도 모르며, 첫 번째 사람은 무기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피곤해해서는 안 되는데도, 기어코 우리는 그렇게도 많은 포도주를 마시지 않았던가. 두 번째 사람마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자 우리는 즐거웠다.(「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카프카의 골목에서 또 하나 언급되어야 할 점은 언제나 달이 떠 있다는 점입니다. 가족들이 잠들 무렵, 한편으로 사교계의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주인공은 무엇에 이끌리듯 골목길 위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카프카에게 밤이란 인식의 시간이었습니다. 카프카는 평생 잠을 잘 자지 못했어요. 그는 불면을 사랑했습니다. 왜냐하면 밤에 깨어 있을 때, 그는 가능한 온갖 깨달음을 향해 활짝 열려 있을 수 있었거든요. 낮을 채우는 것은 억압되고 자제된 조화가 만드는 갖가지 소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카프카는 오직 불면의 밤에만 글을 썼지요.


이 불면증은 단지 내가 글을 쓴다는 사실에서만 생긴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내가 글을 이렇게 조금만 쓰고 이렇게 시원치 않은 글을 쓰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작은 흔들림 때문에 예민해진다. 그리고 특별히 저녁 무렵에, 아침에는 훨씬 더 많이, 고통을, 즉 나를 활짝 열어젖히는 상태에 근접해 있다는 가능성을 느낀다. 이 가능성이 나로 하여금 모든 것에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할 텐데. … 왜냐하면 나의 본질은 현재의 혼합된 상황을 견딜 이해력을 충분하게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낮에는 눈에 보이는 세계가 나를 도와주는데, 밤에는 나를 거침없이 난도질한다.[일기 1911년 10월2일]


그러므로 카프카의 밤은 깨어있는 자의 것입니다. 달밤의 골목길에서 약속과 질서가 의심되자마자, 생의 다른 풍경이 피칠갑을 한 모습으로 불쑥 나타나는 것은 그래서 당연해 보입니다. 물론 그 풍경도 또다른 놀이 속에 뭍혀 사라질 테지요.


밤에 흠뻑 잠겨. 이따금 골똘히 생각하기 위해 고개를 떨구듯, 그렇게 밤에 흠뻑 빠져 있다. 주위 사람들은 모두 잠들어 있다. 그들이 집안에서, 탄탄한 침대 속에서, 탄탄한 지붕 밑에서, 매트리스 위로 몸을 쭉 뻗치거나 오그린 채, 시트 속에서, 이불을 덮고 잠자고 있다는 것은 하나의 보잘 것 없는 위선, 하나의 순진한 자기기만이다. 사실 그들은 과거의 그 어느 때인가처럼 그리고 나중엔가처럼 황야에서 함께 있은 적이 있다. 벌판의 야영지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 한 떼의 무리, 한 종족이 차가운 땅 위 차가운 하늘 아래서, 이전에 서 있던 곳에 내던져져 있다. 이마는 팔에 박고, 얼굴은 땅바닥을 향한 채 조용히 숨쉬며. 그런데 너는 깨어 있다. 너는 파수꾼의 하나다. 너는 네 곁 섶나무 더미에서 꺼낸 타는 장작을 흔들어 바로 옆사람을 찾는다. 너는 왜 깨어 있는가? 한 사람은 깨어 있어야 한다고 한다. 한 사람은 여기 있어야만 한다.(「밤에」) 


도주로는 골목을 따라  


그런데 단지 우리가 정 주고 몸담았던 삶을 중단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골목 모퉁이에 주저앉아 길바닥에 그림만 그리고 앉아있을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카프카의 존재들은 아무데나 퍼져 앉아 시간을 떼우려고 하는 떠돌이가 아닙니다. 그들은 ‘여태껏’을 중단시키겠다고 결심하고, ‘걷는 자’이지요. 그리고 저 길을 돌아 무엇이 있을지에 대해서는 하나도 고민하지 않습니다. 존재는 아버지와 신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길모퉁이에서 사건을 일으키며 몸을 옮깁니다. 그 과정에서 힘을 얻고 다시 또 모퉁이를 돌지요.




골목길 걸어보셨나요? 골목에서는 이어지던 길이 뚝 끊기기도 하고, 뜬금없이 틀어야 하는 일도 빈번히 일어납니다. 산책자의 시선은 결코 한 점에 쏠릴 수 없어요. 베스트베스트 백작이 이 골목 저 골목 구석에서 놀고 있는 K를 발견하기 어려웠던 것은 당연합니다. K또한 백작님만 보고 걸을 수는 없었지요. 그리고 골목에서는 땅의 굴곡을 짐작하기가 어렵습니다. 평평하게 이어져있으리라고 생각했지만 갑자기 계단이 나타나기도 하고, 서서히 시작된 오르막이지만 어느새 바닥에 도착합니다. 그래서 멀어졌다고 생각했던 애인이 오르막길에서 점점 모습을 키우는 것을 보고 기뻐하게 되죠. 다시 나타난 아가씨는 벌써 타인의 아내가 되어 있지만, K는 그녀와 이웃이 되어 또 다른 사건을 만듭니다. 골목이라는 공간은 균질하지가 않아서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도 없고, 사건의 추이를 해석할 수도 없습니다. 액체 혹은 기체 안에 떠다니는 분자들의 불규칙한 운동처럼 골목길에서의 걸음은 출발지와 목적지를 모르고, n개의 삶을 낳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걷기입니다. 닥쳐오는 벽 앞에 서서 세상을 다르게 보기 위해 고개를 돌리고, 굴러다니는 낙엽과 인연의 낡은 조각을 갖고 새로운 놀이를 발명하기. 뜬금없는 기쁨과 슬픔을 앞에서 하하하 웃기. 도주로를 만들려는 자에게 세계는 온통 골목길처럼 보이지 않을까요? 막혔다고 생각했지만, 그 앞에서 출구가 열리고. 다시 또 한계를 겪게 되지만 얼마든지 옆길로 새서 다른 방향을 기웃거리게 되는. 굽어지는 새로운 벽 앞에서 달라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그것이 카프카가 말하는 바깥없는 자유입니다. 도주로는 골목길 위에!


글_오선민(고전비평공간 규문)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