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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나는 이렇게 SF를 읽었다

케이트 윌헬름,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 - 세대를 가르고 흐르는 강

by 북드라망 2018. 3. 21.

케이트 윌헬름,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

- 세대를 가르고 흐르는 강



2018년 3월 1일은 오랜만에 잘 닦은 유리처럼 날이 쨍했다. 시야가 맑고 투명했고, 햇빛은 공기를 뚫고 직선으로 내리꽂혔다. 본따 오려낸 것 같은 그림자들이 발밑에서 춤을 추었다. 만물의 가장자리가 먹선으로 그은 듯 또렷한 날이었다. 바람도 많이 불었다. 살갗을 할퀴는 공기가 유난히 차고 날카로워, 나는 낮 볕이 따사로운 걸 알면서도 연신 옷깃을 다시 여몄다.  




시내 대로를 따라 오래 걸었다. 뺨이 에이고 손이 곱아오기 시작할 즈음 비로소, 잠깐 몸을 녹일 겸 종로타워에 들어갔다. 잠깐만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우리 시대의 유명한 격언이 말하듯이,  “들어올 땐 마음대로였겠지만 나갈 땐 아니란다.” 


나는 의도치 않게 그 안에 더 오래 발이 묶여 있어야만 했는데, 그건 그 건물 안에 뭔가 치명적으로 매력적인 게 있어서는 아니었다. 원인은 오히려 건물 밖에 있었고,  매력적이기는커녕 그 반대의 정서를 환기시키는 것이었다. 안이 좋아서라기보다가 밖이 싫어서, 그 지하에 스스로를 유폐시켜야 했던 셈이다. 도로 나오라고 손짓하는 매혹적인 햇살과, 그에 맞춰 살랑이는 그림자들의 군무에도 불구하고. 


그러니까, 종로타워 지하 서점에 한 30분쯤 머물며 책 구경을 하다가, 이제 그만 다시 길을 떠나려고 1층으로 올라갔을 때, ‘이쪽으로는 출입이 통제되었다’며 제지하는 경비원의 어깨 너머, 시원한 유리통창 밖에 펼쳐진 광경이 문제였던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손마다 팔랑팔랑  태극기를 흔들며 거리를 가득 메운 채 꾸역꾸역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삼일절을 기념하는 시민행진 같은 것이려니 했다. 하지만 태극기 사이사이, 별들이 영롱히 박힌 성조기가 여기저기 나부끼는 것을 보았을 때, 그 정체를 깨닫고 표정을 굳혔다. ‘태극기집회’였다. 태극기 때문이 아니라 성조기 때문에 ‘태극기집회’라니, 역설적이지만 너무나 정확한 공식 아닌가. 멀리 있는 큰 나라에 밉보이면 큰일이라는 공포에 기반하여, 형님 국가의 국기를 모셔다 밸도 없이 아양 떠는 게 한국식 ‘애국보수’라는 걸 우리는 충분히 학습해 왔으니까. 


성조기가 싫다는 게 아니다. 오해는 금물이다. 오히려 나는 미국을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다. 콜라, 햄버거, 마블과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 애플과 타일러 라쉬를 사랑해 마지 않고, 성조기도 태극기만큼 예쁘다고 생각한다. 캡틴 아메리카 마크도 얼마나 잘 그리는지, 초등학생 조카는 나만 보면 비브라늄 방패를 그려달라고 색연필을 내민다. 다만 나는, 대한민국 국적의 대한민국 국민이 자국의 이슈로 시위를 하면서 남의 나라 국기를 흔들어대는 아스트랄한 풍경까지 동해바다 같은 동포애로 포용할 비위를 타고 나지 못했을 뿐이다.  


국기를 흔들며 걸어가는 사람들 너머로 다른 것들도 눈에 들어왔다. 국정농단으로 얼마전 30년을 구형받은 전임 대통령이 얼마나 결백하고 청렴한 분인지 뜨겁게 부르짖는 플래카드가 먼저 지나갔다. 커다랗게 인쇄된 그 독재자 아버지의 초상이 뒤뚱뒤뚱 뒤따르고 있었다. 한참 뒤이어 트럭도 한 대 지나갔는데, ‘촛불내란자 처형’이라는 빨간 글자를 수박만한 사이즈로 또박또박 써넣은 널판지가 높이 매달려 있었다. ‘역적 효수!’를 나름의 21세기적 언어로 구사해놓은 셈이었다. 세습왕조를 향한 충성이 미덕이었던 시절은 한 세기 전에 이미 지나갔건만, 어떤 사람들의 시대감각은 백년 동안의 나머지 학습으로도 업데이트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맹목적인 진심의 정서가 그 풍경으로부터 훅 끼쳐왔다. 날것 그대로 드러나는 진심이라니 자연스러워 좋기는 하지만, 자연스러움이 문명의 덕목은 아니지 않은가. 나는 땅 속에 뒹구는 원석보다 정교하게 컷팅하고 정갈하게 연마하는 인간의 기술력을 더 사랑한다. 굶주림에 지쳐 빵을 훔친 장발장을 연민하지만, 인간사회의 법도에 본능을 앞세우지 않으려고 애썼던 그 직전의 장발장이 품위있다고 생각한다. 정제되지도, 반추되지도 않은 원시적인 진심들- 공포, 증오, 추종은 인간의 동물적 한계에 대한 필연적인 슬픔을 환기시키기는 했지만, 어쨌든 우아하거나 품위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고 아름다움과는 더더욱 거리가 멀었다. 그 그악스러운 빨간 색 필체를 보며, 나는 마치 악취를 맡은 사람처럼 얼굴을 찌푸렸다. 아름다우려고 애쓰지도 않는 것이 싫었다. 안 그럴 수 있었는데 그러할 때는 더더욱.  


너무 멀어서 사람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냥 대략, 특정한 정치성향을 띤 나이든 사람들의 덩어리였다. 가슴 저 아래로부터 어둡고 비릿한 감정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유리창 앞을 떠나 서둘러 지하로 걸음을 옮겼다. 이 감정이 싫었다. 그것은 내가 저들을 바라볼 때 가장 자주 느끼는 감정, 다잡기 가장 힘든 감정이기도 하다. 지랄맞았던 현대사 속 나름의 굴곡 많은 삶의 내력이 저들을 저렇게 만들었다는 걸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는데도, 이 감정은 시시때때로 노도처럼 나를 휩쓸어버리곤 했다. 언젠가부터 그들을 볼 때면 까마득히 깊은 석회동굴 아래 무언가 떨어져내린 듯 귓전에 괴괴한 메아리가 울리곤 하는 것이다. 나는 이 메아리가 시작된 때를 똑똑히 기억했다. 그것은 내 마음이 추락하며 내내 내지른 비명의 잔상이었다. ’사람이 아닌 것들! 사람이기를 포기한 것들!’. 2016년 4월 이후로 쭉 맴도는 환청이었다. 


“사람같지 않아요.” 

소설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의 1부에 비슷한 말이 나왔었다. 자기자신을 비롯한 몇몇 생존자들의 유전자를 복제해서 만들어낸 다음 세대의 아이들, 클론을 바라보며 주인공 데이비드가 그렇게 내뱉었다. 클론들은 종족을 가리지 않는 불임의 재앙이 전 지구를 휩쓸며 인류문명이 급속히 멸망해버리던 절체절명의 시기에, 데이비드의 가족이 유전자 복제와 인공자궁 연구를 성공시켜 가까스로 이루어낸 쾌거였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태어난 생명체는 아니었지만, 그 아이들은 평범해보였다. 열심히 배우고 성실히 노동하며 시시때때로 까르르 천진난만한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 보통의 아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누구의 유전자를 복제했는가에 따라 무리 별로 찍어낸 것처럼 똑같은 얼굴들을 하고 있긴 했어도, 그뿐이었다.  


“세대 차이라고 들어봤지? 바로 우리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군.” 

데이비드의 삼촌 월트가 이렇게 대꾸했을 때, 그 까칠한 어조에는 그보다 훨씬 크고 심각한 문제가 있지만 부러 심상한 단어로 일축한다는 분위기가 짙게 깔려 있었다. 


하지만 정말, 세대차이보다 더 심각한 원인이 있었던 것일까? 클론은 유래 없는 인간 유형이기는 하다. 자연스러운 성행위를 통해 수정되지 않고, 인간의 육체 대신 인공자궁과 합성양수 속에서 팔다리가 생장하여 태어났으니까. 하지만 태어나기까지의 과정 차이가 새로운 인간종을 분기시키는 것은 아니다. 아무런 유전자 조작 없이 복제되기만 한 아이들의 신체 조성은, 골격과 신경계와 대뇌와 전두엽의 형태까지, 유전자의 원 제공자와 털 한 가닥까지도 동일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어느 모로 보아도 클론들은 괴물이나 악마와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재래 사회 평균보다 선량하고 이타적인 성향이 주를 이루었다. 문제는 그들이 독자적인 소통 체계를 이루면서, 거기 참여하지 못하는 윗세대들로부터 서서히 유리되어 나간 데 있었다. 데이비드를 비롯한 유전자 제공자들, 이른바 ‘원로’들이 느낀 기이한 위화감은 바로 거기서 왔던 것이다.  

 

케이트 윌헬름이 1976년 발표한 『노래하던 새들도 지금은 사라지고』는 문명의 멸망 이후라는 테마를 더없이 서정적이고 아름답게 풀어낸 작품이다. 개인으로서의 인간과 집단/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인간을 끊임없이 대비하면서, 존재한다는 것의 의미, 생존한다는 것의 의미,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를 끊임없이 반추하게 만든다. 또한 이 소설은 서로 너무 다른 정신세계를 가진 세대 간의 갈등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멸망에서 살아남은 원로 세대와 그들이 창조해낸 클론 세대, 그리고 클론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이단아 마크 사이의 갈등이 차례차례 맞물려 내려간다. 


소설 속에서 동일성, 나아가 집단성에 대한 클론들의 감각은 근대적인 인간 정신으로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이다. ‘원로’들은 마치 텔레파시처럼 서로를 느끼는 그 특별한 소통능력을 이해하지 못하고 거의 공포에 가까운 반응을 보인다.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사실 피차 마찬가지였다. 클론들 역시 ‘이전 인류’가 중시하던 개체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며, 공익을 해치는 암적인 요인으로 간주하고 있으므로.   


하지만 따지고 보면, 아이들이 그토록 이질적인 존재가 된 건 성장환경 때문이었다. 기존의 어느 세대와도 판이하게 달랐던 것이다. 클론들만의 차별적인 특수성은 멸망세계라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불가피한 것이었다. 보라: 똑같이 생긴 수십 명이 한 날 한 시에 한꺼번에 태어나 동일한 생애주기를 집단으로 겪으며 자라났다. 이들은 전통적인 양육방식 속 개인화된 애착과 수직적 교감을 별로 경험하지 못한다. 자아개념이 형성되는 중요한 시기에, 그들은 동갑내기 쌍둥이들과의 수평적인 교감, 극도로 긴밀한 사회화를 우선적으로 경험하다시피 한다. 이제 이 아이들이 지향하고 구가하는 사회성이 이전 인류와 동일할 것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는가. 개체성에 대한 자각이나 집단성에 대한 인식이 다르지 않았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원로들의 공포와 달리, 아이들은 과학기술의 산물이기 때문에 이질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들 자신이 당면한 환경의 필요충분조건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에, 거기 최대한 맞게 적응한 모습이 그토록 이질적인 것이었다. 


우리가 당면한 시대의 필요충분조건과, 우리 앞 세대가 당면했던 시대의 필요충분조건이 서로 판이하게 달랐던 것처럼.


 * * *


나는 한참을 지하 서점에서 서성이다가 결국 지하철역으로 연결되는 지하도를 통해 그곳을 빠져나왔다. 시위대를 등지고 안국역을 향해 걸었다. 본래 가려던 곳의 반대 방향이었지만, 행진 대열과 함께 걷느니 차라리 그게 나았다. 그 무리의 득의양양한 분위기, ‘박근혜를 석방하라’며 어우러지는 목소리, 아니 그냥 그들의 존재 자체를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서울의 길들은 요리조리 통하는 법이고, 사람들은 그 안에서 제멋대로 브라운 운동을 하며, 등지고 걷는 건 완벽한 회피책이 되어주지 않는다. 


집회에서 중간 이탈했는지, 태극기를 돌돌 말아쥔 중장년층의 어르신들을 계속해서 마주쳤다. 부부나 친구 사이로 보이는 이들이 많았다. 밝은 햇빛 속 나들이 기분을 만끽하는지 유난히 다들 기분이 좋은 얼굴이었다. 말끔한 외출복에 해사한 표정, 생기 넘치는 눈빛들. 당장이라도 누군가 길을 물으면, 친절하게 손을 들어 가르쳐줄 게 분명했다. 그 선량하고 무해한 얼굴들을 보자 마음 속의 어두운 메아리가 서서히 멀어져갔다. 약간은 분하게도, 그들도 역시 사람이었다. 괴물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친북빨갱이’로 싸잡히는 우리가, 어느 모로든 결코 괴물이 아닌 것처럼. 


왜 아니겠는가? 친구네서 얻어다드린 김치가 너무 맛있더라고 허허 웃으시던, 나의 온화한 아버지도 저 집회에 나가고 싶어 하셨다. 너 좋아하는 새우장 따로 챙겼다며, 랩으로 그릇을 꽁꽁 싸매주시던 나의 사랑 깊은 어머니도 저 집회에 나가고 싶어 하셨다. 그 무섭고 끔찍한 ‘친북빨갱이’ 딸내미를 잡아 죽이는 대신, 지극정성 챙기는 나의 다정다감한 애국보수들. 


이른바 ‘애국보수’와 ‘친북빨갱이’ 사이로 흐르는 강을 나는 안다. 클론과 원로들 사이로 흐르는 것과 같은 그 깊고도 너른 강을, 아마도 우리는 끝내 건너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같은 땅에서도 다른 시대를 살며, 서로 다른 필요충분조건을 감당하는 가운데 서로 다른 철학을 체화한 사람들 사이의 운명적인 간극이다. 팔다리 잃은 상이군인이 수두룩하게 배회하던 전쟁의 폐허를 화려한 마천루로 덮어나가는 과정을 직접 살아낸 세대와, 응팔-응사-응칠의 정서로부터 월드컵의 영광이 더 친숙한 세대가 서로의 정신세계를 어떻게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누군가 사랑은 이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세상이 반목 속에 멸망하지 않고 아슬아슬하게나마 존속하는 건 오히려, 이해를 초월한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는 데이비드의 클론 가운데 하나인 배리가 그런 사랑을 보여준다. 집단성을 우선시하는 평범한 클론인 그는 유난히도 개체성을 간구하는 이단아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 아이를 살리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다. 그리고 살아남은 아이가 결국, 두 번째 멸망을 딛고 인류를 다시 살아가게 만든다. 

 

정치적 견해 차이로 입씨름을 벌이던 아버지가 ‘너 그러려면 호적 파서 나가라’고 고함지를 때, 부녀 사이에는 아득히 멀고 깊은 몰이해의 강이 가로놓여 있다. 어떤 나룻배도 그 강을 건너게 도와주지 못할 것이다. 우리 사이에는 불태울 다리조차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 호적을 파지 않고 김치를 사다드리고 새우장을 포장하며 서로를 보살필 것이다. 그것은 이쪽 연안과 저쪽 연안을 잇는 아주 가늘고 질긴 줄과 같은 것. 그 불가해한 사랑이 우리를 붙들어 준다. 미움 속에 영영 멸망하지 않도록.


글_윰(sf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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