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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정치1/몸과정치2

‘사회’ 만들기

by 북드라망 2018. 3. 15.

‘사회’ 만들기

 


사회적 상상과 사회 이론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들이 존재한다.

내가 ‘상상(적인 것)’이라는 용어를 쓰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내 논의의 초점이 바로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사회적 환경을 ‘상상하는’ 방식에 맞추어져 있으며,

 이는 이론적인 용어로 표현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이미지와 이야기, 그리고 전설 속에 담겨있다.

 둘째 이론은 소수의 전유물이기 쉽다. 하지만 사회적 상상에서 흥미로운 점은

 그것이 사회 전체는 아닐지라도 폭넓은 인간 집단에 의해 공유된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세 번째 차이가 나타난다.

 그것은 바로, 사회적 상상이란 공통의 실천을 가능하게 하고

 정당성에 대한 감각을 공유하도록 만드는 공통의 이해라는 점이다.

─찰스 테일러, 『근대의 사회적 상상』, 43-44쪽


앞서 society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라는 고민 속에서 이를 집합적 방식으로 사용했던 이들. 가령 ‘상생양의 도’라던지, ‘인’이나 ‘군’이라던지의 말들 속에서 새로운 관계방식을 사유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실제로 이들이 어떤 식으로 사회를 만들어 가려고 했는가 그 노력들을 살펴보자. 왜냐하면 단순히 관념이나 상상 뿐만 아니라 이들의 실천 속에서 어떻게 ‘사회적이 것’이 파악되었는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론과 실천은 한 방향으로만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이론이 실천을 자극하며, 또한 실천이 이론을 재구성한다. 이렇게 수정된 이론은 또다시 실천(관습)을 자극한다. 이런 과정 속에서 사회적 상상에, 그리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심대한 변화가 일어난다.

(이러한 실천으로서의 ‘메이로쿠샤’의 사회적인 것에 주목한 논의로는 木村直恵, 「「社会」以前と 「社会」以後-明治期日本における「社会」概念と社会的想像の編成」, 鈴木貞美, 劉建輝 編, 『東アジアにおける知的交流: キイ・コンセプトの再検討』(京都: 国際日本文化研究センター, 2013); 木村直恵,「〈ソサイチー〉を結ぶ: 明六社「ソサイチー」社交・アソシエーション実践(プラクティス)(後篇)」, 『学習院女子大学紀要』16 (2014). 키무라 나오에의 논의에 바탕한다.)

 

주지하듯이 메이지 초기 ‘샤(社)’라는 말은 유행어의 하나였다. 문학사(분가쿠샤, 文學社), 박애사(하쿠야이샤, 博愛社)를 비롯해 신문사(신붕샤, 新聞社) 같은 말들이 메이지 초기에 생긴 말이다. 이러한 ‘샤’들 중 가장 중심에 메이로쿠샤가 있다. 메이로쿠샤는 메이지(明治) 로쿠년, 1873년에 만들어져서 메이로쿠샤(明六社)라는 이름이 붙었다. 모리 아리노리에 의해 결성이 요청되어 당대 내노라 하던 지식인들이 모두 모였다. 국회를 개설할 것인지의 문제부터 시작해서, 학자의 직분은 무엇인지, 문자는 무엇으로 해야 하는가와 같은 문제 뿐만 아니라 여성문제, 종교문제 등 실로 다루지 않는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 뿐만 아니라 메이로쿠샤라는 조직 자체 역시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다. 메이로쿠샤는 흔히 ‘소사이어티’라는 것을 일본에서도 실천해보자는 자각적인 의식 하에서 결성된 최초의 단체였다. 규제(規制) 제1조에서 메이로쿠샤는 자신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제1조 주지(主旨). 샤(社)를 설립하는 주지는 우리나라의 교육을 추진하기 위해, 유지(有志)들이 회동(會同)하여 그 수단을 상의(商議)함에 있다. 또한 동지가 모여 이견(異見)을 교환함으로써, 뜻[知]을 넓히고 앎[識]을 밝히는 데 있다.

─「明六社規制」, 山室信一·中野目徹 校註, 2009,『明六雜誌』下, 422쪽


​얼핏 보면 뭐 그렇게 대단할 거 없어 보이는 이 메이로쿠샤 규칙 1조는 실은 새로운 모임 방식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이는 막말 유신기의 일본인이 서양에서 경탄해마지 않았던 자발적 결사(voluntary association)를 일본에서도 재현해 보고자 하는 시도였다. 그렇다면 이들이 샤를 통해서 실험해보려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무엇을 기존의 모임과 다른 것이라 생각했을까?

다름이란 무엇인가?


규제1조에서는 뜻을 같이하는 무리가 회동, 집회하여 상의하고, 이견을 교환해 지식을 넓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밝힌다. 여기서 ‘이견’을 교환해 지식을 넓힌다는 것은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당연한 학술적 모임의 태도라 보기 쉽다. 하지만 당시 정치적 의견의 차이로 암살을 벌이는 일이 일상적 행위였다. 메이로쿠샤의 많은 회원들 중에서도 양학자라는 이유만으로 수차례 암살의 위기에 처했었다. 후쿠자와가 서양에 가서 처음 놀랐던 것 중에 하나가 서양에서는 태평무사한 세상에 당을 나누어 쌍방이 맹렬하게 투쟁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서로 적이라고 하면서도 끝나고 나서는 같은 테이블에서 술과 밥을 함께 한다는 것이었다.

정치문제에서 선거법과 같은 법령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이해할 수가 없으니 선거법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법령이고 국회란 어떤 관청인가 하고 질문을 하였더니. 질문을 받은 사람이 그저 웃고만 있다. 무엇을 묻는지를 뻔히 안다는 투의 웃음인 것이다. 그것을 나로서는 알 리가 없어 도무지 정리가 되지 않는다. 또한 정당으로는 보수당과 자유당과 군소 정당과 같은 것들이 있고, 쌍방이 막상막하 맹렬하게 투쟁을 한다고 한다. 무슨 소리인가, 태평무사한 세상에서 정치적인 투쟁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거야 알 수가 없구나. 이거야말로 보통 문제가 아니다,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전연 판단이 설 리가 없다. 저 사람과 이 사람이 적이라는 둥 하면서도, 같은 테이블에서 술을 마시고 밥을 먹고 있다. 조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후쿠자와 유키치, 허호 역, 2006, 『후쿠자와 유키치 자서전』, 158∼159쪽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끼리 무언가를 해본다는 발상 자체가 그들에게 낯선 것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새로운 인간관계의 양식으로서 샤를 만들어보겠다는 실천은 추상적으로만 이해하던 society라는 개념을 실천해보기 위한 시도였다.

이 모임은 어떤 통일적 견해나 합의를 이끌어나가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다. 메이로쿠샤라는 사회는 국회개설에 관한 논쟁이나 학자직분론 논쟁에서 볼 수 있듯 어떤 공유된 태도나 원칙을 취하면서도 각기 자유로운 사고를 갖고 연설, 토론해 그것을 그대로 인쇄, 간행하였다. 회원 간에 뜻이 다르더라도 그것을 막아 출판하지 못하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다름은 존중되는 분위기였다. 이는 모리 아리노리가 메이로쿠샤 1주년을 맞아 한 연설에서 ‘연설’의 법을 강조한 것과 관련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작년 겨울 이래 회합[社會]에서의 연설의 법이 세워짐으로 점차 ‘소사이어티’의 체제(體制)를 얻기에 이르렀다. 그렇다고 해도 아직 이를 들은 후 토론, 비평하는 단계에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이는 필경 많은 한자를 사용해 청자가 분명히 이를 이해할 수 없다는 점과 연설의 법이 아직 정돈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땅히 후의를 쏟아 그 장애를 제거할 수단을 세워, 더욱더 회락(會樂)을 늘리고 사익(社益)을 나아가게 함을 도모해야 한다.

─森有礼, 「明六社第一年回役員改選ニ付演説」, 明六雜誌 第30号, 山室信一·中野目徹 校註(2009), 55〜56쪽

연설의 법이 세워짐으로 인해 점차 소사이어티, 즉 사회의 체제를 얻기에 이르렀다는 모리 아리노리의 발언은 의미심장하다. 소사이어티의 핵심은 ‘연설’ 그 자체에 있었다. 아직 토론과 비평의 단계에까지 이르지는 못했지만 이는 소사이어티의 특징의 하나를 나타내는 것이라 인식했다. ‘연설’은 그 자체로 그간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장’을 만들어 냈다. 이 수평의 장은 의견이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과정이 아니라 누가 맞고 틀리고를 공론화할 수 있는 장이라는 점에서 단순히 기존의 상소문이나, 사간들이 행하는 읍소와는 다른 것이었다. 물론 에도 후기의 ‘회독(會讀)’의 전통에서 보듯이 이러한 수평적 커뮤니케이션의 성격이 전무했었다고는 볼 수 없다. ‘대등한 인간관계의 장’으로서, ‘관용의 덕을 육성하는 장’으로서 회독이 자유민권운동기의 학습결사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핵심적인 것은 타자에 대한 태도의 변화라 하겠다. 이때 연설은 일방적인 의견 전달이 아니라 토론과 비평을 수반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 속에 ‘적’에 대한 논의가 새롭게 읽혀지기 시작한 것은 메이로쿠 잡지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독특한 태도였다. 당시 메이로쿠 잡지에 ‘적’이나 ‘이’에 대한 논의가 많았음은 이를 증명한다. 「애적론(愛敵論)」, 「존이설(尊異説)」, 「적설(賊説)」 등의 그것이다. 사람은 ‘위군(爲群)의 성(性)’, 즉 사회를 이루는 성질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타인을 만나면 반드시 사랑하는 성을 갖추게 되며, 필적(匹敵)이란 말이 그러하듯이 적이란 나를 해치는 것만이 아니라 나와 겨루는 상대라는 점이 강조된다. 이는 적(賊)이라는 글자 역시도 마찬가지인데, 주임금을 시해한 것이 인을 해친 자를 죽였기 때문에 적이 아니라고 맹자가 말한 것처럼, 정부 의견에 반대한다고 해서 적이라고 칭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다양한 의견이나 정치적 입장을 용인하는 것이 오히려 국가의 부강에 도움이 된다고 역설한다.


일사일신(一社一身)의 메이로쿠샤


이러한 성격은 메이로쿠 잡지의 폐간과 관련해 후쿠자와가 쓴 글에서도 잘 나타난다. 후쿠자와는 여기서 메이로쿠샤를 ‘한 몸(一身)’에 비유한다. 

사람들이 한 마음으로 결정해야 할 일이므로, 사원(社員)의 의견이 진실로 하나로 합쳐 한 사회(一社)가 흡사 한 몸(一身)처럼 된 것이 아니라면 그 진퇴를 논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이 샤[社] 또한 설립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겨우 한 달에 두 번 집회를 여는 정도이니 아직 일사일신(一社一身)과 같은 것이라 볼 수 없다.

─福澤諭吉, 「明六雑誌ノ出版ヲ止メルノ議案」, 『郵便報知新聞』(1875.9.4.) 『福澤諭吉全集』19巻, 553쪽

 


 그는 메이로쿠 잡지의 폐간의 압력 속에서 아직 한 몸과 같은 ‘일사일신(一社一身)’의 상태가 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일사일신’이 특정한 사상이나 생각을 한 몸처럼 하나로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당시 언론에 대한 정부의 규제 속에서 메이로쿠샤는 폐간의 기로에 섰다. 이를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한 몸과 같이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회가 한 몸처럼 되어 움직이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은 그 안의 이질적인 논의들을 하나로 통합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들을 인정한 상태에서 한 몸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에 가깝다.

따라서 앞에서 본 ‘이견을 교환함으로써 뜻을 넓히고 앎을 밝히는’ 장으로서 사회의 상과 충돌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후쿠자와는 정부의 뜻에 따를 것인지, 아니면 언론의 자유를 지킬 것인지 둘 중의 하나를 결정할 수 없는 상태에서 결국 잡지의 발간을 그만둘 수밖에 없다고 논한다. 이때 논자들 중에 혹자는 메이로쿠샤는 학문상의 사(社)이지, 정치를 논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폐간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지만 후쿠자와는 이것이 문제의 본질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학자의 논의는 ‘무형의 정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유형의 율령’으로 이를 침묵시킬 수 없으며, 사상을 지배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학문을 논하는 것이 정치나 기타 영역으로 파급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어떤 조건 속에서 학문을 논하게 되는 것은 무형의 정신을 억압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후쿠자와에게 더 중요한 것은 메이로쿠샤를 유지할 것이냐 그만둘 것이냐를 결정할 때 이것이 진정으로 한 몸이 되어 하나로 움직일 수 있느냐였다. 이를 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즉 자신들이 스스로 룰=법을 만들고, 이를 한 몸 같이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결국 단순히 다수의 뜻에 따르는 것이 되고 만다. 메이로쿠샤는 자발적이고 자주적으로 스스로를 규정하는 법을 정하고, 그것을 지키는 것을 통해 구성원들이 서로 평등한 동료로서 관계 맺고 있었다. 이것이 새로운 관계 맺음의 기본이라 여겼고, 이 원칙이 무너지는 한 샤는 유명무실해진다고 보았다. 이후 이러한 자발적 결사의 모임들은 메이지 초기 늘어갔다. 자율, 자치, 상호 평등이라는 새로운 관계가 사람들을 경험시키고 학습시킨 것이었다.

후쿠자와 유키치



이는 후쿠자와가 케이오기주쿠를 설립할 때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 조직을 ‘회사(会社)’, ‘사중(社中)’, ‘동사(同社)’ 혹은 ‘오당(吾党)’이라는 말로 가리키는데 여기서 자신은 학교의 선생이 아니며, 생도 역시 자신의 문인이 아님을 강조한다. 이는 총체로서 하나의 ‘사중(社中)’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사중에는 각각 그 직분이 있다. 하지만 ‘사중’은 선생-문인관계로 결합된 학교조직이 아니라, 목적을 함께하며 협력하는 자들에 의한 대등성에 기반한 동지적 결합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그런데 이는 단순히 협회의 유무 차원이 아닌 앎의 방식[學知] 차원의 변화라는 보다 큰 그림 속에 위치한다. 후쿠자와는 『문명론의 개략』에서 협회의 중요성을 다시 강조하고 있는데, 여기서 동서양에서 지(知)의 구성방식에 차이가 있음을 말한다.

서양 제국의 인민이라고 반드시 지자(知者)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임[仲間]을 결성하여 일을 수행하는데 그 세상에 나타난 실적을 보면 지자의 행위와 유사한 점이 많다. 국내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모두 모임의 의논으로 안 된 것이 없다. 정부에도 모임의 의논을 위해 의사원(議事院)이라는 것이 있고, 장사를 하는데도 모임들의 조합인 컴퍼니라는 것이 있다. 학자에게도 모임이 있고, 사찰에도 모임이 있다. 벽촌의 서민에 이르기까지 저마다 모임을 결성하여 공사의 일을 상의하는 풍습이 있다. 이미 모임으로 나눠져 있으면 그 모임마다 고유한 견해가 없을 수가 없다. 가령 몇 사람의 벗들이나 두세 집의 이웃끼리 모임을 결성하면 그들 사이에 고유한 견해가 생긴다. 이들이 합쳐져 한 마을이 되면 한 마을의 견해가 생기고, 나아가 한 주(州)가 되고 한 군(郡)이 되면 일주일군(一州一郡)의 견해가 생긴다. 이리하여 이 견해와 저 견해를 서로 합치고 그 취지들을 다소 조정하는 일을 거듭하면 마침내 한 나라의 중론(衆論)이 정해진다.

─福澤諭吉, 1962, 『文明論之槪略』, 100∼101쪽


후쿠자와는 이를 설명하면서 화학법칙의 비유를 들고 있다. 이때 화학법칙이란 서로 다른 두 가지가 화합해 질적으로 다른 것을 만들어낸다는 논리다. 대단하지 않은 것이 모여 대단한 것을 이뤄낸다는 것이 유럽의 지에 대한 그의 평가였고, 이것이 동양과 서양의 지의 결합방식의 차이라고 느꼈다. 이처럼 후쿠자와가 느꼈던 이 집합의 마법으로서 화학은 권력의 편중과는 반대로 사회적인 것의 다원적 성격에 기반한 것이었다. 이는 사회적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즉 서로 모이는 것이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 관련되어 있었다.


글_김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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