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관계 속에서 뜻(志)을 세우다

관계 속에서 뜻(志)을 세우다


 

顔淵季路 侍 子曰 “盍各言爾志”

시 왈  

안연(顔淵)과 자로(子路)가 공자(孔子)를 모시고 있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어찌 각각 너희들의 뜻을 말하지 않는가?”


子路曰 “願車馬 衣輕裘 與朋友共 敝之而無憾”

왈  공 

자로가 말했다.

“원컨대 수레와 말과 좋은 가죽옷을 벗과 함께 쓰다가 그것이 닳아지더라도 아무 유감이 없고자 합니다.”


顔淵曰 “願無伐善 無施勞”

안연이 말했다.

“원컨대 자신의 유능함을 자랑하지 않으며, 노고를 과시하지 않고자 합니다.”


子路曰 “願聞子之志”

왈  

자로가 물었다.

“선생님의 뜻을 듣고자 합니다.”


子曰 “老者 安之 朋友 信之 少者 懷之”

지  지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이 든 사람을 편안하게 해 드리고, 벗은 미덥게 해주고, 젊은이는 품고자 한다.”  - 〈공야장〉편 25장


=글자 풀이=

=주석 풀이=


《논어(論語)》를 읽다 보면, 공자와 제자들 사이의 가르침과 배움이 지극히 일상적인 순간에 일어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때 나눈 그들의 대화가 가장 감동적이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게는 공부가 아직 일상과 맞닿아 있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기껏 글을 써야 할 때가 되어서야 생각을 시작한다.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 일상에서도 계속 공부와 관련된 질문을 주고받을 수 있었던 건 그들의 공부가 그만큼 일상과 분리되지 않았다는 얘기일 것이다.


안회와 자로가 공자를 모시고 있었는데, 공자가 뜬금없이 이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평소에 지니고 있는 각자의 뜻(志)을 얘기해보라는 것. 유가에서 ‘뜻’이란 심지소지(心之所之), 즉 ‘마음이 가는 바’를 뜻한다. 그러니까 공자는 자신의 제자 둘이 어떤 마음으로 공부하고 있는지를 물어보는 것이다. 그런데 안회와 자로, 게다가 공자까지, 이들은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인격을 발현하는 데 뜻을 두고 있다.


자로는 의리의 대명사다. 당시 수레와 말은 대부(大夫) 이상의 권력자만이 소유할 수 있는 사치품이었고, 가벼운 가죽옷 역시 부유한 상류층만이 입을 수 있는 고급품이었다. 이것을 유감없이 나눌 수 있는 것은 자신과 친구를 구분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만이 가능한 경지다. 우리는 평소 애지중지하던 물건이 아니어도, 일단 물건을 빌려주면 계속 신경을 쓰지 않는가. ‘내 것’이란 개념이 아주 확고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물건이 돌아오지 않으면 초조해하고, 상대방이 물건을 망가트리기라도 하면 엄청 서운해 한다. 그러나 물건이란 아무리 값비싼 것이라도 언젠가 그 쓸모를 다하기 마련인 것. 자로는 물건 하나 때문에 친구와의 관계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자로는 자신이 어떤 물건 때문에 기뻤다면 그 기쁨을 친구에게도 느끼게 하고, 물건을 소유하는 것보다 그 나눔의 과정을 더욱 기뻐했을 것이다. 요컨대, 자로의 뜻은 자신의 사욕을 채우는 게 아니라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친구와 함께 누리며 즐거워할 수 있는 친구가 되는 데 있었다.


자로가 벗들과의 관계를 중시했다면, 안회는 모든 관계에서 자신을 성찰하는 것에 중심을 둔다고 할 수 있다. 안회의 말 중 ‘시로(施勞)’는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첫 번째는 시(施)를 ‘자랑하다’로, 로(勞)를 ‘공로’의 뜻으로 봐서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다’로 해석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시’를 ‘베풀다’로, ‘로’를 ‘수고로운 일’로 보고 ‘자신에게 수고로운 일을 남에게도 베풀지 않는다’로 해석하는 것이다. 차이는 있으나, 어느 쪽이든 자신을 미루어 상대방을 헤아려야만 가능한 경지이다. 그러니까 내가 배고프면 다른 사람도 배고프고, 내가 힘들면 다른 사람도 힘들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는 자신과 타자를 동시에 생각할 수 있어야만 가능하다. 그런데 이는 매순간 자신을 검증함으로써 사욕을 덜어내는 부단한 노력이 있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즉, 안회는 어떤 상황에 놓이든, 누구를 만나든, 관계 속에서 자신을 성찰하며 살아가는 것을 자신의 배움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가 끝이 아니다. 자로는 존경하는 선생님의 뜻은 무엇이냐고 되묻는다. 솔직히 나는 공자가 정치적 포부를 얘기할 거라고 생각했다. 문(文)·무(武)·주공(周公)으로부터 내려오는 정치를 다시 현실에서 실천한 사람, 무도(無道)한 시대에 태어나 천하를 교화한 사람으로 이름을 남기고 싶다고 말이다. 하지만 공자의 말은 나이 든 사람부터 젊은 사람까지 모두를 아우르고 싶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지극히 평범하고 소박한 것 같지만, 생각해보면 이것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나이 든 사람과 친구, 자기보다 젊은 사람과 모두 관계를 맺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대부분 자신과 비슷한 또래들 혹은 비슷한 취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하고만 관계를 맺는다. 그렇게 해서는 언제까지고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하고만 만나게 된다. 모든 세대를 아우르기 위해선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감각을 존중할 수 있어야 하고, 자기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배울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 한다. 가령, 나이 든 사람에게는 세월에 의해 쌓인 지혜를 배운다는 생각으로 공경해야 하고, 친구에게는 마음의 잉여를 남기지 않아야 하고, 젊은 사람에게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낌없이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 즉, 모든 상황과 관계에 맞게 적절하게 행동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게 바로 공자의 정치적 이상이 아니었을까? 나이 든 사람은 그들이 오랜 세월 겪은 것에 대해 존중받고, 동료들 사이에는 굳건한 신뢰와 연대가 있고, 젊은 사람에게는 포용과 아량이 베풀어지는 공동체를 구현하는 것. 인간에 대한 이 드넓은 인애(仁愛)야말로 공자의 정치적 이상과 삶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우리는 늘 타인의 시선을 경유해서 우리 자신을 만난다.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점검하지 않으면 사욕을 덜어낼 수 없고,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더 이상의 발전도 없게 된다. 하지만 대부분은 타자의 시선에 휘둘리며 살아간다. 타자로부터 좋은 평가를 얻기 위해 행동할 뿐 정작 자신의 사욕에 대해서는 성찰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세 사람은 타인의 시선에 수동적으로 예속되기는커녕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기 삶의 중심을 잡고자 했다. 이것은 자신의 마음을 점검하는 동시에 항상 자신을 다르게 볼 수 있는 또 다른 시선을 가지는 것이다.


사실 그동안 나는 글을 잘 써서 칭찬을 받는 데 공부의 뜻을 두고 있었다. 하지만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내가 뛰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나를 가르치는 스승과 함께 공부하는 벗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즉, 나의 공부는 그들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이제는 뜻(志)을 다르게 세워야 한다.


‘어떤 사람이고 싶으냐’는 질문에는 ‘타자와 어떻게 관계를 맺어나갈 것인가’라는 질문이 전제되어야 한다. 공부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구성하는 과정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공부에 뜻을 둔다는 것은 무엇일까? 공부는 내가 공동체에 몸을 담고 있기 때문에 이루어진다. 언제, 누가 오더라도 맞아들일 수 있도록 이 공간을 깨끗하게 준비하는 일, 설령 오지 않더라도 계속 이곳을 닦는 것을 지금 나의 공부로 삼고 싶다.



글 : 규창(고전비평공간 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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