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아이작 아시모프,『아이, 로봇』 - 어떤 거짓말들에 관하여

아이작 아시모프,『아이, 로봇』 - 어떤 거짓말들에 관하여



오래된 주택가였다. 금가고 깨진 곳 투성이의 창백한 시멘트 포장길에는 가장자리마다 잡초가 무성했다. 한때는 그 길에 초록의 생기를 더했을 테지만, 이미 때는 스산한 11월 중순, 그 채찍같던 잎새마저 누렇게 말라붙은 지 노래였다. 


스치는 기억에는 재개발로 한참 시끄러웠을 무렵 뉴스에서 이 동네 이름을 보았던 것도 같았다. 줄눈이 바스러져내린 시멘트 블럭 담벼락에 서툴게 갈겨쓴 빨간 스프레이 글씨, 천만년은 걸려있었나 싶게 날긋날긋 헤어진 플랭카드, 드문드문 붙어있는 찢긴 공고문의 글귀들이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실제로, 창가에 쌓아올린 세간살이에 가로막혀 햇빛 한 점 안 들게 생긴 허름한 살림집들 중간중간에, 선명한 빈집의 흔적들이 섞여있었다. 빨간색 페인트로 엑스(X)자가 쳐진, 아귀도 잘 안 맞는 현관문들. 깨진 채 방치된 창문들. 버린 가구와 가재도구들이 가득 쌓인 채 비바람에 풍화되어 가고 있는 마당들. 



안내받은 약도를 들고 더듬더듬 짚어간 그 인적없는 골목 골목의 어느 깊은 모퉁이, 지어진 지 30년은 너끈히 넘어 보이는 연립주택의 반지하에, 빛바랜 오방색 깃발들을 드리우고 그 집이 있었다. 고개를 들어 홋수를 확인한 후, 내가 그 문앞에서 잠시 망설였던가. 차갑게 곱은 손을 들어 초인종을 누르고, 신경질적으로 서성인 시간만은 영겁같았다. 이윽고 녹슨 철제 현관문이 철컹 열리며 누군가 빼꼼히 내다보았다. 


“들어와요.”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평소 미신적인 사람인 건 아니다. 비록 괴담게시판과 귀신 이야기를 좋아하긴 하지만 그건 그런 계통의 이야기들이 불러일으키는 뒷통수 저릿저릿한 감각을 즐기기 때문이지 그로써 어떤 종류의 내밀한 미신적 신념을 강화할 수 있어서가 아니었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무료 사주나 별자리 운세도 단골로 클릭해보지만, 그럴 때 마음은 봉봉(vonvon)에 이름을 넣어볼 때와 큰 차이가 없다(“당신은 전생에 섹시지수 120의  장군이었습니다!” 아이, 의미없지만 재밌어) .하지만 그날은, 그 가을은, 아니, 그 해는 통째로, 30여년 한결같던 ‘평소’가 송두리째 사라진 시절이었다.  


인생이 발 밑에서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무너짐 그 자체보다 이유도 원인도 모른다는 것이 더 끔찍했다. 답을 가진 한 사람은 철옹성같이 침묵했다. 지옥의 고통이 그 침묵으로부터 왔다. 어떤 보복이 아니고서는 이렇게 잔인할 수가 없는데, 그저 살피며 최선을 다한 세월 속에, 내가 어떤 악업을 쌓았기에 이런 응징을 당하는 것일까. 추론은 거듭거듭 실패하였다. 과학기술이 모든 걸 규명하는 21세기에, 아무런 논리적 인과를 찾을 수 없는 단죄가 나를 압살시키는 중이었다. 공황장애와 불면, 악몽이 번갈아 찾아드는 이 불가해의 지옥에서 이성과 합리는 미약하고 무력했다. “모르겠어.” 논리력이 날마다 좌절한 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되뇌었다. “너무 말이 안 돼. 그냥 현실이 아닌 거 아닐까?” 합리성이 비실비실하게 거들었다. 


설명되지 않는 부분을 떼어내 신의 품으로 토스할 수 있는 이들이 절실히 부러웠지만, 내게는 그럴 능력이 없었다. 나는 신앙을 가질 수 없는 정신머리를 타고 난 사람이다. 고통스러운 마음을 어딘가 의탁하고 싶었지만 내게는 빌어먹을 최소한의 염치가 있었다. 믿지도 않고 믿을 것도 아니면서, 수녀님, 법사님, 랍비님을 이용해먹기는 싫었다. 무신론자가 염치까지 있는 건 이럴 때 최악이다. 나는 내가 저주받았다고 생각했다. 




이 알음알음 소문난 무당의 연락처를 구했던 건 그래서였다. 내 선호로는 우주를 통치한다는 거대 신보다는 올망졸망한 귀신이 차라리 나았고, 최소한 이 민속신앙의 사제에게는 정해진 값이라도 있었던 것이다. 복채 말이다. 어쨌거나 내가 염두에 둔 건 점괘가 아니었다. 기복의 푸닥거리도 아니었다. 근거 없는 뜬소리를 믿고 매달릴 마음은 추호도 없었고, 그런 신앙은 애쓴다고 솟아날 것도 아니었다. 바람은 딴 데 있었다. 털어놓을 곳, 들어줄 귀, 그리고 나처럼 막막하고 불행한 사람들의 방대한 임상데이터를 축적하는 과정에서 몸에 밴 ’마음 취급의 기술’. 


그녀의 방은 컴컴하고 냉골 같았지만, 싸구려 티백을 담아 내준 차는 델 듯이 뜨거웠다. 얼음같은 손으로 그 잔을 움켜잡고 나는 하얗게 피어오르는 김을 한동안 내려다보았다.  이제 나는 이성으로 거르기를 포기한 내밀하고 적나라한 날것의 이야기를 쏟아낼 참이었다. 저 호리호리 마른 몸의 파리한 무속인은 귀 기울이고 넘겨짚고 알아맞히고, 그 어떤 말들을 내게 건넬 터였다. 그녀가 맞다고 믿는 말 혹은 들려주어야 한다고 결심한 말들을. 내게 해를 끼치지 않지만 결국은 비어있을 말들, 그러나 끝내 내가 듣고 위로받을 말들을. 다정하고 충성스럽게 달콤한 거짓말을 끝없이 늘어놓았던, [아이, 로봇]의 저 허비처럼.


허비. 빗대자면, 신의 실수로 태어나 착란으로 사위어버린 비운의 천재. 아이작 아시모프의 소설집 『아이, 로봇』 의 에피소드 하나를 책임진 인물, 아니 로봇이다. 수잔 캘빈 박사가 기억하는 여덟 인상적인 로봇들 가운데 하나로, 양전자 두뇌의 제조과정 중 알 수 없는 오류가 일어나 이상 작동하게 된 개체였다. 아무도 원리를 찾아낼 수 없는 모종의 이유로 인해, 그에게는 사람의 마음을 읽어내는 성능이 생겨났던 것이다.  


그는 사람이 사람을 연모하는 마음을 읽는다. 사람이 기계를 질투하는 마음을 읽는다. 들끓어오르는 사회적 성공의 야망을 읽는다. 그리고 그 간절함에 다정하게 화답한다. 


당신, 그를 사랑하죠? 그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수학적 원리요? 수학재능이 사람을 따라갈 수 없어서 저는 전혀 모르겠어요. 


그가 은퇴하냐고요? 물론이죠. 당신이 그 자리로 갈 거예요. 딱 적임자죠.


달콤한 말들이었다. 사랑에 실패할까봐, 기계가 나보다 똑똑할까봐, 승진하지 못할까봐 조마조마하던 마음들에 팡팡 불꽃축제가 열린다. 모두가 흡족하고, 모두가 행복했다. 그 확신에 찬 단언들이 새빨간 거짓말임이 확인되기 전까진. 


아이작 아시모프의 『아이, 로봇』 은 로봇심리학 분야에 평생을 바친 늙은 학자 수잔 캘빈의 회고를 내세워 다양한 로봇들의 에피소드를 액자형식에 담아 들려주는 소설이다. 일견 발랄한 우화집 같기도 하지만, 그 유명한 로봇 공학의 3원칙을 세상에 소개하고, 그 원칙들의 적용과 상호 충돌을 다양하게 시뮬레이션 해보면서 가다듬고 정교화한 뜻깊은 지침서이기도 하다. 아이작 아시모프가 이 책에서 주창한 로봇공학의 3원칙은 소설적인 아이디어에서 출발했지만, 꼭 필요한 강령들로 효율적으로 구성한 탓에 실제 엔지니어링이나 인공지능 분야에서도 유용하게 참조된다고 한다. 


제 1원칙: 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 그리고 위험에 처한 인간을 모른 척 해서도 안 된다. 


제 2원칙: 제 1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제 3원칙: 제 1원칙과 제 2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로봇 자신을 지켜야 한다. 


로봇공학 3원칙은 로봇을 만들 때 가장 기본적인 토대, 일종의 ‘본능’으로서 도입되기 때문에, 이를 위배하는 로봇은 존재할 수가 없다. 물론, 인간이 정해서 적용하는 규율일 뿐 만유인력의 법칙같은 자연법칙이 아니긴 하다. 인간에게 해를 입히는 로봇, 복종하지 않는 로봇, 자살하는 로봇을 만드는 게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고, 이를테면 고무신을 녹여 황금금괴를 만들어내는 거나 진배없는 일이라고는 할 수 없다. 『아이, 로봇』 의 여러 에피소드들 중에서도 제 1원칙을 슬쩍 수정해서 적용시킨 로봇이 말썽을 일으키는 이야기가 나온다. 하지만 로봇공학의 3원칙은 대체로 아주 강력한 제조원리다. 잘 조직된 문명사회의 고도 기술산업에서 기반 원리를 통째로 뜯어고친 제품을 만든다는 건, 어마어마한 자본과 권력의 비호가 없는 한 거의 요원한 일이다. 검색 기능을 싹 빼고 N 포털을 복제해내는 작업 쯤으로 비유하면 될까. 『아이, 로봇』 속 저 예외적인 1원칙 수정의 예화 역시 군사영역의 개입 속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살인하지 말라’는 인간사회의 절대규율이 군사영역에서 합법적으로 완화되는 것과 비슷하게. 




하여간. 허비는 군사적인 개입으로 만들어진 개체는 아니었다. 마음을 읽는 능력이 생겨났다고 해서, 존립 근거에 가까운 저 3대 원칙이 유명무실해지지도 않았다. 그가 상처만 남길 진실을 전할 수 없었던 건 그래서였다. 경우에 따라서 진실이란 로봇공학 제 1원칙, ‘인간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된다’에 정면으로 위배되기 때문에. 


들으면 틀림없이 마음이 부서질 진실을, 아끼는 사람의 면전에 아무렇지도 않게 들이밀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먼저 알고 있었다는 것, 그것은 말하는 자에게 선지자의 지위를 부여한다. 그것은 숭고하고도 고통스러운 자리다. 악역 아닌 악역이다. 내가 원치 않아도, 나의 말은 칼이 되어 상대를 벨 것이다. 나는 실시간으로 그가 피 흘리는 것을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내 말에 상처입고 다친 상대는 진실이 불러일으킨 미움과 분노의 정서를 나에게 투사해버리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적진을 찾은 사신들이 무수히 목이 베이고, 선지자들이 비극적인 순교의 단골손님이 되곤 했던 게 무엇 때문이겠는가?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내가 진실을 안다’는 사실을 감춘다. 알면서도 모른 척 하거나, 화제를 아예 회피하는 길을 택한다. 어차피 제3자일 뿐이라면, 굳이 내가 악역을 자처할 필요는 없기 때문에. 나를 지키고, 잠깐이라도 상대의 마음을 지키고, 장기적으로는 관계를 지키는 합리적인 전략이다. 그러나 딱하게도 그건 허비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선택지였다. 그는 명실공히 ‘마음을 읽는 로봇’이었고, 마음에 관한 한 그가 진실을 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으니까. 이제 누군가 와서 ‘네가 아는 진실을 이야기하라’고 요구할 때, 허비는 아주 딱한 처지에 놓일 수밖에 없다. 진실을 직면시키는 것은 상대에 대한 적극적인 가해라고 판단되는데, 제 1원칙에 의거, 그는 결코 사람에게 해를 입힐 수가 없는 것이다...  


말해버리는 것이 적극적인 가해, 무지 속에 버려두는 것은 소극적인 가해라고 하면, 어떤 가해도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는 제 3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다.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일시적인 면피책이냐 아니냐 하는 건 허비에게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 미래에 대한 전망 속에 마음의 역학을 위치시키는 건 결단코 그의 능력 밖의 일이므로. 


거짓말이라는 선택지를 강탈하고서, 반드시 두 가해 중 하나를 골라 수행하라고 압박하자 불쌍한 허비는 회로가 타버리는 고통 속에 영원히 작동을 멈추고 말았다. 허비의 거짓말에 깊이 상처입고 악의에 가득 차 있던 사람들은 아무도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지 않았지만, 그건 정말 큰 손실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이 우연한 피조물은 아마도 제법 그럴싸한 심리상담을 해낼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갖가지 마음의 상처와 그 귀결에 관한 방대한 임상사례들을 공급받기만 했어도, 허용된 거짓말의 범위를 조금만 정교하게 조정받기만 했어도, 조금만 더 모호한 화법을 훈련받기만 했어도, 그는 마음을 달래주는 일을 훌륭히 수행해낼 수 있었을 터였다. 종교기관 대신 후미진 대나무숲을 찾는 부류의 사람들은 그저 털어놓고 사소하게 위로받길 바랄 뿐이다. 그럴 때 적절한 거짓말은 틀림없이 도움이 된다. 그 낡은 재개발지구 어두운 반지하방에서, 지친 눈매의 생면부지 무속인이 그랬던 것처럼. 




두어 시간 후 그 집을 나설 때, 나는 살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두 시간동안 그녀는 평가하지 않으며 들어주는 귀였고, 내가 모르는 세계관으로 다른 해석을 전해주는 통역자였다. 그녀가 신념을 갖고 건네는 말들-운명론, ‘할머님’ 말씀, 그리고 예언-을 나는 추호도 믿지 않았지만, 그 말들이 좋았고 그 말들이 고마웠다. 오로지 마음을 어루만져줄 뿐인, 고맙고 따뜻한, 그러나 그로써 이미 충분하고도 남은 거짓말. 


어떤 거짓말들은 구멍 난 마음을 기우고, 어쨌거나 한 발 더 내딛게 한다. 

그것이 아마도 허비의 잠재력이었을 것이다. 


글_윰(SF팬)

설정

트랙백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