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우리 나르시스트, 그 후

우리 나르시스트, 그 후




우리, 21세기의 다이스케들


“욕실에서 정성껏 이를 닦았다. 그는 평소부터 자신의 고른 치아에 만족하고 있었다. 윗옷을 벗고 가슴과 등을 깨끗이 문질렀다. 피부는 섬세한 윤기가 감돌았다. 향유를 바른 자리를 정성껏 닦아낸 것처럼 어깨를 움직이거나 팔을 올릴 때마다 지방이 살짝 붙은 부분이 도드라져 보였다. 다이스케는 자신의 이런 모습 또한 만족스러웠다. 이어 검은 머리에 가르마를 탔다. 기름을 바르지 않아도 머리카락은 신기할 만큼 말을 잘 들었다. 수염 역시 머리카락처럼 섬세하고 가지런한 모습으로 입 위를 품위 있게 덮고 있다. 다이스케는 자신의 통통한 뺨을 두 손으로 어루만지며 거울에 얼굴을 비춰보았다. 그건 마치 여자가 분을 바를 때의 손놀림과도 같은 동작이었다. 실제로 그는 필요하다면 백분이라도 바를 수 있을 만큼 자신의 용모에 자신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나한처럼 빼빼마른 골격과 얼굴이다. 그는 거울을 바라볼 때마다 자신이 나한과 같은 외모를 갖고 태어나지 않아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할 정도다. 남들에게 멋쟁이라는 말을 들어도 그리 거북스럽지 않다. 그만큼 다이스케는 일본의 구시대적인 발상에서 벗어나 있다.”(나쓰메 소세키, 《그 후》, 현암사, p.18)




나쓰메 소세키가 쓴 《그 후》의 주인공 다이스케. 메이지 일본에서 그는 ‘별종’이었다. 노동을 혐오하고 출세나 성공보다는 소소한 일상을 소중히 여기며 자신의 미모를 세심히 가꾸는, 자신의 세련된 취향과 섬세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살아가는 인간. ‘필요하면 백분(白粉)이라도’ 바를 준비가 된 남자. 그가 혐오하는 ‘나한’ 같은 외모가 상징하는 것은 국가나 사회, 이념 따위에 매몰되어 ‘자기 자신’을 상실한 삶이다. 다이스케는 결코 근대화라는 도금된 이미지에 현혹당하지 않는다. 그가 보기에 ‘진보’니 ‘계몽’이니 하는 가치들은 개인들에게 사회적 유용성을 강요함으로써 각자의 삶과 욕망에 충실하지 못하도록 하는 허울 좋은 족쇄일 뿐이다. 일본의 구시대적인 발상으로부터 멀리 벗어나 버린 다이스케는 소설 속 누구로부터도 온전히 이해받지 못한다. 주변인들에게 그는 철부지 아들, 이해할 수 없는 동생, 쓸모없는 방관자다. 그는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천박한 현실과 적절히 거리를 둔 채 자신이 구성한 ‘고상한 세계’ 속을 소요하고자 한다.


다이스케가 100년 정도 늦게 태어났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 지극히 평범한 인간으로 취급받았을 것이다. 지금 우리 모두는 얼마간 다이스케와 닮아 있는 것 같다. 어렸을 적, 나는 내가 “남자”치고 거울을 너무 자주보고 외모에 지나치게 민감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라면서 그렇지도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웬만한 (남자인) 친구들은 나 이상으로 외모를 공들여 가꾸고 나만큼이나 자기 자신에 대해 민감했다. 특히 군대에서는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서 만난 또래들은 훈련이 있으면 먼저 선크림부터 떡칠하고 트러블이 생기면 서둘러 여드름 패치를 붙이느라 여념이 없었다. 우리의 ‘주적’은 자외선과 피부 트러블이었다. 또한, 다이스케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거대한’ 가치들을 간단히 냉소할 줄 안다. 우리는 ‘그러므로’라는 근거와 ‘해야 한다’라는 당위로 무장한 목적의 설교자들에 질색한다. ‘남북단일팀’이라는 명분보다는 선수 개인의 꿈을 훨씬 더 소중히 여기고 저출산 문제의 해결보다는 각자의 삶을 자유롭게 계획할 귄리를 우선시한다. 나아가 우리는 부귀영화보다는 소소한 일상을, 사회적 성공보다는 행복한 삶을 추구한다.


다이스케의 삶은 한때 나의 이상이기도 했다. 부모의 경제적 원조 하에 쇼핑을 하고 미술품을 사 모으고 연극을 보러 다니고 너무 진지해지지 않는 정도의 독서와 공부를 하고 기분이 내키면 목적지 없이 전차에 오르는 여유로운 삶. 더할 나위 없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다이스케의 방황은 그리 경쾌해 보이지 않는다. 그는 늘 불안에 시달린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어떤 ‘거대한 것’에도 복종하지 않지만 우리의 불복종에는 활력이 없다. 다이스케는 독립적이다. 그는 모든 것들과 적절한 거리를 지키면서 무엇과도 동일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다이스케의 독립성은 전적으로 외부 의존적이다. 그는 사업가인 아버지로 상징되는 “일본의 구시대적 발상”에 대한 거부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세상은 타락했다. 따라서 타락을 꿰뚫어본 내가 느끼는 고통과 혐오감은 고귀하고 정당하다. 다이스케의 자기향락은 그가 거부하고자 하는 것들을 땔감으로 삼는다. 의존적 독립성과 무기력한 자기애. 때문에 아버지의 경제적 원조가 끊기고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현실을 구축해야 할 순간을 맞닥뜨리자마자, 다이스케의 ‘고상한 세계’는 맥없이 무너지고 만다.


《그 후》를 읽는 내내 다이스케에게서 내 모습이 보였다. 다이스케도 나도 결코 ‘시도’하지 않는다. 구태여 시도하고 실험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수 천 가지나 된다. 마음만 먹으면 당장 그 이유를 하나 더 만들어 낼 수도 있다. 무엇보다, 시도 하지 않는 동안에 우리는 스스로를 ‘적당히’ 긍정할 수 있다. ‘적어도 내가 저들보다는 낫다’라는 방식으로 자기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이것으로 족한가? 우리는 ‘다 안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그 뒤에서는 비겁하고 왜소한 난장이가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게 아닐까?



나는 전부 다 안다, 나 자신을 제외하고는




우리, 21세기의 다이스케들은 규범적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내 집을 꼭 마련해야 한다거나 반드시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뤄야 한다거나 무슨 일이 있어도 목표를 실현해야 한다는 식의 집착으로부터 자유롭다. 대신에 우리의 욕망은 안주하지 않고 흐르며 매번 새로운 것에 꽂힌다. 명품을 사서 몇 십 년씩 입기보다는 SPA 브랜드에서 한 계절 입고 버릴 옷을 고르고, 한 뮤지션의 앨범을 첫 번째 트랙부터 마지막 트랙까지 감상하기보다는 많은 뮤지션들의 대표곡들을 플레이리스트에 담고 무작위로 재생한다. 일을 통한 자아실현을 꿈꾸기보다는 더 좋은 조건에 자신을 팔기 위한 이직을 고민한다. 때문에 우리의 욕망은 탐욕이나 야심, 집착의 형태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의 욕망은 안주하지 않고 매번 새로운 것에 꽂힌다.


나는 유튜브를 통해 호주와 아일랜드의 무명 뮤지션들의 라이브 영상을 감상하고 인스타그램에서는 내 친구들이 올리는 사진을 통해 그들의 일상에 접속한다. 이처럼 온갖 것들과 끊임없이 접속하는데 그러한 접속의 귀결점은 항상 ‘나’다. 잘난 척하더니 겨우 나르시시즘이다. 우리가 마주하는 낯설고 새로운 것들은 그저 소비의 대상일 뿐이다.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을 쾌적하게 소비한 뒤 항상 자신으로 되돌아온다. ‘나’는 출발점이자 도착점인 셈이다.


“우리는 사실 우리 자신에게 필연적으로 낯선 존재로 있고, 우리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며, 우리 자신을 혼동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가장 먼 존재이다’라는 명제는 우리에게 영원한 의미를 지닌다. 우리 자신에게 우리는 ‘인식하는 자’가 아닌 것이다.”(프리드리히 니체, 《도덕의 계보학》, 연암서가, p.12)


‘니가 나에 대해서 뭘 알아!’ 이건 우리가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는 말이다. 우리는 다른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확신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앎은 우리에게 일종의 권리와 같다. 물론 가끔은 ‘나도 나를 잘 모르겠어’라고 호소하지만, 그런 예외적인 순간조차 나는 ‘나’에 가장 가까이 있는 존재다. 그러나 니체는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는 권리를 가차 없이 박탈한다. 우리 자신에게 우리는 ‘인식하는 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자기 자신을 마주하게 되는 것은 항상 다른 것들과의 마주침을 통해서다. 우리를 둘러싼 공기, 우리를 내리쬐는 햇살, 우리의 몸 안에 들어와 있는 이물질들의 작용 등등을 통해. 그러니까 자기인식에는 이미 늘 ‘바깥’이 개입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신’이라는 뫼비우스의 띠를 끝도 없이 순례한다.


우리는 ‘세팅된 경험’ 세대다. 어려서부터 부모들이 제공한 온갖 ‘체험’들을 누리는 데다, 수시로 해외로 나가는 건 기본이다. 그러나 나의 경우 다채로운 경험들은 결코 ‘나’를 넘쳐흐르지 않았다. 모두 다 적당 적당히. 나의 경험들은 나를 꾸며주고 강화해줄지언정 나의 한계에 직면하거나 나 자신의 바닥을 마주하도록 강요하지는 않았다. 아니, 나에게 경험은 딱 그 정도 선에서만 허용되고 소비되었다. 세계는 이미 나의 관점으로 재편되어 있고 그 안에서 나는 나인 채로 매순간을 부유할 뿐이었다. 우리의 풍부한 경험이 공허한 것은 이 때문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전 세계’라는 이름의 ‘내 방’ 안에서 방랑하는 히키코모리들이다.


내가 나를 알게 되는 것은 더 이상 편안하게 나 자신 안에 머물 수 없게 되는 순간이다. 우리는 한계에 도달하고 실패함으로써만 스스로를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뭍에서는 내가 물에 뜰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우리는 ‘할 수 없음’에 이를 때 스스로를 알게 된다. ‘할 수 없음’을 행하는 것, 그것이 시도이고 실험이다. 매번 할 수 없음에 이름으로써만 무엇을 할 수 있는지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사실 자기인식이란 그 자체로 자신에 대한 실험이자 시도다. 우리는 외부에 스스로를 열고 끊임없는 ‘되어감’ 속에 있음으로써만 자기 자신을 알아갈 수 있다. ‘나’를 고집하지 않음으로써만 매번 새롭게 나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우리의 자기애가 결정적으로 결여하고 있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자기 밖에 모르는’ 우리들은 사실 자기 자신을 가장 모른다. 시도하고 실험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 그러한 태도는 냉소와 염세로 드러났다. 어떤 변화에도 기다렸다는 듯 자신을 내맡길 준비가 되어있는 상태가 ‘달관’이라면, ‘냉소’는 모든 변화하는 것들을 자기 자신과 분리시킨 채로만 받아들이려는 고집이다. 어떤 변이도 겪지 않으려는 완고함. 나의 냉소와 고착적 자기애는 동전의 양면과 같았다. 그 때문에 나의 냉소는 결코 자기 환멸에까지 이르지 않았고 나의 자기애에는 늘 자기비하가 따라다녔다.


우리의 나르시시즘, 자신을 보존하고 유지하려는 힘이 종국에 도달하게 되는 것은 결국 냉소와 염세다. 힘의 보존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끊임없이 생성을 거듭하는 세계는 그 자체로 부정적이고 두려운 것일 수밖에 없다. 세계가 자기임을 깨닫지 못하는 냉소주의자는 세계를 냉소하면서 실은 자기 자신을 냉소한다. 그는 타인에게도, 자신에게도 이를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전부 다 안다, 나 자신을 제외하고는.”(프랑수아 비용, <촌언(寸言)의 발라드>)



허영, 무능한 자들의 외투


그동안 나는 적어도 나의 태도가 솔직하고 소박한 것이라 생각했고, 그렇게 스스로를 정당화했다. 적어도 거창한 이상을 내세워 스스로의 사사로운 욕망을 은폐하거나 나 자신의 올바름을 절대화하여 타자에게 강요하지는 않았다고 자부했다. 적어도 우리의 자기애는 어떤 ‘거대한’ 것들에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위험하고 폭력적인 방식은 아니지 않은가. 그저 소박하고 무해한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을 뿐이지 않은가. 이러한 소극적 자기합리화의 논리를 벗어나기란 쉽지 않았다. 아니,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고 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근본적으로 허영은 커다란 유용성, 즉 보존을 위한 최강의 수단이다. 그런데 허영은 그 개인이 영리해지면 영리해질수록 더 커질 것이다 : 왜냐하면 힘에 대한 신뢰를 증대시키는 것은 힘 자체를 증대시키는 것보다도 훨씬 더 쉽기 때문이다.”(프리드리히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Ⅱ》, 책세상, p.335)


니체는 허영심을 독특하게 정의한다. 허영은 보존을 위한 최강의 수단이며 힘 자체가 아니라 힘에 대한 ‘신뢰’와 관련되어 있다. 니체가 보기에 자신의 힘의 고양과 무관한 긍정은 모두 허영이다. 힘이 고양되는 것은 다른 것과의 마주침을 통해서이다. 다른 신체, 다른 사유와 접속할 때 기존의 자신이 깨지기도 하고 또 새롭게 고양되기도 한다. 접속을 받아들이고 다른 힘을 전유할 수 있는 역량이 있을 때만 우리는 자신의 힘을 고양시킬 수 있다. 가만히 앉아 있어서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위험을 감수하며 우리의 힘을 고양시키기보다는 자신을 다른 것에 동일시함으로써 힘을 지니고 있다고 믿고 싶어 한다. 힘이 아니라 ‘힘에 대한 신뢰’를 증대시키기를 원하는 것이다.


우리의 ‘소박한’ 자기애 또한 허영에 불과한 게 아닐까? 분명 우리도 무언가에 스스로를 동일시한다. 다만 그것이 드러나는 양상이 조금 다를 뿐이다. 우리는 어떤 집단에 자신을 일치시키는 대신 나와 ‘동류’라고 믿는 것들과 더불어 매끈한 집단성을 이룬다. 이념을 통한 맹목적 동일시가 아닌 취향을 통한 쾌적한 자기화. 우리가 관계 맺는 방식들을 떠올려보자. 나는 늘 내게 우호적인 이들과 우호적일 수 있는 한도 내에서만 관계를 맺어왔다. 이것이 안전한 관계 맺기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에는 늘 공허가 뒤따른다.




우리는 다른 힘에 복종하지도, 다른 힘을 전유하지도 않는 선에서 적절히 관계 맺고자 한다. 가령 SNS나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한 익명적 관계들은 우리에게 다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편안함을 선사한다. 그러한 익명적 관계에는 타인과의 마주침에 수반되는 모든 위험이 제거되어 있기 때문이다. 온라인만이 아니다. ‘인맥 다이어트’나 ‘인맥 리셋’ 같은 신조어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우리는 관계 자체에 내재해 있는 불편함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한다. 이상한 건,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외로움을 호소하며 타자를 갈구한다는 사실이다. 혼자 생일을 보내거나 휴가를 보내면 자신이 제대로 된 삶을 살고 있지 못한 것만 같이 느껴진다. 혼자 있는 시간은 타인들과 함께하는 시간에 대해서 결여로 경험된다. 결국 우리는 혼자여도, 함께여도, 늘 무능하다. 늘 공허하다. 어떤 힘의 변환도 능동적으로 구성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갈 곳 없는 나르시시즘적 영혼들이 떠도는 곳은 결국 ‘시장’이다. 안전한 위치에서 온갖 낯설고 새로운 것들을 소비함으로써 힘에 대한 신뢰를 증대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요컨대, 우리는 ‘국가’나 ‘민족’ 등의 거대한 것들 대신에 ‘나’ 혹은 ‘나다운 삶’이라는 개인적이고 트렌디한 이미지에 스스로를 동일시한다. 그런데 이때의 ‘나’란 무엇인가? 이미지, 그것도 끊임없이 변주되는 이미지다. 사실 ‘나’로 산다는 것, ‘나답게’ 산다는 것은 생각만큼 간단한 일이 아니다. ‘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 매 시즌 새로운 옷으로 ‘나의 스타일’을 유지해야 하고, 나만의 취미도 하나쯤 가지고 있어야 하며, 때마다 여행을 다니며 나의 경험과 나의 추억을 축적해야 한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삶의 이미지를 새롭게 구성해내는 동시에 그것을 충족시키고자 노력한다.


결국 우리는 ‘국가를 위해 봉사하라’, ‘가족을 위해 희생하라’, ‘당을 위해 헌신하라’ … 라는 명령을 대신해서 ‘너 자신에 투자하라’, ‘원하는 삶을 살아라’, ‘네 욕망에 충실하라’ … 라는 자본의 명령에 복종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나다움’은 결국 자본으로 수렴된다. 미세한 차이들을 만들어내면서 스스로를 증식시키는 자본과 자본의 흐름에 자신을 투영하면서 끊임없이 ‘나’를 재생산하는 우리 나르시스들. 우리의 자기애는 화폐라는 물신(物神)에 기대어서만 가까스로 긍정에 이르는, 지독히도 무력한 허영에 지나지 않는다.



‘그 후’보다는 ‘지금’


다이스케는 찌는 듯한 거리를 잰걸음으로 걸었다. 태양은 다이스케의 머리 위에 곧장 내리쬐고 있었다. 메마른 먼지가 불티처럼 그의 맨발에 들러붙었다. 그는 바작바작 타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타들어간다! 타들어간다!”/ 걸어가면서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다바시로 가서 전차를 탔다. 전차는 거침없이 달렸다. 다이스케는 전차 안에서 주변 사람이 들릴 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움직인다. 세상이 움직인다.”/ 그의 머리는 전차가 빨리 달릴수록 빨리 회전하기 시작했다. 회전함에 따라 불덩이처럼 달아올랐다. 이렇게 계속해서 반나절이나 타고 간다면 완전히 타버릴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빨간 우체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자 그 빨간색이 갑자기 다이스케의 머릿속을 헤집고 들어와 빙빙 돌기 시작했다. 우산 가게 간판에 빨간 양산 네 개가 겹친 채 높이 걸려 있다. 양산 색깔이 다시 다이스케의 머릿속으로 들어와 빙빙 소용돌이쳤다. 네거리에 크고 새빨간 풍선을 팔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전차가 갑자기 모퉁이를 돌자 풍선이 따라와 다이스케의 머리에 달라붙었다. 소포를 실은 빨간 자동차가 전차와 스치듯 지나갈 때, 다시 다이스케의 머릿속에 들어왔다. 담배 가게 입구의 노렌이 빨갰다. ‘대방출’이라고 쓰여 있는 깃발도 새빨갰다. 전신주도 빨갰다. 빨간 페인트 간판이 계속 이어졌다. 나중에는 세상이 전부 빨개졌다. 그리고 다이스케의 머릿속을 중심으로 불길을 내뿜으며 빙빙 회전했다. 다이스케는 머릿속이 다 타버릴 때까지 계속 전차를 타고 가기로 결심했다.(나쓰메 소세키, 《그 후》, 현암사, p.325)


다이스케는 항상 논평자의 위치에 있다. 일본의 현실에 대해서, 자기 아버지에 대해서, 친구 히라오카의 실직에 대해서, 묘하게 자신과 닮은(?) 서생 가도노에 대해서, 그는 자신이 수집하고 있는 미술품이나 자신이 본 연극을 비평하는 것과 같은 태도를 취해왔다. 자기 자신과 자신을 사로잡은 감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아직 서른이 채 안 된(!) 다이스케는 세상을 다 안다는 듯 짐짓 초연한 자세를 취한다. 나는 그의 조로함에 나 자신이 겹쳐져 보였다. 한 번도 자기 자신을 떠나본 적이 없는 자가 잠시 빌려 쓴 성숙함의 가면. 나와 다이스케의 기이한 늙음. 인간은 체험을 소화해내는 만큼만 성숙해진다. 다이스케는 늘 경험을 회피해왔다. 취직과 결혼 등 모든 사회적 요구들을 거부하되 주어진 길 바깥에서 어떤 시도도 하지 않으면서 삶을 유예한 것이다. 그러나 삶은 다이스케에게 유예를, 그리고 논평자의 자리를 허용하지 않는다. 더 이상 ‘허영’이 먹혀들지 않는 지점에 이르게 된 것이다. 고요해 보였던 세계가 그제야 소용돌이치기 시작한다.


《그 후》는 여기서 끝난다. ‘그 후’ 다이스케는 어떻게 되었을까? ‘고상한 세계’가 무너진 자리에서 그는 뭘 할 수 있을까? 이전까지의 자신의 삶을 부정하고 ‘밥벌이를 위한 노동’에 자신을 바쳐 병든 미치요를 부양하며 살아가는 길이 있다. 아니면 가난한 글쟁이 친구 데라오처럼 문학에 투신하여 거기서 자신의 길을 모색하는 방법도 있을 거다. 어느 쪽이든 다이스케는 그를 더 이상 ‘다이스케’로 존재할 수 없도록 하는 한계 상황에 처해 있다. 그는 지금 ‘자신의 몰락을 어떻게 체험할 것인가’라는 물음 앞에 서 있는 것이다. 그것을 자기 자신의 상실으로 경험함으로써 현실을 부정하고 저주하며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이전의 자신을 초과하는 그 모든 불편과 고통을 마주함으로써 자기 자신에 도달할 것인가. 모든 것은 그의 결단에 달려 있다.




질문은 내게도 던져졌다. 다이스케와 같은 위기에 처하게 된다면 어떻게 나의 상황을 돌파할 것인가? 물론 나는 다이스케가 처한 것과 같은 삶의 기로 앞에 있지는 않다. 그러나 다이스케가 보여주는 것처럼 누구도 삶 바깥에 서 있을 수는 없다. 아무리 안전한 위치에 멈춰있고자 해도 삶은 늘 예기치 못한 우연과 함께 우리를 엄습한다. 재난이 찾아올 때 우리는 대피소에 있지 않을 것이다. 아니, 사실 삶에는 어떤 확실한 피난처도 없다. 만약 내가 당장 돈을 벌어서 누군가를 먹여 살려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나는 그때도 지금과 같은 식으로 나를 긍정할 수 있을까? 더 이상 이전의 ‘나’로 존재할 수 없게 되는 순간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때 공부는 내게 무엇일까?


나, 또 하나의 나르시스. 나는 이 공허한 자기애와 너무 오랜 시간을 함께해왔다. 이제는 지겹다. ‘나’라는 뫼비우스의 띠를 그만 벗어나고 싶다. ‘그 바깥’에 무엇이 있을지, ‘그 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전혀 알 수 없지만, 내게 문제가 되는 것은 ‘지금’이다. ‘그 후’ 이전에 먼저 나는 “머릿속이 다 타버릴” 듯한 ‘지금’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 또한 구토를 일으키는 현기증에 시달릴 것이다. 어이없는 막장 연애로든, 의지했던 사람들과의 관계의 궤멸로든. 그 순간 나의 무너짐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내 공부는 그 ‘지금’을 기다린다.


글_건화(고전비평공간 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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