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철학, 건강의 기예

철학, 건강의 기예




철학, 여전히 너무나 낯선


나는 연구실 바깥의 주변인들에게, 심지어는 가족들에게조차도 뭘 하고 사는지 알 수 없는 인간이다. 학교를 다니는 것도 아니고 취직을 한 것도 아닌 주제에 바쁜 척은 다 하고 다니는. 그래서 다들 내게 묻는다. 도대체 뭐하고 싸돌아다니는 중이냐고. 그런데 어째서인지 이런 질문에 답할 때면 ‘철학’이라는 말을 빼려고 노력하게 된다. 결국 그게 그거지만 인문학 공부를 한다고 말하거나 읽고 쓰는 법을 배우고 있다는 식으로 대답하게 되는 거다. 분명히 철학을 공부하고 있고 그걸로 글도 쓰고 있지만, 여전히 ‘철학’이라는 말이 낯설다. ‘철학’이라는 말이 주는 무거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난 뭔가 고원한 진리를 논할 것만 같은 철학의 진지하고 무거운 이미지가 부담스럽다.




내가 철학에 대한 이미지를 형성하게 된 것은 고등학교 때인 것 같다. 내가 다닌 학교에는 ‘야학’이라는 제도가 있었는데, 이를 통해 학생들은 방과후에 미술, 음악, 건축, 시사, 철학 등등에 관한 수업을 선택해서 들을 수 있었다. 내가 처음으로 ‘사회·문화·철학(=인문학?)’ 책들을 직접 접한 건 바로 이 야학수업을 통해서였다. 여기서 나는 철학에 대한 두 개의 이미지를 동시에 형성했다. 하나는 ‘존재’나 ‘진리’ 같은 것을 논하는 사변적 관념철학의 이미지였고, 다른 하나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지적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비판적이고 사회참여적인 정치철학의 이미지였다. 후자에 좀 더 공감하기는 했지만, 딱히 어느 쪽도 나를 강하게 흔들어놓지는 못했다. 그냥 ‘저런 세계가 있구나’ 정도?


사변적인 것이든 정치적인 것이든, 내게 철학이란 우선 정신적이고 의식적이며 이성적인 활동이었다. 그리고 이때의 철학이란, 누구나 당장 실행할 수 있는 무엇이기보다는 어떤 전문적인 영역 내에서 행해지는 것이었다. 또한 그것은 ‘인간은 본성은 선한가, 악한가?’ 따위를 묻는 관념적 호기심의 소산이거나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사회적 문제’를 비판하거나 해결하기 위해 활용되곤 하는 논리적이고 정신적인 도구였다. 어떤 방식으로든 ‘철학’은 항상 나의 일상과는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니체는 철학의 정신적 이미지를 과감하게 벗어버린다. 그는 “철학적인 의사(醫師)”가 되고자 했다. “민족, 시대, 인종, 인류의 총체적인 건강의 문제를 진단하고, (…) 모든 철학이 다루어온 것은 ‘진리’가 아니라 다른 어떤 것, 즉 건강, 미래, 성장, 권력, 삶 등이라는 명제에 과감하게 천착하는”(니체, 《즐거운 학문》, 2판 서문) 철학자-의사. 우리는 모두 육체를 떠날 수 없는 존재다. 따지고 보면 어떤 고원한 정신적 활동도 신체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철학은, 그리고 철학에 대한 기존의 이미지들은 흔히 신체를 간과한다. 이에 비해 니체는 몸으로부터 출발하고자 한다. 그에게 철학은 다른 무엇보다도 신체에 관한 것이었고 감각과 취향에 관련된 것이었다.


내가 철학에 대해 느꼈던 위화감의 근본적 원인은 내가 그것을 정신적 활동에 국한시킨 데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니체의 말처럼 철학이 다루어온 것이 진리가 아닌 건강이라면, 철학은 더 이상 나의 일상과 따로 떨어진 무엇일 수 없을 테다. 그러한 철학이란 매일 먹고, 싸고, 자는 나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몸 위에서 펼쳐지는 것일 테니까. 대체 몸으로부터 출발하는 철학이란 무엇일까?



‘큰 이성’으로서의 몸


신체란 무엇인가? 생각해보면 나는 늘 신체를 어떤 제약으로 경험해온 것 같다. 더 놀고 싶은데 자야 한다고 몸이 신호를 보낼 때, 귀찮아 죽겠는데 뱃속에서 자꾸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릴 때, 몸의 어느 부위인가가 아파올 때, 나는 이런 경우에만 내 몸의 존재감을 느낀다. 그 이외에는 신체가 없는 것처럼 느낀다. 마치 신체가 놓여 있는 구체적인 조건을 떠나서 내가 ‘자유롭게’ 존재할 수 있고, 존재하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이는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에게 너무나 익숙한 사고방식일 테지만, 따지고 보면 매우 기이한 사고방식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한 번도 신체를 떠나 본 적이 없으면서도, 습관적으로 신체를 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또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신체에 매우 민감하다. 마치 “내 머리카락 한 올로 세상을 이롭게 할 수 있어도 뽑지 않겠다”고 말하는 양주의 위아주의(爲我主義)를 표방하기라도 하듯이, 우리는 우리의 몸을 아낀다. 피부는 말할 것도 없고 손끝부터 발끝까지, 최근에는 신체 곳곳의 털들에까지 ‘관리’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털을 마구 뽑아대는 걸 보니 양주의 후예는 아니겠다). 신체의 표면에 트러블이나 흠집이라도 생기는 날엔 난리가 난다. 부족한 영양은 온갖 영양제를 통해 보충하고 부족한 운동량을 보충하기 위해서는 각종 시설들로 향한다. 인류 역사에서 지금 우리 세대만큼 자기 몸을 소중히 가꾸는 20대가 있었을까?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신체와 관계하는 상이한 두 가지 방식이 있다. 몸을 하찮게 여기며 신체를 벗어난 자유를 상상하는 방식과, 신체를 극진히 관리함으로써 그것을 어떤 이상적 ‘아름다움’이나 ‘건강’에 일치시키고자 노력하는 방식. 전자의 경우 신체는 정신을 가두는 새장이고, 후자의 경우 신체는 일종의 ‘표면 이미지’다. 그러나 니체에게 신체란 정신과의 구분 속에서 성립하는 개념도, 몇몇 수치들과 타인들의 시선(혹은 그것을 내면화한 자기 자신의 시선)에 의해 출현하는 표상도 아니다.


신체는 커다란 이성이며, 하나의 의미를 지닌 다양성이고, 전쟁이자 평화, 가축의 무리이자 목자이다./ 형제여, 네가 “정신”이라고 부르는 너의 작은 이성 또한 너의 신체의 도구, 너의 커다란 이성의 작은 도구이자 놀잇감일 뿐이다.(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책세상, p.52)


니체는 우선 정신과 신체를 대립적으로 이해하거나 분리될 수 있는 무엇으로 보는 관점을 폐기할 것을 요구한다. 정신이 신체를 조종하는 것도, 그 역도 아니다. 니체는 우리가 ‘정신’이라고 부르는 것과 ‘신체’라고 부르는 것을 모두 포괄하는 ‘큰 이성’으로서의 신체(=자기Selbst)를 이야기한다. 여기서 ‘큰 이성’이란 타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부단히 활동 중인 것으로서의 신체다. 신체는 우리가 들이마시는 공기, 섭취하는 음식물,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 스쳐지나가는 바람 등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러한 외부성들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과정 자체다. 신체는 이질적인 것들이 투쟁을 벌이는 전쟁터이며, 그것들이 벌이는 전쟁 자체이기도 하다. 우리의 동일성(평화)은 그 전쟁을 통해 유지된다. 우리가 특권을 부여하는 정신과 자아는 이러한 내부/외부를 가로지르는 운동의 부수물일 따름이다. 우리의 욕망, 충동, 의지, 지성은 모두 커다란 이성으로서의 신체를 구성한다.


나는 그간 철학을 고원한 정신적 활동이라고 생각해왔다. 난해한 언어로 창백한 관념들을 다루는 것이 철학이라고. 생각해보면 공부를 시작한 뒤로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은연중에 철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결국 철학자들로부터 그들의 논리를 배워오는 일이라고 여기고 있었나 보다. 신체로부터 분리된, 다시 말해 내 욕망이나 충동, 정서와 무관한 ‘순수한 이성’ 같은 것을 상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니체적 관점에서 보자면 순수한 정신이나 이성 같은 것은 없다. 이성이 발휘될 때조차 그것은 욕망이나 충동 등 모든 신체적 해석들과 동시적으로 작동한다. 요컨대, 관념의 영역 따위가 아니라 지금 작동하는 나의 욕망, 이 생생한 몸. 철학은 이 신체의 느낌에 대한 진단에서 시작된다. 나는 무엇에 끌리고 무엇에 거부감을 느끼는가? 어떤 것과 만났을 때 상쾌함을 느끼고 어떤 것과 만났을 때 무거워지는가? 나의 취향, 내가 세계를 감각하는 방식. 여기가 바로 철학이 시작되는 자리다. 그런 점에서 니체에게 철학이란 진리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하나의 ‘건강학’이다.



건강, 관계 맺는 힘


건강이라고? 내게 건강이란 하나의 표상에 불과하다. 젊은 육체의 이미지와 동일시될 수 있는 무엇이랄까? 밤새 놀아도 쌩쌩하고 뭘 먹어도 무리 없이 소화시키고 다쳐도 금방 회복하는, 소년만화의 주인공들 같은 에너제틱한 신체의 이미지. 다른 누군가에게 건강은 투명하고 밝게 빛나는 아기 피부와 균형 잡힌 몸매, 꼿꼿한 자세 등의 이미지로 표상될 것이다. 건강이 아니라 건강에 대한 이미지. 아이러니하게도 건강에 대한 이같은 표상은 정작 신체를 망각하게 한다. 나를 이루고 있는 타자들과의 관계 맺기에 대한 고민은 사라지고, 건강의 추구는 ‘건강’이라는 추상적인 이미지를 쟁취하고 그러한 상태를 유지하는 일로 귀결되고 만다. 건강해지면 건강해질수록 점점 더 수동적이게 되고 자본에 종속되고 마는 역설.


나는 20대지만 건강의 표상으로서의 ‘젊음’과는 거리가 먼 신체를 지니고 있다. 거칠고 푸석푸석한 피부, 쉽게 피로해지는 몸, 소화불량의 위장. 어디가 특별히 아픈 건 아니지만 ‘건강’의 일반적 표상으로부터는 멀리 떨어져 있다. 그 때문인지 나는 건강을 나와는 무관한 것으로 여겼다. 온갖 좋은 것들을 챙겨먹고 운동을 하러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존경스러운 마음과 의아한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도저히 저들처럼 열심히 몸을 관리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다. 그러니 그냥 막 살자. 늙어서 온 몸이 아파오면 그때쯤 후회하게 되려나? 이정도가 건강에 대한 내 생각의 전부였다. 나의 신체성을 응시하고 건강을 실험하기보다는 게으르게도 진부한 이미지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철학을 시작하기 전에 철학에 대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과 똑같이.


니체는 평생 지독하게 병을 앓았지만 그 자신이 앓은 병은 (건강과 마찬가지로) 신체의 특정한 상태일 뿐이었다. 그는 가장 심하게 앓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글을 썼다. 병고에도 ‘불구하고’ 쓴 것이 아니라 병을 ‘통해서’ 썼다. 니체는 무서운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에게서는 “건강한 사람의 눈이 보는, 사물을 둘러싸고 있는 저 보잘것없고 기만적인 매력들이 사라진다”(니체, 《아침놀》, 114절)고 말한 바 있다. 그러니까 니체에게 병은 하나의 관점인 것이다. 그는 병을 통해 건강한 상태에서는 감각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모든 것들을 새롭게 경험한다. 병을 건강의 결여로 이해하는 대신, 병이라는 조건 속에서 새로운 사유를 구성함으로써 자신의 건강을 발명해낸 것이다. 병은 그로 하여금 아포리즘이라는 글쓰기 형식을 실험하게 했으며, 모든 기존의 사회적 가치들로부터 떠날 수 있게 했다. 니체에게 글을 쓸 수 있는 최적의 상태 같은 것은 없다. 각각의 상태에서 구성할 수 있는 상이한 언어와 사유가 있을 뿐.


니체에게 건강이란 이미지도 아니고 병이나 고통이 없는 상태도 아니다. 그것은 주어진 조건 속에서 능동성을 발휘하는 일이다. 즉 건강이란 자신을 구성하는 타자들과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역량이라고 할 수 있다. 시시각각 변하는 환경과 더불어 스스로를 바꾸어내며 접속과 변이의 역량을 펼쳐내는 것. 생각해보자. 매번 달라지는 날씨에도 우리가 일정한 체온을 유지하는 것은 외부 기온의 변동에 맞추어 열을 발생시키고 방출하며 스스로를 바꾸어내는 과정을 통해서다. 이러한 접속과 변이의 역량이 없다면,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우호적이지 않은 무언가와 마주치는 순간 중심을 잃고 무너지게 될 것이다. 니체는 건강을 꿈꾸는 대신 병이라는 현재적 조건과 어떻게 다르게 관계 맺을 것인지를 고민했다.


우리의 정신 역시 마찬가지다. 몸이 그러하듯 정신 또한 외부와 능동적으로 관계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을 익숙한 해석의 틀에 우겨넣고 자기 자신의 유용성으로 세계를 재편하려드는 것, 혹은 어떠한 중심도 없이 남들이 좋다고 하는 가치를 그대로 따르는 것. 이는 편협함과 무지몽매함이기 이전에 병적인 상태의 표현이다.




글을 쓰고 공부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나의 병, 나의 치우침과 만나게 되는 순간이 있다. 글을 쓰면서 나는 지나치게 ‘안전함’을 추구하는 나의 모습과 마주하게 되었다. 텍스트를 적극적으로 해석하기보다는 빌려온 말들에 의지하고, 스스로 단호하게 결말짓기보다는 ‘단정하지 않는다’는 포즈로 비겁하게 얼버무린다. 그때마다 글은 동력을 잃어버리고 설명적으로 되어버리고 만다. 안전함에 대한 나의 치우침은 게으름으로 드러나는가 하면 소심함으로 드러나고, 또 권위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완전한’ 무엇을 하려는 욕망. 그런 것이 보장되지 않으면 한 걸음을 떼지 않으려는 인색함. 아마도 그 모든 것이 내 걸음걸이, 내 호흡, 내 표정으로, 그러니까 내 온몸으로 이미 표현되고 있을 것이다. 철학과는 무관할 것이라 생각했던 그 모든 것들로.



나비의 철학


이 철학 전체는 그것의 모든 우회로와 함께 어디로 가려 하는 것인가? 그것은 말하자면 하나의 지속적이고 강한 충동을 이성으로 번역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하는가? 이러한 충동이란 부드러운 태양, 밝고 생동하는 대기, 남쪽의 식물, 바다의 숨결, 고기와 계란과 과일로 이루어진 가벼운 식사, 뜨거운 음료수, 며칠 동안의 조용한 산책, 적은 말수, 드물지만 신중한 독서, 혼자 거주함, 청결하고 질박하며 거의 군인 같은 생활 습관, 요컨대 내 취미에 가장 적합하고 내게 가장 도움이 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충동이다. 근본적으로 철학은 개인이 건강해지는 법에 대한 본능이 아닐까? 나의 대기, 나의 높이, 나의 기후, 나름대로의 건강을 두뇌라는 우회로를 통해 추구하려는 본능이 아닐까? 다른 많은, 그리고 분명히 더욱 높은 숭고한 철학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나의 철학보다 더 음울하고 까다로운 철학들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아마 그것들도 모두 그러한 개인적인 충동들의 지성적인 우회로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그동안 나는 새로운 눈으로 나비 한 마리가 은밀하고 고독하게 바위로 된 해안가를 나는 것을 본다. 이 해안가에서는 훌륭한 많은 식물들이 자란다. 나비는 자신이 단지 하루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 자신의 허약한 날개에는 밤이 너무 차가울 것이라는 사실을 염려하지 않고 이리저리 날아다닌다. 아마 나비를 위해서도 하나의 철학이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것이 나의 철학이 아닐지라도.

― (프리드리히 니체, 《아침놀》, 553절, 책세상, p.413)


‘두뇌라는 우회로를 통해 건강을 추구하려는 본능’. 이것이 니체가 정의하는 철학이다. 우리의 두뇌는 무엇을 하는가? 우리의 신체와 마찬가지로 무언가를 번역하고 해석한다. 몸이 은 공기와 온도, 습도, 음식물 등등을 받아들이고 번역(=소화)함으로써 외부를 자기화하는 것처럼 우리의 정신은 욕망, 충동, 정서를 ‘이성으로 번역하는’ 일을 한다. 그러니까 우리의 두뇌, 정신은 자유의지를 지닌 주체나 신체로부터 독립된 의식 따위가 아니라 충동과 욕망의 번역자이며 번역의 결과물인 것이다.


니체는 하나의 건강법으로서 자신의 철학을 발명했다. ‘부드러운 태양, 밝고 생동하는 대기, 남쪽의 식물, 바다의 숨결, 고기와 계란과 과일로 이루어진 가벼운 식사, 뜨거운 음료수, 며칠 동안의 조용한 산책…’ 니체는 철학이 부여한 당위로부터 이런 것들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가장 적합하고 도움이 되는 것들에 대한 충동으로부터 철학을 구성해냈다. 즉 자신의 신체, 자신의 환경을 언어로 번역해낸 결과물이 철학인 것이다.


우리의 신체는 다양하고, 그만큼의 건강과 병이 존재한다. 나의 신체를 느끼는 것이 나이듯, 나의 병 역시 오직 나만 앓을 수 있는 것이다. 건강도 마찬가지다. 나의 건강은 니체의 건강과 같을 수 없다. 모두가 추구해야 할 건강 같은 건 없다. ‘보편적인 몸’, ‘보편적인 병’, ‘보편적인 건강’이 있을 수 없다면, ‘보편적 철학’ 또한 있을 수 없다.


니체는 ‘나비의 철학’을 상상한다. 아마도 나비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경험할 것이다. 나비가 느끼는 태양, 바람, 중력을 우리는 상상도 할 수 없다. 나비의 신체와 우리의 신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비가 사유를 한다면 전혀 다른 철학이 만들어질 것이다. 내게 필요한 것은 ‘나를 위한 건강’으로서의 ‘나의 철학’이다. 어떻게 건강해질 것인가? 우선 나의 몸에 대해 예민해지자. 습관과 익숙함 속에서는 내 몸을 진단할 수 없다. 시도하고 실험하자. 나의 대기, 나의 높이, 나의 기후를 발견하기 위해.



글 : 건화(고전비평공간 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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