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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정치1/몸과정치2

‘상생(相生)’하는 신체

by 북드라망 2018. 1. 4.


‘상생(相生)’하는 신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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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사람이 사는데 반드시 한 몸[一己]으로 생양(生養)할 수 없다.

금수들은 한 몸으로 생양한다고 해도 사람인 이상 그럴 수 없다.

반드시 인민이 서로 주고받지 않으면 생양할 수 없다.

그러므로 기꺼이 서로 도와가며 생활하는 것을 ‘상생양의 도’라 부른다.

─ 니시 아마네(西周), 「백학연환(百学連環)」

 

상생양의 도[相生養之道]


앞서 살펴보았듯이 society를 ‘인(仁)’으로 번역한 예는 사회를 전통적인 개념 속에서 상상하는 일단을 보여준다. 전통적인 인간관계로서 ‘사회적인 것’이 먼저 사유된 것은 충분히 이해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고전의 전거들이 원용이 되지만, 이것이 전통적 개념들을 그대로 가지고 온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전통적 개념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전유하면서 번역의 불가능성을 해결하려고 했다. 그런 점에서 니시 아마네(西周, 1829-1897)가 society를 ‘상생양의 도[相生養之道]’라고 번역한 것 역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상생양의 도’란 말은 니시 뿐만 아니라 쓰다 마미치(津田眞道), 간다 다카히라(神田孝平), 가토 히로유키(加藤弘之) 같은 일부 양학자 사이에서도 공통적으로 쓰이던 말이었다. 즉 ‘상생양의 도[相生養之道]’ 혹은 ‘상생양(相生養)’, ‘상제양(相済養)’이라는 말로 ‘사회란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모습이 보인다. 중요한 문장이므로 좀 길지만 인용해 보도록 하자.

Society(社)는 ‘상생양의 도[相生養之道]’로 번역한다. 소사이어티라는 말은 보통 사(社)라는 글자로 번역하지만, 당(党)이라는 글자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은 것 같다. 무릇 사람이 사는데 반드시 한 몸[一己]으로 생양(生養)할 수 없다. 금수들은 한 몸으로 생양한다고 해도 사람인 이상 그럴 수 없다. 반드시 인민이 서로 주고받지 않으면 생양할 수 없다. 그러므로 기꺼이 서로 도와가며 생활하는 것을 상생양의 도라 부른다. 소사이어티 즉 당이란 인민이 아직 나라를 만들기 이전의 상태로 향당(郷党)의 생(生)이라는 의미이다. 상생양의 도란 division of labour or profession, 즉 노동을 나누고 직업을 나눈다는 뜻으로, 인민은 각자 고립해 생활할 수 없기에 어떤 이는 밭을 갈고, 어떤 이는 옷을 짜고, 어떤 이는 기물을 제작하는 등 반드시 직업을 나누고 노동을 나눠 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서로 물건을 교환하여 사용해야 비로소 ‘생양의 도’가 성립한다. 또한 반드시 노동을 나누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한 사람이라도 자신이 노동하지 않으면서도 타인이 노동한 결과물을 사용할 수 있다면 이는 천도(天道)의 적(賊)이 된다. 위로는 천자(天子)로부터 아래로는 만민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직업에는 귀천이 있다 해도, 모두 노동을 나눠 살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비로소 국가라는 것이 성립한다. 사농공상은 물론 각각 직업이라는 것은 모두 소사이어티 안에 있는데, 시계의 조립처럼 한 점의 티끌은 해가 없지만 톱니바퀴 하나라도 빠지면 쓸모가 없어지는 것과 같다. 인민이 각자 그 직업과 노동을 나눠서 서로 주고받으며 살지 않으면 안 된다. 맹자가 말한 역공통사(易功通事)라는 것 또한 이 뜻이다.

─니시 아마네(西周), 「백학연환(百学連環)」, 大久保利謙 編, 『西周全集』第4卷, 239∼240쪽


이 글에는 몇 가지 주목해야 할 지점이 있다. 우선 첫째 ‘society’와 ‘상생양의 도’라는 두 개념어 사이에는 정확한 일대일의 번역관계를 이루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니시는 society를 흔히 생각하듯 눈에 보이는 어떤 집합이나 공적인 조직과 같은 실체가 아닌 인간관계의 추상적 원리인 ‘상생양하는 도(道)’로서 번역한다. society라는 말을 기존의 ‘사(社)’나 ‘당(党)’처럼 집합적 명사로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원리적 측면을 강조하며 상생양의 도, 즉 ‘늘 서로 도와가며 생활하는 도리’로 번역한 것이다. 즉 ‘상생양의 도’는 구체적인 인간관계를 넘어, 그 인간관계의 특징으로 형용화되어 채택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란 ‘한 몸’으로는 살 수 없는 존재로서 인간은 서로 ‘생양’하면서 집합적으로 살 수밖에 없다는 인식은 동양이나 서양 모두 일반적인 사고였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말한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앞서 인(仁)으로 society를 번역하고자 했던 고민은 이러한 집합적 존재로서의 삶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society를 ‘도’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것은 특이한 사유라 할 수 있다. 

 


통공역사(通功易事)


두 번째로 니시가 society를 ‘통공역사(通功易事)’와 같은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원래 이 말은 『맹자』 등문공편에 나오는 말이다. 사(士)가 아무 일 없이 얻어먹고 다니는 것이 옳지 않은 것 아니냐고 제자 팽갱(彭更)이 묻자 맹자가 다음과 같이 대답하는 대목에서 나온다.

자네가 만일 통공역사(通功易事)를 해서 남는 것을 가지고 모자란 것을 보충하지 않는다면, 농부는 곡식이 남아돌아가고, 여인들에게는 천이 남아돌아갈 것일세. 그러나 만일 자네가 이를 유통시킨다면 목수와 수레를 만드는 사람들이 모두 자네에게서 얻어먹을 수 있을 것이네. 여기에 어떤 사람이 있어 집에 들어와서는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는 공경하며, 선왕의 도를 잘 지켜서, 후세의 배우는 사람을 기다리지만, 자네로부터 얻어먹을 수 없으니, 자네는 어찌 목수와 수레를 만드는 사람들은 높이면서 인의(仁義)를 행하는 사람은 경시하는가?”

​─『맹자(孟子)』 「등문공하(滕文公下)」

 

이는 허행(許行) 등 신농(神農)씨의 도를 받들어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이상으로 삼는 농가(農家) 사상에 대한 비판으로, ‘통공역사(通功易事)’란 공적(功績)을 유통케 하고 결과물을 서로 교역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통공역사를 가지고 와서 인민이 각자 그 업과 일을 나눠 더불어 힘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으로 풀어 ‘사회적인 것’과 동일한 것으로 파악한다.

니시는 society란 무엇인가를 이해할 때 먼저 떠올랐던 것은 상생양이나 통공역사와 같은 전통적 어휘들이었다. 서구적 교육뿐만 아니라 전통적 교육을 받았던 니시에게 이러한 고전의 경구들은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는 익숙한 도구였다. 그렇다면 ‘상생양’이라는 말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상생양’이라는 말은 멀게는 논어나 순자, 혹은 한유의 『원도(原道)』나 대진의 『중용보주』 등에서도 쓰이던 말이었다. 그리고 가깝게는 에도 시대의 유학자 오규 소라이(荻生徂徠)의 『변도(弁道)』에서도 등장한다.

 

상친(相親)하고, 상애(相愛)하고, 상생(相生)하고, 상보(相輔)하고, 상양(相養)하고, 상광(相匡)하고, 상구(相救)하는 것은 사람의 성(性)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도는 혼자서는 될 수 없다. 반드시 억만 사람이 함께 해야만 이야기될 수 있다. 지금 천하를 보건대, 누가 고립해 무리 짓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농공상은 서로 도우며 먹는 자이다. 그렇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 도적이라 해도 반드시 당류(党類)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억만 사람을 아울러, 그 친애생양의 성(親愛生養の性)을 따르게 하는 것이 선왕의 도이다

─오규 소라이(荻生徂徠), 「변도(弁道)」, 『日本思想大系』 36,17∼18쪽

니시는 젊은 시절부터 오규 소라이의 사상에 빠져있었다. 사람의 도는 혼자서는 될 수 없기 때문에, 서로 아까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키우고, 서로 도와주고, 서로 기르고, 서로 바로잡고, 서로 구하는 것 속에서 함께 이룰 수 있다. 이처럼 니시가 사용하는 society에 대한 이해는 전통적 유학 발상에 가까웠다. 그렇지만 ‘역공통사’가 서양의 society 개념과 같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면 그동안 동양에는 society 개념이 없었다고 한 니시 본인의 발언과 논리상으로 배치된다. 니시는 사회라는 개념이 동양에서는 없었던 것임을 말한다.

인간의 본무(本務)는 상생양의 도(相生養の道)로서, 사람이란 어떻게 해서도 혼자서는 생양할 수 없다. 금수의 무리는 소시알(social), 즉 상친(相親)하는 도가 없다. 따라서 교합할 때에만 서로 모이며 혹은 해후하지만, 다시 흩어져 각자 생양한다. 물론 금수라 해도 원앙과 같이 ‘소시알(ソシアル)’한 것도 있다. 하지만 사람이란 ‘소시알’하지 않으면 생양할 수 없다. 한유(漢儒)에서는 이와 같은 도가 있음을 지금까지 한 번도 논한 바 없었다.

─니시 아마네,「백학연환」, 大久保利謙 編 『西周全集』제4권, 161쪽

앞서 이와쿠라 사절단의 기록에서도 보았듯이 당시 지식인들은 society를 그동안 동양에서는 없었던 개념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동양과 서양의 큰 차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한유(漢儒)에서는 이와 같은 도가 있음을 지금까지 한 번도 논한 바 없었다”고 니시가 말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society가 ‘역공통사’와 유사한 개념이라는 니시의 발언과는 배치되는 것이 아닌가. 이미 맹자도 society를 이야기했던 것 아닌가. 하지만 니시가 맹자식의 전통적 논의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앞서 인용한 문장으로 돌아가보자. 여기서 맹자가 말한 바의 핵심은 단순히 일을 나누고, 함께 한다는 교역을 강조하는 부분이 아니었다. 오히려 분업에서 무의미한 듯이 보일 수 있는 ‘인의’를 강조하는 부분이야말로 맹자가 말하려 했던 핵심이었다.

이처럼 니시는 맹자의 강조점을 비틀어 ‘선왕의 도’에 대한 강조라는 부분은 빼버리고, 이를 마치 근대적인 교환관계에 대한 강조로 읽어냄으로써 사회와 비슷한 이미지로 차용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니시에게 society는 사회분업의 이미지, ‘division of labour or profession’로 그려지게 된다. 인간이 고립해 살 수 없기 때문에 공동적 삶이 그 본성으로 정해져 있다는 발상은 유학적 전통이나 서양 정치사상의 전통에서 동시에 볼 수 있는 것이다. 니시는 이를 가교로 서로 다른 사람들이 호환 불가능한 존재가치를 갖고 서로 협력하는 이상사회의 이미지로서 society를 그려낸다.

시계로서의 사회


세 번째로 니시가 들고 있는 ‘시계’의 비유다. 니시는 톱니바퀴 하나라도 빠지면 쓸모 없어지는 시계에 사회를 비유한다. 이 속에서 인민은 각자 그 직업과 노동을 나눠서 서로 주고받으며 살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인민과 군주의 관계는 시계의 부품이 각각의 역할을 분업하듯이 기능상 대등함과 상호적 관계를 특징으로 한다. 여기서 군주는 사회를 만들어내는 외재적 주체가 아니라 시계=사회의 일부분을 구성하는 분자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니시는 심지어 만약 한 사람이라도 자신이 노동하지 않으면서도 타인이 노동한 결과물을 사용할 수 있다면 이는 ‘천도(天道)의 적(賊)’이라고까지 말한다.


이것이 니시가 ‘생양(生養)’이라는 말에 서로 구성한다는 의미에서 ‘상(相)’자를 추가해 ‘상생양’이란 말을 만든 이유였다. 즉 소라이와 달리 ‘선왕의 도’라는 초월적인 행위주체를 설정하는 대신, 이는 생양하는 존재들끼리의 상호성에 의해 메워진다. 이는 그가 참고했을 법한 순자 식의 군(群)에 대한 발상과도 반대된다.

도란 무엇인가? 임금의 도를 말한다. 임금이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을 잘 돌보는 것[能群]을 말한다. 많은 사람들을 생양(生養)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사람들이 잘 살도록 보양하는 것이며, 사람들을 잘 다스리는 것[班治]이며, 사람들을 잘 등용하는 것[顯設]이며, 사람들에게 제대로 신분에 맞는 옷을 입게 해주는 것[藩飾]이다.

─『순자』, 「군도(君道)」 

순자에게도 ‘생양(生養)’이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그는 생양의 네 가지 조건을 이야기한다. 즉, 사람들을 잘 살도록 보양해 주는 사람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친근해지며, 사람들을 잘 다스리는 사람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안심하게 되며, 사람들을 잘 등용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즐겁게 여기며, 사람들에게 제대로 신분에 맞는 옷을 입게 해주는 사람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영화롭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생양할 수 있게 만드는 주체는 임금이다. 순자는 능군(能群), 즉 많은 사람들을 잘 돌보는 것을 임금의 도와 연결시킨다.

힘은 소만 못하고 달리기는 말만 못한데, 소와 말은 어째서 사람에게 부림을 받는가? 그것은 사람들은 여럿이 힘을 합쳐 모여 살 수 있으나[能群], 소나 말은 여럿이 힘을 합쳐 모여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어떻게 여럿이 힘을 합쳐 모여 살 수 있는가? 그것은 분별[分]이 있기 때문이다. 그 분별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그것은 의로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로움으로써 사람들을 분별 지으면 화합하고, 화합하면 하나로 뭉치고, 하나로 뭉치면 힘이 많아지고, 힘이 많으면 강해지고, 강하면 만물을 이겨낼 수가 있다. … 임금이란 여럿이 모여 잘 살도록 해주는 사람이다[君者 善群也]. 여럿이 모여 사는 방법이 합당하면 만물이 모두 그들에게 합당케 되고, 여러 가지 가축들이 모두 나름대로 잘 자라게 될 것이며, 여러 생물도 모두 그들의 목숨대로 살게 될 것이다.

─『순자』, 「왕제(王制)」

사람들은 무리[群]를 이루는 성질이 있는데 임금이란 이러한 무리를 잘 이루도록 하는 자로, 순자에 따르면 무리를 이루기 위해서는 분별[分]의 도가 있어야 한다. 이는 니시가 사회를 이뤄 서로 생양케 하는 것을 ‘도’로 파악한 것과는 다르다. 니시에게 ‘사회적인 것’이란 인민이 개인으로 고립되어 생활할 수 없기 때문에 각자 일과 업을 나누며 상호 물건을 교환하고 사용하는 관계에 놓이게 된다. 수평적 상호의존관계로서 교환관계가 ‘상생양의 도’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때 상생양하는 목적은 개인의 신체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점에서 홉스식의 가정과 유사하지만 결론은 전혀 다르다. 서로 생양한다는 것의 이미지 속에는 스스로 돕고, 서로를 돕는 자조와 상생의 집합적 신체, 공공적 신체가 숨어있다. 즉 분업이란 단순히 생존이나 효율성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연대의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다.




다른 한편 군주와 같은 외재적 존재의 역할이 배제된다는 점에서 ‘상(相)’-생양하는 관계는 인격적 종속과 의존관계를 매개로 전체 세상과 연결되던 관계와 달리 수평적이고 비인격적인 평등성을 바탕으로 한다. 즉 별다른 매개 없이 사회 전체와 ‘직접 접속’(direct access)하는 개인들의 연합을 상상하게 하는 것이다. 이제 구성원들 공동의 창건행위로부터 사회가 창출되는 것이다. 성인으로서 초월적 군주가 협력적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유교적 사회상이라면 새로운 ‘사회적인 것’의 이미지는 ‘위로는 천자(天子)로부터 아래로는 만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각자의 일과 업을 나누어 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천자 역시도 하나의 부품과 같이 편입되어, 각자가 대등하면서도 다른 역할을 상호 대체할 수 없는 역할을 담당해 원만한 조화를 그리는 공동적 생의 형태로 ‘상생양의 도’를 구상하고 있다. 이 점에서 ‘상생양의 도’는 전통적 개념을 쓰면서도 그 원뜻과 달리 오히려 근대적 사회 개념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

 

사회의 역어로서 상생양의 도가 경제적 분업의 이미지를 갖고 등장하게 된 것에서 보듯이 근대적 사회 개념은 경제와 분리해 생각할 수 없는 문제였다. 앞서 구미의 기록에서 사회를 자신의 ‘이욕’을 지키기 위한 경제적 관점에 서있었던 것에서 보았던 것처럼 당시 사회는 정치적 개념이라기보다 경제학적 개념이었다. 즉 사회를 구성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행복과 사회전체의 ‘공공의 복지’란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자유로운 사회생활의 자율성 아래에서 조화된다. 이는 분명 니시가 네덜란드 유학 당시 배웠던 피셰링의 경제학의 영향이 클 것이다. 니시는 ‘사회적인 것’을 서로 돕고 살 수밖에 없는 존재론적 가치이자 명(命) 또는 도(道)로 파악하면서도 개인들의 분업 관계 속에서 교환관계를 통해 하나의 집합을 이루는 것으로 상정한다. 이는 유학적 발상과 서구적 society 개념의 혼합이었다. 

 

물론 니시의 ‘상생양의 도’라는 개념은 소라이의 영향 하에 유학적 사유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핵심적 논리구조에서는 차이를 보인다. 소라이에게 도는 선왕(先王)의 존재, 즉 서로 사랑하고 서로 아끼는[相生, 相養] 본래적인 성(性)을 이룰 수 있게 해주는 존재로서 성인=선왕이라는 주체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소라이의 논리가 단지 초월적 존재로서의 군주만을 강조한 것도 아니었다. 앞에서 본 인용문대로 서로 사랑하고 서로 아끼는 것[相生]이 인간의 본성인데 이때 각각은 공동체 속에서 그 나름의 기능을 수행하여 도에 참여한다. 소라이는 어떠한 개인이라도 이 도에 참여할 수 있고, 참여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소라이는 유가의 논리에서는 성인만이 도를 온전히 파악하고 실현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라도 정치적 공동체에서 그 자신의 부분적 역할을 담당함을 통해 도에 부분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처럼 도에 부분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소라이는 ‘덕(德)’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소라이에게 ‘도(道)’란 각자가 분업을 통해 공동체, 즉 공동의 생활에 기여함으로써 도달하는 삶의 궁극적 가치라는 점에서 니시의 견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도는 ‘선왕’=‘성인’만이 알 수 있는 바로 일반 백성들이 전체상을 파악할 수는 없지만, 백성들은 각자 자신이 할 수 있는 바를 충실히 수행하는 덕의 차원에서 도의 일부분에 참여한다. 이는 니시가 사회적인 것의 번역어로 ‘상생양의 도’를 골랐을 때 ‘도’라는 말이 쓰인 이유였을 것이다. ‘상생양의 도’에서 역시 개별적 분업을 통해 공동체에 기여하는 ‘공동체적 기능주의’라는 관점에서 보편적 도를 획득하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이는 단순히 경제적인 이유만이 아니라 보편적 ‘도’의 참여이고, 이것이 니시가 전통적인 용어로서 사회적인 것을 설명하는 이유였을 것이다.  

이처럼 society의 번역어로 선택된 ‘상생양의 도’라는 말은 그 안에 많은 논의를 함축하고 있다. 즉 경제적 교환관계를 통해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의 사회성을 표현하기 위해 ‘생양(生養)’이라는 전통적인 어휘에, 어떤 초월적 주체가 아닌 상호 주체성의 의미로서의 ‘상(相)’이라는 접두어를 붙인 후, 새로운 인간관계의 원리를 의미하는 ‘도(道)’라는 말을 붙여 ‘상(相)-생양(生養)의 도(道)’라는 말이 만들어진 것이다. 전통적인 논리 속에서 서로 돕고 서로 기르는 인간적 속성을 바탕으로 집합적 신체로서의 교환관계 원리라는 ‘사회적인 것’이 새롭게 상상된다.

※ 덧: 이 글은 키무라 나오에(木村直恵)의 논의를 기본으로 합니다.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개념과 소통』 2017년 여름 19호에 실렸으니 각주나 참고문헌은 그 글을 참고해 주세요.


글_김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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