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필립 K. 딕,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내가 진짜 인간이고, 너는 아니야?

필립 K. 딕,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 내가 진짜 인간이고, 너는 아니야?



시선에 대해 생각한다. 어머니가 아이에게 보내는 따뜻한 시선, 길가에 카악 침 뱉는 자를 흘겨보는 차가운 시선, 퇴근길 정체 속에 잽싸게 끼어들기 하는 얌체를 향한 고까운 시선, 그 얌체에 대항해 끈질기게 차선을 방어하는 앞 차를 향한 경탄의 시선. ‘눈으로만 보세요’ 표지판이 붙은 마블 캐릭터 등신대 피규어를 향한 아이들의 간절한 시선, ‘덕질’ 하는 연예인을 향한 우리들의 열망어린 시선. 

그리고, 또. 

노숙자를 향한 냉랭한 시선, 동성애자를 바라보는 혐오의 시선, 피부색 어두운 이주노동자들을 향한 깔보는 시선, 장애인을 향한 공포의 시선, 조선족을 향한 배척의 시선. 종합하자면, 다른 사람들을 한층 깔아뭉개는 우월한 시선. 




시선은 어떤 경우에도 위법은 아니다. 전 청와대 민정수석 우병우 씨가 기자에게 레이저 시선을 쏘자 그 재수없음이 만고에 회자되었지만, 시선이 되먹지 못하더라는 이유로 그를 기소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주목할 바는 바로 그 ‘회자되었음’이다. 불법도 위법도 아닌 사소한 신체의 운용이 아홉시 뉴스의 한 꼭지를 차지할 수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시사하는가. 우리는 시선이 권력을 담을 수 있음을 안다. TPO(시간Time, 장소Place, 경우Occasion)에 맞지 않는 시선을 보내거나 피하거나 맞받아 쏨으로써 위계를 전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 별 거 아닌 거 같지만, 별 거라는 사실을 안다. ‘눈을 왜 그렇게 떠’라는 말이 포함된 어느 연예인들간 사적 대화는 신문의 가십란을 통통하게 살찌워주고, 길거리나 술집에서는 생판 모르는 사람들끼리 ‘뭘 꼴아봐?’라며 시비가 붙는다. 그럴 때 시선은 생업을 흔들고, 삶과 죽음을 가르는 문제로까지 비화된다.  


그래서 나는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 안드로이드 로이 바티가 제 창조주를 대면하는 장면이 좋았다. 그는 제게 ‘사물’의 운명을 부여한 안드로이드 제조사 타이렐 사의 회장을 살해하는데, 총을 쏘거나, 칼로 찌르거나, 완력으로 목을 부러뜨리는 방법을 택하지 않는다. 대신 두 손을 내밀어, 마주한 얼굴을 비통하게 어루만지다가, 천천히 두 눈을 짓이겨버린다. 엄지손가락으로 그 오만한 눈알을 터뜨려버릴 때, 그것은 단순한 복수를 넘어 세상을 향한 통렬한 시위가 된다. 인격과 자의식을 갖춘 한 존재를 어엿한 인간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면, 너의 그 방자한 시선을 영원히 거두라!  

  

『블레이드 러너』는, 익히 알려진 대로, 필립 K. 딕의 SF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를 각색한 영화다. 원작에서는 로이 바티가 타이렐 사의 회장을 만나지도 않지만, 영화의 저 장면은 소설을 읽는 내내 내가 느꼈던 문제의식을 훌륭히 압축해내고 있었다. 물론 이 소설은 문명과 인간성의 갈등에 관한 작품일지도 모른다. 기계와 인간의 경계에 관한 질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내게 이것은 부당하게 설정된 위계와 그릇된 시선에 관한 이야기였다. 게으른 잣대에 의해 우열을 가름 당하고 비뚤어진 시선 앞에 맨몸으로 선, 모든 억울한 ‘사람’들의 이야기. 




주인공인 릭 데카드는 안드로이드 현상금 사냥꾼이다. 인간사회로 숨어든 안드로이드들을 찾아내 ‘퇴역시키는’ 일을 한다. 말이 좋아 퇴역이지, 안드로이드 입장에서야 무참한 도륙에 지나지 않는다. 마주한 상대방의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정중한 대화를 나누다가, 안드로이드임을 눈치채면 즉시 총을 쏘아 목숨을 끊어놓는 식이니 말이다. 얼핏 극악무도한 백정질 같지만, 실상은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작업이다. 안드로이드를 판별해내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만약에 전문성이 없다면, 안드로이드라고 여겨 ‘퇴역’ 시키고 보니 사람을 살해했다는 식의 불상사가 초래될 수도 있다. 

 

이 시대의 안드로이드는 삐걱거리며 부자연스럽게 거동하는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 아니다. 피가 흐르고 땀이 배어나고 알코올에 취하는 신체적 특성은 물론, 독자적인 사고능력과 희노애락의 풍부한 감정선, 살고자 하는 의지까지 보통 사람과 다를 바가 없는, 인조인간들이다. 인간 사회는 차갑게 ‘인조’에 방점을 찍지만, 안드로이드 스스로는 ‘인간’에 방점을 찍고 있는 게 분명하다. 차별적 처우에 반기를 들고 달아나, 인간사회로 숨어들어 인간들 틈에 섞여 살아가는 안드로이드가 하나의 사회문제로 대두될 만큼. 


안드로이드와 사람을 구분 짓는 기준은 단 하나, 공감능력이다. 공감능력은 안드로이드가 갖지지 못하는 자질이다. 릭 데카드는 보이드-캄프 척도라는 도구를 써서 이를 확인한다. 볼에 전극을 붙이고 차근차근 질문을 던지며 동공의 확장, 기계 눈금의 미묘한 떨림을 복합적으로 해석하는 식이다. 지극히 주관적이고 오차가 많을 것 같은 검사법이지만 어쨌든, 릭 데카드의 판정은 언제나 확실하다. 그의 기계장치, 그의 시선 앞에 선 인조인간은 한순간에 사물로, 물건으로, 사냥감으로 전락한다. 사랑을 느끼고 공포에 질리고 남들처럼 성실히 세금내며 이 사회의 일원으로 삶을 구가하고 싶어 하지만, 오직 공감능력이 보통 사람과 같지 않다는 이유로. 


소설은 굉장히 재미있지만, 읽고 나면 마음에 침울함이 남는다. 릭 데카드 역시 줄거리상 악역인 여섯 대의 도망자 안드로이드를 모두 ‘퇴역’시키는 데 성공하지만, 회의와 허무에 사로잡혀 허덕인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마음이 냉담하다. 내내 주인공을 응원하며 달려왔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자기혐오가 당연한 죗값으로 보이는 것이다. 꾸역꾸역 이 ‘해피엔딩’까지 온 건 진심으로는 동의할 수 없는 허약한 전제 위에서였다. 대체, 누가 악역이란 말인가. ‘공감능력’이라는 걸 진짜 인간의 조건으로 삼는다고? 장난해? 그건 터무니없이 취약한 기준이었다. 사람의 성격, 환경과 경험에 따라 얼마든지 격차가 생기는 덕목이라는 건 작중인물들조차 인정하는 부분이다. 이 소설의 도입부에는 주인공과 아내가 호르몬 조합 장치를 사용해 간단히 자기 기분을 조절하는 장면이 나온다. 기계를 사용해서 기분을 조작하는 행태는 과연 ‘진짜 인간’다운가? 자연스러운가? 오히려 그게 더 안드로이드적이지 않은가? ‘인조’적이지 않냐는 말이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인간과 안드로이드의 경계를 이미 모호할대로 모호하게 허물어뜨린 상태에서 이야기를 출발시키고, 그토록 얄팍한 한끝 차이로 타자를 학대하는 것의 꺼림칙함을 성공적으로 우리 마음에 안착시킨다. 그리고 그건 미래 세계의 안드로이드에만 국한할 이야기가 아니다. 




무해한 타자들을 향하는 배척의 시선에는 각자의 보이드-캄프 척도가 은밀하게 깃들어 있다. 소설 속에서 측량하는 것은 공감능력이었지만, 현실세계에서 그것은 피부색이거나, 장애의 유무거나, 타고난 성별이나 성적지향 같은 것으로 그때그때 바뀐다. 그리고 그런 시선들은 릭 데카드가, 경찰서장이, 그 사회 보통의 인간들이 안드로이드를 쳐다보는 시선과 하등 다르지 않다. 그들은 눈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공감능력이 있는/피부색이 이런/장애가 없는/이성애자인/남성인/중국인이 아닌/직업이 좋은, 내가 진짜 궁극의 인간이고, 너는 아니야.’   


그러나 이 암담한 풍경에 희망의 빛을 비추는 것이 다시 공감능력이라는 것이 절묘하다. 릭 데카드는 안드로이드를 추적하는 일련의 과정 속에 큰 변화를 겪는다. 진짜 인간다운 그 알량한 공감능력이 가엾은 ‘가짜’ 인간들을 향하게 되자, 그는 영영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어버렸다. 진짜와 가짜, 그 둘의 간극이 얼마나 허약하고 보잘것없는지 체감시켜준 것은 다른 어떤 피상적인 척도도 아닌, 그의 삶 안에서 생생하게 작동한 공감과 이해였다. 


아마 그는 더 이상 진짜 동물을 욕심내지 않을 것이다. 우연히 손에 넣은 전기두꺼비라도, 정성을 다해 키울 것이다. 누군가가 얼마 만큼 진짜이고 얼마 만큼 가짜인지 판별해내는 일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눈빛은 중립적일 것이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고, 우위를 주장하거나 열등함을 인정하지도 않고, 비하하지도 숭배하지도 않으면서 있는 그대로 무감히 바라볼 것이다. 아마도 그건, 서로에게 무해한 미지의 타인들이 서로에게 바라는 딱 그런 시선일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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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이 이렇게 흘러간 데에는 연유가 있습니다. 


신데렐라가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에 놀라 달려가다가 유리구두를 떨어뜨린 건 순전히 옷차림 때문이었죠. 치맛단이 풍성하게 퍼져 발치까지 길게 늘어지는 화려한 드레스는 전력질주에 알맞은 차림새가 아니거든요. 무도회용 유리 하이힐을 내주던 요정 대모님은 이 아이가 이걸 신고 장애물 달리기를 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놈의 신발은 저절로 벗겨지기까지 한 걸 보니 아마, 꽉 조여맬 신발끈도 안 달린 주제에 사이즈조차 제대로 맞지 않았던 모양이에요.  

 

무도회에 맞는 차림이 따로 있듯이, 달리기 등의 운동에도 적당한 복장이 따로 있습니다. 그런 옷은 펄럭이거나 휘감기거나 마찰을 일으켜 움직임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되며, 근력운동을 할 경우 자세나 각도, 근육의 움직임을 시시각각 육안으로 확인하기 용이하도록 몸 선이 드러나는 것이 좋아요. 신발에 대해서라면, 언제든 끈을 단단히 조여 신는 게 중요하며, 어떤 경우라도 유리로 만들어진 것은 안 신느니만 못하겠지요.  


저는 동네 헬스클럽을 다닙니다. 헬스클럽은 궁전이 아니고, 저는 왕자님과 춤을 추러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달리기와 근력운동을 하기에 가장 좋게 만들어진 운동복을 입어요. 헐렁이지도 펄럭이지도 않고, 드레시한 구석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신축성 좋고 기능적인 피트니스 웨어죠. 노출은 거의 없지만, 몸에 딱 맞아 선이 드러나는 그런 차림입니다. 


그리고는 꼭, 갈 때마다 불쾌한 사람들과 마주치게 됩니다. 편의상 그들을 눈알맨이라고 부를게요. 




얼핏 그들은 헬스클럽에 나와 열심히 건강관리를 하는 흔한 옆집 아저씨, 평범한 초로의 남성들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평범하고 무해한’ 뭇 사람들과 구분되는 포인트가 하나 있으니 그것은 물론, 눈알이죠. 보통 사람들에게 눈이 두 개 달린 것처럼, 애석하게도 그들 역시 얼굴 상단 삼분의 일 선상에, 하나로도 과분할 눈알이 두 개 꽉 채워서 콕콕 박혀있습니다. 눈알맨들은 물리적으로 남을 해코지 하는 사람들은 아니에요. 그들은, 그저, 가진 눈알을 매우 무례하게 함부로 굴려댈 뿐이지요. 그들은 마치 고깃덩어리라도 되는 것처럼, 아주 빤히, 끈질기게, 타인의 몸을 훑어봅니다. 불쾌해하는 기색으로 눈을 마주쳐도 피하지도 않아요. 남자와 달리 가슴이 불룩하다는 이유로, 숏팬츠 아래 허벅지 라인이 드러나는 레깅스를 입었다는 이유로, 저는 길가에 놓여있는 사물, 인격이 박탈된 물건이 된 기분을 느껴야 합니다. 


물론 저도 이성의 몸을 보는 걸 좋아해요. 그렇지만 그렇게 대놓고 쳐다보지 않아요. 몸에 맞지 않는 삼색추리닝을 입는 바람에 아랫도리가 볼썽사납게 툭 불거진 사람들도 종종 마주치지만, 무안해 할까봐 재빨리 시선을 돌립니다. 몸을 보든 얼굴을 보든 국부에 눈이 가 닿든, 당사자가 불쾌하지 않게끔 시선을 단속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당연한 예의이고 존중이니까요. 그런데 눈알맨들은 그걸 안 해요. 신체를 빤히 쳐다보는 행태가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할지 어떨지 전혀 개의치 않는 거예요. 저는 그 시선에서 그들 스스로 설정하고 있는 위계를 느낍니다. ‘나는 남자다. 연장자다. 그래서 내가 더 우월하고, 내가 더 ‘진짜 사람’에 가깝다.‘ 


제가 눈알맨들의 회사 회장님이었다면 감히 그렇게 쳐다보지 못했겠죠. 집주인이기만 해도 못 그랬을 거라는 걸 충분히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 뻔뻔한 시선은 상대가 대등한 인격체임을 인정하지 않는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화를 내며 안드로이드 로이 바티의 엄지손가락을 떠올리곤 하는 거죠. 실소도 나오지 않을 이유로 우위를 점하고 방약무도하게 구는 자를 붙들어 그 알량한 두 눈알을 콱 터뜨려버리는 전복을. 자, ‘진짜 인간’ 따위, 엿이나 먹으렴. 


글_윰(SF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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