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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베짱이의역습

썸은 이제 그만. 태양처럼 사랑하라!

by 북드라망 2017. 12. 19.

은 이제 그만. 태양처럼 사랑하라!




‘썸’, 나의 쿨한 사랑법


나는 공부하는 게 좋다. 음악 듣는 것도 좋아하고, 기타 치는 것도 좋아하고, 그림 그리는 것도 좋아하고, 영화 보는 것도 좋아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책 읽고 글 쓰는 게 가장 좋다. 게다가 지금 나에게는 공부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 갖추어져 있다. 나의 일과는 공부뿐이다. 돌봐야 할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돈을 벌어야 하는 것도 아니며, 달리 하고 싶은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나는 좋아하는 일을 앞에 두고도 주변만 빙빙 돈다. 공부도 그렇다. 사실 나는 공부에 나를 온전히 내어주지 않고 있다. 매주 세미나를 하고 강의를 듣지만, 딱히 절실하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약간 거리를 둔 채 ‘적당히’ 훑고 지나간다는 느낌. 그래, 아직 공부가 몸에 익숙해지지 못한 탓일 거야. 그러다 문득, ‘혹시 나는 공부뿐만이 아니라 모든 것과의 관계에서 이러한 패턴을 반복해온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일천한 내 연애사를 돌이켜봐도 그렇다. 생각해보면 나는 항상 마음을 주는 데 인색했다. 대부분의 경우 내가 마음을 더 많이 주는 쪽인 양 행동했지만, 한편에서는 언제든 그것을 거두어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관계가 끝나도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았다. 무엇을 하든 마찬가지였다. 그림을 그리든 기타를 치든 ‘이건 단지 취미일 뿐’이라는 점을 스스로에게 분명히 했다. 알바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여기에 돈을 벌기 위해 잠깐 왔을 뿐이야’라는 말을 끊임없이 되뇌었다. 어디서 뭘 하든, 스스로를 ‘임시로 머무는 사람’ 정도로 간주했을 뿐이다.


말하자면 나는 세계와 ‘썸’을 타고 있었던 것이다. ‘썸’은 나와 내 또래들이 가장 선호하는 관계의 형태다. 긴장감과 설렘을 동시에 느낄 수 있지만 질척거리는 감정의 충돌은 겪을 필요는 없는 편리한 관계. ‘썸’을 즐기면서 나는 그걸 정형화된 관계에 대한 저항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결혼이라는 제도에 포섭되고 싶지 않다. ‘남자친구’, ‘여자친구’라는 식의 호칭이 만들어내는 독점적 관계는 진부하다. 그저 거기까지만, 딱 그 정도만. 우리는 이런 우리의 태도를 ‘쿨하다’는 말로 정당화한다. 지저분한 꼴을 볼 일도 없고, 다칠 걱정도 없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는 너무나 공허하다. 세계와 ‘썸’을 타는 동안은 사실 무엇을 겪어도 겪은 것 같지 않고, 무엇을 느껴도 느낀 것 같지 않다. 그러다 이런 생각이 드는 거다. 어쩌면 ‘썸’을 즐기는 건 관계가 전면화되었을 때 겪어야 할 귀찮은 것들을 회피하고자 하는 태도가 아니었을까? 혹은 익숙한 관계에서 오는 권태를 돌파하지 못하고 수동적으로 새로운 자극을 구하는 무력함의 표현은 아니었을까? ‘썸’이라는 말은 우리가 세계와 관계하는 방식의 인색함을 표현하는 단어였는지도 모르겠다.


일이나 공부에 대해서도 나는 일종의 ‘아마추어리즘’을 표방했다. 뭐든 적당히 즐거운 정도로만 하는 것. 악기도 좀 다루고, 그림도 좀 그리고, 때로는 어려운 책도 좀 읽으면서 경쾌하게 삶을 주유하고 싶었다. 그럴 때만, 다시 말해 한 가지 분야나 특정한 목적 같은 것에 매몰되지 않고 매사를 일종의 ‘취미’로 다룰 수 있을 때라야 여유 있고 매력적인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전혀 다른 종류의 위기감을 느낀다. 혹시 나는 이대로 세계와, 나 자신과 끊임없이 썸만 타다 끝나고 마는 게 아닐까?



달의 썸타기


나는 한동안 ‘무기력’이나 ‘냉소’ 같은 말에 붙들려 있었다. 이런 말들은 나를, 그리고 내 또래들을 잘 설명해주는 것 같았다. 어떤 신념이나 목표에 매진하거나 순수한 열정으로 무언가에 몰두하기에 우리는 너무나 무기력하고 냉소적이다... 우리는 믿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다... 우리는 뭔가를 시도하고 좌절할 기회를 박탈당한 것이다... 그러므로 깨작거리면서 온갖 것들과 썸이나 타는 게 우리의 운명일지도 모르겠다... 대충 이런 식의 진부한 숙명론적 자기비하에 빠져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자기비하에는 강한 매혹이 숨어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의 의욕 없음과 무기력에는 기이한 방식의 자기도취가 작동하고 있었다. 나는 남들이 안달복달하는 ‘미래’, ‘성공’, ‘삶’ 따위에 대한 나의 무신경함을 전시했던 것이다. 짐짓 어른스러운 얼굴을 하고는, 무엇하러 그렇게 사소한 일에 애를 쓰고 얼굴을 붉히느냐고 묻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그러니까 나는, 어떤 일에도 나 자신을 온전히 던지지는 않음으로써, 즉 절반쯤만 의욕하는 방식으로 나를 ‘보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절반쯤’만 의욕한다는 것은 의욕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요컨대, 나는 ‘의욕하지 않는 나’를 의욕하고 있었다.


어쩌라고?



“너희 또한 이 대지와 지상의 것을 사랑하고 있다. 나 너희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너희가 하고 있는 사랑 속에는 수치심이 있고 좋지 않은 양심이란 것이 있다. 달을 닮아 그런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의 정신을 설득하여 지상의 것을 경멸하도록 해왔지만 너희 오장육부까지 설득하지는 못한 것이다. 너희에게 있어 가장 강한 것이 바로 그것들이니!

그리하여 너희의 정신은 너희의 오장육부의 뜻에 따르면서도 수치스러워 하고, 그 수치심에서 뒷길로, 거짓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때묻지 않은 앎에 대하여’,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책세상, p.208


니체는 ‘순수한 인식’을 추구하는 학자들을 ‘달’에 비유한다. 온몸을 던져 대지를 샅샅이 비추는 태양의 무구한 사랑이 아닌, 대지의 아름다움을 눈길로써만 더듬는 달의 음흉한 사랑. 달은 대지를 사랑하는 자신의 욕망과 충동을 애써 감추고 무욕(無欲)과 무사심(無私心)을 가장하는 눈길로 세계를 ‘관조’한다. 이들 ‘때묻지 않은 앎’을 추구하는 자들은, 달이 그러하듯 욕망하면서도 자신의 욕망을 부정한다. 때문에 그들의 욕망에는 수치심이 깃든다. 니체가 보기에 이들은 자신의 신체적 충동과 욕망에 의해 인식을 추구하면서도 온힘을 다해 그것을 부정하려 든다는 점에서 기만적이며 음탕하다. 그렇다면 ‘때묻지 않은 앎’을 추구하는 자들은 무엇 때문에 자신의 욕망을 부정하는가?


사랑에는 늘 몰락이 수반되기 마련이다. 니체에 따르면 “사랑하는 것과 몰락하는 것”은 “영원히 조화를 이루어”(니체, 같은 책, p.209)왔다. 어째서인가? 사랑한다는 것은 ‘나’인 채로 ‘너’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너’라는 타자와의 마주침을 통해 내 안의 타자성을 발견하는 일이고, 완전히 다른 자기 자신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니체가 “사랑을 향한 의지는 기꺼이 죽음을 맞이하려는 의지이기도 하다”라고 말한 것은 그 때문이다. 요컨대, 사랑이란 기존의 자신의 몰락을 수반하는 낯선 마주침이다. 이에 반해 ‘썸’은, 어떤 안전한 선을 지키며 타자와 공유할 수 있는 것만을 공유하려한다는 점에서, 자기 몰락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자신을 유지하고 강화하려는 욕망의 발로다. 썸은 비겁하고 이해타산적인 자기 보존의 욕구다.


‘때묻지 않은 앎’을 추구하는 자들은 대지를 의욕적으로 해석하고 창조하기보다는 ‘관조’라는 명분하에 실은 세계와 썸을 타는 자들이다. 그들은 “백 개의 눈을 지닌 거울처럼 사물 앞에 드러누울 뿐 그것들로부터 아무것도 바라지”(p.208) 않는 상태를 원한다. 그들은 의욕하면서도 자신들의 의욕함을 온전히 감당하려 들지 않는 것이다. ‘사랑’에 내포되어 있는 위험과 불안, 좌절, 허망함을 회피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들은 거울이 되고자 하지 않는다. 사랑의 무구함은 모든 고귀하고 비천한 욕망을 남김없이 드러내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의욕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스스로 명령하고 복종함을 가리킨다. 자기 자신에게 명령하는 자는 “자신의 법에 대해 판관과 수호자가, 그리고 제물이 되지 않을 수”(니체, 앞의 책, p.193) 없다. 그런 점에서 무언가를 의욕한다는 것은 그로 인해 야기될 결과까지 온전히 욕망함을 의미한다. 의욕하는 자는 의욕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의욕한다. 간보지 않고, 밀당하지 않고, 의욕할 뿐이다.


니체는 달의 사랑을 불임(不姙)이라고 규정한다. 누구도 다치게 하지 않는, 누구도 변화시키지 못하는 사랑. 어떤 불쾌감도 야기하지 않는, 어떤 사유도 발생시킬 수 없는 사랑. 나는 ‘좋아한다’고 하면서도 어느 하나에 매몰되고 싶지 않았다. 그건 삶에 여유를 갖지 못하는 협소한 인간이나 하는 짓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안전하게 자신을 지키며 대지의 실루엣을 더듬는 달의 사랑을 반복하는 동안, 나는 결국 나 자신에 매몰되고 말았다. ‘썸 타는’ 나는 분만이 아니라 도피를, 해산의 고통이 아니라 자신의 영구보존을 욕망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태양처럼 사랑하라


니체에 따르면,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결코 자기보존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생각해보자. 우리의 신체는 스스로를 보존하기 위해서조차 해체와 생성을 거듭한다. 존재에는 이미 그 자체로 외부가 개입되어 있는 것이다. 니체는 생명체를 발견하면서 “주인이 되고자 하는 의지”(니체, 앞의 책, p.194) 또한 발견했다고 말한다. 우리를 지배하는 힘에의 의지는 정복하고 전유하고 고양되고자 하지, 머무르고 유지하고 반복하려 들지 않는다. 다시 말해, 우리를 가로지르는 힘은 결코 몸을 사리는 법이 없다.


“벌써 저 활활 타오르는 자가 떠오르고 있으니, 대지에 대한 그의 사랑이 다가오고 있으니! 순진무구와 창조의 열망이야말로 태양이 온몸으로 사랑하는 것들이렷다!

저쪽을 보라, 태양이 어찌 그리도 서둘러 바다를 건너오는가! 너희는 그의 사랑의 갈증과 뜨거운 입김을 느끼지 못하는가?

태양은 바닷물을 빨아들여 그 심연을 자신의 높이까지 들이마시려 한다. 이에 천 개나 되는 젖가슴을 갖고 있는 바다가 갈망으로 부풀어 오르는구나.

바다는 태양이 목말라 자신에게 입맞춤해주기를, 그리하여 자신이 빨려들어가기를 소망한다. 대기가 되어 높이 올라 빛이 흐르는 길이 되고 스스로 빛이 되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진정, 태양이 그러하듯 나 또한 생을, 그리고 깊은 바다를 두루 사랑한다.

깊은 곳에 있는 것 모두는 올라와야 한다. 나의 높이까지! 내게는 이것이 깨달음이니.”(앞의 책, p.211)



‘눈길로만 더듬는’ 달과 달리 태양은 ‘온몸을 던져’ 사랑한다. 바다의 심연까지를 빨아들이는 사랑. 태양의 사랑에는 어떠한 망설임도, 거리낌도 없다. 태양은 자신을 아낌없이 모두 준다. ‘미래’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자신의 에너지를 아끼지 않는다. 매순간 자기 자신을 남김없이 태운다. 하여 태양은 세계를 감춤 없이 드러낸다. 가장 아름다운 것에서부터 더없이 추악하고 역겨운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만천하에 드러낸다. 그렇게 태양은 모든 것에 깃들어, 모든 것을 분만해낸다. 이러한 태양의 전면적 사랑에는 계산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애초에 태양은 돌려받을 것을 생각하지 않고 베풀기 때문이다.


태양처럼 사랑한다는 건 뭘까? 사람과 일과 공부와, 달의 방식이 아닌 태양의 방식으로 관계 맺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내가 그에게, 또 그가 나에게 가져다 줄 모든 환희와 고통을 남김없이 욕망하는 일이 아닐까. 내가 활동하는 이곳 ‘바깥’을 이상(理想)으로 삼지 않기, 머리가 아니라 온몸으로 텍스트를 읽어내기, 그게 태양의 방식으로 살고 사랑하는 길이 아닐까. 결과가 어떠하든 시도하기. 실패하더라도 다시 시도하기.


다시, 나 자신이다. 나는 여전히 너무나 몸을 사린다. 나는 니체처럼 당당하게, “태양이 그러하듯 나 또한 생을, 그리고 깊은 바다를 두루 사랑한다”고 외칠 수 없다. 무엇이 나를 멈칫거리게 하는 걸까? 무엇이 나를 인색하게 만드는 걸까? 나의 비겁은 무엇에 기인하는가?


나는 어떤 일에도 쉽게 기대를 걸지 않는 편이다. 안 될 거라고 생각하는 일에 대해 포기도 빠르다. 그게 내가 견지해온 ‘쿨함’이다. 그러나 그 ‘쿨함’으로도 나는 가볍지 않다. 홀가분하지 않다. 나의 쿨함은 더 없이 소심하고 나약하며 더 없이 무거운 나를 감추는 장막이었기 때문이다. 상처받을까봐,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의 비루함과 마주하게 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그 무엇도 욕망하지 않는 것처럼 나 자신을 속였던 것인지도. 무엇에게도 온전히 내 마음을 내어주지 않는 ‘쿨함’이 내 무거움의 정체였다는 역설.


니체는 우리가 모든 것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걷는 법, 나는 법, 읽는 법, 사랑하는 법까지도. 이제 썸은 그만 타고 싶다. 사랑하고 싶다. 태양처럼.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자신을 건전하며 건강한 사랑으로써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p.319)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먼저, 나 자신에 대한 모든 환상을 버리자. 어떠한 기대나 체념도 없이 나 자신과 만나기. 온갖 더러운 꼴을 보고 비루한 자신과 마주할 것을, 그런 나 자신과 싸울 것을 각오하기.


글 : 건화(고전비평공간 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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