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예속을 갈망하는 자유

예속을 갈망하는 자유



일하기 싫다! 그러나 …


일하기 싫다. 그냥 일이 하고 싶지 않다. 지금도 안 하고 있지만 더욱 강렬하게, 가능하다면 영원히 안 하고 싶다. “그럼 어떻게 먹고 살 건데?”라고 물어도 딱히 구체적인 대책은 없다. 그냥 아주 막연하게, 틀에 박힌 삶을 살고 싶지 않을 뿐. 매일 가기 싫은 곳에 가서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면서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하는 삶. 그런 삶을 사는 나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다. 상상하고 싶지 않다. 일의 노예가 되고 싶지 않다!


내 장래희망은 ‘돈 많은 백수’였다. 재벌을 꿈꾼 건 아니다. 돈이 너무 많아도 피곤할 게 뻔하니까. 적당히 여행 다니고 취미를 즐기며 한평생 유유자적 살아갈 수 있을 정도면 된다. 귀찮은 건 질색이다. 취직을 한다는 건, 돈을 받는 대가로 정해진 시간동안 나를 귀찮게 할 권리를 양도하는 일이 아닌가. 끔찍한 일이다. TV에선 연일 청년실업이 문제라고 떠들어대는데, 내게는 오히려 언젠간 직업을 가져야만 한다는 사실이야말로 걱정거리다.




막대한 유산의 상속자가 아닌 이상 몇 가지의 현실적 대안을 염두에 둬야 할 것이다. 어떻게 해야 노예를 면할 수 있을까? 이상적인 방법은 ‘노동’으로 여겨지지 않는 일을 통해 돈을 버는 길을 강구하는 것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돈도 버는 것. 일종의 ‘예술가’가 되는 것. 그게 아니라면 ‘의미 있는 일’을 밥벌이로 삼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노동, 인권, 환경, 평화 등을 위해 일하는 시민단체나 사회적 기업 같은 곳에 취직하는 것. 그런데 실은 양쪽 모두 이미 나의 꿈과는 거리가 멀다.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하고 싶은 일’이 ‘노동’이 된다는 것을 뜻하며, 돈을 전혀 벌 수 없을지도 모를 상황에 자신을 맡기는 일이지 않은가. 또한 ‘의미 있는 일’을 하는 활동가가 된다는 것은 이미 자기 자신을 상당부분 포기한다는 것을 뜻하지 않나. 그나마 현실적인, 아니 사실상 가능한 유일한 방법은 취직을 하되 직장에 자신을 완전히 내주지 않는 것이다. 적게 일하고 적게 벌면서 퇴근 후와 주말에는 ‘나의 삶’을 영위하는 것. 그러나 일을 하면서 ‘나의 삶’을 산다는 건 가능할 것 같지가 않다.


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먹고 살자면 노동은 불가피한데 ‘자유’는 노동 바깥에 있으니. 그래서 나는 어슬렁어슬렁 공부도 하고 여행도 다니면서 천천히 출구를 찾아보고자 했다. 나를 기만하지 않으면서 돈도 벌 수 있는 방법을.



‘자유’를 갈망하는 노예의 역설


그런데 사실 나 같은 게으름뱅이만 ‘일하기 싫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내 또래의 어느 누구도 노동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매주 일요일 저녁이면 SNS에는 진풍경이 펼쳐진다. 월요일을 앞둔 직장인들은 광기에 사로잡혀 자신의 직장과 상사, 그리고 자신의 운명에 대한 저주를 퍼붓는다. 직장인들이 자신들의 ‘노예상태’를 자조하는 모습은 언제나, 어디서나 볼 수 있다. 백수, 직장인 할 것 없이 우리 모두는 노동을 혐오하는 것 같다.


그런데 우리가 노동을 혐오하며 꿈꾸는 자유는 기만적이지 않은가? 우린 일은 하기 싫지만 돈은 벌고 싶다고 말한다. 우리가 상상하는 자유란 돈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꿈꾸는 자유는 기본적으로 마음대로 하거나 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다.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먹고, 사고 싶은 게 있으면 사고,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갈 수 있는 상태. 누구도 방해하거나 간섭하지 않는 상태. 모든 게 ‘내 뜻대로’ 되는 삶. 그러나 이러한 자유는 세계가 '예외적으로' 호의를 베풀어 줄 때만 가능한 것이라는 점에서 실은 자유가 아니다. 어른들의 호의적 보살핌 속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모두 누리는 어린아이를 자유롭다고 할 것인가. 의존적인 너무나 의존적인 자유. 우리가 갈망하는 자유의 이러한 의존성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혐오하는 현실로부터 한 발짝도 떼지 못한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박탈당했고, 매일 사용되어 닳아지는 것이 되도록 교육받았으며 그것을 의무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제 그들은 이렇게 매일 사용되어 닳지 않고는 지낼 수 없게 되었고 그 이외에 다른 것을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수레를 끄는 이 가련한 동물들에게 ‘휴가’를 주지 않는 것만은 허용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과도하게 노동하는 세기에서 한가함Muße이라는 이상은 ‘휴가’라고 불리는데, 이 휴가 때에 사람들은 한때나마 마음껏 게으름을 피우며 멍청하고 어린애처럼 굴어도 되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아침놀』, 178절, 책세상)




니체는 노동을 신성시하는 시대에, 노동이 의무라고 교육받았으며 노동하지 않고는 살 수 없게 되어버린 사람들을 본다. 이들은 ‘노동’과 함께 ‘휴가’ 또한 외부로부터 부여받았다. 수레를 끄는 가련한 동물들은 일하는 시간뿐만 아니라 한가한 시간조차도 스스로 조직해내지 못한다. 니체가 보기에 과도하게 노동하는 세기의 인간들은 직장에서만이 아니라 집에서도, 노동하는 동안만이 아니라 여가를 보내는 동안에도 노예다. 그렇다면 지금, 노동을 멸시하는 우리는 어떤가?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좀 더 비겁하고 탐욕스러워졌을 뿐. 수동적이고 의무적인 ‘노동’을 거부하고자 한다면 거기에 수반되는 ‘휴가’ 또한 거부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그러나 우리가 노동을 거부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노동/휴가의 반복적 패턴을 강요하는 시스템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 단지 ‘귀찮음’과 ‘수고스러움’을 감당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욕망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휴가’다. “마음껏 게으름을 피우며 멍청하고 어린애처럼 굴어도 되는” 시간. 능동

적으로 행하고 감당하는 자유가 아니라 자신에게 부과된 의무와 책임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으로서의 수동적 자유. 우리가 ‘노예’나 ‘착취’를 거부하며 열망하는 자유란 기껏해야 ‘노동하지 않는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일하기 싫다’라고 말하면서, 의무에 대한 부정으로서 자유를 말한다. 늘 ‘해야 하는 일’은 한 쪽에 있고, 그것의 반대개념으로서의 자유를 상상하는 것이다. 그러나 솔직해지자. 노동을 혐오한다고 말하는 우리는, ‘해야 하는 일’이 주는 안정감에 은밀하게 의지하고 있는 건 아닐까? 사실 우리는 노예화에 저항하지도, 노동을 거부하지도 않는다. 그런 제스처를 취할 뿐이다. 우린 그저 영원히 지속되는 휴가 같은 것은 현실에 없다는 사실에 살짝 뾰로통해져 있을 뿐이다.


‘휴가’란 기본적으로 수동적인, 현재의 행위 ‘바깥’의 영역이다. 우린 어디서나 이런 분할을 만들어낸다. 나는 군대에 있는 동안 ‘바깥을 꿈꾸는 삶’에 환멸을 느꼈다. ‘휴가’와 ‘전역’만을 기다리는 하루하루 속에서 현실은 저 너머에 이르기 위해 견뎌야 할 무엇이었다. 그곳에서 ‘지금’은 항상 부차적인 것으로, 구태여 모든 역량을 발휘할 필요가 없는 하찮은 것으로 폄하되었다. 이런 전도되고 파편화된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공부를 시작하며 한 가지 기대했던 것이 있다면, 이러한 기만적인 삶의 이분화를 넘어가는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또다시 바깥을 꿈꾸는 나를 발견한다. 나는 그저 끊임없이 여기가 아닌 어딘가를 꿈꿔왔고 꿈꾸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에게 ‘자유’는 일종의 마취제다. 생각해보자. 우리는 노동에 질색하지만, 이상하게도 거부하면 거부할수록 더욱 노동에 얽매이고 있지는 않은가? 우린 지독하게 냉소적이지만 이상하게도 저항하지는 않는다. 저항하는 순간, 우리가 현실 바깥에 위치시켰던 자유는 지금 여기에서 감당해야 할 현실로 다가오게 될 것이므로. 애써 감당하고 싶지는 않다. 우리는 그저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폭력적인 시스템의 부품으로 소모되고 싶지 않다고 말하며 피해자 코스프레를 한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우리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저항할 수 없다고, 출구는 이미 닫혀버렸다고 말한다. 다 알고 있다는 듯, ‘어른’을 가장하면서 자신의 나약함을 감추는 것이다. 여기는 어떠한 다른 삶의 가능성도 없는 ‘헬’이어야만 한다. 그래야 아무것도 감당하지 않으려는 우리의 무기력을 정당화할 수 있으니까. 우리는 항상 불만에 가득차서는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 사이의 모순에 의한 고통을 호소하지만, 그건 정말로 모순인가? 어쩌면 우리는 스스로 모든 출구를 봉쇄해버리고, 우리가 부정한 바로 그 현실에 게으르게 기생하고자 하는 건 아닐까? 우리는 정말로 자유를 원하기는 하는 걸까?




생각해보면 내가 직장의 노예가 되는 것을 거부하며 꿈꾸던 ‘자유로운 삶’은 늘 어떤 ‘조건’에 관한 상상이었다. 나의 구도 속에서 자유란 타인으로부터 침해받지 않을 수 있는 완벽한 조건이 세팅될 때만 가능한 무엇이었다. ‘돈 많은 백수’를 꿈꾼다는 것, 이는 나 자신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으면서 모든 것이 내게 우호적으로 되기를 바라는 탐욕이 아니었을까?


이 허망한 꿈의 가장 병적인 지점은 일체의 실천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나는, 남부럽지 않게 살겠다며 학벌에 목매고, 악착같이 스펙을 쌓고, 번듯한 직장을 구하고, 차와 집을 장만하는 사람들을 노예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드러나는 양상이 조금 달랐을 뿐 나를 자유롭게 해줄 어떤 이상적인 조건이 갖추어지기를 기대했다는 점에서 나의 욕망도 그들의 욕망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행복한 노예


“가난하면서도 즐겁고 독립적이라는 것! 그것들은 동시에 가능하다. 가난하면서도 즐겁고 노예라는 것! 이것도 가능하다. 그리고 나는 공장 노예 제도의 노동자들이 이보다 더 좋은 상태에 있다고 생각할 수 없다. 만약 그들이 지금 상태처럼 기계의 나사로, 또 말하자면 인간의 발명품에 대한 보완물로 소모되는 것을 치욕이라고 느끼지 않는다고 가정한다면 말이다! 높은 급여를 통해 그들의 비참한 삶이 본질적으로 극복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어리석다. 즉 임금이 높아진다고 해서 그들이 당하고 있는 비인격적인 노예화가 지양되는 것은 아니다.”(프리드리히 니체, 『아침놀』, 206절, 책세상)


니체는 가난과 즐거움, 독립성이 동시에 가능한 것만큼이나 가난과 즐거움, 노예상태 또한 공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그것을 치욕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노예 상태는 즐거움과도 양립할 수 있다. 니체가 이야기하는 ‘노예’란 누구인가? 노예는 가난한 자도 아니고 부유한 자도 아니다. 노동하는 자도 아니고 무위도식하는 자도 아니다. 노예란 자신이 외부에 의해 일방적으로 규정되는 것을 치욕으로 느끼지 못하는 자다.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기를 포기한 자다.


우리는 자존심이 세다. 우리의 권리가 침해당한다고 느낄 때,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느낄 때 우리는 분개한다. 우리가 착취에 저항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소중한 나’에 대한 가혹하고 불합리한 처우에 대한 것이며, 우리의 높은 자존심은 침해되어선 안 될 신성한 ‘권리’에 관한 것이다. 좋다. 그러나 정말 그것으로 충분한가? 우리가 수치스러운 착취와 노예상태의 반대편에 놓고 동경하는 것은 구글이나 페이스북 같은, 우수한 복지를 제공하는 기업에 취직하는 것이다. 그러나 니체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러한 욕망이야말로 우리의 노예성을 증명한다. 우리는 그저 가장 좋은 조건에 자신을 팔고 싶은 것이다. 기왕이면 초가집의 노예가 되기보다는 궁궐의 노예가 되자. 행복하고 부유하고 즐거운 노예가 되자! 100년이 넘도록 그칠 줄을 모르는 니체의 탄식. “아! 인격이 아니라 하나의 나사가 되는 대가로 하나의 값을 갖게 되다니!”(니체, 앞의 글)


노예의 비참함은 외부적 조건 자체가 아니라 그러한 조건에 의해 규정되는 방식으로부터 비롯된다. 우리는 모두 각자에게 고유한 제한조건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모든 제한으로부터 풀려난 삶은 없다. 우리가 처해 있는 독특한 배치는 우리를 한계 짓는 조건인 동시에 그 자체로 우리를 살게 하는 조건이다. 따라서 우리를 규정하는 조건 속에서 우리의 능동성을 발휘하는 그만큼이 자유다.


생명은 스스로의 힘을 발휘함으로써 고양된다. 능동성을 발휘하는 만큼이, 스스로 행하고 감당하는 만큼이 우리 자신의 삶이다. 그러나 우리가 갈망하는 ‘행복한 노예’와 ‘영원한 휴가’는 그 자체로 삶에 대한 부정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삶이 아니라 죽음을 욕망하는 게 아닐까.


“차라리 이민을 가자. 세계에 아직 남아 있는 야만적이고 신선한 지역의 주인이 되고 무엇보다도 나 자신의 주인이 되려하자. 그 어떠한 것이든 노예 제도의 징후가 조금이라도 보이는 한, 장소를 바꾸자. 모험과 전쟁을 회피하지 말고 최악의 경우에는 죽을 각오를 하자. 이 불결한 노예 제도만은 더 이상 안 된다. 이렇게 음침하고 악의적이며 음모적으로 변하는 것은 더 이상 안 된다.”(프리드리히 니체, 『아침놀』, 206절, 책세상)


니체는 우리에게 현실을 부정하고 저편을 꿈꾸는 대신 ‘장소’를 바꾸라고 말한다. 장소를 바꾼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전에 자신이 의지하고 있던 가치들을 버리는 일이다. 우리의 모토는 ‘가장 적은 노동을! 더 많은 휴가를!’이 아니라 ‘노동도 휴가도 거부한다!’가 되어야 한다. ‘노예상태’와 함께 ‘풍족함’마저 버릴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신이 누릴 것과 감수할 것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자에게 자유는 없다. 온전히 자기 힘으로 모험과 전쟁을 겪어내는 것, 최악의 경우에는 죽음까지도 각오하는 것. 자유를 말할 수 있는 권리는 그런 자들에게만 있다.


다시, 나 자신에게 질문해본다. ‘행복한 노예’가 되기를 원하는가, ‘자신의 주인’이 되기를 원하는가?



글 : 건화(고전비평공간 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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