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조지 R.R. 마틴, 『샌드킹』 - 지능이 있는 것은 반드시 반격을 한다

조지 R.R. 마틴, 『샌드킹』 

- 지능이 있는 것은 반드시 반격을 한다




호러는 참 신기한 장르다. 아무리 비슷한 이야기를 아무리 반복해 접해도 그 매력이 바래는 법이 없다. 마력이라고 해야 할까 요력이라고 해야 할까. 까마득히 어릴 때 이미 중독되어 교과서 밑으로 『오싹오싹 괴담선집』을 몰래 숨겨 읽고 헌책방 서가에서 『어셔 가의 몰락』을 날쌔게 움켜쥐던 그 손으로, 지금도 여전히 ‘괴담’ 게시판을 클릭하고, ‘옥수동 귀신’을 클릭하고, 영화 『그것(it)』의 예고편을 클릭하고 있는 것이다. 30분도 안 걸려 백 퍼센트 후회할 줄 사무치게 잘 알면서도! 인과응보를 확실히 실현시키는 게 호러물의 특징 아니던가. 따라서 내가 치를 후유증은 불 보듯 뻔하다. 침실에서는 불 끄고 누워 이불을 턱밑까지 끌어당기고 방문 아래 얇은 틈을 밤새도록 뚫어져라 노려본다. 금방이라도 『링』의 귀신이 기어나올 것만 같아 눈을 뗄 수가 없는 것이다. 으슥한 골목길 저 앞서 가고 있는 사람들과 거리가 좁혀지는 게 겁이 나 발걸음을 늦춘다. 저들이 홀연히 뒤돌아보면 얼굴에 이목구비가 없을 게 틀림없으니까! 길목에 서 있는 봉고차마다 경계하며 멀찍이 피해서 다니는 건 필수다. 괜히 기웃거리다가 장기 밀매의 희생양이 될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이 모든 게 얼마나 얼척 없는 걱정인지 머리로야 알고 있다. 그러니 아 그거 괜히 봤다고, 보지 말았어야 했다고, 그 시간에 붕어싸만코나 까먹었어야 했다고, 숨죽이며 스릴을 만끽하던 어제의 나를 오조 오억 번씩 욕하는 건 숫제 일상이 되어버렸다. 어쩌면 피칠갑한 귀신이나 발톱으로 사람 내장을 파내 앞니로 끊어먹는 점액질의 괴물들보다, 그렇게 줄기차게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이야말로 호러물의 가장 무서운 점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얼마나 많은 귀신과 요괴와 악령과 괴물들이 예쁘장하게 포장된 공포를 해사하게 흔들어대며 우리 생에 사뿐히 걸어들어왔던가. 빨간 휴지 줄까 파란 휴지 줄까 묻는 뒷간 귀신과 빨간 마스크와 홍콩할매같은 어린이 전담마크 요괴들부터, 눈을 까뒤집고 달려들어 사정없이 물어뜯는 우리 시대의 아이콘 좀비에 이르기까지, 어떤 측면에서 내 인생은 무수한 가상의 존재들에 대한 옴니버스 연속극 같은 공포로 점철되어 왔다고 할 만 하다. 


하지만 평생에 걸쳐 가장 무서웠던 건 사실 귀신이 아니었다. 악령도 아니었다. 내 가장 근원적인 공포의 왕좌를 차지하는 건 언제나 평범한 작은 동물들의 ‘떼’였다. 홀로 나타나 왁 놀래키고 사라지는 어릿광대나 귀신이나 칼든 처키(Chucky) 따위는 아무리 무서워도 그때뿐이다. 그들을 물리칠 방법은 대부분 존재했고, 설령 아무 방도가 없다손 치더라도 실제 마주칠 가능성도 없으니 잊어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떼를 지어 몰아치는 동물들’은 얘기가 달랐다. 일단 실물이 현실 세계 도처, 일상생활 안에 있었다. 한 마리씩이야 무섭지 않다. 그러나 거대하게 무리를 지으면, 놈들은 가장 크고 무섭고 논리가 먹히지 않는 괴물이 되었다. 이들에 대한 공포는 어릴 때 본 몇 편의 영화들에서 기인했다. 나는 그 영화들을, 원망을 품고, 애석한 마음으로, 정확히 지목해낼 수 있다. 살인 벌떼의 공격을 담은 재난영화 『스웜』, 달려드는 갈매기 떼의 포악스러운 날개짓을 화면 가득 잡은 히치콕의 『새』, 그리고 우글거리는 구더기 풀장을 보여주었던 80년대 공포영화 『페노미나』가 바로 그들이었다. 개체로서의 자기보호본능이 결여된 동물들이 무리를 지어 한 방향으로 돌진할 때, 그 맹목성은 그 어떤 피투성이 악령보다 무섭다는 걸 그 영화들은 선명하게 각인시켰다.  




물론 나는 떼를 이룬 벌레들이 최고로 무섭다고 말하는 것일 뿐, 다른 것들이 안 무섭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다. 벌레 떼가 환기시키는 실제적인 위기감을 제외하면, 대개의 호러물에서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건 이유를 알 수 없는 선뜩한 악의였다. 피해자들은 대개 길을 잘못 들었거나, 쓸데없이 호기심이 발동했거나, 허세가 있거나, 중2병이거나, 눈치가 좀 없을 뿐이다. 지은 죄에 비하면 지나치게 부당하고 거대한 악의가 ‘너 잘 걸렸다’는 식으로 관용 없이 발산된다. 사정이 이러하니, 타인을 까닭 없이 상처주고 괴롭히고 해코지하는 악의의 화신과 속내 모를 벌레 떼가 한 데 뒤섞인 호러 SF를 만났을 때, 내가 영혼 깊숙한 곳까지 전율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조지 R.R. 마틴의 단편 『샌드킹』의 사이먼 크레스는 본 중 가장 반감이 드는 주인공이다. 누굴 데려와도 그가 악인임을 부정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가 얼마나 거침없이 오만하고 가학적이고 심성이 나쁜 인간인지는 첫 장부터 분명히 묘사된다. 이 인간에게서 호감 가는 구석을 찾느니 내가 즐겨찾는 괴담 게시판에서 비건 채식 레시피를 찾는 게 빠르겠다네. 그는 도시에서 50킬로미터나 떨어진 황량한 땅에 큰 저택을 덩그마니 지어놓고 혼자 산다. 은하계 각지에서 실어온 희귀 애완동물을 키우는 게 그의 취미였다. 돌보고 예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싸우고 잡아먹기를 지켜보는 악취미였지만. 


소설은 사이먼 크레스가 시내의 수상쩍은 수입상점에서 새로운 애완동물을 구입하는 데서 시작한다. 바로 ‘샌드킹’이었다. 곤충을 닮았지만 곤충보다 훨씬 지능이 높고, 서식지의 크기에 따라 체구가 달라지는, 딱딱한 갑각에 뒤덮인 외계동물. 모래와 암석으로 성을 지어올리고 사는 샌드킹들은 <모>라는 암컷을 중심으로 집단의식을 공유한다. 복수의 부속과 하나의 정신. 실질적으로 한 채의 샌드킹 성은 한 마리의 거대한 자웅동체 생물인 셈이라고, 상점의 신비로운 점원은 설명하였다. 처음에 시큰둥해 하던 사이먼 크레스는 샌드킹에게 종교 본능이 있다는 데 넘어가고 만다. 가까이서 먹이를 주는 사람에 대한 초감각이 작동하여, 자신들의 성에 그 ‘신’의 얼굴을 새겨놓고 숭배하는 습성이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테라리움 속 샌드킹의 성 꼭대기에는 정중히 그를 맞이한 바로 그 점원의 얼굴이 선명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결국 사이먼 크레스는 네 무리의 샌드킹을 구입한다. 물론, 잘 보살펴 키우려는 목적이 아니라, 자신을 숭배하며 서로 살육하고 전쟁을 벌이는 장면을 지켜보려는 심산이었지만. 콜로세움의 잔학한 로마 황제처럼, 올림푸스의 타락한 신처럼, 사이먼 크레스는 통치신 놀음을 즐기기 시작한다. 


샌드킹들은 먹이를 주는 그의 얼굴을 신의 그것으로 인식한 후, 각각의 성 꼭대기에 그의 얼굴을 조각한다. 처음 그 인상은 온화하고 쾌활하고 현명한 것이었다. 사이먼 크레스는 만족감을 느끼지만, 그 즐거움은 오래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본성은 어디 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폭력적이고 잔인하며 흉포한 인간이었으므로, 폭력적이고 잔인하며 흉포한 신이 된다. 일부러 굶주리게 하고, 파괴하고, 벌주고, 홍수를 내고, 전쟁을 유발하는 식으로 그는 전횡을 휘두른다. 각 성 꼭대기 조각의 얼굴은 그에 따라 조금씩 바뀌어간다. 악마적이고 야비하고 악의에 찬 형상으로.     



이 이야기에는 여러 변형의 이미지가 혼재한다. 변태를 거듭하며 ‘다른’ 존재로 전이해가는 갑각질 동물의 생태 묘사에서 카프카의 『변신』을 떠올리는 건 단순하지만 자연스러운 일이다. 처음에 손톱만한 벌레였던 샌드킹들이 여러 번 허물을 벗으며 결국 사람을 닮은 크기와 형상으로 달라지기까지, 먹이의 수급은 부족했을지언정 악의의 수급은 넘치고도 남았다. 커질수록 그들의 초감각과 지능 또한 발달하므로, ‘신’에 대한 숭배가 증오로 뒤바뀐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악으로서의 사이먼 크레스를 투영하고 있는 건 사실 성 꼭대기의 얼굴 조각뿐이 아니라 샌드킹 그 자체이기도 한 것이다. 제 행위와 존재로 영향 끼친 모든 것이 자기 삶을 방증한다. 그런 맥락에서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떠올리는 건 너무 나이브한 일일까. 

  

다양한 신화들과 종교 경전들이 생각난다. 땅을 흔들고 물을 쏟아붓고 불길을 놓는, 그 수많았던 천벌들 말이다. 나보다 작고 약한 존재 앞에서 신으로 행세하는 건 얼마나 손쉬운 일인가. 생사여탈권을 손에 쥐고 있다면 더더욱, 악마가 되는 건 얼마나 간단한 일이란 말인가. 하지만 항상 기억할 일이다. 지능이 있는 것은 반드시 반격을 한다. 벌레는 지능이 없다고 알려져 있지만, 글쎄, 내 공포의 정점에 무엇이 있는지 앞서 말했다시피, 작은 동물이 떼를 이뤄 몰려오면 엄청나게 무섭다. 


샌드킹은 처음부터 우글우글 떼를 이룬 군체동물이었다. 체구를 키우며 차차로 지능까지 발달시켜간 끝에, 받아왔던 악의와 악행을 되돌리기까지 한다. 뒷일 생각하지 않고 멋대로 굴어온 ‘신’에게, 이는 사실 끔찍한 악몽이다. 책을 다 읽고 나면 딱히 누구에게라고 할 것 없이 소리질러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알파고도 발명했어요. 어디 슬슬 켕기시는 분 안 계신가요?  



*  *  *

조지 R.R. 마틴의 『샌드킹』을 처음 읽었던 것은 아마도, 십여 년 전 도서관이었을 겁니다. 같은 단편집에 실려있던 다른 작품들은 다 까먹고서도, 이 작품만은 선명하게 뇌리에 새겨졌어요. 시간이 흐르면서 내용의 세부는 흐릿하게 지워져갔지만, 무섭고도 매력적인 이미지는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가끔 생각날 때면 다시 읽어보고 싶다는 욕구가 솟구쳤지만, 어느 책이었는지, 누가 쓴 작품이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으니 속수무책이었어요. 결국에는 제목도 가물가물해졌죠.  


‘그게 뭐였더라? 샌드... 샌드... 샌드벅? 샌드맨? 샌드몬스터?’ 


실제로 그 뒤 몇 년간 이 소설을 다시 찾아보려고 애쓴 적이 몇 차례 있었습니다. 그땐 어째서 ‘샌드킹’이라는 말이 끝까지 떠오르지 않았던 걸까요. 『샌드맨』은 닐 게이먼의 유명한 그래픽 노블 시리즈였습니다. ‘샌드벅’은 베이스기타의 제품명인 모양이었어요. 둘 중 어느 쪽도 외계행성의 벌레 떼와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샌드킹』을 재회한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 지금은 폐간된 잡지 [판타스틱]에서였습니다. 우연이 아니라 운명같이 느껴졌던 그 해후가, 얼마나 뛸 듯이 기뻤는지 모릅니다. 샌드킹! 몇 년을 애타게 그리워했으나 찾아내지 못했던 그 제목이 샌드킹이었다니!  두 달인지 석 달인지에 걸쳐 연재되는 동안, 오래도록 무지의 감옥에 격리되어 있다가, 느닷없이 동경해온 스타의 간헐적 접견권을 얻은 자의 기분을 만끽했죠. 손꼽아 기다리고, 다시 만나고, 손꼽아 기다리고, 다시 만나고! 


이번에 다시 읽은 『샌드킹』은 조지 R.R.마틴 걸작선의 2권에 수록된 버전입니다. 함께 실려 있는 다른 작품들도 다 좋더라고요. 미드 『왕좌의 게임』 다음 시즌을 기다리는 동안 이 선집을 야금야금 읽어볼 생각입니다.  


글_윰(sf팬)



조지 R. R. 마틴 걸작선 : 꿈의 노래 2 - 10점
조지 R. R. 마틴 지음, 김상훈 옮김/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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