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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역체로서의 몸​

  

 

신체(body)는 그것이 특별한 법적 자격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인격(person)에서 사물(thing)로 이동하는 수단이라고 이야기된다.

법에서 신체처럼 많이 이야기된 것도 없다.

신체는 이러한 두 차원들을 진동하며,

인격에서 사물로 혹은 사물에서 인격으로의 이동을 가능케 한다. 

─Roberto Esposito, 『Person and Things』

 

 

인격(person)과 개체적인 것

 

앞서 보았던 자유가 개체적인 것의 문제로, 소유형으로 접근되는 것은 특이한 발상이다. 능력으로서의 자유가 아니라 자유란 이제 선천적으로 개인에게 주어진 소유하는 권리가 된다. 하지만 이러한 권리를 당연히 가졌다고 선험적으로 상정되는 개체가 오히려 이상한 사고 아닐까? 이렇게 권리나 의무와 같은 무언가를 소유하고 있다는 이러한 관념은 신체를 소유한다는 생각과 떨어질 수 없다. 이제 사람들의 관계 역시 이 소유된 무엇을 바탕으로 거래와 교환으로서만 생각된다. 그런 점에서 정치와 신체의 관계는 떨어질 수 없다.

 

즉 외부와 고립된 의미를 지닌 개체적인 생명이 떠올랐을 때 자주, 자유, 권리라는 개념어 역시 소유의 문제로서 파악된다. 외부로부터 무언가 지켜야 할 대상으로서 몸이 등장하고 이것이 정치적인 관념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단순히 정치적 관념을 소유의 관념으로 여기게 되었다는 데서 그치는 것은 아니다. 이는 거꾸로 말하면 이제 소유되지 못하는 것은 자유, 권리를 가질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는 생명이란 무엇인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생명’을 가리키는 말은 두 종류가 있었다. 조에(zoē)와 비오스(bíos)가 그것이다. 조에가 단순히 살아있는 생명으로서의 의미라면, 비오스는 이와는 달리 특수한 생명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인간은 정치적인 동물(zōion politikon)”에서 동물(zōion)은 조에(zoē)의 의미, 즉 인간이 동물로서의 단순한 생명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방점은 인간이 동물=생명이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체를 통해 단순한 조에로서의 생명을 넘어 비오스(bíos)로서의 생명을 획득한다는 데 있다. 즉 정치체를 이룸으로써 선함(agathon)에 도달하는 생명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인간이란 단순히 살아있다는 것만이 생명의 의미가 아니라 어떤 목적성 속에서만 의미를 가진 생명이 된다.

 

이러한 아리스테텔레스적 생명의 의미를 현대적인 문제로써 설명한 것이 아감벤이었다. 그런데 그는 『호모 사케르』를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적 도식을 뒤집는다. 그는 주권의 예외상태(ex-ceptio)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벌거벗은 생명(homo sacer)’인 ‘조에’의 성격을 강조한다. 여기서 이들은 단순한 생명으로서 언제나 생사여탈권에 노출되어 있는 자들로 상정된다. 이들을 ‘배제적으로 포함’하면서 만들어지는 것이 주권으로, 생명이란 법질서의 내외부에 식별 불가능한 영역에 존재한다. 포로수용소가 그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전체주의는 단지 포로수용소나 나치즘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는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 주권의 ‘본질’을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수용소란 ‘근대 생명 정치의 패러다임’ 그 자체로 역사적 장소나 한정된 공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벌거벗은 생명이 생산되는 모든 공간을 일컫는다. 아감벤은 이처럼 죽음의 가능성을 매개로 주권 앞에 생명 자체가 놓이는 조에로서의 성격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때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이 비오스를 긍정하고 조에를 부정하는 것으로, 또는 아감벤과 같이 인간의 조에적 성격을 강조하면서 단순히 권력의 대상으로서의 인간의 생명을 파악하는 것으로 멈출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적으로 말하자면 비오스로서의 생명만이 가치를 갖는다면, 거꾸로 아감벤에게는 조에로서의 생명, 즉 죽어있는(죽음으로 향해 갈 수밖에 없는) 것으로서 밖에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신체, 몸이란 이 비오스와 조에 ‘사이’에 있다. 

 


신체, 인격과 사물 사이

 

우리가 신체, 몸이라고 했을 때 당연히 개체적인 것이로 생각하기 쉽지만, 개체적인 것으로 사유 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들이 필요하다. 내 몸을 내가 소유할 수 있다는, 내가 주도적으로 내 의지대로 내 몸을 조절, 통제, 관리할 수 있다는 발상이다. 자조론에서 보이는 자주적인 것에 대한 발상이, 자유나 권리를 소유적으로 파악하는 발상이 개체적인 것을 가능케 한다. 이처럼 연결된 고리에서 벗어나 독립된 단위로서 개체적인 것은 더 큰 그림을 가능케 하는 기본단위로써 제공된다. 이처럼 ‘개인’이라는 개념은 존재가 아니라 소유에 의해 정의된다. 바꾸어 말하자면 이 개념은 형이상학적이고 초월적인 ‘심층적’ 통일성에 준거하는 것이 아니라 재산 혹은 소유물을 가지고 있는 ‘피상적’ 개체에 준거한다.

─네그리, 『공통체』, 34~35쪽

로크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개인의 모든 권리는 그가 자신의 신체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소유는 무엇보다 철저한 배타적 성격을 그 본질로 한다. 내 신체는 나의 것이기에 타인이 임의로 침해할 수 없는 것이며 내 신체를 사용하여 내가 획득한 나의 재산도 타인의 영향력을 배제하는 배타적 성격을 갖는다. 개인성이란 타자와 공유 불가능한 자신의 고유성(property)으로부터 나타난다. 정치적 질서란 이렇게 자신의 신체를 소유한 개인들 사이에서 맺어지는 계약에 의해 성립되는 것이며, 그러한 한에서 모든 정치질서는 소유권이라는 정초적 권리에 바탕을 두고 수립되는 것이다.

─정정훈, 『인권과 인권들』, 211쪽

 

인격과 사물 사이


 

하지만 신체 혹은 생명이란 조에와 비오스의 사이, 바꿔 말하자면 사물과 인격 사이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인격(person)은 사람의 품성이나 됨됨이에 관련된 도덕적 관점이라기보다 정치학적, 법학적 문제로서 자격 혹은 주체와 관련된 용어로서의 의미다. 가령 개인이 법적 주체로서 인격을 가졌는가, 그리고 이때 인격은 어떻게 주어지는가라는 문제이다. 그렇다면 인격이란 말은 신체와 어떤 관련을 갖는가? 인격이란 말의 어원이 된 페르소나란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는 원래 연극과 관련된 말이었다. 즉 인격(person)이란 어떤 페르소나(persona), 즉 가면을 쓰는 문제로 이러한 가면을 쓰지 않고서는 주체로서 인정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제 신체는 그 자체가 아니라 어떤 인격을 갖추게 됨으로써만 법적이고, 정치적인 장에 들어설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권리의 주체로서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신체의 문제와 바로 연결된다. 인격으로서 페르소나를 갖기 위해서는 먼저 독립된 개인과 독립된 권리라는 개념을 선재적으로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이는 자연상태에서 탈각된 배타적이고 독립적인 신체를 바탕에 둔 것이다. 몸, 신체가 면역화(immunized)되는 것이다. 즉 외부로부터 스스로 지킬 수 있는/지켜야 하는 전투 중의 신체로서 관념화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신체는 인격화, 주체화될 수 없다. 하지만 역으로 말하자면 이는 신체 관념이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재구성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공동체와 면역체

 

이처럼 신체는 개체적인 것으로 인격화됨으로써만 의미를 부여받는다. 여기서 개체적인 것이란 과연 무엇이고, 이것은 무엇과 구별되는가? 먼저 개인적인 것과 개체적인 것이 다르다는 점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개체적인 것이란 개인적인 것에 선행한다. 개체적인 것은 집합적인 것을 하나씩 분리하여 셀 수 있다는 발상, 즉 불가산명사를 가산 명사화 할 수 있다는 발상과 관련된다. 이처럼 전통적인 집합성에서 떨어져 나온 개체성은 자조론의 논의에서 보이듯 하나의 ‘독립적’ 신체성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때 떨어져나온 개체성을 보장하기 위해서 어떤 ‘소유적’ 개념이 뒷받침되어야 했다. 개체에 대한 이러한 소유적, 경제적 관념 속에서 사회를 이룰 수 있는 기본적 인격이라는 관념 역시 가능했다. 그리고 이는 ‘복수’로서의 개체‘들’이라는 조건 속에서 새로운 관계를 예비하고 있었다. 

 

이는 분명히 전통적인 사유와는 다른 것이었다. 즉 전통적 사유 속에서 전(前)개체적 내지 간(間)개체적인 것들로서의 관계가 분리될 수 없었던 것과는 대비된다. 여기서 우리는 전통적인 신체 상의 변화와 개체적인 것의 변화 연동을 볼 수 있다. 즉 자주, 자유, 자조라는 개념은 법적, 권리적으로 독립된 개체를 낳는데, 이는 신체로 보자면 안을 관장하며 밖을 방어하는 식 주체의 상과 유사하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테일러가 지적하듯 사회적인 것을 개체적인 것의 합으로 읽어낼 때 우리가 쉽게 빠지는 오류 중 하나가 전통적인 ‘공동체’의 소멸과 이를 대가로 한 ‘개인주의’의 부상으로 읽어내는 경향이다. 그러나 사회와 개체는 같이 간다. 공동체가 해체되면서 개인이 등장하는 것이라기보다 기존의 공동체에 대한 상에서 새로운 공동체나 사회에 대한 상으로 변하면서 개체적인 것이 등장한다. 따라서 공동체 혹은 집합적 신체상이 어떻게 변화했는가, 어떤 신체에서 어떤 신체로 이동하는가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

─찰스 테일러, 『근대의 사회적 상상』, 33~34쪽

 

그런 점에서 개체적인 것이 단순히 퇴니스식의 공동사회(Gemeinschaft)에서 이익사회(Gesellschaft)로 이동해 가는 과정에서 떠오르게 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이러한 대립은 이념형적 대립일 뿐만 아니라 근대적 사회의 상에 대한 역전된 상으로서 공동체가 역 투사된 것일 뿐이다. 즉 공동체는 근대사회와 더불어 태어난 것일 뿐 아니라 근대사회와 대립하지 않고서는 그 의미를 가질 수 없다. 그러나 이 전도된 이상형으로서 게마인샤프트는 일찍이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을 뿐 아니라 그러한 상 역시 그릇된 모델을 삼고 있다. 이때 퇴니스의 모델이 상정하는 것은 공동사회를 이루던 개인들이 자각을 갖고 이익사회를 구성하는 것으로 상정된다. 그러나 반대로 이는 국가 혹은 사회를 구성하는데 필요한 블록으로서 개체적인 것이 요청되었던 것이었다. 국가 혹은 사회는 이제 개체적인 것의 합으로 나타난다. 

 

공동체에서 개체적인 것으로


 

쉽게 생각하듯이 공동체가 해체되면서 개인이 등장하는 것이라기보다 기존의 공동체에 대한 상에서 새로운 국가나 사회에 대한 상으로 변하면서 어떤 필요성에 의해 개체적인 것이 등장한다. 즉 국가적/사회적인 것이 요청되면서 개체적인 것도 동시에 사유할 수 있게 된다. 근대 동아시아에서 개체적인 것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은 없던 ‘다자(多者)’를 만들어가는 것이자, 이를 통해 ‘일자(一者)’를 만들어가는 것이 동시에 진행되는 과정이었다. 이는 역으로 일자 속에서 다자가 구성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동시에 이는 다자로서의 신체가 일자로서의 인격이 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에스포지토가 공동체와 면역체를 대조한 것은 그런 점에서 근대의 신체가 인격화를 달성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가 설명하는 공동체와 면역체는 어원상으로 보면 더 분명히 구별된다. 즉 공동체(community)가 선물, 빛, 의무를 의미하는 뮤너스(munus)를 함께(com-)하는 관계라면, 면역체(immunity)는 이러한 관계에서 배제, 면제(im-)된 관계이다. 이제 공동체로서의 신체는 면역체가 되는 과정에 놓인다. 이는 개체로서의 신체뿐만이 아니라 정치체로서의 집합체 신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글_김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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