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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나는 이렇게 SF를 읽었다

『별의 계승자』 : 과학은 어떻게 활극이 되는가

by 북드라망 2017. 10. 18.

『별의 계승자』 : 과학은 어떻게 활극이 되는가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후보자의 창조학회 논란은 재미있는 타이밍에 불거져 나왔다. 평소 묵묵하고 조용하던 과학자들이 흔치 않게 격앙되어 장관 임명에 반대하고 성토하는 목소리를 앞 다투어 높이는 동안, 나는 하필 이 때를 골라 ‘신’이 부러 장난을 쳐놓고 키득거리며 지켜보는 모양을 상상했다. 아마도 논란의 주인공인 장관 후보자나, 그를 인선한 사람들은 물론 거개의 반대파들까지도 몰랐을 테지만, 그것은 반도의 작은 출판계, 작은 SF소설 전문 출판사를 통해, 제임스 P. 호건의 『별의 계승자』 2권이 막 출간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던 것이다. 겉보기에는 물론 전혀 별개의 일이다. 그러나 8년 가까이 이 책의 후속작을 기다려온 내 입장에서는 그 두 사건이 거의 시차 없이 연달아 일어난 것이 그리스 비극만큼이나 극적으로 느껴졌다. 창조학회가 과학과 과학자가 어떠하지 않아야 할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면, 『별의 계승자』는 과학과 과학자가 어떠해야할지를 가장 강력하게 보여주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제임스 P. 호건


우주도 나오고, 외계인도 나오고, 왕복선과 탐험대까지 나오지만 스페이스오페라는 아니다. 팽팽한 긴장과 허를 찌르는 첩보와 긴박한 대결의 연속이 손에 땀을 쥐게 하는데, 그 치열한 현장은 전쟁터가 아니다. SF, 즉 사이언스 픽션을 ‘과학소설’로 번역하고 그 정의를 살짝 비틀어 읽는다면, 『별의 계승자』만큼 그 이름에 적확히 부합하는 소설도 흔치 않을 것이다. 이 소설에서는 아예 과학 그 자체가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표면상의 인간 주인공은 있지만, 나는 그가 최전선의 과학이라는 개념을 사람으로 형상화시켜놓은 결정체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아니라기엔, 주인공 빅터 헌트의 인간으로서의 면모를 그리는 데 작가가 너무할 정도로 관심이 없다. 주인공을 매력적으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굳이 ‘얘는 로봇이 아닙니다’라고 강조하기 위해 집어넣은 것 같은 뻔한 장치들이 가끔 나올 뿐이다. 그마저도 티가 날 정도로 무성의해서 보는 쪽이 머쓱해질 지경이다. 덕분에 이 인물은, 소설에 나오는 다른 허다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너무나 납작하고 향기가 없다. 감정이 살아있는 생활인으로서의 이미지는 조금도 그려지지 않는다. 어찌나 무미건조한지, 주요 캐릭터의 매력에 집중하여 스토리를 따라가는 데 익숙한 나같은 타입이라면 독서가 영 원활하기 힘들 정도다. 그러나 과학/과학자의 현신이라는 관점으로 보면 사정이 달라진다. 빅터 헌트는 과학이라는 주인공이 작동하는 기제의 가장 이상적이고 효율적인 정점을 표상한다. 논리, 이성, 합리성, 끝없이 진리를 추구하는 겸허한 정신과 편견에 구애되지 않는 자유로운 상상력까지. 


근미래, 달에서 우주복을 입은 인간의 유해가 발견되는 데서부터 모든 일이 시작된다. 달에 이미 많은 기지들이 건설되고 사람들이 무시로 오간 지도 오래라고는 해도, 인종적인 특징이며 발견된 위치에 이르기까지 이 유해에는 이상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그리하여 동위원소 분석을 통해 밝혀진 진실은 온 지구를 충격으로 몰아넣는다. 그 사체, 일명 찰리는, 무려 5만 년 전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한편 목성의 위성 가니메데에서는 얼음 밑에 파묻혀있던 아주 오래된 우주선이 발견된다. 계통학적으로 명백히 외계로부터 온 것이 분명한 탑승자의 시신과, 지질학적인 연대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아득한 과거 지구의 동식물 표본을 가득 채운 채로. 



이 각기의 발견을 엮어 미스테리를 풀어가는 과정은 한편의 액션활극과도 같다. 그 액션의 무대가 여기저기의 연구소들과, 이 사람 저 사람의 머릿속들이기는 하지만. 찰리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으며 어떤 경위로 그 불모의 위성에서 발견된 것인지, 뜬금없이 목성의 위성에서 발견된 우주선과 외계인의 정체는 무엇인지, 진실을 파악하기 위해 수많은 과학자들이 팔을 걷어붙인다. 생물학, 천문학, 지질학, 수학, 물리학부터 인류학과 언어학에 이르기까지, 제각기 다른 전공의 사람들이 공동의 목표를 향해 달려든다. 각자의 전문분야를 연구하고 서로 간 학설의 정합성을 맞추어보고, 논쟁하고, 비판하고, 수정하고, 다시 새로운 가설에 입각해 연구를 전개하는 과정이 부단하게 반복된다. 그 대결과 협업을 통해 착착 논리적으로 퍼즐이 맞추어져가는 걸 지켜보는 게 이 소설의 가장 큰 즐거움일 것이다. 


이 ‘연구소 활극’에서 갑옷을 두르고, 칼을 맞대고, 불똥 튀게 합을 겨루거나 사이좋게 어깨를 겯는 주요 인물들에게는 성격 불문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과학적인 정합성 앞에 깨끗이 승복할 줄 안다는 점이다. 사람은 사람이기 때문에 현실세계에서는 쓸데없는 아집과 자존심 싸움이 없기가 힘들지만, 적어도 이 소설이 이상적인 과학자의 자세를 그리고 있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과학자에 대한 소설의 이런 전제는 내 개인적인 기억을 아련하게 환기시킨다. 


+ + +


나의 아버지는 학교에서 화학을 가르치셨다. 직장에서 어떠신지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낡은 사진앨범 안에서 만화영화 속 미치광이 박사처럼 흰 가운을 입고 비커와 스포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아버지의 사진을 본 기억은 있다. 악당의 트레이드마크인 폭탄 맞은 헤어스타일과 똥글뱅이 안경이 없으니 물론 정체가 헷갈릴 일은 없었다. 집안에는 항상 아버지 일감의 잔재가 여기저기 흩어져있었다. 나는 화학교재나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영문 잡지를 책받침 삼아, 화학식과 분자모형이 복잡하게 적혀있는 A4 보고서의 이면지에다가 고인돌가족과 꼬마자동차 붕붕과 빨간머리 앤 따위를 그리면서 자랐다. 

  


온 가족이 둘러앉은 저녁 식탁에서, 아버지는 가끔씩 과학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나는 그게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점잖고 말수가 적은 데다가 낮고 온화하여 사람 졸리게 만드는 음색으로 악명도 높으신 분이, 그런 날이면 목소리에 은근히 열기도 띠었다. 졸린 목소리라니, 대체 누가? 어떤 날은 나물 반찬에 든 화학성분 설명이, 어떤 날에는 오래된 과학사 이야기가 넋을 쏙 빼놓았다. 동생과 내가 발라먹던 갈치 토막에 멍하니 젓가락을 얹은 채 벤젠의 분자식 발견 전설이나 빅뱅이론 이야기에 귀를 쫑긋거리고 있으면, 밥상 식어가는 걸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던 엄마로부터 ‘당신 때문에 애들이 밥을 안 먹는다’는 진반농반의 불호령이 떨어지곤 하였다.


『별의 계승자』가 환기시킨 건 그 중 하나의 저녁식탁이다. 아버지가 어느 늙고 명망 높은 과학자의 일화를 들려주신 날이었다. 젊은 날 세운 업적으로 학계에서 인정받으며 평생을 고고히 살아왔던 과학자가, 늘그막 참석한 학회에서 젊은 신진이 자신의 이론을 논파하는 걸 듣고, “내가 틀리고 당신이 맞소”라고 깨끗이 승복했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그 학자의 이름이나 시대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이야기를 들려주던 순간의 아버지 표정은 선명하게 기억한다. 항상 차분하고 조곤조곤하시던 분답지 않게, 그때 그분의 음성, 그분의 눈빛에는 온풍에 깃털이 붕 떠오르는 듯한 부드러운 상승감이 깃들어있었다. 어린 눈에도 독특하게 캐치된 그것은 아마도 자부심, 또는 긍지 같은 것이었다. 긍지란 소속과 연결로부터 발생하는 감정이 아닌가. 한때를 풍미했으나 이제는 폐기되어버린 이론을 주창했던 늙은 서양 남자와 나의 부친을 하나로 묶고 연결하는 것, 그리하여 『별의 계승자』를 읽게 된 훗날 소설 속 과학자들을 지켜보며 십수년 전 그 표정을 회상하게 만든 그것은, 거대한 진리 탐구에의 열정을 자신 앞에 앞세우거나, 최소한 그러한 태도를 추구하는 감각이었다.  

  

그랬던 아버지를 떠올려보면, 창조학회 소동에 대한 그분의 감상이 어떨지도 익히 짐작이 간다. 그 자체로 추구해야 할 진리를 도구화하는 것, 전혀 다른 가치를 포장하는 데 이용할 뿐 아니라 심지어 곡해하기 까지 하는 행태가 과학자로서의 긍지를 훼손시켰으리라는 사실은 명약관화다. 덧붙여,  『별의 계승자』에 기본으로 깔려있는 것은 진화에 입각한 사고방식이다. 학자들이 연구와 논박 속에서 진화 속 잃어버린 고리를 찾고, 인류 이전 태양계의 역사를 추론해내고, 인종 교체의 미스테리를 풀어내는 전체의 줄거리 속에서 진화이론을 들어내고 나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다. 이 소설의 후속편 출간 소식이 창조학회 소동의 대칭적 사건으로 느껴졌던 건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글_윰(SF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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