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어둠의 속도』 - 통조림 뚜껑을 따다

『어둠의 속도』 - 통조림 뚜껑을 따다


통조림 고등어는 기분이 어떨까. 비좁은 어둠 속에서 옴쭉달싹 못 한 채, 동그란 눈을 희번덕이고 싶어도 반사할 빛 한 점이 얻지 못한다는 것은. 단단하게 밀봉된 어둠 속에선 시간도 아주 느리게 흐를 것이다. 흐르는 용암이 굳어가는 속도로, 아주 느릿느릿. 




단언컨대 나는 통조림 고등어의 기분을 안다. 필요한 앎을 박탈당한 채, 정보로부터 소외당한 채, 무지(無知)의 영토로 유폐되어 있었던 경험이 있다면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 먹음직스럽게 조리된 고등어처럼, 우리는 무지한 채로 말끔히 처리되고 데쳐져서 깡통에 담겨 보존된다. 


깡통을 흔들고 툭툭 건드리는 시그널들이 있게 마련이다. 어쩌면 통조림의 뚜껑을 열고 빛을 보여줄 작은 정보의 파편들이. 어둠 속에 갇힌 뇌는 미친 뻥튀기 장수 같아서, 감지된 데이터들을 닥치는 대로 증폭시킨다. 이거 중요한 신호 같지 않아? 뻥! 이것도 중요한 신호 같지 않아? 뻥! 이것도 뻥! 저것도 뻥! 아까 지나간 그것들도, 뻥! 뻥! 뻥! 


모든 소리, 모든 촉감, 미풍같은 냄새 한 올에까지 ‘의미’가 부여되는 건 피곤한 일이다. 감지된 데이터들이 집채만하게 뻥튀기 되어 너도나도 머리를 들이미는데, 어느 것이 유의미한 신호이고 어느 것이 흘려보내도 될 쭉정이인지, 판별해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정상과 비정상, 평범과 비범, 모두가 헝클어져버리는 깡통 속에서는 삶이 무겁고 갑갑해진다. ‘이런 게 왜 정상이지?’ ‘이건 왜 이상한 거지?’ 새삼스러운 의문들을 애써 숨기며, 관습적인 행태들을 눈치껏 흉내나 내는 것이 최선이 된다.   


나에게 깡통에 잠겼던 어둠의 경험은 한정적이고 한시적인 것이었다.

루에게, 인생이란 통째로 그런 것이었다. 


『어둠의 속도』의 주인공 루 애런데일은 어느 모로 보아도 SF의 주인공에 적합해 보이는 인물이 아니다. 치약광고처럼 빛나는 미소로 승무원들을 사로잡는 바람둥이 우주함장도 아니고, 탁월한 유머감각으로 상황을 타개해나가는 영리한 우주비행사도 아니다. 천재도 아니고, 영웅도 아니고, 외계인도 아니고, 첩보원도 아니다. 




그는 그저, 한 대기업의 연구원이다. 회사에서는 복잡한 패턴을 읽어 분석하는 일을 한다. 내향적인 성격에 차분하고 진지하고 예의바른 사람이다. 자기 집에서 혼자 살고, 자가용으로 출퇴근하며, 취미로 펜싱을 즐긴다. 부모님은 돌아가셨지만 따뜻하고 충실한 오랜 친구들이 있고, 내심 좋아하는 여자도 있다. 야무지게 집안일을 하고, 항상 매무새를 단정히 하며, 일요일에는 교회에 나간다. 그에게는 대단한 야심도 없다. 스스로 꾸려가고 있는, 단조롭지만 규칙적인 소시민적 일상이면 충분하다고 여긴다. 이제 당신은 한쪽 눈을 찡그리며 톤을 높여 반문하고 싶을 것이다. 


“SF소설의 주인공이라고? 에이, 그냥 보통 사람 같은데?”

맞다. 그는 그냥 보통사람 같다. 하지만 그는 보통사람이라고 불리지 않는다. 자칭으로도, 타칭으로도, 절대로. 

     

루는 자폐인이다. 1차 진단 자폐 스펙트럼 장애/자폐증. 감각통합장애. 청각정보처리장애. 시각정보처리장애. 촉각방어… 그의 소맷자락을 유심히 살펴보면, 특수 접착제로 끈적끈적하게 눌러붙여놓은 것만 같은 이런 꼬리표들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적절한 치료법과 양육을 통해 ‘정상인’들과 어울려 살 수 있는 정도가 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통’이라던가 ‘정상’과 같은 라벨이 그에게 주어졌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많은 자폐인들이 그렇듯, 루가 세상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보통의 사람들과 좀 다르다. 그는  어둠에 잠긴 통조림 고등어의 뇌, 또는 뻥튀기 장수 같은 뇌를 가졌다. 빛, 소리, 냄새 같은 사소한 것들로부터, 그는 응당 보통을 훨씬 넘어서는 과도한 정보 값을 읽어낸다. 반대로, 사람들의 표정, 눈짓, 관용어 같은 것들에서는 도통 패턴이 읽히지 않는다. ‘모르면 외워야지’. 우리가 수능을 공부하듯이 그는 정상적인 생활을 공부해야만 했다. 보통 사람들, 이른바 정상인들과 어울려 살기 위해, 그는 경련과도 같은 반복행동을 억제하는 방법, 냄새나 소리에 새되게 반응하지 않는 방법, 멍청하고 텅 빈 인사말에 역시 무의미한 인사말로 호응하는 방법 등을 외워 익혔다. 외워 써먹으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게 마련이다. 정상과 비정상의 그 간극을 그는 빛과 어둠의 유비로서 끝없이 숙고한다. 


“정상인들은 어떻게 느낄까? 중학교 과학 시간에 했던 실험을 기억한다. 비스듬히 놓은 화분에 씨를 심었다. 식물들은 줄기가 어느 쪽으로 굽어지든 간에, 빛이 있는 방향으로 자랐다. 누군가 나를 비스듬히 놓은 화분에 심었던 걸까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 363쪽




그늘에 뿌리를 둔 채 빛을 향해 몸을 뻗는 굴광성 식물처럼, 루는 평생 정상성을 향해 끊임없이 제 존재를 휘어왔다. 그러나 정상은, 혹은 비정상은, 얼마나 서로 구분될 수 있는 개념들일까? 소설에서는 거듭하여 그 경계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이를테면 루에게는 적들이 있다. 그의 장애로 인해 불이익을 입고 있다고 여기는 소위 ‘정상인’들이다. 회사에 새로 부임한 상급자인 크렌쇼는 자폐인들이 회사 비용구조에 해악을 끼친다고 생각해 말도 안 되게 부당한 해고 공작을 벌인다. 펜싱 모임의 돈(Don)은 루가 동정을 빌미로 제 친구들을 가로채갔다며 저열하고 폭력적인 복수 행각을 벌인다. 그들은 과연 얼마나 ‘정상’이었나? 쳇머리를 떨지 않고,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말을 더듬지 않는 그들이 정말 루보다 더 정상이라 할 수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그들보다는 루를 ‘비정상’의 영역 더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는다. 비정상인 이들이 서성이는 곳, 그곳은 어둠의 영토다. 빛이 없는 곳. 빛이 아직 도달하지 못한 곳. 이런 비유를 사용할 때, 루가 자신의 장애를 비하하는 것은 아니다. 앎을 앞선 무지가, 자신의 존재를 결정짓고 있다고 느낄 뿐이다. 

  

“어둠은 빛이 없는 곳이죠. 빛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곳이요. 어둠이 더 빠를 수 있어요- 항상 먼저 있으니까요.”  - 142쪽   


소설의 배경이 되는 근미래는 자폐 치료법이 개발되어 더 이상 자폐인이 생기지 않는 시대다. 루는 마지막 자폐인 그룹에 속한다. 안타깝게도 완벽한 치료법이 알려지기 이전에 태어나 성장한 세대였던 것이다. 그가 받은 치료도 퍽 진보된 것이어서 그가 이만큼이라도 앞가림 하며 살 수 있게 만들어주었지만, 완치의 혜택까지는 루의 몫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자폐의 역진치료법이 연구 개발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그의 평온하던 일상에도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어둠이 더 빠르지만, 빛은 그 어둠을 따라잡는다. 그리하여,

똑똑. 


암흑 밖에서 마침내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연구개발중인 새로운 자폐치료법이 문 앞에 당도한 것이다. 인간의 자폐와 유사한 증상을 보이던 침팬지의 역진치료에 성공했다는 들뜬 소식이 전해진다. 문틈으로 희미하게 빛줄기가 비친다. 

‘그러니까 루, 정상인의 세계로 건너오는 모험에 동참하지 않을래?’

이제, 루가 대답해야 할 순간이다. 문을 열 것인가, 말 것인가. 문을 열면 빛 속으로 나설 수 있을까? 아니면, 그 한 발 뒤, 어둠보다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떨어져 내리게 될까?


가만히 가라앉은 통조림 속 어둠에도 미덕은 있다. 그것은 최소한 익숙해진 평화를 보장해준다. 문을 연다는 건 그 안온함을 희생하겠다는 각오이며 동시에 불가역적인 변화를 끌어안겠다는 선언이 된다. 사랑이 사라지고, 우정이 변하고, 새로운 어둠이 따라오더라도 후회 없이 제 선택을 책임지는 것. 빛을 앞지른 어둠을 적대하지도 미워하지도 않는 것. 그저 빛을 향해 묵묵히 걸음을 옮겨 나가는 것. 


나는 내 통조림의 뚜껑이 열리던 날을 기억한다. 그 찐득찐득한 어둠을 찢으며 빛이 확 끼쳐 들어오던 순간을. 무지가 사라진 자리에 눈부시게, 삽시간에 앎이 들어찼다. 확실히 지(知)가 항상 축복인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종종 고통과 욕지기, 후회마저 뒤따른다.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하다. 긴 세월 곤죽같이 정체되어 있던 시간은 빛과 더불어 일렁이는 아지랑이로 피어오른다. 통조림 바깥의 세상으로 외연을 확대할 가능성이 팝콘처럼 팡팡 터져오르기 시작한다. 


저 밖에는 어둠이, 우리가 아직 모르는 어둠이 있다. 어둠은 언제나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어둠은 언제나 빛보다 앞선다. 예전의 루는 어둠의 속도가 빛의 속도보다 빠르다는 것을 불편해했다. 지금의 나는 그 사실을 기쁘게 여긴다. 왜냐하면 그것은 빛을 쫓는 한, 나는 영원히 끝나지 않으리란 뜻이기 때문이다. 

이제 내가 질문을 던질 차례다. p553


누구에게나 어느 정도로는 한발을 담그고 있는 어둠이 있다. 그것이 우리의 숙명이라면, 빛을 쫓는 당당함 역시 그러할 것이다. 루처럼. 언제나 루가 그래 온 것처럼.




돌이켜보니 저는 이 소설을 거의 일이 년에 한번 꼴로 다시 읽어온 것 같아요. 굉장히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읽을 때마다 감회가 달라지는 것도 신기하고요. 


큰 사건이 별반 없는 데 비해 분량이 꽤 됩니다. 아마 루의 내면묘사가 책 두께의 상당 지분을 차지할 거예요. 일상 속 사소한 데이터들을 모아 찬찬히 집요하게 캐묻고 캐묻는 자폐인 특유의 사고 과정들이 지독히도 세세하게 표현되거든요. 그런데 이게 절대 지루하지가 않아요. 오히려 굉장히 흥미진진하죠. 자폐인 루의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것들 상당수가 기실 얼마나 이상하고 주먹구구인지 새삼 다르게 조망되는 효과가 일어나서 더더욱 그렇습니다. 장애인이라는 색안경을 벗고 있는 그대로 바라볼 때, 루라는 한 사람이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그 자체로 얼마나 매력적인 존재인지도 확연히 느껴지고요. 이런 이입이 가능한 상대를 두고, 그와 나 사이 어떤 사소한 차이를 절대적인 장벽으로 침소봉대할 수 있을지 깊은 회의감도 듭니다. 


 저자는 실제로 자폐인 자녀를 둔 어머니입니다. 『어둠의 속도』는 20년에 달하는 초밀착 관찰과 양육의 경험을 바탕으로 써내려간 작품이라고 해요. 경이로운 수준의 공감과 이입을 불러일으키는 그 치밀한 묘사가 어떤 시간과 애정 속에 배태된 것인지 생각해보면 마음마저 아득해집니다. 


글_윰(SF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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