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나의 일, '밝은 덕'을 밝게 만들기

나의 일, '밝은 덕'을 밝게 만들기



천하에 ‘명덕’을 밝히고자 한다. 세 글자로 쓰면 ‘평천하’에요. 그러니까 ‘수신제가치국평천하’는 누구의 일이다? ‘명덕’을 밝히는 ‘나’의 일이고 ‘명명덕’을 추구하는 내가 ‘신민’을 통해 ‘지어지선’에 이르는 것이다. 모두 ‘나’가 중심에 있지요. 물론 ‘수신’하는 ‘나’이지요. 이것이 정치 철학으로 가면 맹자의 왕도(王道), 인자무적(仁者無敵)이 되지요.

우응순, 『친절한 강의 대학』, 북드라망, 44쪽




『대학』의 첫문장은 ‘대학의 도는 명덕을 밝히는 데 있으며, 백성을 새롭게 하는 데 있으며, 지극한 선의 경지에 이르러 머무르는 데 있다’이다. ‘명덕’은 ‘밝은 덕’인데 이걸 또 ‘밝힌다’. 말하자면, 이 ‘밝은 덕’이 무언가에 가려져 있다는 말. 사람이라면 누구나 날 때부터 ‘밝은 덕’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살다보면 이리저리 때가 묻어 밝은 덕이 가려져 있다는 말씀이겠지. 열심히 닦고 닦아서 ‘밝은 덕’이 드러났다고 치자, 그 다음엔 어떻게 될까? 거기에 머물러야 한다. 머물러야 하기 때문에 유학은 ‘경거망동’을 가장 경계한다. 까딱하면 그 동안 쌓은 덕을 한방에 날리고 만다.


사실 유학의 여러 담론들 중에서 내가 가장 감복하는 부분은 모든 개혁, 개선의 출발점이 ‘나’에게로 모인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끝에도 또한 ‘나’가 있다. 그러니까 시작부터 ‘끝판왕’을 불러내는 셈이다. 역사적으로나 인간의 심리적인 면에서나 ‘남’을 두고 고칠 점을 찾기란 너무나 쉽다. 계몽주의나 기타 이른바 ‘변혁적 사상’들을 보아도 그렇다. 어떤 ‘객체’를 앞에 놓고 요모조모 뜯어보면서 이걸 고치고, 저걸 고치고 하면 이렇게 된다는 형식을 취한다. 쉬워서 그렇게 한다기보다는 그게 자연스럽기 때문에 그런 것이리라. 더군다나 그게 틀렸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러나 거기에는 항상 ‘나’의 문제가 빠져 있다. 세계가 이렇게 저렇게 바뀐다 한들 내가 바뀌지 않으면 말짱 헛것이 되고 만다. 더불어 바깥에서 문제를 찾는 습관 혹은 관성에 따라 바뀐 세계의 바깥에서 문제를 찾고 있을 가능성이 여전히 높다. 그래서 ‘남 탓’이 습관이 되고 만다.


여전히 잘되지 않는 것이기는 하지만, 나는 이른바 객관적인 모든 지표들이 ‘내 탓’이 아님을 가리키고 있더라도 가급적이면 ‘내 탓’으로 돌리려고 노력하곤 한다. 대개의 경우 그렇게 할 때 더 빨리 화가 가라앉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 때문에 나와 직접 맞닿아 있는 주변이 더 평안해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일단 내가 바뀌면 나와 맞닿은 부분들도 밝아진다. 최소한 더 어두워지지는 않는다. 이렇게 놓고 보면 이쪽이 바깥에서 나로 들어오는 길보다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게다가 어떤 목표를 이루는 데 있어서 더 쉬워보이기까지 한다. 곁가지로 한마디 더 붙이자면, 그렇기 때문에 특정한 사상들 간에 무엇이 옳다 그르다 할 필요가 없다고 느낀다. 차라리 각각의 것이 제시하는 길들을 다 다녀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게 아니라면, 직접 제 갈 길을 내면 그만 아닌가? 




『대학』의 담론에 비하자면 정말이지 너무 소박해서 이런 게 『대학』과 관련이 있나 싶을 정도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게 내 나름대로의 ‘지어지선’, 지극한 선, 밝은 덕에 머무르는 연습이다.


태어나 살면서 마주하는 ‘천하’는 어쩌면, 생각보다 좁다. 집과 집 바깥은 꽤 좁은 관계가 다 일지도 모르고. 그런 점에서 ‘평천하’는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수신’이 오롯이 나의 일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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