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몸, 내부를 말하다

 몸, 내부를 말하다
 
 
 
“난학(蘭學)이란 요컨대 어떤 어려움에도 끄덕하지 않고 사물을 여는 것이,
... 사물을 엶으로써 ‘내부’를 보고, ‘내부’에 있는 것에 대처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하는 지적인 주장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난학의 감각으로는 무엇이든 제대로 이해하려면
 내부를 열어 보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닫힌 채로는 어떠한 것도 지식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타이먼 스크리치, 『에도의 문을 열다』, 11쪽
 


개체와 개체적인 것
 
이제 본격적으로 근대 시기에 어떻게 우리가 집합체, 정치체로서의 몸을 생각하게 되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이른바 ‘근대’라는 시기에 대해 다양하게 정의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정치체(바디폴리틱)를 구성하는 논리에서도 이 시기가 하나의 변곡점이 됨은 분명하다. 즉 전통적인 공동체에서 근대적 사회나 국가로의 이동이다. 물론 이러한 과정을 공동체가 해체되면서 개체적인 것이 나오고, 이 개인들이 국가를 구성했다고 도식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테일러가 지적하듯이 사회적인 것을 개체적인 것의 합으로 읽어낼 때 우리가 쉽게 빠지는 오류중 하나가 전통적인 ‘공동체’의 소멸과 이를 대가로 한 ‘개인주의’의 부상으로 읽어내는 경향이다. 그러나 그런 식의 도식적인 이해는 간편할지 몰라도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어떻게 전통적인 공동체에서 벗어나 개체적인 것이 등장하게 되었는가? 이 질문에 갑자기 공동체보다 개인의 이익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갑자기 등장하게 되었다는 식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따라서 공동체와 개체는 같이 간다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할 것이다. 즉, 공동체가 해체되면서 개인이 등장하는 것이라기보다 기존의 공동체에 대한 상에서 새로운 집합체에 대한 상으로 변하면서 개체적인 것이 등장한다. 따라서 공동체에서의 집합적 신체상이 어떻게 변화했는가, 어떤 신체에서 어떤 신체로 이동하는가를 보는 것이 중요할지 모른다. 어떻게 보자면 개체, 사회, 국가는 항상 존재해왔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떤 독특한 메커니즘 속에서 ‘근대적’ 의미의 개체적인/사회적인 것/국가적인 것이 등장한다. 즉 조건과 배치 속에서 이들이 작동하는 방식을 보아야 한다.
 


 
물론 여기서 개체적인 것은 개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이 존재했다 하더라도 자신을 개체적인 것으로 자각했는지는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개인’이라는 관념 이전에 ‘개체적인 것’이라는 발상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는가를 보아야 하는 이유이다. 이때 개체적인 것이란 우리가 쉽게 생각하듯이 자신의 내면에 침잠하는 주체로서의 개인이라기보다, ‘개(個)’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즉 새로운 유형의 관계방식을 의미하는 것에 가깝다.
 
“우리는 ‘개체적인 것’이라 할 때 무엇이 개체적인지 직관적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개체의 개념에는 모호한 구석이 있다. 개체를 규정해 주는 분절 선은 정확히 어디에서 그어져야 하는가? 우리는 개인을 개체적으로 여기기도 하지만 국가를 개체적으로 여기기도 한다. 따라서 개체란 분할하면 더 이상 본래 자신이 아니게 되는 모든 것이 개체이다. 또한 정치적으로 볼 때 개인이 개체적이 될 수 있다는 발상은 새로운 것이었다. 권리 역시 집합적이거나, 위치에 따라 혹은 상황에 따라 나오는 개념이지, 소유형으로서 단독자 개인에게 보편적인 정치적 권리로 파악되는 것은 이 개체적인 것이라는 발상 후에야 가능했다.”
─이정우, 「‘이것’ 되기로서의 주체화」, 『인지와 자본: 인지, 주체화, 자율성, 장치의 측면에서 본 생명과 자본』
 
따라서 개체적인 것의 등장은 그동안 없었던 개인이 등장했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관계설정에 대한 문제다. 그렇다면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는가? 이를 신체관을 통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어떻게 개체라는 것이 전통적 관계 속에서 해체되고, 새로운 관계망으로 들어가는지를 말이다.
 
 
해체의 시대
 
먼저 근대라는 새로운 시대의 신체관이 동아시아에서 어떻게 전개되고 있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를 『해체신서』(1774)와 『양생훈』(1713)을 통해 스케치해보자. 두 책은 비슷한 시기에 쓰였으며, 각각 새로운 신체관의 시작과 전통적 신체관을 대표하는 저작이라는 점에서 비교의 의미가 있다. 이 시기는 이른바 ‘문명의 충돌’ 이전에 ‘신체관의 충돌’이라 불릴 만한 것이 일어났던 시기였던 것이다.
 
잘 알다시피 『해체신서』는 근대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등장한 해부학 도서이다. 1774년에 번역된 이 책은 독일인 쿨무스(Johann Adam Kulmus, 1689-1745)가 1722년에 펴낸 책 Anatomische Tabellen의 네덜란드어 번역서를 스키타 겐파쿠(杉田玄白)가 일본어로 번역한 것이었다. 『해체신서』는 서양의학의 본격적 수용을 알리는 책으로 평가되는데, 하지만 이 책이 단순히 의학 차원에서 새로운 서양의학을 도입했다는 의미로 그치는 것은 아니었다. 근대 일본의 대사상가였던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가 사비를 들여서 이 책을 재출간한 것은 이 번역본이 시대성을 대변하고 있는 책이었기 때문이었다.
 


 
후쿠자와는 『해체신서』의 재판(1890)의 서문을 직접 쓰고 있다. 서문에서 후쿠자와는 이 책이 에도 대지진 당시 화재로 소실되어 ‘천재(千載)의 유감’이었는데 메이로쿠샤에 함께 참여하고 있던 간다(神田孝平)라는 친구가 혼고 거리를 거닐다가 성당 뒤편의 노점에서 우연히 사본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때 성당 뒤편의 노점에서 발견했다는 장소는 의미심장하다. 이 성당은 다름 아닌 공자에게 제사 지내는 사당인 유시마 성당(湯島聖堂)이라고 추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어쩌면 기존의 전통 질서에서 새로운 질서로 변용을 의미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삽입된 것일지 모른다. 이 책을 건네받은 후쿠자와는 친구와 둘이 마주 앉아 반복해서 읽고, 그때마다 함께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말을 잃었다고 적고 있다.
 
이 서문에서도 볼 수 있듯이 후쿠자와에게 『해체신서』는 단순히 근대 의학의 출발점이라는 의미만을 갖는 것은 아니었다. 후쿠자와가 서문에서 이 책은 동양의 한 나라였던 일본이 백 년 전에 이미 ‘서양문명을 배태’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강조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후 『해체신서』 번역에 관한 이야기는 일본의 근대 교육 과정에 편입되어 각급 학교 교과서에 일제히 실리게 된다. 신체관의 충돌은 단순히 신체를 바라보는 관점이 전통적인 것에서 근대적인 것으로 바뀌었다는 문제만이 아니라, ‘문명의 전환’이라는 관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해체신서』의 저자 겐파쿠는 번역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오진(應神) 천황 시대에 백제의 왕인이 처음으로 한자를 전하는 서적을 갖고 건너와 이후 대대로 천황은 학생들을 중국에 보내 그쪽 책을 공부하게 했다. 긴 세월이 흐른 지금에 와서야 비로소 한인(漢人)들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한학(漢學)이 가능하게 됐다. 지금 처음 시작한 이 업(業)이 갑자기 어떤 성과를 올릴 수 있겠는가? 다만 인신형체(人身形體)라는 아주 중요한 것이 천재(千載) 동안 말한 바와 다르다는 사실의 대강을 어떻게 해서든 세상에 알리고 싶다는 생각 이외에 달리 바라는 바는 없었다.”
─스기타 겐파쿠(杉田玄白), 『난학시사(蘭学事始)』, 47∼48쪽
 
겐파쿠는 전통적 질서와 결별하고 새로운 의학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학문의 중심이 중국에서 서양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있음을 넌지시 밝히고 있다. 하지만 이는 사후적으로 저자 자신의 의도가 덧붙여졌을 가능성이 크다. 이 책은 『해체신서』가 번역된 지 40여 년이 지난 후에 그가 이 책의 번역의 의미를 밝힌 것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그의 의도가 실제로 어떠했는가를 떠나 겐파쿠가 밝히고 있듯이 이것이 새로운 시대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라고 인식했다는 점이다. 겐파쿠는 이렇게 말한다. “에도에서 이 학을 창업해 ‘후와케(腑分け, 장부를 가름)’라는 낡은 말을 새롭게 ‘해체(解體)’라는 말로 번역했고, 동료 중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난학’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쓰기 시작하면서 이윽고 일본 전역에서 자연스러운 통칭이 되기에 이르렀다.” 전통적인 ‘후와케(腑分け)’라는 용어 대신 ‘해체’라는 새로운 개념을 사용했다는 것이 네덜란드 학문을 뜻하는 ‘난학(蘭學)’이 융성하게 된 출발점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전통적인 용어를 대체해 새로운 용어를 개발했다는 차원만이 아니라, 논리 자체의 전환, 즉 새로운 시대로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라 여겨졌던 것이다.
 
 
몸을 본다는 것
 
그렇다면 그들이 해부에서 느꼈던 ‘새로움’은 무엇이었을까. 『해체신서』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 해부도다. 이는 원본에 삽입된 그림을 베낀 것으로 당시 신체관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회고록인 『난학사시』에서 일본과 중국의 책과는 다른 서양 해부도의 정묘함을 보는 것만으로 심지(心地)가 열릴 만큼 흥미가 있었다는 겐파쿠의 말처럼 당시 에도인들이 이 그림에 매혹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전통적 해부도에 비해 입체감이나 정밀감의 차원이 전혀 달랐던 이 그림이 주는 생경함은 묘하면서도 낯선 자극이었을 것이다.
 
겐파쿠는 “그 글자는 한 자도 읽을 수 없었지만, 해부도 속 내장의 구조[臟腑], 골격[骨節] 등은 지금까지 책에서 보거나 들은 것과 크게 달랐다. 이는 분명 실험을 하여 도설(圖說)한 것임을 알고 어떻게 해서라도 그 책을 구하고 싶었다”고 회상한다. 그러나 서양의 해부도를 보고 이것이 실제로 해부를 해서 그린 것임을 어떻게 알았을까? 실제로 사체를 해부한다고 해도 그것이 해부도에서 보이는 것처럼 깨끗하게 정돈된 모습이 아니었을 것은 예상 가능하다. 피 칠갑 되어 있는, 여기저기 꼬여있는 장부만이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본다는 것은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 아는 상황에서만 볼 수 있다. 우리는 객관적인 무언가가 있고 이를 있는 그대로 본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무언가를 어떻게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 있고 그 대상을 본다고 하는 게 맞을지 모른다. 따라서 겐파쿠가 사체를 해부해 보고 이것이 서양의 해부도와 일치하더라는, 지금까지 자신이 배워왔던 것이 틀렸고 네덜란드 학문이야말로 ‘실측궁리(實測窮理)’에 기반을 둠을 발견해 냈다고 회상하는 것은 하나의 만들어진 픽션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전통 의학이 실제 어떠했는지, 서양 의학이 어떠했는지, 무엇이 더 정확했는지가 아니다. 서양의학을 처음 도입하고자 했던 이들에게 기존 의학과 새로운 의학의 차이가 명확하게 다가왔다는 점에 있다. 더 정확히는 그렇게 차이를 인식했다는 점에 있다.
 
『해체신서』에서 겐파쿠는 자신의 작업의 의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중국의 치료법과 논설은 연구할수록 견강부회한 것이어서 밝히려고 하면 점점 더 어두워지고 바로잡으려 하면 점점 더 잘못되어 쓸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는데, ‘해부의 책’을 가져다 그 설대로 해부해 보니 하나도 어긋나지 않았다. 장부와 규관(窺關)​, 골수와 맥락(脈絡)의 위치와 정렬된 상태를 비로소 알 수 있게 되었으니 한설(漢說)은 틀리고 해부의 서적이 옳다는 견해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물론 한인에게도 해부의 법이 있었지만 후세 사람이 그것을 전하지 못하고 다만 찌꺼기만을 믿고는 고찰할 수 없는 말만을 하면서 수천 년이 흐르는 동안 끝내 진면목을 알지 못하게 되었다. 반면 해부는 양과(洋科), 서양의학의 핵심으로 네덜란드인이 정교할 수 있던 것도 이 해부학에서 비롯되었다고 결론 내린다.
 
 
자연과 분리된 내부
 
그런데 이 정교함은 흔히 평가하듯 단순히 정확성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정확함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내부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일지 모른다. 『해체신서』의 번역을 바로잡고 원서의 주를 보충한 『중정해체신서』(1826)에서는 내부와 외부의 구분과 내부의 중시가 더 명확히 드러난다.
 
 
“해부는 의도(醫道)의 큰 근본으로, 내과와 외과 및 여러 과에서 먼저 힘써야 한다. 무엇 때문인가. 의사가 만약 사람의 내부[內景]를 잘 알지 못한다면 질병의 원인을 살필 수가 없다. 질병의 원인을 알지 못하는데도 병을 치료한다는 것은 억측이며 터무니없는 일이다. 그 준칙을 잃은 자에게 무엇을 바라겠는가. 비유하자면, 선장이 나침반의 사용에 익숙하지 않으면 움직일 때마다 해로를 잘못 잡게 되는 것과 같다. 질병의 여러 증상은 모두 몸 안에 갖추어진 여러 물질과 기관이 본래의 형질이 변화되어 자연스러운 평상시 기능을 잃음으로써 발생한다. 그런 까닭에 의사는 마땅히 먼저 해부를 하여 실측함으로써, 그 본연의 형질과 자연스러운 평상 기능을 이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평상시의 기능을 잃고 변화를 만드는 원인을 고찰할 수 없다.”
─스기타 겐파쿠, 김성수 역, 『해체신서』, 94쪽
 
이때 몸 안은 나침반과 같은 기관에 비유된다. 내부의 기관들이 평상시 기능을 잃기 때문에 몸에 문제가 생긴다. 따라서 해부를 통해 실측함으로써 평상의 기능을 아는 일이 중요해진다. 이러한 사고는 당연한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신체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보자면 적지 않은 변화였다.
 
『해체신서』 이후 서양의학의 도입은 메이지 이후 사람들로 하여금 몸에 나타난 모든 현상은 신체 내부의 구조에 의해 독자적으로 지배된다고 생각하게 되는 발단이 되었다. 이전까지 사람들은 몸 바깥의 자연 세계에서 큰비를 내리거나 홍수가 일어나는 것과 같이 자연의 힘이 몸의 내부까지도 관철된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면 혈액이 몸 안을 이동하는 원리에 대해 심장이라는 펌프를 통해 혈액이 혈관을 순환한다는 생각은 메이지 이후에나 보급된 것이었다. 메이지 이전 사람들은 바다에 만조와 간조가 있는 것처럼 사람의 몸 안의 혈액도 같은 리듬으로 가득 차거나 밀려 나가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감기 역시 메이지 이후 들어서야 신체 내부에 감기의 원인인 물질이 침입해 감염되어 발병한다고 생각하게 되지만, 에도시대까지 이 병명은 풍(風)이라 불리며 문자 그대로 자연계를 교란하는 바람과 같은 현상이 몸 안에 생기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처럼 서양 의학의 도입과 함께 자신의 의지로 제어하고 통제할 수 있는 몸이 등장한다. 이전의 자연 혹은 외부에 내맡겨져 스스로 자율성을 갖지 못한 신체에서 이제는 외부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신체상이 그려지게 되는 것이다. 수동적이고 의존적인 신체에서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신체상이 떠오르는 배경에는 이 시기 신체의 안과 밖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가 있었다. 이는 내부와 외부의 지배관계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큰 변화였다. 신체의 내부가 신체의 표면에 나타난 모든 현상을 ‘결정하고 있다’고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들이 느꼈던 정확성의 놀라움 뒤에는 사물을 엶으로써 ‘내부’를 보고 ‘내부’에 있는 것이야말로 진리를 보여준다는 생각이 있었다.
 
반면 전통적인 동양의학에서는 안과 밖이란 구별될 수 없었다. 동양의학에서 망진(望診)은 겉을 살펴 병을 진단하는 것을 의미한다. 보아서 아는 것[望診], 들어서 아는 것[聞診], 물어서 아는 것[問診], 맥을 짚어 아는 것[切診] 네 가지 진찰법 중에서 가장 으뜸으로 쳤던 것이 보아서 아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 ‘본다’는 것은 단지 바깥을 본다는 것만이 아니다. 이는 바깥으로 드러나는 색을 보는 것이자, 생기를 보는 것이었다. 이러한 봄에 대한 사유에서 보듯이 안은 바깥과 구별될 수 없다. 이러한 관점 속에서 몸을 열어 보지 않고도 진단할 수 있다는 편작의 일화는 단순히 동양의학의 신비함을 말하기 위한 방식만은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몸을 열어볼 수 없던 것이 아니라 열어 보지 않으려 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의학은 고정불변의 과학적 사실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의학의 내용이 불변의 진리는 아니다. 그것은 어떤 세계관에 기대고 있느냐에 따라 진리라고 믿어지기도 혹은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되기도 한다. 이는 어떤 관점이 더 설득적이라고 생각되느냐에 따라 각각 다른 관점에서 신체를 보게 한다. 즉 세계관의 문제다. 신체관의 충돌은 그런 점에서 무엇이 더 과학적이냐 그렇지 않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신체 모델을 사유의 기반으로 할 것인가의 문제였던 것이다.​


글_김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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