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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닌하오 공자, 짜이찌엔 논어

『논어』라는 텍스트 - 배움에 뜻을 둔 자들의 책④

by 북드라망 2017. 5. 11.

『논어』라는 텍스트 - 배움에 뜻을 둔 자들의 책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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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朋), 멂(遠), 즐거움(樂)


有朋自遠方來(유붕자원방래). 不亦樂乎(불역락호). <논어>의 첫 문장 두 번째 구절입니다. 유붕. 벗(朋)이 있어서, 뭐 이 정도의 말입니다. 자원방래. 자(自)자는 ‘-로부터’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자(自)원방이라고 하면 ‘원방, 즉 먼 곳으로부터’라는 뜻이 되겠죠. 자/원방/래. 먼 곳으로부터 오니, 혹은 먼 곳으로부터 오면, 이라는 뜻입니다. 불역락호! 또한 즐겁지(樂) 아니한가! 즐거운 일이다, 라는 뜻이겠죠.

 

이 두 번째 구절에는 벗과 먼 곳, 그리고 즐거움이 계열화되어 있습니다. 첫째 구절이 학습-때(時)-기쁨인 것과 비교해보면 절묘한 댓구입니다. 유학의 벡터가 어쨌든 가까운 데서 먼 데로, 나에게서 남에게로 나아가는 것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기쁨(悅)과 즐거움(樂)은 점증적인 것으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꼭 그런 것도 아닙니다.

 

어찌 됐건 일단 여기에서 중요한 건 벗(朋)이라는 존재입니다. 아, 글쎄! 저기 어딘가에 갔더니, 키가 2m도 훨씬 넘는 한 꺽다리 아저씨가 있어요. 그 양반이 키도 크고 몸집도 그렇고, 생긴 것도 뭐 포쓰가 장난 아닌데, 같이 있는 사람들도 척 보기에 상태가 보통이 아닌 인사들이 득실득실 모여있는 거죠. 대체 이들이 왜 모여있으며, 모여서는 무엇을 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희한한 게 이들이 자기들끼리 아주 즐거워한다는 거! 이게 포인트입니다.

 

 

벗이라는 존재​


  

붕(朋)이라는 이 글자는 앞에서 본 새의 날개(羽)를 표현한 글자와 같은 방식으로 형성된 글자입니다. 아니 새의 날개에서 온 글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새의 날개는 한쪽이 다른 한 쪽을 도와주는 관계가 아니죠. 두 개의 날개가 하나인 겁니다. 마찬가지로 벗도 나의 존재적 결합체, 나의 존재적 완성이라는 이루는 존재라는 거에요. 그래서 연암은 벗을 ‘또 하나의 나’라고 불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논어>에 등장하는 이 벗이라는 말은 오늘날 우리가 보통 쓰는 ‘친구’와는 조금 의미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 현대인들은 같은 나이 같은 학교 같은 반 동창 등등 보통 친구라고 하면 그냥 같은 또래를 가리키죠. 하지만 그런 건 그냥 프렌드(friend)입니다. 이에 반해 <논어>의 붕은, 어떤 삶의 비전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동지(同志), 즉 지향점이 같은 사람들이에요. 난 적어도 이러이러한 것들만큼은 내 생활에서 타협하지 않고 살아야지. 최소한 내가 사는 지역공동체에서 이러이러한 정도만큼은 같이 지키면서 살아야지.... 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공자님이 또 우리를 아니 저를 감동시킵니다. 삶에 대해 내가 어떤 비전을 가지고 내가 살고 있는데, 그러한 비전들을 공유하는 벗들이 찾아온다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멋진 일인지 아세요? 저는 현재 공부 공동체 <남산 강학원>이라는 곳에서 활동 중인데요, 이곳에서는 이러저러한 공부 관련 프로그램 활동들이 있습니다. 충무로역에서 남산을 보고 곧장 산책하듯 올라오시면 됩니다. 저희 같은 건물에는 의역학을 공부하는 <감이당> 공부 회원들도 있고, 하여튼 많은 분이 저희 공간을 찾아와 함께 공부하고 생활합니다. 그런데 지금 공부하시는 분들 중에는 제주도에서 오신 분이 계세요. 매주 창원에서도 오시고, 대구에서도 오고, 청주에서도 옵니다. 지금 이 자리도 한 번 생각해보세요. 저도 먼 데서 왔습니다만, 또 이 안에서도 각각 가깝고 먼 데서 찾아온 분들입니다. 또한 이 먼 데라는 게 꼭 공간적 거리만도 아닙니다. 삶의 크기를 키워줄 동지들인 것입니다. 그만큼 스펙트럼이 넓어야 하고 다층 다양한 관계들이 펼쳐지겠죠. 이 먼 곳에서 찾아오는 동지들에는 이런 의미까지 포함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먼 곳에서 찾아오는 동지들


 

한편 이 두 번째 구절에서 사람들이 먼 데서 찾아온다는 이 말의 의미도 충분히 상상해보면 좋겠습니다. 요컨대 이 말은 단지 거리가 먼 데서 온다는 점만 강조되는 게 아닙니다. 먼 데서 사람‘들‘​ 아니 동지(同志)’들‘이 찾아오는 거고, 그 말은 결국 이 배움의 조직이 본격적으로 공동체적 관계로 펼쳐진다는 뜻이기도 한 것입니다. 예컨대 자로는 성읍 바깥에 살던 야인(野人)이었고, 자공은 이웃 나라인 위(衛)나라 출신입니다. 거리도 거리지만 두 사람은 공자님을 사이에 두고 나이 차가 서로에게 스물한 살의 차이가 있는 겁니다. 거주 환경도 다르고, 나라도 다르고, 나이도 한 세대가 넘어 차이가 ’먼‘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사람들이 모여 있다는 말입니다.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왜요? 이들이 왜 찾아오고 왜 모입니까? 공자님이 무슨 권력자도 아닌데 말입니다. 아는 게 많아서? 하하. 뭐 그럴 수도 있습니다만, 제가 보기에 그 이유는 이들이 각각 다른 삶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같은 삶의 방향이 일치했기 때문입니다. 선수는 선수가 알아보는 법이거든요. 자연스럽게 서로 끌리고 찾게 되겠죠. 그런데 우리 연구실, 강학원에 와서 공부하시고. 여기 또 좋은 강의가 있으니 서로 찾아오시고... 아니 꼭 제 강의가 좋아서 먼 데서 찾아오셨다는 뜻은 아니고요. 비유입니다. (웃음) 어쨌든 거기 가면 제 얘길 들어주고 함께 이런 고민을 나눌 사람들이 있다고 하니 저도 강의하러 오는 거고요, 또 이런 강의가 있다는 걸 알고 찾아들 오신 거죠. 그리고 함께 공자와 <논어> 이야기를 나누어 보는 겁니다. 배우고 익히는 기쁨과 공부를 매개로 동지가 된 이 강의실의 활기. 이게 얼마나 즐거운 일입니까. 안 즐거운 게 이상한 거 아닌가요? (웃음)

 

 

지인(知人), 군자(君子)


그러고 보면 공자님 말씀은 너무 지당한 말씀이에요. 너무 당연해서 우리가 잊는 거죠. 그 가치를.

이제 오늘 강의도 마무리할 때가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조금 건방진 소리를 하자면, 저는 사실 어떤 의미에서 <논어>의 한 주제가 여기에서 다 드러났다고 생각해요. 여기 어디냐구요? 지금까지 한 두 구절이요. 물론 건방지게 말씀드리는 거예요. 제가 생각할 때 <논어>가 말해주는 윤리적 비전이라고 할까요. 즉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입니다.

 

저는 이 부분에 관해서 만큼은 불교나 도가 쪽에 비해 유가의 확실한 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수천 년간 유가가 책임져온 부분이 있다는 겁니다. 아니 확실히 유가가 출중하다고 생각합니다. 뭐냐. 간명합니다. 우리는 배우는 존재들이다, 라는 거죠. 산다는 것은 배운다는 것이고, 배움은 그것이 내 것으로 삼는 끝없는 과정이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배우는 그것들은 나 아닌 다른 사람들과 더부는 관계 속에서 펼쳐지는 것이다. 멀면 멀수록, 많이 펼칠수록 즐거운 삶이 될 것이라는 것. 제가 보기엔 <논어>의 윤리적 명제는 이 두 가지면 다 된 것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어 있죠? 세 번째 구절이 있어요.

 

인부지이불온(人不知而不慍). 다른 사람들이 나(우리)를 알아주지 않아도[부지] 성나지 않으면[불온]. 불역군자호(不亦君子乎). 군자가 아니겠는가.

 


 

이 세 번째 구절은 노파심에서 붙인 게 아닐까 싶어요. 포인트는 몇 가지 있습니다. 일단 인(人). 이건 타인들. 다른 사람들이란 뜻이라고 앞에서 말씀드렸죠. 그리고 부지(不知). ‘알지 못하다’, 즉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라는 뜻입니다. 이 부분은 <논어>에서 아주 중요한 문제이니 잘 기억해두시기 바랍니다. 요컨대 <논어>에는 여러 차례 ‘다른 사람이 나를 알아봐 주지 않는 것을 근심하지 말라’라는 식의 문장이 되풀이됩니다. 제가 얼핏 기억하는 것만도 세 차례 이상 나오는 것 같아요. 그러니 사실 매우 강조되는 주제였던 셈이죠. 요컨대 사람을 알아보는 문제, 가 문제가 되고 있었던 시대인 겁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공자 계열의 제자들이 전통적인 권력 집단이나 귀족 층이 아니었다는 의미와도 관련이 있을 테고(결국 누군가 능력을 알아봐 주고 선택해줘야 하는 문제이니까요), 또 한편으로는 공자가 이제까지의 시대적 흐름에 맞서 다른 가치를 요구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공자 자체가 기존의 권력 집단 외부의 인물이었으니까요.

 

그리고 그다음은 불온(不慍), 즉 ‘성나지 않으면’이라는 대목입니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나지 않는 것입니다. 뭘 알아주지 않아요? 의롭게 사는 것이죠. 뭐가 의로운 것인가? 떳떳한 것이 옳은 것이죠. 그럼 어떻게 떳떳하죠? 자기의 옳음을 실천하며 살면 떳떳한 것이죠. 배우고 익히고! 뜻을 함께하는 벗들과 일을 도모하고! 그냥 그렇게 사는 건데, 이걸 또 사람들은 수군거리는 거죠. “공자네 학교 재들은, 자기들만 좋아. 자기들끼리 기쁘고 즐거워...” 이러면서 비아냥거리기도 하고, 뭐 하여튼 기타 등등 하는 거죠.

 

그럴 때 발끈하거나 이럴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또 이런 경우도 있을 수 있어요. 내가 보기엔(이게 중요합니다. 내가 보기엔!) 분명 나보다 못난 인물인 어떤 사람이 출세하는 것, 출세해서 권력에 빌붙어서 부귀해지고 돈도 많이 벌고, 막 위세 부리고 그러는 거. 이런 모습을 보면서도 굳이 ‘왜 나는 알아주지 않는 거야, 내가 더 잘났는데’ 이러면서 성이 나지 않아야 합니다.(웃음)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것. 제 식으로 이야기하면, 자기 삶의 가치를 선택하는 기준이 자기에게서 나와서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것도 없이 스스로가 건강한 삶의 주인이 될 수 있으면, 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사람을 군자(君子)라고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논어>에서 공자가 강조하는 윤리적 주체로서의 군자입니다. 군자는 그런 사람들이라는 거에요.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그까짓 것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것. 이것을 아Q의 ‘정신 승리법’과 착각하시면 안 돼요. 아큐의 정신승리법은 패배를 패배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약자의 방식이지만, 군자의 윤리는 저 스스로 가치를 생산하는 것이기 때문에 누군가의 외부적 가치로 자신의 삶을 재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누구나 다 비난할 만한 것을 가지고 비난하고 있는데도, “난 괜찮아 난 괜찮아 나만 좋으면 돼-” (웃음) 이게 아니에요. 배우고 익히고 유붕자원방래 하는 관계에서 이래야 하는데 아무도 안 친하고 혼자서 막 골방 속에 있으면서 “난 괜찮아 난 괜찮아 난 오늘 좋아서 이러는 거야-” (웃음) 그러는 거 아니라는 겁니다.

 

군자(君子)라는 이 말은 공자를 만나면서 말의 뜻이 전면적으로 변화하게 되는 대표적인 용어입니다. 본래 공자가 살던 노나라 시절에 이 말은 일차적으로 계급상으로 고귀한 자를 뜻합니다. 말뜻 그대로 하자면 군주의 자식이란 뜻입니다. 최고급 귀족을 뜻하는 말이죠. 그렇기에 고귀한 자이고, 그런 사람들이 원래 고귀한 삶을 실천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요컨대 고대에는 이 사람들이 왜 귀족이 됐나 따져보면, 그 사람들이 고귀하기 때문에, 고귀한 혈통들이기 때문에 그런 거였어요. 그런데 이게 여러 세대가 맞물려 내려오다 보면 그저 아버지가 고귀한 사람이기 때문에 고귀한 사람이 된 자들이 대부분이거든요. 공자 시대가 되면 사실상 계급의 표지일 뿐 인물의 가치를 평가하는 것과는 무관해진 겁니다. 그런데 <논어>에서 공자는 이 군자라는 말의 용법을 바꿔버립니다. 군주의 자식으로 태어나는 게 군자가 아니고, 고귀한 자답게 삶을 실천하는 자들이라야 군자라고요. 일종의 도덕적+인격적 완성을 위해 노력하는 자, 라는 의미를 붙인 겁니다.. 그래서 <논어> 안에는 이 두 가지 용례가 혼재되어 있어요. 군자라는 말이 나올 때, 어떨 때는 그냥 귀족들을 가리키는 말로 쓰일 때가 있고, 어떨 때는 지금 이 용례에서처럼 훌륭한 삶의 가치를 실천하는 고귀한 인물을 가리키는 말로 쓰일 때가 있습니다. 유념해서 살펴야 하는 언어입니다.

  

시간도 많이 지났는데, 이제 그만 정리해야겠습니다. 지금 <논어>의 첫 번째 문장 세 구절을 읽어보았습니다. 저는 이 첫 번째 문장. ‘학(學)’이라는 글자로 시작하는 스승의 첫 문장. 제자들이 절대로, 최고의 우리 스승의 문장이라고 합의해 줬을 거라고 믿어봄 직한 이 첫 문장은 <논어> 전편을 가름하는 핵심 중의 핵심 문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논어>입니다. 배움으로 시작하고, 붕우와의 관계로 펼치고, 사람을 알아보는 문제로 끝난다는 것. 가만히 살펴보면 이 우연한 편집의 책 <논어> 전편이 이 몇 가지의 키워드를 끊임없이 반복하며 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논어> 마지막 편 마지막 구절이 뭔지 집에 가서 한 번 확인해 보세요. 아무 흥미로우실 겁니다. 물론 이게 <논어>의 전부는 아닙니다. <논어>로 말할 수 있는 어떤 한 계열의 이야기축 한 개, 고작 한 개를 지금까지 떠들었을 뿐입니다. 다음 시간엔 다른 계열에서 <논어>를 읽는 또 다른 이야기를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끝까지 들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마치겠습니다.


글_문성환(남산 강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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