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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약선생의 도서관

조르조 아감벤, 『왕국과 영광』- 텅 빈 것들의 합창

by 북드라망 2017. 4. 25.

텅 빈 것들의 합창 - 조르조 아감벤, 『왕국과 영광』



다른 사람들과 사물들을 내 의도대로 움직이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어쩌면 현대에 와서 골격이 잡힌 경제학, 경영학, 행정학 같은 학문들은 모조리 이 문제에 집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관계들을 효율적으로 파악하고 그 관계들을 의도에 맞게 조정하고 바꾸어 나감으로써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는 것이야말로 그 학문들의 핵심적인 목표인 것이다. 경영학이란 회사의 이익에 맞게끔 직원들과 생산요소들을 잘 연결시키고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경제학이 국민소득을 극대화시키도록 경제참여자들로 하여금 소비와 투자와 정부지출을 적정하게 사용하도록 하는 방법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이런 시선으로 사태들을 바라본다는 것은 모든 사태를 실천적인 작업으로 이해한다는 의미이다. 진리를 인식하기 위해 학문이나 이론을 이해하지 않고, 실천 행위로 그것들을 이해해 보면 대부분 학문들은 대상 요소들을 조정하고 움직여서 상태를 유지하거나 바꾸어 나가기 위한 실천들과 관련된다. 이렇게 정의해 놓고 보면 모든 이론과 학문은 ‘권력학’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러니까 모든 이론은 권력을 실천하는 방법에 대한 것들이다. 좀 문장이 어색하긴 한데, 그리 표현할 수밖에 없다. 


‘권력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때 이 모든 것의 기원은 어떤 것일까? 이른바 서구의 ‘권력학들’은 어떤 기원에서 탄생하여 발전해 왔으며, 현대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일까? 
물론 숱한 철학자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 여러 각도로 파악해 들어갔다. 그 중에서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은 독특한 질문을 가지고 이 문제를 탐색한다. 특히 그는 푸코가 『안전, 영토, 인구』에서 통치 기술의 기원을 그리스도교적 사목, 즉 “영혼에 대한 통치”에서 찾았던 것, 그리고 그것이 가족이라는 모델에 따라 질서 지어진 개인들, 사물이나 부에 대한 관리라는 점, 그러므로 사목 모델은 ‘영혼의 오이코노미아(oikonomia psuchón, 오이코노미아 푸스콘)’라는 모습을 갖고 있으며[각주:1], 따라서 현대 정치 영역에 오이코노미아(경제)를 도입한 것은 필연적이며 그 기원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은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에 주목한다. 
하지만 아감벤은 좀 다른 질문을 가지고서 푸코가 말했던 것에서 푸코가 보지 못했던 것을 찾아내 푸코의 주장을 더 강렬하게 만들어 놓았다. 아감벤의 질문은 이렇다. “권력은 왜 원래부터 분할되는 것일까? 권력은 왜 항상 이미 두 자루의 칼로 분절화된 모습을 띨까?”[각주:2] 즉, 권력은 왜 대리의 형태를 띠는가? 이를 위해서 아감벤은 서구에서 권력은 ‘오이코노미아(oikonomia)’ 형태, 다시 말해 ‘인간들에 대한 통치’라는 형태로 나타나는데, 어떤 경로를 거쳐서 그런 형태를 가지게 되었는지를 탐구하고자 했다. 


미셸 푸코


여기서 아감벤은 우리들의 통념과 좀 다른 접근을 시도한다. 사실 교회권력을 비판하는 입장에 서면, 우리들의 생활 곳곳에 신학적인 구조가 스며들어 있는 것에 매우 비판적이 된다. 그렇게 보면 세상 모든 일이 덮어놓고 신학이 세속화되어 적용된 것이라고 여긴다. 또 그렇게 설명하는 주장들은 니체의 외피를 쓰고 각종 글에 나타나고, 심지어 그런 주장에 근거한 통속적인 교양책들도 차고 넘친다. 그러나 아감벤은 그런 통념을 뒤집는다. 
아감벤에 따르면 신학은 태생적으로 신의 삶과 인간의 역사를 하나의 ‘오이코노미아’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다시 말해 신학은 그 자체 ‘오이코노미아적’인 것이지, 그저 나중에 가서야 세속화를 통해 ‘오이코노미아적’이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학이 따로 있었고, 그 신학에 따라서 오이코노미아(경제)가 탄생한 것이 아니라, 이미 오이코노미아적인 것이 있었고, 그 오이코노미아적인 것으로부터 신학도 정치도 파생되어 나왔다는 말이다. 


우선 ‘오이코노미아’란 말부터 살펴보자. ‘오이코노미아’란 말은 ‘집안의 경영(administration of the house)’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 대상이 되는 오이코스(oikos)가 단순하게 가족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주인과 노예 사이의 주종 관계, 부모와 자식 사이의 부자 관계, 남편과 아내 사이의 배우자 관계 등 ‘오이코노미아적’ 관계들은 인식적 대상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궁극적으로 경영적(administrative)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실체적이지 않고 행위적인 것들, 실천적인 것들이다. 어떤 행위를 통해 구성되는 관계들이고, 또한 그 관계들을 잘 조직화하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매번 특정한 문제들에 대처하는 의사 결정과 일의 배치를 함축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신학의 영역에 오이코노미아가 도입되었을까? 우선 신학자들은 유일신적이고 단일 권력적인 교회 권력에 대해 그 정당성을 설명해야 했다. 이를 위해서 페테르존이라는 신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간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신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다른 모든 것을 움직이는 것’, 곧 ‘부동의 원동자(原動子)’는 단일 통치를 의미하는 ‘모나르키아(monarkhia)’를 신학정치적으로 정당화해주는 원형으로 제시되었다. 이 세계를 움직이는 단 하나의 힘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느님인 것이다. 이 논리에 의해 이스라엘은 신정체제로서 하나의 민족이 하나뿐인 왕인 신의 통치를 받는다. 이것은 로마 군주정에 대한 정당화의 논리도 역시 제공하였다. “콘스탄티누스가 리키니우스를 물리친 뒤 ‘정치적 모나르키아’가 회복되었고 동시에 ‘하느님의 모나르키아’도 확보되었다. 지상의 유일한(single) 왕은 하늘의 유일한(single) 왕 및 유일한(single) 주권적 노모스(nomos) 및 로고스에 대응한다.”[각주:3] 즉 속세의 왕은 하느님의 모나르키아를 지상에 구축한 유일한 자이다. 


여기까지는 그리 논란이 될 일이 없다. 그러나 이런 단일 통치의 논리가 어떤 위기를 맞게 된다. 그 이유는 바로 우리도 잘 알고 있는 삼위일체 신학 때문이다. 이제 신성에 대한 모나르키아적 이해(이것은 유일신에 의한 단일 통치이다!)를 삼위격(성부, 성자, 성령이 함께 통치하는 것처럼 보인다!) 주장에 맞게 적절히 고쳐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심해야 하는 것은 단일 실체(ousia)를 해치지 않으면서, 특히 하느님 안에 ‘내분(stasis)’을 도입하지 않으면서 삼위일체적 분절화(Trinitarian articulation)가 가능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교부 신학자들에게는 매우 까다롭고,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까닥했다가는 하느님이라는 단일 실체가 깨지면서, 성경의 모든 논리의 근원인 유일신이 무너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오이코노미아’ 개념이 도입된다. 오이코노미아는 단일 통치와 삼위일체를 연결해 주는 고리인 셈이었다. 이렇게 되면 삼위일체 교리가 그리스도교적 정치가 존립할 수 있는 유일한 기반이기도 한 것이다. 


조르조 아감벤



사실 ‘오이코노미아’란 개념은 꼭 가족사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히포크라테스는 ‘환자에 대한 오이코노미아’라는 말을 사용한다. 의사가 환자를 대할 때 필요한 시술과 도구들의 배치를 이야기한다. 스토아 철학자인 크뤼시포스는 ‘온 우주의 오이코노미아’라는 표현을 쓴다. 온 우주의 질서정연한 배치로서 전체를 규제하고 통치하는 힘을 이르는 표현이다. 성서의 “하늘에 계신 너의 아버지께서 먹여 주신다”는 표현도 오이코노미아의 동사형인 ‘oikonomein’을 사용한다.
잘 보면 알겠지만 원래 이 말은 신학적인 말이 아니다. 사실 오이코노미아를 처음으로 신학적 의미를 부여했다고 일컬어지는 바울(Paulus)에게도 오이코노미아는 단지 누군가가 자기에게 맡긴 직무와 활동일 뿐이지, 그것이 하느님의 구원 계획도 동일시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교회의 발전과 함께 삼위일체론이 정립되고, 그와 함께 어떤 전도가 발생하였다. 초기 교회의 바울은 ‘신비의 오이코노미아’(“economy of the mystery”) 라는 표현을 사용했을 뿐이었다. 그는 ‘하느님의 신비’와 ‘자신에게 맡겨진 직무’를 분리하여 사고하였다. 여기서 오이코노미아는 그저 하느님의 신비를 드러내고자 자신에게 맡겨진 직무이자 활동일 뿐 그 자체가 하느님의 구원계획이거나 하느님의 신비일 리가 없었다. 하느님의 신비는 따로 존재하는 유일무이한 것이었다. 


그러나 삼위일체 신학이 정립되어 갈 때 논쟁자 중 하나였던 히폴리투스는 그것을 ‘오이코노미아의 신비’(tōi mystēriōi tēs oikonomias, “mystery of the economy.”)라는 말로 전도시켜버린다. “아버지 자신의 말씀이자 ‘오이코노미아의 신비’인 예수 그리스도 안이 아니라면 하느님은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각주:4]
이제 아들-말씀[예수 그리스도]이라는 형상으로 인격화된 활동 자체가 신비가 된다. 오이코노미아 자체가 신비인 것이다. 이제 단일한 신도 신비롭지만, 현세에 드러난 활동들, 즉 오이코노미아도 신비로운 것이 된다. 둘은 서로 대응하고 또한 동일한 것이 되었다. 하느님과 오이코노미아는 같은 것이다!


여기에다 오이코노미아라는 개념이 기존에 품고 있던 ‘질서정연한 배치’라는 의미를 추가하게 되면, 이제 오이코노미아는 신의 존재를 그에 대응하고 동일시되는 삼위로 분절이 가능한 동시에 그것을 일체로 ‘조화시키는’ 활동이라는 의미도 갖추게 된다. 따라서 이제 이것은 실체적인 분리가 아니다. 오이코노미아란 실체적 이종성(substantial heterogeneity)이 아니라 단일한 실재의 분절화(articulation of a single reality)로서 규정될 수 있게 된다. 즉 삼위일체란 하느님의 존재가 분절화된 것이 아니라 실천의 분절화이다. 존재는 하나이지만, 존재의 실천이 여러 개로 나뉜다. 존재와 동일한 신비를 지니고서 말이다.


이제 하느님의 모나르키아는 위기에 빠지지 않고 다시 되살아날 수 있게 되었다. 하느님의 모나르키아는 오이코노미아, 곧 통치 장치를 통해서 그것의 신비를 분절화하고 동시에 다양하게 계시할 수 있게 된다. 하느님의 모나르키아는 오이코노미아를 통해 더 완벽해지고, 더 정교해지는 것이다. 이렇게 오이코노미아는 신학 안으로 들어와서 권력을 구조화 하였다. 


아감벤은 독일 관념론의 역사 개념도 하느님의 계시 과정과 역사 사이의 ‘오이코노미아적’ 연관을 사유하려는 시도였다고 본다. 헤겔 좌파(마르크스는 헤겔 좌파였다!)가 신학적 개념과 절연할 수 있었던 것도 인간의 역사적 자기생산으로서의 ‘경제’(이코노미)가 역사 과정의 중심에 놓이는 조건 위에서였다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오이코노미아는 초월론과 내재론을 연결하는 뿌리 깊은 고리였던 셈이다. 좌파는 ‘하느님의 오이코노미아’ 대신 ‘인간의 오이코노미아(경제)’를 대신 들여놓은 것이다. 경제를 하부구조로 보고 사회구성체를 바라보는 방식은 좌파나 우파나 똑같은 것이다. 그것은 이미 신학에 적용되었던 오이코노미아의 형태인 것이다. 

이런 삼위일체론이 오이코노미아의 기반 위에 성립되자, 이제 그리스도에 관해서는 두 개의 로고스가 있게 되는데, 하나는 예수의 신성에 관한 로고스이고, 다른 하나는 성육신과 구원의 오이코노미아에 관한 로고스이다. 


활동하며 세상의 통치를 담당하는 신?



예컨대 2세기 후반 경 활동한 플라톤주의 철학자 누메니우스는 두 가지 신을 구별한다. 왕으로 정의되는 첫 번째 신은 세상 밖에 있고 초월적이며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두 번째 신은 활동하면서 세상의 통치를 담당한다.[각주:5]
이것은 매우 중대한 역할을 하게 된다. 신-왕의 형상(the figures of the god-king, 초월적이다!)과 데미우르고스[조물주]의 형상(내재적이다!)을 무작위와 작위 및 초월성과 내재성 사이의 대립과 연계시킨 것이다. 누메니우스 신학은 우주 밖에 있는 독재자(momarch)를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내재적 통치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왕국과 통치(Kingdom and Government)를 철저히 분할했다고 할 수 있었다.[각주:6] 그러나 이들 서로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 세속에서 통치하는 신(조물주)은 무위의 신(신-왕)을 필요로 하고, 무위의 신도 데미우르고스의 세속적 활동을 필요로 한다. 


이렇게 되면 신-왕은 텅 비어 버린다. 그는 ‘무용한 왕(rex inutills)’인 셈이다. 모든 통치적 활동은 세속적 통치가 담당할 것인 바, 초월적인 신-왕은 해야할 일이 없다. 즉, “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 이제 신-왕(god-king)은 존엄으로 둘러싸여 있을 뿐, 더 이상 행사될 수 있는 권력이 아니다. 그것은 실제의 실행은 없는 권력, 즉 권위로서만 존재한다. 권위와 권력은 그렇게 서로 협조하면서 세상을 다스린다. 권위 없는 권력 없으며, 권력 없는 권위도 없는 것이다. 


텅 비어버린 권력. 더군다나 이 권력은 오이코노미아에 의해 대리로서만 경영된다. 권력은 직접 행사되지 않는다. 왕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으므로, 권력은 대리를 통해서만 행사된다. “권력은 본질 자체에서 대리(vicariousness)이다”[각주:7]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정치권력하면 떠올리는 단어, 주권 권력은 절대적으로 비실체적이며 ‘오이코노미아적’이다. 오이코노미아적 통치는 텅 비어버린 권력인 왕국에 대해 대리적으로 행동한다. 오이코노미아는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텅 빈 권력이 있어야만 작동 가능한 장치인 것이다. 


다시 아감벤의 질문으로 되돌아가 보자. 왜 권력은 두 자루의 칼이 필요한가? 왜 그것은 두 개로 분절되어야 했는가? 왜 그것은 대리를 통해서만 작동하는가? 아감벤의 답변은 그것은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텅 빈 권력과 그 권력을 대리하는 실천만이 있는 기계장치인 것이다. 그게 가족이 되었든, 교회가 되었든, 국가가 되었든, 그 모두 동일한 기계에 의해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즉 텅 비어 있는 것의 대리들에 의해 작동되는 것이다. 
이 대리적 기계장치를 움직이는 것은 영광송이다. 랍비적 전통에서 ‘여호와의 영광’은 ‘현전(Shekinah)’와 관련된 것이다. 이 말은 인간들 사이에 하느님이 임하시는 것을 표현한다. 중세 철학자들도 ‘현전’과 ‘영광’을 동일시했다. 이것은 마치 현대 민주주의에서 여론과도 같다. 다시 말하면 미디어의 여론 선동에 따라 텅 빈 통치기계는 작동한다.  




‘신의 영광(doxa theou)’은 이제 아버지[성부]와 아들[성자] 사이의 상호 찬양이라는 작동을 규정하고 있다. 삼위일체적 오이코노미아는 구성상 ‘영광의 오이코노미아’이다.[각주:8] 영광송이라는 상호 찬양이 없으면 상호 존재하기 힘든 구조다. 체포되기 전 예수의 기도는 이것을 더욱 극적으로 보여준다. 사실 예수가 지상에서 완수한 일은 아버지를 찬양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거꾸로 그와 같은 정도로 아버지이신 성부께서 아들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이 된다. 그것은 서로 순환된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들의 영광을 드러내주시어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게 해 주십시오.”(요한, 17, 1~5)
이 구조 속에서 통치는 왕국을 찬양하고, 왕국은 통치를 찬양한다. 오로지 찬양의 순환만 있다. 이 통치 기계의 중심은 비어 있는데-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기 위해 비워놓은 옥좌의 형상은 그래서 매우 의미심장하다!- 영광이란 바로 이 텅 빔을 드러내는 동시에 덮어버리는 빛이다. 그것은 권력이 작동하는 한 도무지 고갈될 수 없는 것이다.


이 지점에 이르면 현대 민주주의의 기원이 드러난다. 하느님의 존재와 구원을 향한 실천으로서의 삼위일체, 그리고 그것을 작동시키는 영광송. 주권권력과 대의민주주의(삼권분립은 의미심장하다!), 그리고 그것을 작동시키는 미디어와 여론들. 그 둘은 모두 권력의 대리적인 실천인 오이코노미아에 의해 구성된 것들이다. 
아마 서두에서 나는 모든 학문과 이론을 권력학이라고 했다. 그게 맞는 말이라면, 모든 학문과 이론은 오이코노미아적인 기술, 그러니까 텅 빈 권력을 작동시키는 방식에 대한 탐구들이라고 말해도 괜찮으리라. 새로운 지식을 통해 진리를 탐구하고 있다기보다, 어떻게 하면 텅 빈 곳에서 권력 장치가 잘 굴러가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한 탐구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더욱 세상은 신기한 것이다. 이 세상은 텅 빈 것들의 합창인 것이다. 아마 영광송의 다른 이름이 있다면 이 이름으로 불러야 할 것이다.


글_약선생(a.k.a 강민혁)

  1. 미셸 푸코, 『안전, 영토, 인구』, 오트르망(심세광, 전혜리, 조성은) 옮김, 난장, 2011, 266쪽. ; Michel Foucault, 『Security, Territory, Population』, Translated by Graham Burchell, 2007, p. 192. [본문으로]
  2. 조르조 아감벤, 『왕국과 영광』, 박진우·정문영 옮김, 새물결, 2016, 225쪽. : Giorgio Agamben, 『 The Kingdom and the Glory』, Translated by Lorenzo Chiesa(with Matteo Mandarini), Stanford University Press, 2011, p. 100. [본문으로]
  3. 조르조 아감벤, 『왕국과 영광』, 박진우·정문영 옮김, 새물결, 2016, 50쪽. : Giorgio Agamben, 『 The Kingdom and the Glory』, Translated by Lorenzo Chiesa(with Matteo Mandarini), Stanford University Press, 2011, p. 10. [본문으로]
  4. 조르조 아감벤, 『왕국과 영광』, 박진우·정문영 옮김, 새물결, 2016, 109쪽. : Giorgio Agamben, 『 The Kingdom and the Glory』, Translated by Lorenzo Chiesa(with Matteo Mandarini), Stanford University Press, 2011, p. 38. [본문으로]
  5. 조르조 아감벤, 『왕국과 영광』, 박진우·정문영 옮김, 새물결, 2016, 182쪽. : Giorgio Agamben, 『 The Kingdom and the Glory』, Translated by Lorenzo Chiesa(with Matteo Mandarini), Stanford University Press, 2011, p. 77. [본문으로]
  6. 조르조 아감벤, 『왕국과 영광』, 박진우·정문영 옮김, 새물결, 2016, 185쪽. : Giorgio Agamben, 『 The Kingdom and the Glory』, Translated by Lorenzo Chiesa(with Matteo Mandarini), Stanford University Press, 2011, p. 78.(185) [본문으로]
  7. 조르조 아감벤, 『왕국과 영광』, 박진우·정문영 옮김, 새물결, 2016, 298쪽. : Giorgio Agamben, 『 The Kingdom and the Glory』, Translated by Lorenzo Chiesa(with Matteo Mandarini), Stanford University Press, 2011, p. 139. [본문으로]
  8. 조르조 아감벤, 『왕국과 영광』, 박진우·정문영 옮김, 새물결, 2016, 415쪽. : Giorgio Agamben, 『 The Kingdom and the Glory』, Translated by Lorenzo Chiesa(with Matteo Mandarini), Stanford University Press, 2011, p. 20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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