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다만 자랄 뿐! - 甲木의 詩

甲木 - 시작, 오직 뻗을 뿐!

김해완(남산강학원 Q&?)

나무
                      김윤성

한결같은 빗속에 서서 젖는
나무를 보며
황금색 햇빛과 갠 하늘을
나는 잊었다.
누가 나를 찾지 않는다.
또 기다리지도 않는다.

한결같은 망각 속에
나는 구태여 움직이지 않아도 좋다.
나는 소리쳐 부르지 않아도 좋다.
시작의 끝도 없는 나의 침묵은
아무도 건드리지 못한다.

무서운 것이 내겐 없다.
누구에게 감사 받을 생각도 없이
나는 나에게 황홀을 느낄 뿐이다.
나는 하늘을 찌를 때까지
자라려고 한다.
무성한 가지와 그늘을 펴려고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구스타브 클림트, <사과나무>


‘나무’는 시인들에게 베스트 시제다. 시집을 들춰 보니 끝도 없이 시들이 쏟아진다. 그 속에서 나무는 보통 현인의 이미지나 혹은 끝없이 베푸는 자연의 이미지를 따라간다. 변치 않는 나무, 그늘을 드리운 나무, 지혜로운 나무, 뿌리 깊은 나무, 강직한 나무…아낌없이 주는 나무. (『아낌없이 주는 나무』 같은 책들은 우리가 얼마나 나무의 등골을 빼먹는지 너무 잘 보여주어서 양심의 가책마저 느끼게 한다!)

그런데 시 「나무」는 그 가운데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느낌을 준다. 이 시에는 낱말의 '정적임' 속에 꿈틀거리는 움직임(動)이 느껴진다. 이 특이한 나무를 보라. 나무는 누군가를 기다린 적도 없고 뭔가를 주려고 한 적도 없다. 심지어 인간에게 감사받을 생각도 없는데, 겸손해서가 아니라 아예 관심조차 없다는 모습이다. 그렇다면 나무는 뭘 하려고 하는가? 수동적인 자세를 취하기에는 이 나무가 안에 품고 있는 에너지가 너무 강렬하다. 나무는 “하늘을 찌를 때까지” 자라고자 한다. 그것도 보통 희망사항이 아니라 진짜로 뚫고 올라갈 기세다. “무서운 것이 내겐 없다. / 누구에게 감사 받을 생각도 없이 / 나는 나에게 황홀을 느낄 뿐이다.” 이쯤 되면 과감하고 진취적인(?) 나무의 발언이 조금 당황스럽기도 하다. 자연이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게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백 년도 살지 못하고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반면, 나무는 몇백 년이 지나도 멈출 줄 모르고 계속해서 위로 아래로 뻗어 나간다. 그 힘을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소리도 움직임도 없지만, 실은 울퉁불퉁한 나무껍질을 따라서 엄청난 생명력의 폭발이 약동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자연에 대해 품고 있는 피상적인 이미지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나무의 본능일지도 모른다.

천간의 첫번째 글자 은 바로 이 나무를 닮았다. 매서운 겨울이 지나면 다시 봄이 오듯이, 음이 최대한으로 응축되는 그 순간 양이 그 안에서 뚫고 나온다. 이게 바로 갑목甲木의 형상이다. 목은 땅을 뚫고 솟아나는 생명력을 뜻한다. 이 목기운도 음양陰陽이 나뉘는데, 갑은 그 중에서도 양목을 담당하고 있다. 이 폭발하는 힘으로 갑목은 초봄을 부르고, 고난을 뚫고, 새로운 일을 추진한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나무는 반대로 쉽게 죽기도 한다. 갑목의 최후는 좋을 수가 없는데, 지나치게 곧고 뻣뻣하기 때문에 강풍이 불거나 벼락이라도 떨어지면 그대로 부러지고 만다. 강한 만큼 단 한 번의 실패에 취약한 것이다. 아마 하늘을 향해 뻗으려는 저 나무는 필히 그 중간에 부러질 것이다. 그러나 갑목들은 실패가 닥칠 수 있다는 사실조차 생각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고속도로 질주를 한다(그렇기 때문에 무너지는 것이기도 하다^^;). 스스로의 황홀함에 도취되어 멈출 줄 모르는 것도 참 갑목답다.

아무튼, 하늘 무서운 줄 모르는(?) 이 나무가 밉지가 않다. 만일 이 시를 일간이 갑목인 내 친구가 대사로 읊는다면 참 웃긴 상황이 될 것이다. (그리고 ‘깔때기 좀 그만 들이대’라고 면박을 줄 테다^^) 하지만 이 무대 기질에는 분명 매력이 있다. 그것은 처음부터 한결같이 취해 온 외부에 대한 무심함과 또한 그것과 대조되는 내적인 힘에서 나온다. 나무는 솔직하게 말한다. 나는 그저 자랄 뿐이다, 여기에는 어떤 이유가 없다! 나무가 자라기 위해서는 햇빛과 하늘과 비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나무는 이내 그것들을 잊어버리고 만다. 이기적이어서가 아니라 존재이유가 외부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나무는 뻗어 나가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 온 신경을 쏟는다. 그런데 자연이 다 그렇지 않을까? 이 시는 그냥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자연의 모든 것이 ‘자신에게 황홀한 채로’ 살아간다는 것을 말해 준다. 나무들은 강력한 생의 기운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지, 남에게 보이기 위해 있는 게 아니다. 무서울 것도 고마울 것도 없이 스스로 말미암아 서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시작의 힘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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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은 나무는 이내 꺾여 버린다. 갑목으로 모든 과정을 밟아 갈 수는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의 시작은 이렇게 갑목과 같아야 하지 않을까. 이유 없는, 오직 충만한 에너지로! 일을 계속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내 안의 원동력이 떨어지는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분명히 내가 하고 싶어서 시작했는데도 남 핑계를 대고 싶어지고 일은 점점 더 지지부진해진다. 그러나 왜 내가 이 일을 시작한 것일까. 되짚어보면, 어느 날 문득 갑목처럼 불쑥 튀어나오는 그 힘으로 간 것이었다. 겨우내 봄을 기다리면서 준비하였던 스프링 같은 그 힘이 있었다. 초심이란 이처럼 공명정대한 어떤 명분이 아니라 이렇게 분출하는 내 몸의 에너지일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다음 스텝을 밟아야 할 것이다. 시를 쭉 읽다 보면 “무성한 가지와 그늘을 펴”려 하는 나무의 마지막 마음에 가닿는다. 이제 나무는 위로만 향해서는 안 된다. 나무는 옆으로 퍼지고, 가지를 드리우고, 꽃을 피우고, 나아가 열매를 맺게 된다. 갑목은 이런 모든 과정들의 첫 스텝이다.

甲의 詩

이왕 내친 김에 시를 좀더 읽어 보겠다 하시는 분들, 아님 이 시로 갑목을 느끼기에는 충분치 않다 하시는 분들을 위하여 소개해드립니다. 이육사의 「교목」이나 마종하의 「걷는 나무」와 함께 읽어보세요. 비장한 갑목, 지혜로운 갑목의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시간지는 시와 천간/지지를 함께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앞으로 시간지는 매달 첫 번째 주 토요일에 찾아옵니다. 마침 이번 달이 甲辰월이네요~ 사이 텀이 길다고 잊어버리지 마시고, 바쁜 일상 속에서 꼭 시 한 수(?) 느끼고 가세요.^^

※ 김윤성 시인의 「나무」를 가수 김광석이 노래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시와 음악이 만났을 때~ 우리에게 어떤 감응을 주는지 함께 만나 보시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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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달집 2012.04.10 14:37 신고 답글 | 수정/삭제 | ADDR

    먼 데 나무를 보다
    누구를 찾지도 않고
    아무도 건드리지도 않는 나무
    광석은 공허한 눈빛이다.
    하늘을 찌를 때까지 자라겠다니
    그제야 피식 웃는다.

    • 북드라망 2012.04.10 16:20 신고 수정/삭제

      노래를 부르는 김광석의 눈빛이 촉촉히 젖어있어서 왠지 맘이....그렇습니다요. 하하하;;;
      (근데, 본문에 나오는 갑목과는 큰 관계없는 댓글이네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