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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연재 ▽/문장보감 : 글쓰기의 진수!

(글쓰기의 진수!) 중국 당·송시대의 문체 혁신 운동!

by 북드라망 2017. 2. 7.

남산강학원 '문장보감세미나'에서 읽어나간 '당송팔대가'들에 관한 이야기를 새로 연재합니다! 격주로 업데이트될 예정이고요, 그야말로 '글쓰기'의 진수가 담겨있습니다. 옛 사람들의 글쓰기와 오늘의 글쓰기를 어떻게 비스듬하게 이어붙일지 함께 읽고 고민해보면 좋겠습니다!

중국 당·송시대의 문체 혁신 운동!

 


1. 글쓰기, 불평한 존재들의 외침

 

당나라 시대의 대문장가 한유(768-824)는 말한다. “만물은 평정을 얻지 못하면 소리 내 운다.” 초목이든, 물이든, 금석이든, 인간이든 모든 만물은 외부사물과 부딪치게 되면, 이로 인해 마음이 평정하지 못해 운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울음으로 그치지 않는다고 한다. 울음으로 다할 수 없어 말로써 외치고, 말로 다 할 수 없어 글로써 외친다는 것이다. 말은 울음보다 정교하고, 글은 말보다 정교하기 때문이다.(한유, 「맹동야를 보내는 글(送孟東野序)」, 『한유문집』1, 361-364쪽, 문학과지성사)


이렇게 보면 울음과 말이 본질적인 것이듯, 글 또한 본질적인 것이다. 모든 존재는 밖으로부터의 충돌이 자신의 지반을 흔들면 살기 위해 소리 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혹은 기뻐서, 혹은 슬퍼서, 혹은 답답해서, 혹은 억울해서, 혹은 분노해서 어쩔 수 없이 외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글쓰기는 인간에게 본질적이고 존재론적인 행위지만 글자를 알고 글쓰기 문법을 알아야만 쓸 수 있기 때문에 제한적이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만 한유 생각대로 한다면, 글자를 알고 책을 읽을 줄 아는 이상 글을 쓰는 행위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본질적인 일이다.  

 

글쓰기는 자신의 불평한 상태를 풀어내고 표현하는 가장 정교한 방법이다. 존재를 증명하며 살아있음을 외친 결과, 글쓰기는 영원히 이름을 남길 수 있는 불후(不朽)의 행위 중 하나로 새겨지게 된 것일 뿐이다. 불후의 욕망도 욕망이지만, 중국에서 사마천 이래 글쓰기는 발분(發憤)의 결과였다. 사마천에게 역사책 저술은 존재론적 몸부림이었다. 단단히 얽힌 억울함, 끓어오르는 분노를 풀어내어 자신을 해원하는 의식과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사마천의 이 울음에 공명했다. 개인의 원한을 하소연하는 ‘소리’에 머무르지 않았기에, 역사 속 수많은 사람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고통과 분노를 풀어내었기에! 울음이 울림이 된 것. 한유는 이런 울음, 이런 말, 이런 글이라야 잘 울고 잘 말하고 잘 쓴 것이라고 했다.  

   

정리하자면 잘 울고, 잘 말하고, 잘 쓰기 위해서는 자신의 불평을 직시해야만 한다. 그리고 자기 시대와 세상의 불평에 민감해야 한다. 존재들의 평형이 기울어지고 깨져나가는 순간과 이유를 알아야 제대로 울 것이 아닌가? 그러니 울었던 자는 많지만 잘 울었던 자는 드물다. 드물지만, 잘 울었던 자들을 찾아 잘 우는 비법을 배워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 된 글을 쓸 것이 아닌가?


사마천의 울음을 이어, 잘 울었던 자들이 있다. 당나라 때의 한유와 유종원을 필두로 하여 북송 때의 구양수, 왕안석, 증공, 소순, 소식, 소철이 그들이다. 이름 하여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 당나라 송나라 시대 8명의 대문장가들! 이들을 팔대가로 묶는 이유는 또 있다. 이들의 공통 비전, 고문(古文) 때문이다. 이들은 고문이라는 문체에 존재를 걸었다. 고문으로 글을 쓰고, 고문을 세상에 전파했으며, 고문으로 세상을 깨웠다. 일명 ‘고문운동가’였던 것이다. 고문이 뭐길래?

 


2, 고문(古文), 반시대적 글쓰기

 

고문이라는 말만 들어도 뭔가 고리타분한 냄새가 진동한다. 문체의 복고인가? 왠지 따분할 것만 같다. 고문이란 말에서 답답함을 느끼는 이유는 18세기 조선의 문장가들 때문이기도 하다. 18세기 조선의 문장가 혜환 이용휴, 연암 박지원, 청장관 이덕무, 초정 박제가 등이 기꺼이 벗어나고자 했던 문체가, 이 고문이 아니었던가? 16세기 이래 18세기까지 사대부들이라면 당연히 따라야하는 문체가 고문이었다. 자유롭고 생기 있는 글을 쓰려는 문장가들은 이 고문 스타일의 격식을 깨뜨려 버렸다. 진부한 문장의 대명사가 고문이었기 때문이다. 유학의 도를 담은 글쓰기, 논어와 맹자 혹은 사마천, 한유의 문체에 의거한 글쓰기. 그래서 이념적이고 보수적이며 모범적이라고 생각되는 글쓰기. 새로움은 없고 모방을 미덕으로 여길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18세기 지식인 대열에 들어가려고 공부하는 선비들이 죄다 고문 스타일을 고수했으니, 얼마나 갑갑하고 지루했겠는가? 좋은 작품도 교과서에 들어가면 재미없고, 새로운 문체도 유행하면 진부해지는 것처럼, 18세기 조선의 고문이 그랬다. 무기력하고 죽은 글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부터 이야기하려는 고문은 18세기의 그 고문이 아니다. 고문의 기원, 그 시작을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당송팔대가들의 고문을 단순한 옛 문체의 회복 혹은 옛 문체의 모방에 불과한 글쓰기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고문은 당나라, 송나라 시대의 주류적 글쓰기, 귀족적 글쓰기에 대한 거부였다. 즉 이 시대 귀족 혹은 문벌 사대부들의 전형적인 글쓰기, 사륙변려문에 대한 반항이었다. 사륙변려문은 4자, 6자 병렬로 이루어진 수식과 전고로 채색된 글이다. 내용보다는 형식의 화려함을 중시한 까닭에 전통적이고 누적된 지식이 없으면 결코 이해할 수도 쓸 수도 없는 문벌 귀족들만의 리그에서 만들어지는 글이었다. 이런 계급적이고 당파적 글쓰기에 대한 반시대적 고찰이 ‘고문’을 통해 일어났던 것이다.

 


당나라와 송나라 때는 글쓰기가 지금보다 훨씬 더 견고하게 지식인들만의 전유물이었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글쓰기를 전문가들의 전유물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적지 않지만 말이다. 존재론적이고 본질적인 글쓰기가 신분 유지와 출세를 위해 이용되었던 것이다. 이 시대의 “이상적인 사람은 친족 간의 관계에서 유덕한 행위를 하고, 관직에 나아가서 공을 이루며, 말을 하고 대화를 하는 데 우아하고 자연스러우며, 저작을 쓰는 데 박학하고 문체가 아름다웠다.” 이들의 덕행, 관직, 말씨, 문장에는 정해진 틀이 있었다. 일종의 표식이었다. 이 표식을 끼리끼리 공유하며,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했다.


그 중요한 표식의 하나가 사륙변려문이었다. 이렇게 쓰지 않으면, 관직에 오르기 어려웠다. 글을 잘 쓴다는 평가는, 세상 사람들의 공감과는 상관없었다. 사륙변려문의 틀에 잘 맞추면 잘 쓴 글이 되는 세상이었다. 여기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두 사람이 있었으니, 한유와 유종원이었다. 이들에게 글은 본질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외침이자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자신의 불평과 세상의 불평을 풀어내는 그 과정에서 살 길을 여는 탐구의 장이 글쓰기였던 것이다. 화려한 형식과 어려운 지식을 뽐내는 문체로는 자신을 드러낼 수 없었기에 새로운 글쓰기를 모색했던 것이다. 글쓰기는 존재의 현현! 자신들이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세상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를 묻는 질문은 글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라는 문제와 직결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한유와 유종원은 자신들만의 글쓰기 길을 찾아냈다. 고문이라는 새로운 문체로 글을 썼던 것이다. 주류의 문화가 길이 될 수는 없었다. 한유가 찾은 비전은 유가의 성인들이 추구했던 도였다. 당시 지식인들은 유가적 수행이나 도에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정치가로서 현장의 삶을 도외시했다. 백성들의 삶에 대한 책무, 이것이 시급했다. 땅에서 사는 사람들은 땅에서 살 궁리를 찾아야 한다. 당시 지식인들은 그것을 하늘에서 찾았다. 한유는 이런 사회를 바꾸기 위해 성인의 도를 실천하고자 했다. 백성들의 일용할 양식과 몸을 보호할 거처와 서로를 살리는 윤리, 그것이 성인의 도였다. 글은 이러한 성인의 도를 담는 그릇이었다.

 

 

좌: 유종원, 우: 한유

그러나 한유와 유종원이 말한 바, 성인의 도는 경전에 나온 성인의 행위나 말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과는 달랐다. 성인의 도는 성인의 행위와 말 너머에 담긴 뜻으로 자신만의 체험으로 해석한 독보적인 것이어야 했다. 또한 경전의 문체를 모방해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이들이 혐오한 건, 표절이었고 알맹이 없는 글이었다. 이들이 추구한 것은 독창성이요 간결함이요 내용의 충실함이었다. 자신의 힘으로 익힌 성인의 뜻, 자기만의 언어 스타일이 고문의 관건이었다. 백성들과 더불어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글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들의 글은 어렵지 않았다. 읽으면 이해되는 글을 썼다. 폐쇄적인 지식과 정보가 아니라 열려있는 지식이자 실천으로써 글을 쓰고 전했다.

 

 

3. 팔인팔색, 당송팔대가

 

고문이 추구하는 바가 유가의 도요, 성인의 도라고 말하는 순간 경직되는 경우가 많다. 고문은 경건하고 보수적임에 틀림없으리라는 선입견으로 지레 흥미를 잃는 것이다. 고문은 분명 유가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개인의 수양과 사회·정치적 책임의식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러나 이것은 추상적 도가 아니라 현실을 도외시하지 않으려는 앙가쥬망에 입각해 있었다. 따라서 이 책임의식은 중앙 정치와 주류 사회에 저항하거나, 시대의 조류를 거스르는 소리로 표현되었다.


이들은 다른 정치를 펼치고자 주류 사대부들과 다르게 글을 썼으며, 그 다른 글로 관직의 문을 두드렸다. 물론 고문으로 과거에 급제하고 관직에 나아가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포기하지도 타협하지도 않았다. 다른 글, 다른 생각을 끈질기게 주장했으며, 기득권 세력을 맹렬히 거스르면서 사회·정치의 장으로 육박해 들어갔다. 이런 까닭에 고문은 자신을 바꾸고, 사대부들을 바꾸고, 시대를 바꾸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차 있다. 그래서 고문은 문체 혁신 운동으로만 볼 수 없다. 고문운동은 사회·정치 변혁 운동이다. 당송팔대가들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존재의 표현이자 사회 운동이자 정치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오해하지 말자. 이들이 해석한 성인의 도는 유가의 도라고만 말하기 어렵다. 남송시대 성리학자들이 벼려낸 바, 도학의 이념에 국한되지 않았다. 한유에게는 공자와 맹자가 성인이었지만 도가적 인물 ‘허유’도 성인이었다. 백이가 성인인 이유는 온 세상이 성인으로 믿고 따르는 무왕과 주공의 뜻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성인도 부정할 수 있는 패기와 독보성. 한유는 성인을 그렇게 자유롭게 정의했다. 북송 때의 소식도 유가의 도덕, 윤리에만 매이지 않았다. 그는 필요하다면 도가의 도와 부처의 도까지 횡단했다. 소식은 우리의 삶이 충만할 수 있다면 유불도의 경계를 두지 않았다. 법과 사람 사이에서, 사상과 사람 사이에서, 현실과 존재 사이에서 길을 찾았다. 그의 사유는 종횡무진 자유롭되 추상적이지도 허황하지도 않았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실천적이었다.   

  

당송팔대가 한 명 한명을 탐방할 때마다, 이들이 하나의 고문 문법에 묶이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란다. 이들은 문장가이면서 정치가요 행정가요 사상가로서 글에서 이 모든 능력을 종합적으로 분출했다. 그에 따라 이들의 고문은 각기 스타일이 달랐고 그 내용도 달랐다. 팔인 팔색! 이들의 글은 정치적인 글도 시사적인 글도 문학적인 글도 진부하거나 교조적이지 않았다. 각각 활기가 넘쳤고 팽팽한 긴장이 있었다. 한유의 문법, 유종원의 문법, 구양수의 문법, 소식의 문법이 생생하게 포착되었다. 이들의 글은 상황마다 다른 어조, 다른 세기, 다른 리듬을 타고 있었다. 그야말로 당송팔대가는 팔색조였다. 


소식이 말한 대로 글을 쓴다는 건, 사물의 미묘함을 포착하는 일로 바람을 묶어두고 그림자를 잡아두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 어찌 보면 전수가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들 고문운동가들이 추구했던 글쓰기의 정신과 글을 쓰는 태도를 따라 가다보면 스스로 글을 쓰는 비법을 훈련하고 터득할 수 있지 않을까? 절실하게 쫓다보면 “떠다니는 구름과 흐르는 물처럼 정해진 형질은 없으나 어느새 가야할 곳에 가고 그쳐야 할 곳에 그치지” 않을까? 


당송팔대가를 읽기 전까지 고문운동가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오해만 하고 있었다. 당송팔대가의 문장을 읽는 것은 일종의 모험과 같은 것이었다. 미리 재미없을 것이라 단정하고는 그래도 대문장가라니까 어디 한번 읽어볼까 하는 의무감이 더 컸다는 걸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문장가들에 대한 호기심은 아주 미미했다.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 읽어가면서 이런 대문장가들이 너무 방치되었구나, 안타까웠다. 번역이 너무 올드해서 그게 장벽이라면 장벽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미진진했으며 문장을 잘 쓴다는 게 무엇인지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했다. 한유가 우리에게 말한 바 잘 울고, 잘 말하고, 잘 쓰는 경지를 이들을 통해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앞으로 ‘문장보감세미나’에서 읽었던 당송팔대가들에 대한 이야기가 하나하나 펼쳐질 것이다. 세미나 회원들이 생애 처음 고문운동가들과 그 문장을 접한 후 느꼈던 충격과 반전이 소개될 터, 이들을 길잡이 삼아 글쓰기의 입구와 출구를 가볍게 넘나 들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글_길진숙(남산강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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