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나의 투쟁』 - 누구나 대단한 삶을 산다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

『나의 투쟁』 - 누구나 대단한 삶을 산다



사진에 관심이 생겨서, ‘나도 사진 찍는 걸 취미로 해볼까’하면 어김없이 간다. 어디로? 이름난 ‘출사’의 명소들로 말이다. 말하자면, ‘출장 사진’ 같은 것이다. 카메라를 둘러매고 자연 풍광이 좋은 곳이나 멋진 건축물들이 모여 있는 곳을 향해 떠난다. 간혹 모델을 섭외해서 사진을 찍기도 한다. 나도 두어 차례 가 본 적이 있다. 그 다음부터는 두 번 다시 가지 않는다. 사실 ‘사진을 찍으러’ 어딘가로 가는 것 자체가 나는 잘 납득이 되지 않았다. ‘순간을 남긴다’는 관념에 비추어 보건데 그렇게 ‘떠나서’ 무언가를 찍는 것은 아무래도 작위적인 느낌이었다. 또한 ‘멋진 것’을 ‘찾아가서’ 찍는 것도 조금 탐탁지가 않았다. 그건 아무래도 거짓말 같은 느낌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은 가장 리얼한 거짓말을 하는 매체다. 



이 무슨 뜬금없는 사진 이야기인가 하면, 이 두꺼운 책을 읽는 동안, 가끔 그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나 스스로 내린 평가부터 이야기 하자면, 정말 근사한 책이다. 누군가에게 추천하겠느냐 하면 ‘강추’한다. 


학교에서 배우기를 ‘소설’은 ‘허구적인 서사’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허구가 아니다. 작가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가 자라면서 겪은 일들을 그저 담담하게 써내려간 소설이다. 장르적으로는 ‘사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런 구분은 무의미하다. 그냥 이걸 ‘소설’이라고 하는 편이 더 나은 것 같다. 소설이 ‘지어낸 이야기’를 두고 하는 말이라면, 자신의 인생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은 ‘소설’이다. 거기엔 진짜로 있었던 일과 지어낸 일 사이의 경계 같은 것이 없다. 하나의 사건을 두고 거기에 있었던 모두의 기억이 다 다른 것이다. 어떤 기억이 과연 ‘지어낸 기억’인가? 


소설(자신의 인생)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실명(實名)이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작가 자신은 언제나 ‘아버지’를 의식하고 있다. 어릴 때는 무서운 사람으로, 커서는 피하고 싶은 사람으로. 그와 동시에 ‘아버지’이기 때문에 갖는 묘한 애증 같은 것도 있다. 나는 이 심리의 묘사가 참 정교하다고 느꼈다. 여하튼 그의 아버지는 말년에 알콜 중독으로 할머니와 할머니의 집을 파멸로 몰아갔다, 고 작가는 묘사한다. 소설이 발표되었을 때, 작가의 삼촌은 그게 사실과 다르며 그 소설로 인해서 작가의 아버지이자 자신의 형의 명예가 실추되었다며 소송을 걸었다고 한다. 아, 그러니까 이 책은 ‘소설’임이 분명하다. 만약 등장인물들의 이름이 실명이 아니라 모두 가명이었거나, 어떤 식으로든 감춰져 있었다면 이 정도의 화제를 몰고 오지 않았을 것이다. 내 느낌으로 작가는 소설이 가진 장르적인 특성을 극한에서 시험한 것 같다. “내 소설은 인생에서 출발한다”는 그의 언급을 보아도 그렇고.


그렇다면 이 소설이 다른 대부분의 소설들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 다른 많은 소설들도 결국엔 작가 자신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는 같다.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다음에야 어떤 인물이나 이야기도 나올 수는 없는 법이니까. 다만 다른 소설들은 작가가 자신을 감춘다. 미리 설정되 세계와 인물들 속에 조금씩 자신을 나누어 놓는 방식도 있을 수 있고, 특정한 인물을 비틀고 다듬어서 자기를 지울 수도 있다. 어째서 그러는 걸까? 그게 이른바 ‘소설’의 형식에 더 부합하기 때문일 것이다. 오래된 습관일수도 있고. 『나의 투쟁』은 그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에서 출발한다. 다만, 그렇게 출발점을 바꿔치기 한 것만으로도 소설에 대해, 인생에 대해 생각해 볼 공간이 열린다. 



내가 기억하는 우리 아버지는 돈을 조금 못 번다는 것만 빼면 어느 모로 보나 좋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기억을 떠올려보면 아버지는 동료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했고, 엄마와도 그다지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 내가 나의 아버지에 관해 ‘사실’만을 기록해 간다면, 그 기록은 아버지의 동료들이나 엄마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조금 심하게 말하자면, 그들에게 그것은 나의 아버지에 관한 기록이 아니라, 허구적인 어느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말하자면 그런 것이다. 세상에 소설이 아닌 인생이 없다. 그러니까 ‘이야기’가 아닌 삶은 없는 셈이다. 


다시 사진에 관해서 이야기를 해 보자면, 이런 말들을 자주 한다. ‘찍을 게 없다’는 말이다. 글을 쓰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쓸 게 없다’고 말한다. 찍을 걸 찾아서 어느 날은 경춘선을 탄다. 그 다음 주에는 영동선을 타고, 자유로를 탄다. 가서 열심히 수백 커트씩 사진을 찍어오지만, 찍어온 모든 사진에서 다른 점을 찾을 수가 없다. 사진에 붙어 있는 지역 태그만 다를 뿐이지. 결국 여기에서 ‘찍을 게 없는’ 상태라면 거기에서도 아무 것도 찍을 수가 없게 된다. 쓰는 것도 마찬가지. 내 인생에 대해서 쓸 수 없으면, 뭘 쓰더라도 의미가 없다.


『나의 투쟁』을 읽는 내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살아간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살아가는 것은 ‘투쟁’이다. 다시 말해, 누구나 이 대단한 이야기를 쓸 수 있다. 이거 참 얼마나 대단한 ‘이야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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