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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이해할 수 없는 고대의 윤리, 오직 믿음 뿐!

by 북드라망 2016. 12. 14.

이해할 수 없는 고대의 윤리, 

오직 믿음 뿐!



안길과 차득공의 기묘한 관계


『삼국사기』 열전에는 오늘날의 윤리로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이 기술된다. 그 중 하나가 「차득공전」의 이야기이다. 차득공은 문무왕의 이복동생이다, 왕은 차득공을 재상으로기용하고자 했다. 차득공은 재상이 되기 전에 은밀히 민생을 살피겠다며 전국을 떠돌았다. 민간 부역의 과중과 세금의 경중, 관리의 청탁여부를 살핀 뒤 재상에 올라 나라를 다스리고자 했던 것이다. 왕이 윤허했고, 차득공은 검은 빛깔의 승복을 입고 비파를 메어 거사 차림을 하고서 서울을 떠났다. 여러 고을을 거쳐 무진주에 이르러 동네를 순행하는데, 그 고을의 아전 안길이 차득공을 보고 이인임을 알아보고 집으로 맞이해 정성껏 음식을 대접했다.  


밤이 되어 안길은 자기 처와 첩 세 사람을 불러놓고 제안했다. 거사 손님을 모시고 자는 사람과 종신토록 해로하겠다고. 두 아내는 어찌 다른 남자와 같이 잘 수 있겠느냐고 거부했으나, 한 아내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우리의 윤리에 의하면 분명 단죄감이지만 김부식은 부인을 수청 들게 하는 행동에 아무런 비판도 하지 않는다. 


김부식_표준영정


김부식이 중요시 한 것은 이런 극진한 대접을 받은 차득공이 그 은혜에 보답했다는 사실이다. 안길은 궁궐에 사는 차득공을 찾아갔고, 차득공은 자신의 부인을 불러내어 안길과 함께 잔치를 베풀었다. 차득공의 답례는 잔치를 베푸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자신을 알아봐준 안길을 왕에게 아뢰었고, 그 결과 안길은 무진주 성부산 아래의 땅을 하사받았다. 


김부식은 신의를 지킨 차득공을 주목했지, 손님접대를 위해 부인을 제공하는 풍속 자체는 문제 삼지 않았다, 아마도 신라 문무왕 시절까지만 해도 귀한 손님에게 부인을 제공하는 풍속이 남아 있었음에 틀림없다. 역사는 우리에게 늘 놀라움을 던진다. 현재의 시선으로 보면 용납되지 않지만, 고대에는 전혀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 윤리들. 차득공이 안길에게 보답을 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비판받았을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야만적이라거나, 비윤리적이라고 무조건 비판할 수 있을까? 윤리는 항상적이지 않다는 것. 고대인의 시선으로 현재의 풍속을 바라본다면, 얼마나 이상할 것인가? 그들에겐 중요하지만 우리에겐 중요하지 않은, 우리에겐 중요하지만 그들에겐 중요하지 않은, 그 차이를 살펴서 그 기원을 따져볼 일이다. 



검군의 선택, 그 이유있는 죽음


<삼국사기> 열전의 「검군전」은 특별하다. 화랑 검군은 자신의 신념을 위해, 동료들을 위해 기꺼이 죽음의 길을 걸어갔다. 


기근이 들어 모두 굶주려 있을 때, 사인들이 창고의 곡식을 훔쳐 나눠 가졌다. 오직 검군만이 받지 않았다. 검군은 화랑 근랑의 무리로 광명담박하여 의리에 어긋나는 것은 일절 탐내지 않는다는 신념을 지녔기 때문이다. 검군은 이 신념을 저버리느니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죄지은 동료들을 고발하여 처벌받게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기근으로 모두 굶주리는 급박한 처지들이라 인정상 쉽게 고발하기도 어려웠다.

  

검군이 근랑의 집에 갔더니 사인들이 은밀히 의논하기를 이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반드시 말이 누설될 것이라 하여 드디어 그를 불렀다. 

검군이 그들이 죽이려는 줄 알고 근랑에게 작별인사를 하면서 말하기를 "오늘 이후로는 다시 서로 만나지 못하겠다."하였다. 낭이 이유를 물었으나 검군이 말하지 않고 있다가 두세 번 물어서야 그 이유를 대략 이야기하였다. 

낭이 말하기를 "그러면 왜 관가에 말하지 않았는가?" 

검군이 말하였다. "자기의 죽는 것을 두려워하여 여러 사람들로 하여금 죄에 걸리게 하는 것은 인정에 차마 할 수 없는 바이다." 

낭이 말하기를 "그러면 왜 도망하지 않느냐?"하니 검군이 말하기를 "저들은 굽고 나는 바른데 도리어 내가 도망하는 것은 장부가 아니다."하고 드디어 사인들에게로 갔다. 

여러 사인들이 술을 내어 대접하면서 비밀리에 독약을 음식에 넣었다. 검군이 이를 알면서도 억지로 먹고 그만 죽었다. 군자가 말했다. "검군이 죽을 자리가 아닌데 죽었으니 이는 태산같이 중한 목숨을 새털보다 가볍게 여겼다고 말할 수 있다." 


 검군은 동료들을 배신할 수 없었고, 내가 바른데 도망가는 것은 장부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검군은 결국 동료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쪽을 선택한다. 동료들이 음식에 탄 독약을 기꺼이 먹고 죽었다. 검군은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동료들을 살리고, 자기의 신념을 증명했다. 김부식은 죽을 자리가 아닌데 죽었다고 비평했지만, 당시의 검군에게는 살아서는 그 어느 것도 해결할 수 없었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자 동료들을 고발하면 동료들이 죄에 걸리고, 동료를 살리기 위해 도망가자니 자신의 신념이 손상되는 딜렘마에 빠진다. 신념을 지키고, 동료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죽는 길밖에 없었다. 신의를 저버린다는 것은 검군에게 용납되지 않았다. 


신의를 저버릴 수 없소!(?)


이처럼 <삼국사기>는 부모와 자식, 부부, 동료 등 인간들 사이의 윤리를 '신의'에 둔다. 그 어떤 윤리보다 상위의 윤리로서 '신의'가 작동한다. 말이나, 가르침을 실행에 옮겨야 한다. 그것이 바로 신이다. 한 말과 배운 말이 지켜지는 걸 최우선으로 한다. 부부라는 인연도 믿음에 기초한다. 그래서 부부의 관계는 '몸이 더럽혀진다는 정절의 관념'에 근거한다기보다는 더 상위에 놓인 '신의'에 근거한다. 약속을 지키는 것, 즉 책임을 다하는 것. 가장 기본적인 윤리이다. 물론 이 윤리가 잘 지켜지지 않으니 '열전'에 입전되어 훌륭한 모습으로 칭송한 것이겠지만, 그 어느 시대보다 '언약, 맹세'가 중요했다. 법보다 앞서며 목숨 바쳐서 실행해야 할 상위의 윤리였다.     


사생을 함께 한 도반들   


삼국시대, 특히 신라의 화랑과 승려들은 친구와 사생을 함께 하고, 함께 불성을 깨우쳤다. 우정이 지나쳐 친구가 죽자 7일 만에 따라 죽은 사다함의 이야기는 아주 유명하다.  


사다함은 내밀왕의 7대손, 아버지는 구리지 급찬이다. 청수하고 지개가 방정하여 사람들이 그를 화랑으로 추어올리매 화랑 노릇을 하였는데 따라는 무리가 무려 1천 명에 달했다. 진흥왕이 가야국을 습격했는데 사다함의 나이가 15-16세로서 종군하기를 청했다. 나이가 어리다고 허락지 않았으나 청하는 태도가 간절하고 뜻이 확고하므로 그를 임명하여 귀당비장을 삼으니 화랑도들이 그에게 따라 나서는 자들이 많았다. 가야 국경에 이르러 사다함은 부하군사들을 거느리고 먼저 전단량으로 들어갔다. 군사들이 갑자기 들이닥치니 가야국 군사들은 놀라 소동하여 막지 못하므로 사다함의 대군이 틈을 타서 그 나라를 없애버렸다. 사다함이 처음에 무관랑과 함께 사생을 같이하는 벗으로 약속했는데 무관이 병으로 죽자 매우 섧게 울고 7일 만에 죽으니 나이가 17세였다.(「사다함」,『삼국사기』열전) 


삼국시대 부부들은 서로의 '지향'을 이해하고 지켜주었다. 평강왕의 공주와 온달도 그렇고, 강수와 그의 처도 그렇고, 남편의 죽음을 이해한 소나의 부인도 그러했다. 그러나 이 부인들은 남편이 죽어도 따라 죽지는 않았다. 사다함은 사생을 함께 하기로 약속한 벗, 무관랑이 죽자 따라 죽는다. 17살의 청년 사다함은 약속을 지킨 것이다. 애정보다 더 깊은 우정으로 친구를 따라간 사다함. 고대사회는 남성들 사이에 애정과 우정이 겹쳐져 있었기에 이런 일이 가능하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사다함의 죽음은 해석의 여지를 남기지만, 화랑들 사이의 우정은 생사를 넘나드는 전우의 그것 이상이었다. 


물론 삼국시대 친구간의 우정은 부부관계에서와 마찬가지로 동지적 신의에 바탕한다. 단순히 의리를 지키는 수준에서가 아니라 도반 즉 서로를 깨우쳐주는 스승이자 친구로서 우정을 발휘하는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승려들이 입전되어 있지 않다. 승려였다가 용감한 무장으로 활약한 전쟁영웅들의 이야기는 기록했지만, 문화와 철학 방면에서 뛰어나게 활약한 인물들은 기록하지 않았다. 기술된 사건이 국가주의와 통치 이념에 부합하는 것을 위주로 했기 때문에 이 바깥에서 작동하는 사유방식들과 생활양식들은 배제되었다. 『삼국유사』는 삼국시대의, 특히 불성으로 우정을 닦는 신라인들에 대해 알려준다.  


관기와 도성 두 성사가 포산에 숨어 살았다. 관기는 남쪽 고개에 암자를 지었고, 도성은 북쪽 굴에 살았다. 서로 10여리나 떨어져 살았지만 구름을 헤치고 달을 노래하며 서로 오가곤 했다. 도성이 관기를 부르려고 하면 산속의 나무들이 모두 남쪽을 향해 굽어져 서로 맞아주는 것 같았다. 관기는 이것을 보고 갔다. 관기가 도성을 맞으려고 할 때에도 그와 같았다. 모두 북쪽으로 누우면 도성이 그에게로 갔다. 

도성은 자기가 살고 있는 집 뒤의 높은 바위 위에 항상 조용히 앉아 있었는데, 어느 날 바위틈 사이로 몸이 빠져나가 온몸이 하늘로 솟구치며 어디로 가버렸는지 모르게 되었다. 혹은 그가 수창군에 이르러 죽었다고도 한다. 관기도 또한 뒤를 따라 죽었다.(삼국유사, 피은) 


관기와 도성은 숨어 살며 불도를 닦는 승려들이다. 이들은 남다른 우정으로 맺어진 친구이다. 도를 닦으면서 맺어진 우정. 친구를 따라 죽은 사다함처럼 도성이 죽자 관기도 뒤를 따라 죽었다. 관기와 도성의 이야기는 화랑들의 우정을 승려들의 우정으로 그 버전을 바꾼 듯 흡사하다. 문파를 이루기보다는(큰 절에 소속되기 보다는) 둘이 산속에 들어가 교유하며 진한 우정을 발휘하는 일화는 『삼국유사』에서 낯설지 않다.  

 

그런데 사다함도 그렇고, 관기와 도성도 그렇고 이 이야기들은 두 사람 사이의 강렬한 우정을 바탕으로 한다. 동지 혹은 도반 사이를 이어주는 폭넓은 우정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화랑과 승려는 어찌 보면 우정의 관계로 맺어진 공동체일 수 있다. 그럼에도 이 두 이야기에서 주목하는 바는 두 사람 사이를 오가는 그 견고한 믿음이다. 한 사람이 죽을 때 따라 죽을 수 있는, 두 사람이 함께 살아야 삶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우정. 남녀의 애정보다 더 깊은 애정을 기반으로 한 친구의 관계를 중시하고, 주목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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